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3부작 Mr. Know 세계문학 17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뉴욕(New York)’이란 말에서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물론 저는 뉴욕은 고사하고 미국령 괌이나 사이판도 가 본적이 없습니다만, 언제부터인가 뉴욕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환상을 가지는 도시가 되어 버린게 아닌가 합니다.
뉴요커라는 말에는 언제부터인가 소위 엣지있고 세련된, 유행의 정점에 서 있는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었습니다.
브루클린과 브로드웨이, 소호에서 가난하지만 꿈을 향해 가는 젊은 예술가들을 떠올린다면, 아마도 오헨리의 작품을 꽤나 분명하게 뇌리에 각인한 사람일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꽃, 세계 금융의 중심이라는 월 스트리트의 분주함과 밀레니엄 행사 때의 타임스퀘어의 화려함도 빼놓을 수 없는 뉴욕의 풍경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어쨌거나 제게 뉴욕은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곳입니다.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의 <대부 2>에서 꼴레오네가 미국에 들어올 때 지나가는 자유의 여신상 장면은 꽤나 큰 충격이었나 봅니다.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작가 가운데 한 명인 폴 오스터에게 뉴욕은 어떨 도시였을까요?
최소한 그의 대표작 [뉴욕 3부작]에서의 뉴욕은 ‘고독한 군중’이 거주하는 곳입니다.
이 속에서 뉴요커들은 길을 잃습니다.
달리는 자전거에서 페달 돌리기를 그만두면 자전거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쓰러집니다.
마찬가지로 폴 오스터가 그리는 뉴요커들은
그들의 주변을 분주하게 흘러가는 사람과 사건들 속에서 페달밟기를 멈출 수 없어서,
그래서 목표를 지향하기보다 그저 달리는 것에 주력하여 내가 서 있는 곳을 알지 못한 채로 길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열심히 앞만 보고 페달을 밟아 마침내 당도하여 고개를 들어보니 생판 처음 보는 곳에 와 있는 것이죠.

[뉴욕 3부작]은 시종일관 세계적 대도시 뉴욕 속에서 일어나는 ‘잃어버림’과 ‘찾음’의 변증법적 통일을 반복하여 보여줍니다.
[뉴욕 3부작]에 실린 세 편의 중편소설이 가진 구도는 기본적으로 동일합니다.
각 작품에는 두 명의 중요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들에게는 ‘쫓는 자’ 또는 ‘지켜보는 자’와 ‘쫓기는 자’ 또는 ‘숨겨진 자’라는 특징을 찾아 볼 수 있겠습니다.
이 두 명의 인물이 서로를 잃어버린 채로 헤매어 돌다가 한 자리로 수렴하여 마침내 ‘내 속에서 너를 찾고, 네 속에서 나를 찾는’ 여로를 마무리짓습니다.

이들은 무엇을 잃어버리고, 무엇을 찾으며, 무엇을 쫓고, 무엇에 쫓기고 있는 것일까요?
이 ‘무엇’이라는 목적어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고유한 자아입니다. 정체성이라고 해도 되겠군요.
자아 혹은 정체성은 절대 불가침을 의미합니다. 어느 누구도 이것을 참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뉴욕 3부작]에서는 자아의 절대성과 개인의 개성이 어떻게 허물어지는지, 그리고 어떻게 새로운 자아와 개성을 향해 변증법적으로 발전하는지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뉴욕’이라는 공간은 그 과정을 확대재생산하는 중요한 촉매제가 됩니다.

[뉴욕 3부작]을 구성하는 세 편의 중편소설에서 ‘쫓는 자’와 ‘쫓기는 자’는 다음과 같습니다.  

<유리의 도시>  쫓는 자: 퀸, 쫓기는 자: 피터 스틸먼
<유령들>  쫓는 자: 블루, 쫓기는 자: 블랙
<잠겨있는 방>  쫓는 자: 나, 쫓기는 자: 팬쇼

쫓는 자들은 스스로의 정당성을 가지고 쫓기는 자들을 따라갑니다.
작가(퀸), 정보요원(블루), 평론가(나)는 직업적 전문성과 오랜 기간 축적해온 경험을 따라 추적 또는 감시 나섭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쫓는 과정에서 뜻하지 못하는 장애물에 봉착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들이 익숙해 왔던 자신의 경험과 지식이 일순간 깨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퀸이 쫓던 스틸먼은 어느 날 밤에 갑자기 사라져 버립니다.
블랙이 쫓던 블루는 도대체가 하는 일도 없이 지루하게 시간만 때우고 있을 뿐입니다.
‘나’는 팬쇼가 행방불명이 되어 죽은 줄로만 여겼으나, 사실은 그가 살아 있음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이런 당황스런 상황은 쫓는 자들로 하여금 추적에 더욱 침잠케 합니다.
쫓기는 자들의 삶과 생각을 좀 더 잘 알아보고자 깊숙이 들어가 버린다는 것이죠.
그리고 종국에는 자신이 쫓아다니던 대상자들과 동일해져가는 스스로를 발견합니다.
이런 관계는 두 번째 작품인 <유령들>에서 가장 극적으로 나타납니다.
몇 달간 계속하여 블루는 블랙을 감시하다가 뭔가 이상한 점을 알아차립니다.
감시당하는 블랙이 자신과 유사한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는 블랙이 무엇을 할 것인지를 스스로 예상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 블루는 블랙을 계속 지켜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생각하기에 블랙이 가만히 집에 머무를 것 같으면 안심하고 나와서 술 한 잔 하고 들어가도 될 정도입니다.
쫓는 자 블루가 쫓기는 자 블랙의 삶 속에 들어갔다가 원래 자신이 서 있는 길을 잃은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동안 억눌러 왔던 스스로의 본성, 스스로의 이드(ID)를 발견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마치 거울 속의 ‘나’를 보는 것과 같은....

이런 ‘표상의 길잃기’와 ‘억눌려 있던 다른 자아의 발견’은 다른 두 중편 <유리의 도시>와 <잠겨있는 방>에서도 유사하게 반복됩니다.
<잠겨있는 방>에서 ‘나’는 팬쇼가 남긴 글을 정리하여 출판하고, 팬쇼의 아내와 결혼하여 살면서 점차로 팬쇼 속에서 자신의 길을 잃어버립니다.
그가 팬쇼의 어머니와 벌이는 성관계는 그의 길잃음의 정점이며, 어릴 적부터 ‘팬쇼되기’를 얼마나 갈망해 왔던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유리의 도시>에서 스틸먼을 찾아내기 위하여 몇 달을 노숙하며 지낸 퀸이 결국 그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지막으로 찾아가 사라진 곳이 바로 스틸먼의 아들이었던 피터 스틸먼과 그의 아내 버지니아의 집이라는 점은 무척 의미심장합니다.

[뉴욕 3부작]에는 구약 성서에 기록된 유명한 바벨탑 이야기가 나옵니다.
신은 인간의 바벨탑 역사를 그르치고 인간들을 세상에 흩어 버리기 위해서 그때까지 하나였던 언어를 여러 가지로 갈라놓습니다.
언어가 인간의 자아 형성과 정체성 확립에 미치는 엄청난 영향력을 생각해 볼 때,
‘동일했던 언어를 갈라놓는다’라는 것은 동일 또는 유사한 자아의 가능성은 봉인하고, 각자의 개성에 따른 자아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는 의미와 다를 바 없습니다.

[뉴욕 3부작]의 등장인물들이 겪는 길잃기와 되찾음은 메트로폴리스에서 생활을 영위하는 바로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 책의 마지막 장면은 ‘내’가 팬쇼로부터 얻은 최후의 빨간 공책을 찢어내어 쓰레기통에 내던지는 것으로 끝납니다.
길잃기(팬쇼되기)와 되찾음(공책찢기)의 변증법 속에서 스스로의 길찾기에 나선 행동을 보여준 ‘나’는 결국 어떻게 될까요? 폴 오스터가  쓰지 않은 진짜 결말이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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