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도둑들의 도시
데이비드 베니오프 지음, 김이선 옮김 / 민음사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전쟁은 모두를 변화시켰다.” (p.362)
그렇습니다. 정말 전쟁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습니다.
전쟁은 한 가정의 좋은 남편, 자상한 아버지로 하여금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유대인들을 학살한 독가스 버튼을 누른 전범으로 만들었습니다.
전쟁은 사회구성원들로 하여금 ‘총화단결’을 최상의 모토로 삼도록 하였고, ‘정부 비판=적(敵)’라는 단순한 논리를 내재화하여 선입견과 편견으로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게 하였습니다.
전시에는 평화로울 때에 쉽게 나타나지 않을 잔인함, 폭력성, 이기성이 미덕이 되며,
화해와 이해는 ‘이적행위(利敵行爲)’로 간주되어 반국가적 가치로 전락합니다.
전쟁은 가치를 전도시킵니다. 인간의 가치는 먼 발치로 밀려나는 대신, 표면적으로는 ‘국가’와 ‘민족’의 가치를, 내부적으로는 지배층의 이해관계라는 가치를 극대화 하는 것이 전쟁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절정을 향해 치닫던 1942년 겨울.
900일간 독일군에 포위된 레닌그라드는 굶주림과 절망의 도시가 되어 버렸습니다.
누구보다 레닌그라드를 사랑하고 조국을 위해 용기있는 행동을 할 자신이 있었던 소년 레프는 친구들과 우연히 낙오한 독일군 병사를 ‘털다가’ 붙잡혀 감옥에 갇히게 되고, 감옥에서 탈영병 신세로 들어온 콜야라는 병사를 만나게 됩니다.
죽음을 기다리던 그들에게 내려진 거부할 수 없는 그레치코 대령의 제안.
대령의 딸의 결혼식 케이크에 들어갈 계란 12개를 찾아오면 석방하겠다는 제안을 듣고 목숨을 걸고 최전선으로 향합니다.
전쟁의 참혹함과 그 속에서 보여지는 다양한 인간군상을 다룬 책과 영화는 무수히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둑들의 도시]에서 다시 한 번 분노를 금하기 어려운 장면들과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바로 ‘전체’나 ‘국가’, ‘민족’이라는 절대 가치 앞에서 인간의 고귀한 생명을 수단화할 수 있으며, 언제든지 그 신성한 제단에 목숨을 바칠 수 있어야 한다는 병영 문화가 철저하게 관철되고 있는 장면들입니다.
이는 파시스트들은 물론이고 프롤레타리아를 위해 존재한다는 소련의 붉은 군대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더욱 문제인 것은 그런 가치관을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주입시켜 수많은 민중과 병사들을 전선으로 내몰고 아사 직전의 상태까지 몰아간 소위 ‘윗대가리’들의 이율배반적인 행태들입니다.
순결한 아리안 민족이나 국가사회주의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전쟁을 일으킨 히틀러나 스탈린 등 최상층 ‘윗대가리’들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갈 때 안전한 후방에서 호의호식했겠죠.
겨우(!) 자기 딸의 결혼식에 쓸 계란을 구하기 위해 두 생명을 전선으로 몰아대는 소련군의 그레치코 대령과 러시아 소녀들을 성적 노리개로 삼아 도망치려는 소녀의 두 발목을 톱질해 버리는 독일군의 아벤드로트 등 말단 ‘대가리들’.
그런데 [도둑들의 도시]를 보면서 전쟁으로 인한 이와 같은 ‘가치의 전도’가 2009년 현재 한국에서도 이런 병영문화의 잔재로 남아 있는 것 같아서 씁쓸했습니다.
병영문화는 권위에 대한 복종과 희생을 의미하며, 지식의 전제(專制)와 독점을 특징으로 합니다. 그리고 개인은 전체를 위하여 희생될 수 있다는 논리로 지탱됩니다.
해병대 체험이니 전방입소교육 체험이니 하는 것들은 ‘고통을 통해 자신을 이길 정신력을 신장한다’는 이상한 논리 하에 개인의 육체에 대한 학대를 미화시킵니다.
사회의 질서와 조화, 안보가 강조되지만 그 속에는 불공평한 관계에 처한 개인의 희생이 강요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개인은 국가에게, 학생은 교사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아이는 어른에게, 여자는 남자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권위’에 따른 복종은 계급에 대한 복종이라는 병영 문화와 상승작용을 일으켜 우리들의 머릿속을 지배해 오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도둑들의 도시]는 무척 재미있는 소설이었지만, ‘입에서는 달고 배에서는 쓴’ 소설이었습니다.
레프는 결국 계란 12개를 얻어 생명을 건집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미국으로까지 가게 됩니다.
하지만 계란 12개 때문에 당한 콜야의 죽음은 어이없는 개죽음(!!)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없겠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를 기다렸을 소냐의 슬픔이 언급되지 않은 것이 더욱 슬프게 합니다.
독일군의 시달림에서 벗어나 탈출한 소녀들은 혹독했던 기억과 그보다 더 혹독할 사회적 편견 및 경제적 어려움에서 어떻게 살아갔을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도둑들의 도시]에서 나오는 참상은 2차 세계대전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 쓴 맛을 더하게 합니다.
전쟁의 명분은 늘 그렇듯이 뭔가 멋진 말들로 치장됩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도 ‘이라크 국민의 독재로부터의 해방’을 명분으로 걸었지만, 진정한 목적은 석유의 안정적 확보와 친미정권 수립에 따른 이란 등 중동국가들 견제에 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입니다.
폭격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슬픈 눈빛과 참상들, 워싱턴에 앉아 ‘신이여! 미국을 구원하소서!’를 부르짖는 사람들은 [도둑들의 도시]에 나오는 장면들과 시대와 배경만 조금 달라졌을 뿐 변한 것이 없습니다.
나찌의 인종주의는 발칸반도와 아프리카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고, 이들의 현실은 2차 세계대전 당시를 능가합니다.
이 책을 비롯하여 전쟁에 대한 책을 읽을 때마다 국가의 가치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평화롭게 살기를 갈구하고, 전쟁으로 자신이나 사랑하는 가족의 생명을 잃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이성과 경험은 날로 진보해 나가는데, 왜 가장 야만적인 행태인 전쟁은 사라지지 않는 것인지...
미국의 요청으로 우리나라가 이라크에 파병하게 되었을 때, 그 불가피성을 역설하던 말, '국익 때문에...'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바르지 않은 전쟁에 참가하여 그들을 슬프게 만드는 것이 과연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는지 의문이 갑니다.
67년 전 레닌그라드를 사이에 둔 소련군과 독일군은 국가의 이익을 위해 개인을 희생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레닌그라드의 민간인들이 경험한 처참함은 더욱 안타까운 것이었습니다.
전쟁 후에 그들에게 돌아간 보상이나 위로는 거의 없었습니다. 전후복구라는 더 피폐한 삶을 참아야 할 의무만 주어졌을 뿐입니다.
평소에는 레닌그라드를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것처럼 말하던 레프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자 '살고 싶다!'라는 순수한 소원을 숨기지 않습니다.
이 가치를 존중하고, 이 소원에 관심을 가지는 사회로 나아가기를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