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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사를 죽였어야 했는데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41
야샤르 케말 지음, 오은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8월
평점 :

잔인했습니다. 피가 튀기거나 엽기적 살인행각으로 잔인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이렇게 잔혹할 수 있는지, 집단적 광기는 사람을 얼마나 미쳐버리게 만드는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야샤르 케말의 [독사를 죽였어야 했는데]는 잔인한 소설입니다.
알라신의 작품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아름다웠던 여인 에스메.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한 할릴이란 남자는 에스메에 대한 구애가 거절당한 뒤 어느 날 밤 그녀를 납치합니다.
할릴은 저항하던 에스메에게 마약을 먹여 겁탈한 후 정식 혼인신고를 하게 됩니다.
아들 하산이 태어나면서 점차 안정을 찾던 에스메의 일생은 연인이었던 압바스가 나타나면서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압바스는 연인을 납치한 할릴을 총으로 쏴죽이고 자신도 죽음을 맞습니다.
이제 에스메는 할릴의 친족들에게는 철천지 원수로, 동네 주민들에게 모든 재앙의 원인이며, 피의 보복을 받아야 ‘창녀’로 지목받게 됩니다.
그들이 알고 있고 원하고 있는 것은 단 하나.
원통하게 죽은 할릴은 구렁이 귀신이 되어 구천을 떠돌고 있으니, 에스메를 죽여 복수함으로써 그 영혼을 위로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을 전체의 집단적 광기 속에 복수를 행할 적임자로 떠오른 이는 바로 아들 하산이었습니다.
하산은 마침내 아버지의 유품인 권총을 어머니 에스메에게 들이대고 방아쇠를 당깁니다.
함무라비 법전에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원칙이 천명된 후,
중동 지방의 법적 원칙은 등가물로의 갚음, 생명에 대해서는 ‘피의 복수’였습니다.
문제는 그와 같은 피의 복수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인습이라고 해야 할 피의 복수의 주체는 언제나 남성이었습니다.
그리고 피의 복수를 통해 지켜내야 할 것은 가부장의 명예, 가문의 명예, 남성의 명예였습니다.
따라서 중동지역 여성들은 피의 복수라는 인습의 희생양일 뿐만 아니라, 가부장적 사회구조에서 파생하는 여성으로서의 성적 차별의 이중 희생양이라 할 것입니다.
사실 모든 비극의 첫 번째 원인은 할릴이 에스메에게 최초에 가했던 납치와 강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할릴이 행한 남성적 폭력은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 대신, 오히려 자신의 신부를 얻은 용기있는 행동으로 치부됩니다.
에스메는 피해자였지만 그녀가 그리던 행복, 그녀가 바라던 사랑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에스메는 남편 할릴의 죽음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문과 마을공동체로부터 ‘남편을 죽음에 빠뜨린 여자’, ‘창녀’로 지목받아 ‘죽어 마땅한 여자’로서 피의 복수의 대상자가 됩니다.
더욱 잔인한 것은 할릴과 에스메의 아들 하산을 이 피의 복수의 집행자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원래 하산은 어머니에게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고 어머니를 지키고자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끊임없이 하산에게 이렇게 충동질합니다.
“네 아버지는 원한을 풀지 못해 소복을 입은 귀신이 되어 구천을 떠돈다. 그 원한의 제공자는 네 어머니 에스메이다. 너는 할릴의 아들이니, 마땅히 할릴을 죽인 네 어머니 에스메를 죽여 원수를 갚고 아버지를 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직접 할릴의 혼백을 만났다는 둥, 할릴이 구렁이가 되는 것을 보았다는 둥 온갖 미신과 주술의 힘이 더해집니다.
삼인성호(三人成虎)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도 곧이듣지 않을 거짓말이라고 하더라도 세 사람만 합심해서 같은 거짓말을 하면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거짓말을 마치 진실인 것처럼 믿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집단적 광기, 집단적 몰아세우기의 힘이 마침내 하산에게도 똑같은 광기를 가지게 하고, 어머니를 향해 복수의 총을 들게 하는 과정이 섬뜩하기만 합니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독사’란 무엇이었을까요?
할릴의 친족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에스메는 죽여야 할 ‘독사’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역으로 본다면 이와 같은 가부장적 차별구조와 남성 중심의 인습이야말로 죽여버려야 할 사회의 독사와 같은 존재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산이 모든 참소를 이겨내고 어머니를 지켰더라면 그는 ‘독사’를 죽이고 생명을 얻은 셈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산은 독사에 굴복하였고, 어머니는 피해자로, 자신은 패륜자요 범죄자로 전락시켰습니다.
인습의 힘과 인습의 무서움이란 것, 집단적 광기의 무서움이란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혹시 우리 사회도 무지함과 무관심 속에서 독사를 한 마리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마침내 그 독사가 자라나 자기자신을 물어 죽음에 이르게 했을 때에야 ‘그 독사를 죽였어야 했는데...’라는 한탄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마지막으로 작가에 대해서....
오르한 파묵 이후로 두 번째로 만난 터키 작가였는데, 파묵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파묵의 작품은 서구화 속에서 터키의 전통을 지키고 계승하고자 하는 노력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속 인물들도 터키의 대도시에 거주하는 지식인 또는 사회지도계층이라는 느낌이 많이 들었구요.
그런데 야샤르 케말은 터키의 기층 민중들의 삶을 보다 가감없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파묵과 차이가 났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서구화나 전통의 계승보다는 인습이 된 전통이 어떻게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지를 보여주고자 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전통의 회복과 인습의 극복. 하나의 대상에 대해 정반대 방향에서 접근하는 위대한 작가를 둔 터키는 이 두 명의 작가로 인해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