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 쇠망사 1 로마제국 쇠망사 1
에드워드 기번 지음, 김희용.윤수인 옮김 / 민음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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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생활하면서 책을 읽을 때 가장 아쉬운 것은 긴 호흡이 필요한 책을 읽기가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출퇴근 시간과 잠들기 전 시간을 활용해 보지만 역시나 만만치 않다.
그래서 자꾸만 독서가 소설 쪽에 치우쳐 가는 것은 아닌지 은근 걱정될 때가 많다.

여름휴가나 명절은 그나마 시간 여유가 좀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맥을 끊어 먹지 않고, 오랜 시간 정독하며 독파해야 할 책에 적합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추석 명절에 읽을 책으로 오랫동안 벼르고 벼르던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 첫 번째 권을 택했다.

[로마제국쇠망사] 첫 번째 권은 기번이 ‘인류가 가장 행복한 시기’라고 평가되던 로마 오현제 말기부터 시작하여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하기 직전까지 약 250년의 역사를 다룬다.
역시 기번의 문장은 시원시원하면서도 유려했고, 흥미로웠다.
특히 그리스도교의 발전과 정립에 대한 마지막 2개 장은 보통 흥미로운 것이 아니어서 15장과 16장은 재독하며 읽게 되었다.

서양사에서 로마가 차지하는 위치는 무엇일까?
오늘날의 서양문화의 기초로 흔히 말해지는 것이 2H, 즉,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지만,
사실 이것은 ‘로마’의 입장에서 보면 무척 억울할 수도 있겠다.
흔히 서양문화의 원류적, 사상적 측면의 공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에 돌리고
로마의 업적과 영향은 정치체제나 법률, 건축 등 실재적인 영역에서 찾곤 하지만,
서양 문화 전체에 있어서 로마의 가장 큰 기여점은 단지 실용적인 기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구’라는 하나의 거대한 영역을 확정지은 것에 있다는 생각이다.
이 때의 ‘영역’이 의미하는 것은 단순한 지리적 강역 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가 로마라는 하나의 문화로 포용되는 융합을 통한 영역을 의미한다.

로마의 지리적 강역은 현재의 영국에서부터 라인강, 도나우강 서부 지역, 이베리아 반도에서부터 아프리카 북부 지역, 터키를 중심으로 하는 소아시아 지역이다.
이들 지역은 지금도 ‘서구’의 핵심적인 지역이다.
그리고 이런 거대한 영토를 하나의 문화권으로 구성하는 것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조건,
즉, 서로 다른 하위의 소(小)문화 간의 관용과 관대함, 융합과 인정에서 ‘Pax Romana’를 형성한 로마의 저력을 발견할 수 있다.
로마는 피정복민에게 관대한 정책을 활용하여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고, 평등한 권한을 누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피정복민이 오랜 시간동안 누려온 문화와 종교, 인적 자원을 인정하고 융합시키고자 하는 것이 기본적인 로마의 정책이었다.
어떤 민족의 문화이든지 세계의 중심 로마의 그릇 속에서 포용해 내어 녹일 수 있으며,
결국에는 로마 속에 녹아들어 제국 전체의 발전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는 그 자신감에는 오만스러움보다 높은 자긍심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 자신감 넘치던 문화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사후부터 서서히 변질된다.
기번은 그 쇠망의 원인과 과정을 [로마제국쇠망사] 전체에 담아 두고 있다.
물론 아둔하고 잔인한 황제들, 고트족과 게르만족을 비롯한 이민족들의 침입 등 여러 가지로 그 원인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첫 번째 권에서 가장 주목해 봐야 할 쇠망의 원인은 역시 앞서 언급한 자신감 넘치던 문화의 창조자를 잃어버린 것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기본적으로 로마는 공화정 때나 제정 때나 진취적인 지배계급과 헌신적인 시민계급의 건강함을 미덕으로 하는 사회였다.
당시 서구 사회에서 최고의 위치라고 할 수 있는 황제를 보면 이 사실이 자명하다.
최소한 5현제 시기까지 로마 황제의 가장 중요한 일은 안팎으로 두 가지였다.
국내적으로는 로마를 잘 다스릴만한 사람을 찾아 그를 부황제로 삼고, 황제 교육을 시키다가 적당한 때에 ‘선양’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식에게 당연히 황제 자리를 세습하는 것이 아니란 점이다.
마치 고대 중국의 요, 순, 우 임금이 천하를 가장 잘 다스릴 사람에게 자리를 양위하는 모습을 현실에서 보는 듯 했다.
국외적으로는 여러 속주들을 돌보고, 때론 최일선에 나가서 직접 전쟁을 지휘하며 군사들과 함께 위험을 무릅써야 했던 일이었다.
영화 <글레디에디터>에도 나오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전선에서 죽었다.

황제가 앞장서서 전투에 임하고,
귀족들과 시민계급이 직접 자비를 들여 무장하여 자신과 가족의 안녕을 위해 싸우는 로마군을 누가 당하겠는가?
덕망과 인품을 쌓아 원로원 등에서 인정받아 국가를 다스릴 만한 실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되는 황제 후보자들이 즐비하니, 어느 누가 황제 자리를 독점하거나 편협한 정책을 일삼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5현제 이후 황제의 자리가 ‘선양’의 대상이 아니라 ‘찬탈’의 대상이 되면서 지배층의 도덕성과 자신감은 무너진다.
급여와 상여금을 올려준다면 서슴없이 황제의 목숨까지도 빼앗는 상비군으로서 근위대의 존재와 용병, 이민족들의 보조군으로의 편입은 ‘스스로의 수호’라는 로마의 뿌리를 갉아먹는다.
진취적이고 자신감 넘치던 문화를 만들어 냈던 로마의 지배층, 솔선수범하여 국가를 지켜냈던 로마의 시민들은 이렇게 썪어가기 시작한다.
기번의 평가를 들어보자.

부유하고 사치스러운 귀족들은 자신들을 군무에서 배제시킨 이러한 치욕적인 면제 조치를 오히려 일종의 특혜로 받아들였다. 더구나 그들은 목욕탕, 극장 및 별장에서의 향락에 탐닉할 수만 있다면, 제국에 관련된 보다 위험한 책무들은 농민과 병사들의 거친 손에 기꺼이 넘겨 주었다(p.309).

이것이 결국에는 제국의 분할과 쇠망의 출발점이 되었다.
사방에서 쳐들어오기 시작하는 이민족들과 복잡한 국내 정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제국을 형식적으로 4분하여 2명의 황제, 2명의 부황제가 각각 다스리는 정치체제를 구축한다.
물론 당시에는 헌신적이고 서로 신뢰하던 4명의 황제들이 유기적으로 협조하여 이민족을 물리치고 짧게나마 로마의 안정과 번영을 이루었다.
하지만, 로마 제국을 지켜내기 위해 불가피하게 고안된 제국의 분할은 결과적으로는 국력을 약화시키게 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제국 재통일도 내전이나 마찬가지였고, 그의 사후 동서 로마제국의 분할과 대립도 국력을 쇠잔케 하는 원인이 되었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번에 [로마제국쇠망사]를 읽으면서 가장 몰입해서 보았던 부분은 로마에서의 그리스도교 발전과 박해에 대한 부분인 제15장과 제16장이었다.
혹시라도 [로마제국쇠망사]에 도전하는 분이라면 꼭 정독하여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로마 제국과 그리스도교’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제국의 박해와 신자의 순교라는 모습이 아닐까?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거나 거대한 콜로세움에 맹수밥으로 던져진 그리스도교인,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신앙을 부인하지 않는 그리스도교인의 모습은
셴케비치의 [쿠오바디스]를 비롯한 수많은 로마 시대 영화를 통해 확대재생산된 이미지이다.
그 때문에 최소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공인 이전의 로마는 그리스도교를 탄압하고 박해한 제국이라는 것이 확고부동한 사실처럼 받아들여져 왔다.

기번은 이런 고정화된 믿음에 상당히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그래서였을까? [로마제국쇠망사]가 처음 나왔을 때, 영국의 교계는 엄청나게 반발하고 기번을 2류 역사가라 칭하며 맹렬히 비난한다.
기번은 로마 제국에서 그리스도교가 급성장한 이유를 다섯 가지로 든다.
첫째, 편협한 일신교의 열정, 둘째, 내세와 영혼불멸의 교리, 셋째, 기적의 힘, 넷째, 그리스도교인들이 보여준 미덕, 다섯째, 그리스도인의 단결에 적합한 교회 행정체계.
기번도 분명히 지적했지만 그리스도교는 분명 로마 제국에서 ‘성장했다’.
네로 황제 시기를 비롯하여 몇 차례 박해와 탄압도 있었으나
그리스도교는 로마 제국이 가지고 있던 기본적인 속성, 즉, 관용과 포용의 수혜를 최대한으로 입은 종교이기도 했다.
그들의 편협한 일신교 교리조차도 로마에서는 용인되었고, 그들의 예배는 특정한 짧은 시기를 제외하고는 묵인되었으며, 포교 역시 자유로웠다.
(성경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을 보면, 그가 로마 제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포교했고, 아무 제한 없이 무수한 교회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로마 제국내 속주들의 행정관과 총독들은 잔혹한 죄를 짓지 않는 한 그리스도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함부로 처형하거나 가두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빌라도의 태도나, 바울에 대한 로마 총독들의 태도를 생각해 보라.)

그래서 기번은 분명히 말한다.

그리스도교인의 종교 교의 자체는 처벌이나 심문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p.640)
그리스도교인들이 교회 내부의 불화 과정에서 서로에게 가한 고통이 광신적인 이교도에게 당한 박해보다 훨씬 더 가혹했다(p.690).

한 마디로 말하면 몇몇 황제에 의한 격렬한 박해도 잠시 있었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로마 제국 시대에는 교회사에서 그렇게 떠들썩하게 높이 평가하는 무시무시하면서도 장기간에 걸친 박해와 순교는 없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로마 제국 입장에서 본다면 그리스도교가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유일신을 믿는 편협함은 주위 다른 종교를 가진 민족들과 사사건건 대립을 일으켰고,
이교도들이라 하여 다른 민족을 참혹하게 학살하는 일도 심심찮게 일으켰다.
내세에 대한 갈망은 스스로를 순교자로 만들기 위해 ‘오버’하는 경우가 잦았고,
교회 내의 재산 문제, 주교와 신자들과의 갈등, 중요 직책의 독점 등은 어떤 경우 속세를 뺨칠 정도였다.

그리스도교는 로마 제국이라는 관대한 둥지 속에서 성장했다.
그리고 이 둥지 속에서 너무나 크게 자라나 마침내는 그 둥지 자체를 먹어치울 지경에 이른다.
포용과 다원성을 정책 목표로 하던 로마 제국과 편협함 및 다른 민족에 대한 배척까지도 서슴지 않았던 그리스도교는 서로의 궁합이 맞지 않은 조합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것 또한 로마 제국의 멸망을 앞당긴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그냥 작은 도시 국가 상태였다면 모를까, 세계 제국이었던 로마가 택한 것이 포용과 다원성이 아니라 편협함과 지식/신앙의 독점이라니,
이는 국력을 분산시키고, 다른 민족, 다른 종교의 반발을 불러왔을 것이 틀림없다.

로마 제국 쇠망의 첫 번째 단계는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지 않은가?
땅에 떨어진 지배계층의 도덕성, 편협된 가치관... 이런 쪽으로 말이다.
이제 [로마제국쇠망사] 두 번째 권은 콘스탄티노플 건설 이후 로마 제국의 상황으로 이어져서 궁극적으로는 동서 로마제국의 분할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는 내부의 다양한 신학적 논의들, 즉, 아리우스파나 그노시스파 등을 어떻게 배격하면서 자신들만의 순수한 ‘지상낙원’을 이룩하고자 하였는지 펼쳐질 것이다.
약 2000년전 로마인들이 택한 길이 어떻게 그들 자신 뿐만 아니라 이후의 서구 역사, 나아가 현재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뱀꼬리
[로마제국쇠망사] 읽기는 큰 즐거움이다.
하지만, 또 언제 이렇게 꼭꼭 씹어 읽는 독서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지 은근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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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의 돌
아티크 라히미 지음, 임희근 옮김 / 현대문학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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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란 것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어려서부터 ‘인내의 미덕’에 세뇌되어 온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문제를 제기해 봅니다.
‘조금 힘들어도 참고 기다려야 한다’, ‘어려움도 참으면 결국 복이 된다’,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다’, ‘인내는 쓰나 그 열매는 달다.’
이 고상한 도덕규범이 혹시 이중적인 잣대로 쓰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일방적인 희생만을 강요하는 도구로 쓰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여기 아프가니스탄에 살고 있는 한 여성이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가정에 무관심한 아버지로부터 맞으면서 자란 이 여성은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던 남자에게 시집와서 또 3년간 남편을 만나지 못합니다.
혹시나 처녀 며느리가 도망갈까봐 감시하는 시어머니의 눈초리는 그렇다 치고,
3년만에 돌아온 남편은 여성의 복종과 일부종사( 一夫從事)를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여성으로서 아내의 인격과 권한은 모두 남자인 자신과 자신의 가문에만 속한 것입니다.
더 기막힌 일은 이런 남편이 내전에 참여했다가 식물인간이 되어 돌아온 후 일어납니다.
시어머니를 비롯한 시댁 식구들은 여자에게 남편을 떠넘기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그 때부터 이 여성은 아무 미동도 없는 남편의 병수발만 들게 됩니다.
그리고 이슬람 근본주의에 경도된 병사들은 이 여성의 육체를 소유할 기회를 엿보면서도
여성이 ‘창녀’처럼 보일 때는 가차없이 그 여성을 악마로 매도하며 침을 뱉습니다.

[인내의 돌]을 통해 이 여성의 일상을 읽으면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봅니다.
“이 여성에게 현실이 고통스러워도 참고 인내하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작가는 아프가니스탄에 현재 거주하고 있는 한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서
인내를 강요당하고 있는 세계 모든 곳의 여성의 처절한 현실과 절망을 재현해 냈습니다.
우선 이 여성이 어떻게 낡은 인습에 메여 있는지 보십시오.
지배자인 남성은 먼저 여성의 몸을 자신들의 ‘영토화’합니다.
순결함에 대한 맹신, 월경을 불결함과 죄악으로 치환시키는 맹목,
여성은 재생산을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편협함,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몸을 희생당한 여성에게 씌워지는 ‘더럽고 사악한 창녀’라는 낙인.
이런 사고방식 속에 여성들에게는 ‘인내’가 강요됩니다. 이게 바로 성정치학이 됩니다.
그리고 이런 인내의 기제는 ‘폭력’과 ‘힘’이란 남성적 가치를 통해서 뒷받침됩니다.
반대로 이 여성이 어떻게 스스로를 해방시켰는지 보십시오.
그녀는 끊임없이 이야기함으로써, 자신의 언어에 자신의 감정을 실음으로써,
그리고 분출하는 감정을 솔직하게 내뱉음으로써 자신을 둘러싼 억압의 부르카를 한 겹 벗겨 냅니다.
참고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분명하지는 않더라도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타자화된 성은 미약하게나마 제자리를 찾습니다.

말과 글이 있다는 것은 소수자, 억압받는 자에게 있어서 저항의 마지막 무기입니다.
그래서 지배자들은 언론을 통제하려 하고, 역사를 자신의 입장에서 기록합니다.
반대로 소수자는 혀를 잘리고, 억압받는 자는 침묵을 강요당합니다.
그리고 도덕을 통해서, 종교를 통해서, 규범과 법률을 통해서 참고 인내할 것을 가르칩니다.
숨막힐 듯 폐쇄적인 사회에서 소수자들은 목소리를 잃었고,
그 잃어버린 목소리는 절규가 되고 비명이 되어서 유령처럼 떠도는 것입니다.

[인내의 돌]은 일방적으로 강요된 인내의 종말이 무엇인지를 한 여성의 삶을 통해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갈 방법에 대해서도 중요한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그 방법이란 무작정 참고 인내하고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는 것, 자신의 존재를 솔직히 인정하는 것,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
그래서 존재하는 모든 것이 존재 그 자체로 인정받는 세상을 만드는 것.

결국 생게 사부르(syngue sabour), 즉, 인내의 돌은 깨어져야 합니다.
강요당한 인내가 깨어질 때만이 참된 자유가 오기 때문입니다.
아프가니스탄 여성에게 구원이 다가온 것처럼 말입니다.

살람 알레이쿰, 아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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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외인종 잔혹사 - 제14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주원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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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인터넷 상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단어 중 하나가 바로 ‘잉여’란 말이다.
잉여의 사전적 의미라면 ‘나머지’ 정도의 의미겠지만, 인터넷의 용법에서 파생된 의미를 유추해 보자면 ‘별 필요없이 그저 밥만 축내는 존재’ 또는 ‘별 볼일 없는 막장인생’ 뭐.... 이 정도 되지 않나 싶다.

[열외인종 잔혹사]는 무지하게 재미있다. 그리고 무지하게 웃긴다.
4명의 ‘잉여인간’이 11월 24일 하루 동안 엇갈리다가 결국 만나게 되는 이 작품은 이휘재가 “그래 결심했어!”를 일주일마다 외치던 인생극장을 보는 듯하다.
우선 인물설정 자체가 예사롭지 않다. 여기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우리 사회에서 ‘잉여’로 불릴만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자. 먼저 그들을 보자.

장영달: 무공훈장을 가득 달고 군복을 입은 채 ‘빨갱이 척결’을 외치는 노인
       시청앞이나 종묘공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위 ‘보수 꼴통’
윤마리아: 여러 스펙을 쌓았으나 고작(!) 외국계 회사 인턴으로 일하는 88만원 세대 아가씨
       돈은 없어도, 카드가 상한에 달하는 한이 있어도 짝퉁 명품이라도 걸쳐야 하는 소위 ‘된장녀’
김중혁: 밤엔 서울역, 낮엔 무료급식소를 전전하는 노숙자
       온 사방에 퀴퀴한 냄새를 풍겨 감히 범접을 허하지 않는 소위 ‘거렁뱅이’
기  무: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밤마다 PC방을 전전하며 게임에 중독된 문제 청소년
       하는 일이라곤 먹고 싸고 젊은 누나들 훑어보며 침흘리기 뿐인 소위 ‘날라리 양아치’

이들 잉여인간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저마다의 필요에 의해서 삼성동 코엑스몰로 모여든다.
그리고 거기서 마주친 놀라운 광경!
양의 탈을 뒤집어 쓰고 총을 든 괴한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인질로 삼고 죽이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4명의 주인공은 이 광경을 각각 다르게 받아들인다.
장영달은 좌익 빨갱이 집단의 출현으로, 윤마리아는 카니발의 일종으로, 김중혁은 노숙자들의 메시아가 일으킨 쿠데타로, 기무는 게임업체의 이벤트로.....
그리고 이 상황에서 각자의 필요에 따라 대처한다.
살기 위해서, 회사 정규직원이 되기 위해서, 게임 포인트를 얻기 위해서.

책장이 휙휙 넘어가는 재미와 웃음을 보장하지만, 몹시도 뒷맛을 쓰게 만드는 소설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인공들을 너무나 손쉽게 ‘잉여인간’, 또는 ‘열외인간’으로 치부하고 있지만,
이들은 결국 무한경쟁사회에서 소외받은 우리들 바로 옆의 이웃이며, 어쩌면 우리 스스로도 어느 순간 그런 존재로 전락해 버릴 수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의지박약함과 무식함을 탓하는 것은 이차적인 문제이다.
오히려 이들은 이데올로기의 희생자, 경제위기의 희생자, 교육정책의 희생자가 아니겠는가.
이들이 우리 사회의 열외인종으로 떨어진 이유를 먼저 보자. 그 다음에 이들이 저지르고 있을지 모르는 범죄나 몰염치함에 비난을 퍼부어도 늦지 않으리라.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사람은 예외없이 누구나 잉여인간이 될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
김별아 작가의 말대로 때때로 현실은 코미디보다 더한 코미디다.
분명 웃긴데 웃을 수가 없다. 남들의 불행에 웃어야 하는 현실이 기가 막히고, 언젠가 그 불행이 내게도 순식간에 닥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 기가 막힌다.

소설에 등장하는 4명의 ‘잉여인간’ 또는 ‘열외인종’의 삶을 보라.
사실 우리가 사는 주변에서 비교적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사람들 아닌가. 그리고 냉정하게 생각하면 우리 자신도 언제든지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지 않은가.

삼성동 코엑스몰에 가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높다란 빌딩숲과 최고급 호텔 아래 셀 수 없을 정도의 상점이 모여서 소비할 것을, 지갑을 열 것을 끊임없이 충동질하는 곳.
그래서 ‘자본주의의 타지마할’이라고 부르는 곳.
어쩌면 코엑스몰은 한국 자본주의가 이룩한 성과의 꽃봉오리와 같으면서도 자본주의적 욕망의 상징과도 같은 곳을 상징한다고 하겠다.
여기서 한 쪽으로 조금 나아가면 한국 자본주의의 또다른 얼굴, 즉, 천민자본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지역이 있는 반면,
또 반대쪽으로 조금 나아가면 아직도 비닐하우스를 치고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서 한국 자본주의의 또다른 얼굴을 볼 수 있다.

자본주의 심장에 떨어진 자본주의의 잉여인간들. 이들이 내지른 총질과 욕설은 자본주의라는 단단한 바위를 향해 던진 헛된 계란이었을까?
그래서 이들의 절규는 자본, 권력, 언론에 의해 압살당하는 한갓 ‘망상’이 되어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웃기다. 하지만 씁쓸하고, 결국엔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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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사를 죽였어야 했는데 대산세계문학총서 41
야샤르 케말 지음, 오은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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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했습니다. 피가 튀기거나 엽기적 살인행각으로 잔인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이렇게 잔혹할 수 있는지, 집단적 광기는 사람을 얼마나 미쳐버리게 만드는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야샤르 케말의 [독사를 죽였어야 했는데]는 잔인한 소설입니다.

알라신의 작품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아름다웠던 여인 에스메.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한 할릴이란 남자는 에스메에 대한 구애가 거절당한 뒤 어느 날 밤 그녀를 납치합니다.
할릴은 저항하던 에스메에게 마약을 먹여 겁탈한 후 정식 혼인신고를 하게 됩니다.
아들 하산이 태어나면서 점차 안정을 찾던 에스메의 일생은 연인이었던 압바스가 나타나면서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압바스는 연인을 납치한 할릴을 총으로 쏴죽이고 자신도 죽음을 맞습니다.
이제 에스메는 할릴의 친족들에게는 철천지 원수로, 동네 주민들에게 모든 재앙의 원인이며, 피의 보복을 받아야 ‘창녀’로 지목받게 됩니다.
그들이 알고 있고 원하고 있는 것은 단 하나.
원통하게 죽은 할릴은 구렁이 귀신이 되어 구천을 떠돌고 있으니, 에스메를 죽여 복수함으로써 그 영혼을 위로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을 전체의 집단적 광기 속에 복수를 행할 적임자로 떠오른 이는 바로 아들 하산이었습니다.
하산은 마침내 아버지의 유품인 권총을 어머니 에스메에게 들이대고 방아쇠를 당깁니다.

함무라비 법전에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원칙이 천명된 후,
중동 지방의 법적 원칙은 등가물로의 갚음, 생명에 대해서는 ‘피의 복수’였습니다.
문제는 그와 같은 피의 복수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인습이라고 해야 할 피의 복수의 주체는 언제나 남성이었습니다.
그리고 피의 복수를 통해 지켜내야 할 것은 가부장의 명예, 가문의 명예, 남성의 명예였습니다.
따라서 중동지역 여성들은 피의 복수라는 인습의 희생양일 뿐만 아니라, 가부장적 사회구조에서 파생하는 여성으로서의 성적 차별의 이중 희생양이라 할 것입니다.

사실 모든 비극의 첫 번째 원인은 할릴이 에스메에게 최초에 가했던 납치와 강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할릴이 행한 남성적 폭력은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 대신, 오히려 자신의 신부를 얻은 용기있는 행동으로 치부됩니다.
에스메는 피해자였지만 그녀가 그리던 행복, 그녀가 바라던 사랑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에스메는 남편 할릴의 죽음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문과 마을공동체로부터 ‘남편을 죽음에 빠뜨린 여자’, ‘창녀’로 지목받아 ‘죽어 마땅한 여자’로서 피의 복수의 대상자가 됩니다.

더욱 잔인한 것은 할릴과 에스메의 아들 하산을 이 피의 복수의 집행자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원래 하산은 어머니에게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고 어머니를 지키고자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끊임없이 하산에게 이렇게 충동질합니다.
“네 아버지는 원한을 풀지 못해 소복을 입은 귀신이 되어 구천을 떠돈다. 그 원한의 제공자는 네 어머니 에스메이다. 너는 할릴의 아들이니, 마땅히 할릴을 죽인 네 어머니 에스메를 죽여 원수를 갚고 아버지를 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직접 할릴의 혼백을 만났다는 둥, 할릴이 구렁이가 되는 것을 보았다는 둥 온갖 미신과 주술의 힘이 더해집니다.
삼인성호(三人成虎)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도 곧이듣지 않을 거짓말이라고 하더라도 세 사람만 합심해서 같은 거짓말을 하면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거짓말을 마치 진실인 것처럼 믿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집단적 광기, 집단적 몰아세우기의 힘이 마침내 하산에게도 똑같은 광기를 가지게 하고, 어머니를 향해 복수의 총을 들게 하는 과정이 섬뜩하기만 합니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독사’란 무엇이었을까요?
할릴의 친족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에스메는 죽여야 할 ‘독사’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역으로 본다면 이와 같은 가부장적 차별구조와 남성 중심의 인습이야말로 죽여버려야 할 사회의 독사와 같은 존재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산이 모든 참소를 이겨내고 어머니를 지켰더라면 그는 ‘독사’를 죽이고 생명을 얻은 셈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산은 독사에 굴복하였고, 어머니는 피해자로, 자신은 패륜자요 범죄자로 전락시켰습니다.

인습의 힘과 인습의 무서움이란 것, 집단적 광기의 무서움이란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혹시 우리 사회도 무지함과 무관심 속에서 독사를 한 마리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마침내 그 독사가 자라나 자기자신을 물어 죽음에 이르게 했을 때에야 ‘그 독사를 죽였어야 했는데...’라는 한탄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마지막으로 작가에 대해서....
오르한 파묵 이후로 두 번째로 만난 터키 작가였는데, 파묵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파묵의 작품은 서구화 속에서 터키의 전통을 지키고 계승하고자 하는 노력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속 인물들도 터키의 대도시에 거주하는 지식인 또는 사회지도계층이라는 느낌이 많이 들었구요.
그런데 야샤르 케말은 터키의 기층 민중들의 삶을 보다 가감없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파묵과 차이가 났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서구화나 전통의 계승보다는 인습이 된 전통이 어떻게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지를 보여주고자 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전통의 회복과 인습의 극복. 하나의 대상에 대해 정반대 방향에서 접근하는 위대한 작가를 둔 터키는 이 두 명의 작가로 인해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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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벌 공장
이언 뱅크스 지음, 김상훈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1월
평점 :
절판




 

부커상 후보작품으로까지 올랐다고 하니 나름대로 인정받는 작가와 책이긴 하였으나,
아동학대, 성도착, 가학적 혐오의식, 동물학대, 살인, 방화...
하여튼 인간의 상식으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소재들이 버젓이 소재로 쓰인 책이다.
네이버를 비롯하여 다른 사람들의 감상평을 보니 역시나 불쾌하다거나 혐오스럽다거나 구역질이 난다거나 하는 평가가 많았다.
책이 출판된 영국에서도 ‘영문학사에 남을 걸작’이라는 찬사와 ‘쓰레기’라는 혹평을 동시에 받았으니, 영국 사람들도 우리나라 사람들과 느끼는 것은 비슷했나 보다.

[말벌 공장]은 스코틀랜드 외딴 섬에 사는 프랭크와 그 가족의 이야기이다.
프랭크는 한 마디로 말하면 어린 사이코패스라고 할 수 있겠다.
그의 일상생활이란 누군가 집과 섬을 침범할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서 매일매일 섬을 순찰하고,
갈매기, 쥐, 토끼와 같은 작은 동물들의 머리를 잘라 내어 해안가 기둥에 걸어 놓는 따위의 일이다.
높이 매달린 머리들에 섬을 경비하는 파수꾼의 역할을 부여하는 행동인 것이다.
프랭크는 이미 어린 나이에 3건의 살인을 교묘하게 저지른 전력을 가지고 있는데,
악마와 같은 살인의 대상자가 된 아이들이 자신의 친동생과 사촌들이다.

프랭크의 가족도 만만치 않은 엽기성과 잔혹성을 보인다.
아버지를 오토바이로 깔아 뭉개어 불구로 만든 채 달아나 버린 어머니.
개의 몸에 불을 붙이고, 동네 아이들에게 구더기를 먹이고 다니던 형 에릭.
뭔가 큰 비밀을 간직한 채, 집안 모든 물건의 크기와 용량에 집착하는 아버지.

프랭크의 엽기적인 행각과 오컬트적 주술은 그가 다락방에 만들어 둔 신전(神殿)인 ‘말벌 공장’에서 절정에 이른다.
큰 시계 원반 위에 12군데의 통로를 뚫어두고 잡아온 말벌을 그 위에 둔다.
말벌은 12개의 통로 중 하나를 선택하여 들어가게 되고 그 끝에서 정해진 운명을 맞는다.
불에 타 죽거나, 화학약품에 녹아 내리거나, 전기충격에 튀겨지거나, 거미를 만나 먹이가 되거나, 개미들을 만나 뜯어 먹히거나....
말벌은 제단 위의 희생제물이 되는 셈인데, 그리고 나서 프랭크는 제물이 된 말벌의 운명에 스스로를 교감시키면서 자신의 앞날을 점치는 것이다.

프랭크의 인생은 태어났을 때부터 그의 아머지에 의해서 왜곡되었다.
어떤 왜곡인지는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반전이므로 여기서 밝힐 수는 없겠지만,
“정해진 운명과의 마찰”이 그의 사이코패스적 행태의 원인이라는 정도만 적어 놓는다.
(그런데 먼저 서평을 쓰신 분들이 여기저기 그 결말을 다 적어 놓으셨더란 사실... -_-;;;)

어쩌면 프랭크는 말벌 공장에 자기 자신을 투영해 놓았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프랭크에게 잡혀서 말벌 공장의 원반 위에 내려졌을 때부터 이미 그 말벌은 죽을 운명이다.
다만 말벌이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떤 죽음이냐는 것 뿐.
그나마 자기가 선택한 죽음이 어떤 것인지도 실제 죽음을 맞기 전까지는 전혀 알 수 없는 상태.
프랭크는 정해진 운명 속에서 정해진 선택만을 해야 할 말벌과 자신의 삶을 부지불식간에 일치시켜 온 것 같다.
절대 되돌아 갈 수 없는 말벌 공장의 죽음의 통로에 놓인 말벌처럼, 자신의 인생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학대와 도착으로 풀어 놓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위치를 희생제물의 삶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절대자로 전환시킴으로서 스스로의 만족을 얻는다.
프랭크가 구축해 놓은 ‘말벌 공장’은 그의 의지로 모든 것이 가능한 그의 왕국이며,
희생제물인 말벌에게 프랭크는 ‘신’과 같은 존재이다.
불운과 아픔과 희생으로 프랭크의 가슴속에 들어차 있던 울분은 생사여탈권을 가진 신과 같은 전제(專制)의 위치에 올라감으로서 비로소 보상받고자 한다.

한 마디로 [말벌 공장]은 자극적이고 익숙하지 않은 소설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정신병원을 탈출한 그의 형 에릭을 자기의 무릎 위에 눕게하여 편안히 잠들게 하는 데에서 다소간 안정되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한 소년의 비뚤어진 성장기는 내내 불편함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불편함이 크면서도 사실 ‘재미’로 승부하는 책도 아니다.
동물들을 학대하는 장면이나 동생과 친척들을 살해하는 장면, 에릭이 왜 미쳐버렸는지를 알려주는 장면, 마지막의 반전은 읽는 속도는 높여 주었지만, ‘재미있다’라고 이야기하기에는 불편하다.

어떻게 보면 이런 내용이 추악한 인간본성의 진실에도 닿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 책을 무조건 평가절하하기도 어려울 듯 하다.
과연 인간 심리 깊은 곳에는 사디즘과 잔혹성, 약한 자들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본성이 자리잡고 있어서 누구든 사이코패스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을까?


뱀꼬리
풍광이나 사건들에 대한 묘사, 심리적 불안정성을 표출시키는 서술만 본다면 이언 뱅크스가 무척 뛰어난 작가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이건 번역자의 역량과도 관계된 것이긴 하지만, 그의 다른 작품 [플레바스를 생각하라]를 보면 역시나 영어권에서 왜 그를 촉망받는 작가의 대열에 올려놓았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그리고 화끈한 논란을 만들어 내기 위해 이 책, [말벌 공장]을 처녀작으로 발표했다니...
이 작가도 만만치 않은 사디즘을 가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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