장미의 이름 - 상 - Mr. Know 세계문학 15 Mr. Know 세계문학 15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열린책들 / 2006년 2월
평점 :
절판




 

여름휴가 정도의 여유가 아니라면 언제 움베르토 에코 아저씨의 책을 정독해보겠는가.
이번 휴가에 인적 드문 산골 마을에서 에코 아저씨의 [장미의 이름]을 읽었다.
이번에 세 번째로 읽은 [장미의 이름]은 무척 즐거운 시간을 가지게 해주었다.

사실 [장미의 이름]은 반복하여 읽은 몇 안되는 책 중 하나이다.
한참 스릴러물을 찾아다니던 때에 ‘수도원에서 묵시록의 예언대로 일어나는 연쇄살인’이라는 책표지의 문구에 혹해서 처음 접했지만,
그 때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그냥 글자만 따라가는 데 급급했던 책이었다.
두 번째 읽을 때에 겨우 수도원에서 일어난 살인사건과 그 해결방법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이 때에도 사건의 줄거리 외에는 지루하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세 번째 읽으면서 겨우 에코가 수도원을 중심으로 만화경처럼 벌여놓은 중세의 종교, 문화, 세계관이 조금씩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지식의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종교적 독단의 의미, 이성과 과학, 기호와 상징 등에 대한 여러 생각도 정리해 보는 기회가 되었다.
과연 여러 사람들이 평가하는 대로 왜 에코의 책에 ‘아는만큼 보이는 책’이라는 수식어가 붙는지도 아주 약간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요한 호이징하는 중세가 끝나가는 시기를 일컬어 <중세의 가을>이라고 아름답게 표현했다.
낙조(落照)가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것은 결국 종말의 숙명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마찬가지로 가을빛이 쓸쓸하다는 것은 모든 걷이가 끝난 후 다가올 죽음의 계절 겨울을 앞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4세기 초, 중세시대는 낙조를 비치면서 가을로 달려가고 있었다.
길었던 한 시대가 저물어가면서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속에서는 변화에 대항하여 기존의 가치를 지키고자 애쓰는 사람들, 새로운 가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있다.

‘카놋사의 굴욕’ 사건으로 만방에 그 힘을 과시했던 교황청.
그러나 그 후 300년 만에 교황은 프랑스 국왕의 압력에 굴복하여 로마에 들어가지 못하면서 권위에 큰 타격을 입는다(아비뇽 유수).
세속 권력의 도전에 직면한 교황청은 자신들의 권한을 지키기 위해 수도원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 하였지만,
성(聖) 프란체스코에서 비롯된 ‘청빈(淸貧)’ 운동은 교회의 재산 소유를 비판하는 등 내부로부터 교황청에 대한 반대 목소리를 높인다.
교황 요한 22세는 교회의 청빈을 주장하던 수도사들을 파문하고 종교재판, 화형을 동원하여 이와 같은 반발을 무마하려 하였다.

중세는 정신적 지주였던 교회 내부의 변화와 경제와 사회사상에서도 큰 변화를 겪는다.
개별화된 봉건적 촌락과 대지에 귀속된 농노 중심의 생산양식은 이제 도시지역을 중심으로 발생하기 시작한 시장 중심의 생산양식과 화폐경제에 뒤처지기 시작한다.
도시를 중심으로 성장한 대학은 기존 수도원들이 가지고 있던 지식의 독점권을 해체하였고,
신앙과 교리가 지배하던 사고방식은 이성과 경험의 힘을 통하여 자연에 대한 객관적인 관찰을 중시하는 ‘과학’의 지배로 바뀌어 가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중세를 규정짓던 생산양식과 생활양식과 사유방식이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인 것이다.

[장미의 이름]의 배경에는 표면적으로는 황혼을 맞은 중세의 이중의 갈등 구조,
즉, 교회 외부의 갈등이라 할 수 있는 교황과 황제의 대립과
교회 내부의 갈등이라 할 수 있는 교황과 일부 수도사들(청빈파)의 대립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 속에 흐르는 보다 본질적인 갈등구조는 새로운 시대로의 변화와 기존 시대의 고수 사이의 갈등이라 할 것이다.
이는 중세적 세계관을 대변하는 호르헤 수도사와 그 반대편에서 이성과 경험, 합리적 추론으로 진리에 접근하는 윌리엄 수도사와의 대립으로 잘 나타난다.

개인적으로 에코의 작품이 가지는 매력은 오래 전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 속에서 현재의 모습을 찾을 수 있게 한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장미의 이름]의 주요 등장인물인 호르헤 수도사는 독단적 진리관을 대변한다.
그가 보기에 진리란 인간의 이성의 힘으로 찾을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진리란 이미 신이 완성한 것이기 때문에 성서가 천명한 진리의 보존만이 필요할 뿐이다.
따라서 호르헤 수도사에게 성서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은 마땅히 폐기되어야 할 것이며,
그런 맥락에서 ‘웃음’을 통해 신의 세계를 다르게 보는 법을 가르치고, 진리라 일컬어지는 것을 비웃음으로써 새로운 진리를 얻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은 그에게 절대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호르헤 수도사에게서 종교근본주의자, 맹신론자, 맹목적 반공주의자, 파시스트와 같은 지긋지긋한 자기 중심의 독단주의의 뿌리를 보았다.
그들은 자신이 믿는 것, 자신이 말하는 것만이 진리이며, 여기에 반대하거나 의심을 품는 것은 이단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이 주장하는 진리를 거부하는 자는 설령 죽음을 당한다 해도 당연한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장미의 이름]의 배경이 된 수도원과 장서관은 화재로 무너져 내린다.
이는 중세적 세계관의 종말과 앞으로 긴 세월동안 근대적 세계관이 그 자리를 대체하게 될 것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수도원은 무너지고 장서관의 책들은 모두 불에 탔음에도 불구하고,
호르헤 수도사의 독단주의는 그 얼굴만 달리한 채 현재까지도 힘을 발휘하고 있다.

또 하나 중세의 모습에서 떠올릴 수 있는 현대의 모습은 종교가 가지는 세속적 권한과 재산의 문제이다.
사실 [장미의 이름]을 읽는 사람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 중에 하나는 그리스도의 청빈을 둘러싼 지루해 보이는 논쟁인데,
‘그리스도가 재산을 소유했는가?’라는 논쟁은 지금 보기에는 그다지 중요할 것이 없는 문제일지 몰라도 당시로서는 교회 내부의 입장차이 뿐만 아니라 교회와 황제와의 권력 쟁탈이 걸린 문제였고, 따라서 [장미의 이름]을 이해하는 중요한 주제이다.
[장미의 이름]에도 등장하는 교황 요한 22세는 교회사에서 교황청의 재정을 튼튼히 한 능력있는 인물로 그려지는데, 이는 뒤집어 말하면 그만큼 축재(蓄財)에 능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물론 이 책에도 등장하는 체제나의 미켈레나 카잘레의 우베르티노와 같은 수도사들은 그리스도가 재산을 소유하지 않았므로 교회도 청빈(淸貧)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들의 주장에 대한 교황청의 답변은 파문, 화형, 암살 사주였다.

종교의 재산을 둘러싼 중세말 모습은 어딘지 지금의 모습과 맥락이 닿아있지 않은가?
성장만을 중요하게 여긴 사회 속에서 종교 역시 양적 성장을 최우선의 목표에 두었고,
이것이 신도의 수와 건물의 규모에 집착하는 모습으로 왜곡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종교개혁을 통한 중세의 정신의 몰락은 결국 로마 카톨릭의 쇠퇴를 의미한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당시 교황청이 보여준 구원에 대한 독단(면죄부)과 성직자 집단의 부패에서 기인한 것이었다는 점을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족삼아, 나중에라도 도움이 될 것 같아 몇 가지 읽으면서 메모해 둔 것을 여기에 남겨 두고자 한다.

1. [장미의 이름]의 제목의 의미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Stat rosa pristina nomina nuda tenemus)

에코가 창작노트에서 말했듯이 제목의 의미 간취는 독자들의 몫이라 했지만, 나는 기호학자로서 에코의 생각이 반영된 제목이라 생각한다.
소쉬르는 언어를 나누어 의미를 담지하는 ‘기의’와 문자로 표기되는 ‘기표’로 구분하였다.
이는 기호학의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런 점에서 <장미의 이름>에서 중요한 단어는 ‘장미’보다는 ‘이름’ 쪽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움베르토 에코는 책 중에서 윌리엄 수도사의 말을 빌려 ‘이름은 사물의 궁극(nomina sunt consequentia rerum)'이라고 칭하였다.
그리고 구약성경 창세기에 보면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한 후 땅의 지배자로 세운 아담에게 처음으로 맡긴 일이 동물들의 ’이름‘을 붙이도록 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국 이름은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가지며, 존재를 존재하게끔 하는 힘을 가진다.
윌리엄 수도사가 결국 ‘피니스 아프리카에’로 들어가는 암호의 해답을 찾은 것도 이름이 의미하는 바(기의)가 아니라 ‘이름 그 자체(기표)’에서이지 않은가?
밀실로 들어가는 키워드인 ‘프리뭄 에트 셉티뭄 데 쿠아투오르(Primum et septimu de quatuor)’에서 ‘넷’이란 어떤 사물을 가리키는 것(de re)이 아니라 ‘넷’이라는 말 그 자체(de dicto)였던 것이다.

따라서 책의 제목을 담고 있는 마지막 어구는 죽음이라는 인생의 종착역에 거의 다다른 아드소가 자신이 겪었던 한 시대의 종착이라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변하지 않는 궁극의 관념인 말, 또는 언어의 생명력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으리란 생각이다.

2. 번역에 대해서
[장미의 이름]을 읽기 힘들게 만드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은 번역의 문제를 든다.
이윤기씨의 번역이 너무 어렵고, 그래서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것인데 이건 좀 다르게 봐야 하지 않을까 한다.
중세의 언어구사 자체가 수식이 많고 화려하다는 점, 그리고 당시 수도사들이 즐겨 쓰던 라틴어는 일종의 고어(古語)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오히려 이윤기씨의 번역이 읽는 맛을 더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장미의 이름]을 현대어로 번역했다면 의미 전달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작품 자체가 가지는 특징은 살리지 못했을 것이다.
원작을 충실하게 재현하는 것이 번역의 첫 번째 목표라고 할 때 [장미의 이름]은 분명 좋은 번역이라고 여겨진다.
오히려 번역과 관련하여 우리 출판계에서 아름다운 전통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문학과 인문과학의 아름다운 번역 협동작업이다.
이윤기씨도 지적했듯이 그는 철학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에 내용상의 오역이 있었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강유원 박사는 3백여 군데를 고친 원고를 보내오게 된다.
번역자와 출판사는 그 의견을 받아들여 새로운 개정판을 낸 것이 현재의 [장미의 이름]이 된 것이다.
꼼꼼한 의견으로 작품의 정확도를 높인 강유원 박사와 열린 마음으로 이를 수용한 번역자 및 출판사에 독자로서 감사하게 생각한다.

3. 아드소의 마지막 행위
이번에 읽으면서 아드소의 마지막 행동이 왠지 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수도원에서의 일주일을 보낸 아드소는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수도원 폐허를 찾아 사그러진 양피지 조각을 모은다.
그리고 이따금 모아온 한 조각 양피지를 읽은 후, 그 원본이 되는 책을 찾아 앎을 완성하고, 그 서책이 그리고 있던 세계를 복원한다.
조각으로부터 진리를 복원하는 것, 작은 단서들을 보아 진리를 추론하는 것.
이건 근대 이후 세계를 지배하는 과학의 특징이면서, 또한 보르헤스가 말한 자기만의 도서관을 완성해 가는 과정이기도 한 것 같아서 책을 모두 읽은 지금까지도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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