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 민음사 모던 클래식 10
재닛 윈터슨 지음, 김은정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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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
기도와 선교에 편집증적으로 집착하는 한 어머니가 어린 여자아이를 입양한다.
그리고 입양된 딸에게는 ‘하느님께 바쳐져 살아갈 것’을 인생의 목표로 주입시킨다.
충실히 하느님의 어린 양으로 자라는 것 같던 딸은 어느 날 시장에서 한 소녀를 만나게 되고 뜻하지 않은 사랑에 빠진다.
엄격하고 보수적인 기독교 문화에서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던 동성애.
악마가 들었다는 비난과 손가락질 끝에 마침내 딸은 집과 교회를 떠나 독립한다.

2.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
복잡하게,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 않은가.
세상에 철따라 나는 과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 뿐이랴. 듣도 보도 못한 요상한 형체의 나무열매가 ‘열대과일’이란 이름으로 내 눈과 입을 자극하는 세상에서 오렌지만이 유일한 과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어디가 좀 이상한 사람이 분명하다.

그럼 다음 단계. ‘오렌지’와 ‘과일’ 대신에 다른 말을 넣어 보자.
“코끼리만이 동물은 아니다” 당연한 말. “장미꽃만이 꽃은 아니다” 이것도 당연한 말.
소개념(오렌지, 코끼리, 장미)과 그 개념을 내포하는 대개념(과일, 동물, 꽃)으로 이루어지는 이러한 문장은 상식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문장이다.
(그냥 보통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이런 문장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이런 걸 비꼬아서 다르게 봤다는 건 좀 다른 얘기니 여기선 따지지 말자.)

그럼 이 문장은 어떤가? “기독교만이 종교는 아니다”
음... 갸우뚱. 근본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일부 독실한 분들 중에는 분명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거다. (실제로 봤다.)
“아니야. 기독교만이 진실한 종교지.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없어. 성경은 무오하고,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아.”
이런 사고 방식은 비단 종교의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우리 주위의 정치경제, 사회적 현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비일비재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혹자는 여기에 ‘독선’, ‘독단’이란 말을 붙여 표현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상식은 종교논리와 이데올로기논리 앞에서 허물어진다.

3.
소설이 사회적 현상을 반영하고, 또한 사회적 논의를 이끌어내는 상호작용을 한다고 할 때,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의 가장 큰 강점은 개인에 대한 가족과 지역사회, 종교의 독단에서 비롯되는 ‘거대한 괴물’ 3종 세트의 억압기제를 가감없이 드러내었다는 점에 있다.
특히 지금보다 전반적으로 사회가 보수적이고 폐쇄되었던 1980년대 대처 정부 시기에 쓰여졌다는 점에서 더욱 그 의미가 적지 않다.
작가 자신의 성장경험이 그대로 소설의 배경이 되어 버린 이 책은(그래서 작가와 책 속 주인공의 이름이 동일하다)
개인이 성 정체성을 깨닫는 단순한 동성애 코드의 소설이나 성장소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 대한 사회적 억압을 고발하는 소설로 한 단계 나아간다.

이는 주인공 지넷의 인생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입양에서부터 잘 나타난다.
지넷의 어머니가 가지고 있는 입양목적에서 아이의 미래에 대한 고려는 빠져있다.
그녀의 목적은 단 한 가지, 신을 위해 복무하는 ‘신의 자녀’를 만드는 것 뿐이다.
그녀는 자신을 성모 마리아와 동일시한 것이다!!!
아이의 미래에 대해 관심없는 부모가 어디 있겠냐마는 그 관심이 부모의 일방적 요구, 또는 아이가 가진 다양한 가능성의 제한으로 발현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지넷의 아버지는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는 무능함만을 보여준다.

지넷이 겪게 될 고초의 근원은 가족에 그치지 않는다.
지역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지넷이 나름대로 충실하게 몸담고 있던 교회와 성직자, 신도들에게도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권은 멀고 먼 안드로메다 이야기일 따름이다.
지넷의 동성애적 성향이 밝혀지자마자 이 지역공동체는 그녀에게 비난을 퍼붓고, 다른 사람과의 접근을 막는 한편, 마침내는 축출한다.
그들에게는 <동성애=마귀의 유혹>이란 단순한 도식이 진리였고,
이 진리에 따르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자의 종말은 추방과 ‘지옥행’임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마지막 장면에서 다소 어정쩡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가출하여 생활하던 지넷은 결국에는 어머니에게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러한 행동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일종의 ‘화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지넷의 이러한 ‘회귀’는 과거 자신의 정체성을 짓밟고 획일성만을 강조하였던 가족과 교회의 변화와 반성이 전제되지 않은 복귀라는 점이 아쉽다.
물론 선교단체와 성직자들의 비리는 그들의 힘을 잃게 만들긴 하였으나, 이는 지넷의 적극적 투쟁의 결과라기 보다는 자체적인 모순이 더 큰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4.
이 책에서 눈에 띄는 형식상의 특징은 장 구분을 구약성서에 따라 하였다는 점이다.
즉, <1부/창세기 2부/출애굽기 3부/레위기 4부/민수기 5부/신명기 6부/여호수아 7부/판관기 8부/룻기>와 같이 내용을 구분하여 놓았는데,
아마도 기독교라는 종교적 권위에의 도전이라는 작가의 주제의식이 반영된 것과 아울러 각 장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일종의 이중적 장치로 여겨진다.
예를 들어 <1부/창세기>.
널리 알려져있다시피 구약성서 창세기는 인류, 죄, 이스라엘 민족 등의 ‘기원(genesis)’에 대한 책이다.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에서 1부는 지넷 가정의 기원과 지넷이 장차 범할 죄악, 즉, 동성애의 기원을 암시해 두고 있다.
<2부/출애굽기>는 지넷이 최초로 어머니의 영향력을 벗어나는 ‘학교’라는 곳으로의 탈출(Exodus)을, <6부/여호수아>에서는 자신의 성정체성을 확고히 함으로써 견고한 여리고(Jerico) 성의 붕괴 내용을 담고 있다고 여겨진다.
마지막 장인 <8부/룻기>에서 룻은 이방인임에도 시어머니에 대한 효성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 따라서 이 장에서 ‘죄인’이란 이방인이었던 지넷은 다시 어머니에게로 돌아오게 된다.

또 하나 중간중간에 들어있는 ‘원탁의 기사’ 이야기와 ‘위닛과 마법사’에 대한 이야기 역시 재미있는 형식이었다.
지넷 윈터슨은 이러한 고전적인 이야기들을 통해 자신에게 익숙해 있던 절대적 영역으로부터의 일탈과 회귀는 영원히 반복되며 변주되는 주제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려 한 것 같다.

5.
‘정상’과 ‘비정상’, ‘진실’과 ‘거짓’의 경계는 어느 지점일까?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 즉, 다양성과 개성 보장은 인간관계와 사회의 건강함을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요인이 된다.
남이 나와 다르며, 나 역시 남과 반드시 같아져야 할 필요는 없다는 차이의 인정이 현재 우리 사회가 금쪽처럼 숭상하고 있는 “사회 통합”의 첫 번째 조건이다.
우리 사회가, 그리고 나 자신도 오렌지만이 과일이 아니라는 명료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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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3부작 Mr. Know 세계문학 17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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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뉴욕(New York)’이란 말에서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물론 저는 뉴욕은 고사하고 미국령 괌이나 사이판도 가 본적이 없습니다만, 언제부터인가 뉴욕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환상을 가지는 도시가 되어 버린게 아닌가 합니다.
뉴요커라는 말에는 언제부터인가 소위 엣지있고 세련된, 유행의 정점에 서 있는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었습니다.
브루클린과 브로드웨이, 소호에서 가난하지만 꿈을 향해 가는 젊은 예술가들을 떠올린다면, 아마도 오헨리의 작품을 꽤나 분명하게 뇌리에 각인한 사람일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꽃, 세계 금융의 중심이라는 월 스트리트의 분주함과 밀레니엄 행사 때의 타임스퀘어의 화려함도 빼놓을 수 없는 뉴욕의 풍경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어쨌거나 제게 뉴욕은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곳입니다.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의 <대부 2>에서 꼴레오네가 미국에 들어올 때 지나가는 자유의 여신상 장면은 꽤나 큰 충격이었나 봅니다.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작가 가운데 한 명인 폴 오스터에게 뉴욕은 어떨 도시였을까요?
최소한 그의 대표작 [뉴욕 3부작]에서의 뉴욕은 ‘고독한 군중’이 거주하는 곳입니다.
이 속에서 뉴요커들은 길을 잃습니다.
달리는 자전거에서 페달 돌리기를 그만두면 자전거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쓰러집니다.
마찬가지로 폴 오스터가 그리는 뉴요커들은
그들의 주변을 분주하게 흘러가는 사람과 사건들 속에서 페달밟기를 멈출 수 없어서,
그래서 목표를 지향하기보다 그저 달리는 것에 주력하여 내가 서 있는 곳을 알지 못한 채로 길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열심히 앞만 보고 페달을 밟아 마침내 당도하여 고개를 들어보니 생판 처음 보는 곳에 와 있는 것이죠.

[뉴욕 3부작]은 시종일관 세계적 대도시 뉴욕 속에서 일어나는 ‘잃어버림’과 ‘찾음’의 변증법적 통일을 반복하여 보여줍니다.
[뉴욕 3부작]에 실린 세 편의 중편소설이 가진 구도는 기본적으로 동일합니다.
각 작품에는 두 명의 중요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들에게는 ‘쫓는 자’ 또는 ‘지켜보는 자’와 ‘쫓기는 자’ 또는 ‘숨겨진 자’라는 특징을 찾아 볼 수 있겠습니다.
이 두 명의 인물이 서로를 잃어버린 채로 헤매어 돌다가 한 자리로 수렴하여 마침내 ‘내 속에서 너를 찾고, 네 속에서 나를 찾는’ 여로를 마무리짓습니다.

이들은 무엇을 잃어버리고, 무엇을 찾으며, 무엇을 쫓고, 무엇에 쫓기고 있는 것일까요?
이 ‘무엇’이라는 목적어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고유한 자아입니다. 정체성이라고 해도 되겠군요.
자아 혹은 정체성은 절대 불가침을 의미합니다. 어느 누구도 이것을 참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뉴욕 3부작]에서는 자아의 절대성과 개인의 개성이 어떻게 허물어지는지, 그리고 어떻게 새로운 자아와 개성을 향해 변증법적으로 발전하는지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뉴욕’이라는 공간은 그 과정을 확대재생산하는 중요한 촉매제가 됩니다.

[뉴욕 3부작]을 구성하는 세 편의 중편소설에서 ‘쫓는 자’와 ‘쫓기는 자’는 다음과 같습니다.  

<유리의 도시>  쫓는 자: 퀸, 쫓기는 자: 피터 스틸먼
<유령들>  쫓는 자: 블루, 쫓기는 자: 블랙
<잠겨있는 방>  쫓는 자: 나, 쫓기는 자: 팬쇼

쫓는 자들은 스스로의 정당성을 가지고 쫓기는 자들을 따라갑니다.
작가(퀸), 정보요원(블루), 평론가(나)는 직업적 전문성과 오랜 기간 축적해온 경험을 따라 추적 또는 감시 나섭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쫓는 과정에서 뜻하지 못하는 장애물에 봉착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들이 익숙해 왔던 자신의 경험과 지식이 일순간 깨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퀸이 쫓던 스틸먼은 어느 날 밤에 갑자기 사라져 버립니다.
블랙이 쫓던 블루는 도대체가 하는 일도 없이 지루하게 시간만 때우고 있을 뿐입니다.
‘나’는 팬쇼가 행방불명이 되어 죽은 줄로만 여겼으나, 사실은 그가 살아 있음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이런 당황스런 상황은 쫓는 자들로 하여금 추적에 더욱 침잠케 합니다.
쫓기는 자들의 삶과 생각을 좀 더 잘 알아보고자 깊숙이 들어가 버린다는 것이죠.
그리고 종국에는 자신이 쫓아다니던 대상자들과 동일해져가는 스스로를 발견합니다.
이런 관계는 두 번째 작품인 <유령들>에서 가장 극적으로 나타납니다.
몇 달간 계속하여 블루는 블랙을 감시하다가 뭔가 이상한 점을 알아차립니다.
감시당하는 블랙이 자신과 유사한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는 블랙이 무엇을 할 것인지를 스스로 예상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 블루는 블랙을 계속 지켜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생각하기에 블랙이 가만히 집에 머무를 것 같으면 안심하고 나와서 술 한 잔 하고 들어가도 될 정도입니다.
쫓는 자 블루가 쫓기는 자 블랙의 삶 속에 들어갔다가 원래 자신이 서 있는 길을 잃은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동안 억눌러 왔던 스스로의 본성, 스스로의 이드(ID)를 발견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마치 거울 속의 ‘나’를 보는 것과 같은....

이런 ‘표상의 길잃기’와 ‘억눌려 있던 다른 자아의 발견’은 다른 두 중편 <유리의 도시>와 <잠겨있는 방>에서도 유사하게 반복됩니다.
<잠겨있는 방>에서 ‘나’는 팬쇼가 남긴 글을 정리하여 출판하고, 팬쇼의 아내와 결혼하여 살면서 점차로 팬쇼 속에서 자신의 길을 잃어버립니다.
그가 팬쇼의 어머니와 벌이는 성관계는 그의 길잃음의 정점이며, 어릴 적부터 ‘팬쇼되기’를 얼마나 갈망해 왔던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유리의 도시>에서 스틸먼을 찾아내기 위하여 몇 달을 노숙하며 지낸 퀸이 결국 그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지막으로 찾아가 사라진 곳이 바로 스틸먼의 아들이었던 피터 스틸먼과 그의 아내 버지니아의 집이라는 점은 무척 의미심장합니다.

[뉴욕 3부작]에는 구약 성서에 기록된 유명한 바벨탑 이야기가 나옵니다.
신은 인간의 바벨탑 역사를 그르치고 인간들을 세상에 흩어 버리기 위해서 그때까지 하나였던 언어를 여러 가지로 갈라놓습니다.
언어가 인간의 자아 형성과 정체성 확립에 미치는 엄청난 영향력을 생각해 볼 때,
‘동일했던 언어를 갈라놓는다’라는 것은 동일 또는 유사한 자아의 가능성은 봉인하고, 각자의 개성에 따른 자아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는 의미와 다를 바 없습니다.

[뉴욕 3부작]의 등장인물들이 겪는 길잃기와 되찾음은 메트로폴리스에서 생활을 영위하는 바로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 책의 마지막 장면은 ‘내’가 팬쇼로부터 얻은 최후의 빨간 공책을 찢어내어 쓰레기통에 내던지는 것으로 끝납니다.
길잃기(팬쇼되기)와 되찾음(공책찢기)의 변증법 속에서 스스로의 길찾기에 나선 행동을 보여준 ‘나’는 결국 어떻게 될까요? 폴 오스터가  쓰지 않은 진짜 결말이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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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만화책 - 캐릭터로 읽는 20세기 한국만화사, 한국만화 100년 특별기획
황민호 지음 / 가람기획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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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이리도 간절히 원했을까?
나는 아직도 유리 여닫이문을 가진 우리 동네 만화방을 기억한다.
사방 벽에 빼곡히 만화책이 꽂혀 있고, 가게 한 켠에는 구식 난로가, 그 옆으로는 가게 안에서 떡볶이와 오뎅을 팔았던 곳이었다.
그 유리문 너머에 앉아서 만화책을 보던 형들과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웠던가.
내 꿈은 만화방에서 실컷 만화책을 보는 것이었고, 실제로 꿈 속에서 나는 만화에 파묻혀 행복한 종말(?)을 맞기까지 했다.

하지만, 만화방은 넘어서는 안 될 선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만화는 소위 ‘불량’, ‘저질’과 동의어였으며, 속된 말로 ‘얼라들 베려 버리는’ 원흉 가운데 하나로 치부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
우리 선생님은 종례시간에 수시로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 일으켜 세우거나, 때때로 긴 자를 가지고 손바닥을 때리셨다.
‘네 죄를 알렸다!’하는 선생님의 추궁에 고개를 푹 숙인 나와 친구들이 범한 죄는 둘 중 하나, 그러니까 오락실을 갔거나 만화방을 출입하다 걸린 거다.

그렇지만 우리 악동들은 저마다 푼돈이라도 생기면 다시 만화방으로 기어들어 선생님과 숨바꼭질을 하곤 했다.
그런 와중에 그토록 고상하신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압수한 만화책을 낄낄거리며 보시던 현장을 발각한 쾌거(?)를 거두기도 했다.

만화는 내게 ‘추억’이라는 보석을 하나 가득 선물해 주었다.
좁고 지저분했던 만화방, 거기서 친구들과 함께 먹던 떡볶이, 부모님과 선생님 손에 붙잡혀 끌려 나오던 기억...
하지만 무엇보다 잊을 수 없는 가장 큰 추억은 만화책 속에서 만난 주인공들이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웃고 울고 모험을 펼쳤으며, 나쁜 놈들(그 당시는 주로 간첩, 무장공비 이런 사람들이나 우주 악당들)과 싸웠고, 세계 여러 나라와 우주를 돌아다녔다.
나는 스스로를 만화 속 주인공들과 동일시하였다. 그들은 바로 나였던 시절이었다.

황민호의 [내 인생의 만화책]에서 추억의 보석들을 종합선물세트로 만났다.
동아일보 사회면 좌상단을 차지하던 <고바우 영감>은 정치나 사회를 이해하기에는 아직 너무 어리던 시절에도 그저 만화라는 이유 때문에 꼬박꼬박 눈길을 보냈다.
<꺼벙이>는 아직도 내 책장에 꽂혀 있는 영원한 애독서이며, 내가 가장 자신있게 따라 그렸던 만화 속 주인공이기도 했다.
나는 아직도 <고인돌>을 만나기 위한 경험을 기억하고 있는데, 이게 희대의 주간지였던 <선데이 서울>에 연재되던 만화였는지라 미성년자인 내가 볼 방법이 없었다.
결국 난 아버지가 이발소에 가실 때 무조건 따라갔다. 거기에 <선데이 서울>이 비치되어 있는 것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거울로 비치던 아버지의 눈을 피해 몰래몰래 주간지를 뒤적이던 그 스릴!!!!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엄청난 인기를 모은 <달려라 꼴찌>의 주인공 독고탁이 던지던 드라이브볼, 더스트볼, 하이볼... 외국인 챠리 킴!
‘강토’는 아직도 그 이름이 기억나는 캐릭터이며,
<번데기 야구단>은 그야말로 페이지가 닳도록 심취하던 만화책이었다.
나는 이 책을 만화방에서 연속으로 다섯 번 본 적도 있다. 한 권 값만 내고 말이다.
<강가딘>과 윤승운 선생님의 만화들(요철발명왕, 맹꽁이 서당).. 어떻게 잊혀지겠는가?
나는 강가딘과 맹꽁이서당 훈장님 및 친구들을 틈날 때마다 교과서 한 귀퉁이에 그려넣었다. 물론 공부 안한다고 어머님께 한 소리 들어야 했지만...
둘리, 까치(오혜성), 구영탄... 한국 만화가 낳은 대표적인 캐릭터들이야 두 말하면 입만 아플 뿐.
만화잡지였던 [어깨동무]나 [보물섬]이 발간되는 날이면 우리들은 모두 몇몇 친구들에게 아부하는 것은 물론이고, 하다못해 교문 앞 뽑기라도 사들고 향응을 제공해야 했다.
그래야 대여 순위에서 앞의 번호를 받을 수 있었으니까.

[내 인생의 만화책]을 읽는 시간은 마치 “TV는 사랑을 싣고”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어릴 적 헤어진 친구를 다시 만난 것 같아 즐거움에 가득찬 시간이었다.
하지만 책을 모두 읽고 난 후 가슴 한 구석에서 자꾸만 아쉬운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만화책을 여전히 좋아하긴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주로 찾는 만화는 일본 만화가 되었다.
물론 재미있고 좋은 만화를 찾는 것이야 소비자로서 당연한 권리이고, 그 권리 행사에서 국적을 유일무이한 기준으로 둘 생각은 없다.
그리고 일본 만화의 국내 유입을 금지시켜야 한다거나, 만화를 통해서 극일克日해야 한다거나 하는 주장은 추호도 할 생각이 없다.
그렇지만,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내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내 온 우리 만화가 더 발전하고, 더 좋은 작품을 쏟아내고, 그래서 부모님들과 어린이들, 학생들이 한 권이라도 더 찾는 것이 좋은 것 아닌가.

많은 만화가들이 여전히 우리 만화를 지키고 작품을 내주시는 것에 감사하게 생각한다.
과거와 인식이 달라져서인지 이제 대학에 만화를 창작하는 전공도 생기고, 새로운 시도로 활력을 불어넣는 많은 젊은 작가들의 등장은 희망적이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만화가 생산(만화가)-소비(독자) 단계가 분명히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컴퓨터를 이용해서 만화를 생산하기도 하고 향유하기도 하는 체계를 갖추었다는 점은 만화 발전을 위해서 보통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만화 진흥을 위해서 노력하시는 전문가들이 더 잘 알고 계실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 동안 일본 만화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부분으로 지적되어 왔던 기획력과 다양한 소재 발굴과 같은 과제에 대해서도 체계적인 지원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두 가지 개인적인 바람을 말해 보고 싶다.
이희재 선생님의 [간판스타]. 이 만화책은 내가 가장 아끼는 만화책이다.
만화가 분들이 좀 어려우시더라도 이런 리얼리즘 계열의 만화를 그려주셨으면 한다.
나는 아직도 새벽길 청소부로 나선 분의 이야기에 눈물 흘렸던 기억을 가지고 있고,
천지인이 부른 <청소부 김씨 그를 만날 때>라는 노래에 이 만화를 오버랩 시키는데,
그건 아마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고단함과 그것을 어쩔 도리없이 바라봐야만 하는 내 처지 역시 그 만화와 노래에 오버랩 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물론 재미 측면에서는 부족할 것이고, 찾는 사람도 없겠지만
그래도 만화 역시 시대와 사회의 산물인 이상,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더 많이 보았으면 한다.

또 한 가지. 이건 [내 인생의 만화책] 저자분과 출판사에 드리는 바람이다.
우리 만화사를 캐릭터 측면에서 정리한다고 하면 꼭 2권, 3권을 내주시길 바란다.
분량상 한 권에 모든 만화 캐릭터를 담아내지 못했을 것 같지만,
내가 어릴 때부터 봐왔던 많은 캐릭터들이 없는 것이 아쉬웠고, 특히 최근의 만화 주인공들은 (사실 나도 잘 모르지만) 하나도 없다는 점도 다음 권을 기다리게 했다.
지금 당장 생각나는 캐릭터만 읊어봐도....
박기정의 훈이, 김형배의 로버트 태권V와 20세기 기사단, 배금택의 영심이, 허영만의 손오공, 이정문의 심술이, 신문수의 로봇 찌빠, 이희재의 악동이, 이진주의 하니, 김혜린의 아라, 황미나의 <레드문>에 등장하는 캐릭터 등은 반드시 다루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몇 가지 바람은 있지만, 어쨌든 우리 만화가 여러분들과 [내 인생의 만화책] 작가인 황민호 선생님, 출판사에도 무척 감사드린다.
추억 속의 보석상자를 열고 보석 하나하나를 다시 한 번 만나게 해 주었으니까.

가끔 시내에 나가 시간이 있을 때 만화방에 들른다.
머리도 커졌고 예전과 같은 아슬아슬함이나 금전적 부족함이 없어서인지 만화책 속으로 몰입되는 정도는 덜한 것 같지만 그래도 여전히 한 권의 만화는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앞으로도 나의 만화 사랑은 계속될 것이다. 쭈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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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4 - 숙종실록 - 공작정치, 궁중 암투, 그리고 환국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4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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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 당시 오랫동안 영국군에 저항하던 프랑스 칼레 시가 항복하던 날.
영국군 칼레 시민의 생명을 보장하면서 내건 항복조건.
“칼레 시민 대표 6명을 처형해야 한다!”
과연 누가 시민들을 대표하여 죽을 것인가?
서로 눈치만 볼 때, 칼레 최고의 부자가 스스로 자원하고 나선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시장, 부유한 법률가, 귀족이 차례로 나서고,
이들은 이후 높은 신분에 따른 도덕적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으로 역사에 남았다.
- 지식채널e 中에서

내가 개인적으로 모으고 있는 몇 안되는 시리즈.
만화이기 때문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그러나 그 안에 담고 있는 내용은 정말 감탄을 금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풍부한 책.

이번 14권은 조선의 18대 왕이었던 숙종 시대의 실록이다.
사실 숙종 시대는 우리에게 무척이나 익숙한 시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재미있다. 이 때는 무슨 정치적으로 큰 사건이 있었다거나 전쟁이 있었다거나 뛰어난 위인들이 많이 나왔던 시기는 아니다.
조선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니면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바로 연상되리라.
‘장희빈’ 또는 ‘인현왕후’ 또는 ‘무수리 최씨’라는 여인들 말이다.

장희빈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나 영화의 영향일까.
흔히 숙종은 여인들의 치마폭에서 벗어나지 못한 철부지(!) 임금의 표상처럼 그려지지만,
오히려 숙종은 권모술수 정치에 대단히 능수능란하고 사대부 신하들에서부터 종친, 외척, 주위의 여인들까지 마음먹은대로 이용할 수 있는, 대단한 수완을 가진 임금이었다.
숙종조에 서인과 남인 사이에서 일어난 소위 ‘환국’이라는 정치적 지배층의 교체는 좀 심하게 말하면 숙종이 조장한 ‘친위 쿠데타’나 다름없다.
숙종은 오랫동안 야당의 역할을 하던 남인을 등용시켜 서인의 세력을 굴복시켰다.
그리고 남인들이 정권에 익숙해 질 때 다시 서인들을 불러들임으로써 손바닥 뒤집듯이 정국을 돌려 버린다.
이런 현상은 조선의 그 어떤 왕도 꿈꿔보지 못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인현왕후나 장희빈은 불쌍한 여인들일 수도 있겠다.
여성이 인정받지 못하던 봉건사회에서, 원하든 원하지 않든 권력의 핵심 가까이에 있었으나 절대자의 필요에 따라 이용되다가 버려졌던 여인들 아닌가.

인현왕후와 장희빈 등에 얽힌 이야기는 드라마와 영화에서 충분히 긁어 먹었으니,
그 이야기를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으리라.
(하지만, 분명 몇 년 후에 또 나올 것이다.
똑같은 얘기더라도 기본 시청률은 먹어주는 소재이니, 그 생명력이 영원할 것 같다.)

이번 14권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역시 당시 지배층의 무능함과 부패가 아닌가 한다.
이는 울릉도 어부 안용복의 이야기와 왕을 비롯한 지배층의 부정과 축재에 관련된 이야기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안용복은 아무 벼슬도 없는 사람이었고 우리 땅 울릉도와 독도를 지킬 의무를 가진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국가나 정부로부터 어떤 포상을 받는 것 없이 직접 일본 땅에 뛰어들어 우리 땅 울릉도와 독도를 지켜낸 인물이다.
일부 연구자들은 그의 행동이 자신의 어획량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치부하기도 하지만,
직접 일본까지 가서 대마도주를 비롯한 지배층들로부터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땅임을 확인받고,
임금과 조정 대신들로 하여금 독도까지 관심을 가지도록 한 그의 공로는 절대 작은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당시 당쟁에 빠져 있던 정부가 한 일을 보면 어이가 없다.
벼슬아치를 사칭했다는 죄목으로 안용복을 죄주고 귀양까지 보냈으니 말이다.

또 하나. 숙종은 그야말로 정국을 전환시키는 데에는 뛰어난 판단력과 과감한 결단력을 보였지만,
곪아 터진 민생 문제 해결과 지배층의 부패에 대해서는 무능한 편이었다.
왕실 종친들이 소유한 전답으로 인해 국가의 재정이 황폐해 지는 것에도,
중앙 사대부들의 뇌물과 지방 사대부들의 공공연한 백성 착취에도 이렇다할 대책을 내놓지 못했고,
군포의 폐단이 불러온 백골징포, 황구첨정, 인징, 족징 등은 문제는 알고 있으면서도 과감한 개혁에는 주저하였다.
백성들은 세금으로 죽어나가는 상황에서 궁중의 암투라... 과연 무슨 의미인지?

민생을 외면한 왕을 비롯한 지배층의 모습,
우리 땅을 지키고자 한 백성에게 가해진 어이없는 죄.
그 때나 지금이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우리 땅에서 요원한 일일까?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 한 가지 소개한다.
조선왕조실록이 한글로 모두 번역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책을 보면서 조선왕조실록 사이트(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에서 관련된 내용을 찾아가면서 읽는 것이다.
아무래도 내용을 짧게 요약한 만화에서 찾을 수 없었던 새로운 재미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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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발한 세계일주 레이스
밸리 챈드라새커런, 스티브 헬리 지음, 권성환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스티브와 밸리라는 골 때리는(!!!) 두 친구가 있다.
세계 명문인 하버드대를 나와서 방송작가 일을 하고 있으니 바보들은 아닐테고..
하여튼 서로 아웅다웅 못잡아먹어 안달인 두 친구는 어느날 엽기적인 경주를 제안한다.
다름아닌 세계일주여행!!!!
단, 규칙이 있다.
첫째, 미국 LA에서 한 명은 서쪽으로, 다른 한 명은 동쪽으로 떠나서 1분이라도 빨리 다시 LA로 돌아오는 사람이 승자가 된다.
둘째, 이동할 때는 비행기나 헬리콥터, 열기구를 타면 안된다.
경주에서 이긴 쪽은 LA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비싼 스카치위스키를 상품으로 얻게 된다.
그리고 이들의 경쟁에 관심을 보인 출판사를 꼬셔서(!!!) 여행비용을 대게 했다.

2007년 4월 14일.
드디어 스티브는 태평양을 건너 한국으로, 밸리는 멕시코를 향해 출발하면서 좌충우돌 경주는 시작된다.
스티브는 태평양-중국-몽골-시베리아-모스크바-유럽-대서양을 거쳐 미국으로 돌아오는 코스를 선택했고,
밸리는 브라질-유럽-모스크바-카이로-중동-상하이를 거쳐 미국으로 돌아오기로 한다.
(이 두 사람은 모스크바에서 만나 하루를 함께 지낸다)
이 과정에서 밸리는 약간의 반칙을 쓴다.
바로 두 번째 규칙, 즉, 비행기를 이용해서는 안된다는 규칙을 여러번 어긴 것이다!!!!!

하여튼 이 두 친구는 목숨의 위협을 받기까지 하는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레이스를 완주한다.
그러면서도 시종일관 유머를 잃지 않으면서 때론 익살로, 때론 허풍으로 우리를 즐겁게 한다.

‘집 떠나면 개고생’이란 광고문구도 있는데, 사람들은 왜 여행을 할까? 특히 말도 잘 통하지 않고 낯설은 해외여행을 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광고문구에 100% 동의한다. 정말 집 떠나면 개고생이다!!!)
물론 특별히 뚜렷한 목적을 가진 해외여행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업무상 출장으로, 또 어떤 사람은 공부를 위해서 등등.
하지만 이런 특정한 목적을 가진 경우를 제외한다면 우리가 외국으로 여행을 떠나는 가장 큰 이유는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말을 하기 위함이 아닐까?

스티브와 밸리는 세계일주 여행을 하면서 여러 나라를 방문하고 여러 사람을 만난다.
물론 그들의 나라인 미국의 이웃들이나 유럽 국가들처럼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누리면서 부족함 없이 지내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스티브와 밸리의 관심은 이런 나라들의 국민들에게는 잠깐 머물 뿐이다.
오히려 그들은 다른 나라들, 즉, 중국, 멕시코, 몽골, 브라질, 이집트, 팔레스타인, 캄보디아 등에 사는 사람들에 깊은 애정과 유대를 드러낸다.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
문명의 이기와는 동떨어진 채로 어렵게 살아야 하는 사람들,
아이들의 안전과 건강을 걱정해야만 하는 사람들,
어쩔 수 없이 외국인인 스티브와 밸리를 경계하다가도 어느 샌가 마음을 여는 사람들.

스티브와 밸리는 이들과 마음으로부터 소통한다.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처한 환경과 조건은 동일하지 않으며, 그들의 문화적 배경을 이루는 역사적 상황과 언어도 상이하다.
그런 사람들과 여행자들이 소통하는 것은 세계 어디를 가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공통적인 것이 하나 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고단하지만 일상에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바로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행을 가서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감탄사를 뱉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나는 돌아다니는 것보다 한 군데 머물러 있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고등학교 수업시간에 지리를 무척 좋아하고, 세계 여러 나라의 수도 이름대기 게임도 무척이나 즐겨 했지만, 실제 여행 자체는 내게 익숙하지 않은 경험이다.
하지만, 스티브와 밸리가 경험한 이렇게 재미있고 아름다운 여행이라면,
이렇게 스릴 넘치면서도 사람의 인정이 흐르는 여행이라면,
기꺼이 오늘 밤 꿈속의 시간을 투자하여 이들의 여행행적을 그대로 따라갈 용의가 있다.

아참!!! 스티브와 밸리 중 누가 먼저 LA에 도착해서 상품으로 걸린 위스키를 얻었을까?
그건 직접 읽으시면서 확인해 보시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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