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4 - 숙종실록 - 공작정치, 궁중 암투, 그리고 환국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4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 당시 오랫동안 영국군에 저항하던 프랑스 칼레 시가 항복하던 날.
영국군 칼레 시민의 생명을 보장하면서 내건 항복조건.
“칼레 시민 대표 6명을 처형해야 한다!”
과연 누가 시민들을 대표하여 죽을 것인가?
서로 눈치만 볼 때, 칼레 최고의 부자가 스스로 자원하고 나선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시장, 부유한 법률가, 귀족이 차례로 나서고,
이들은 이후 높은 신분에 따른 도덕적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으로 역사에 남았다.
- 지식채널e 中에서

내가 개인적으로 모으고 있는 몇 안되는 시리즈.
만화이기 때문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그러나 그 안에 담고 있는 내용은 정말 감탄을 금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풍부한 책.

이번 14권은 조선의 18대 왕이었던 숙종 시대의 실록이다.
사실 숙종 시대는 우리에게 무척이나 익숙한 시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재미있다. 이 때는 무슨 정치적으로 큰 사건이 있었다거나 전쟁이 있었다거나 뛰어난 위인들이 많이 나왔던 시기는 아니다.
조선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니면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바로 연상되리라.
‘장희빈’ 또는 ‘인현왕후’ 또는 ‘무수리 최씨’라는 여인들 말이다.

장희빈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나 영화의 영향일까.
흔히 숙종은 여인들의 치마폭에서 벗어나지 못한 철부지(!) 임금의 표상처럼 그려지지만,
오히려 숙종은 권모술수 정치에 대단히 능수능란하고 사대부 신하들에서부터 종친, 외척, 주위의 여인들까지 마음먹은대로 이용할 수 있는, 대단한 수완을 가진 임금이었다.
숙종조에 서인과 남인 사이에서 일어난 소위 ‘환국’이라는 정치적 지배층의 교체는 좀 심하게 말하면 숙종이 조장한 ‘친위 쿠데타’나 다름없다.
숙종은 오랫동안 야당의 역할을 하던 남인을 등용시켜 서인의 세력을 굴복시켰다.
그리고 남인들이 정권에 익숙해 질 때 다시 서인들을 불러들임으로써 손바닥 뒤집듯이 정국을 돌려 버린다.
이런 현상은 조선의 그 어떤 왕도 꿈꿔보지 못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인현왕후나 장희빈은 불쌍한 여인들일 수도 있겠다.
여성이 인정받지 못하던 봉건사회에서, 원하든 원하지 않든 권력의 핵심 가까이에 있었으나 절대자의 필요에 따라 이용되다가 버려졌던 여인들 아닌가.

인현왕후와 장희빈 등에 얽힌 이야기는 드라마와 영화에서 충분히 긁어 먹었으니,
그 이야기를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으리라.
(하지만, 분명 몇 년 후에 또 나올 것이다.
똑같은 얘기더라도 기본 시청률은 먹어주는 소재이니, 그 생명력이 영원할 것 같다.)

이번 14권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역시 당시 지배층의 무능함과 부패가 아닌가 한다.
이는 울릉도 어부 안용복의 이야기와 왕을 비롯한 지배층의 부정과 축재에 관련된 이야기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안용복은 아무 벼슬도 없는 사람이었고 우리 땅 울릉도와 독도를 지킬 의무를 가진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국가나 정부로부터 어떤 포상을 받는 것 없이 직접 일본 땅에 뛰어들어 우리 땅 울릉도와 독도를 지켜낸 인물이다.
일부 연구자들은 그의 행동이 자신의 어획량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치부하기도 하지만,
직접 일본까지 가서 대마도주를 비롯한 지배층들로부터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땅임을 확인받고,
임금과 조정 대신들로 하여금 독도까지 관심을 가지도록 한 그의 공로는 절대 작은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당시 당쟁에 빠져 있던 정부가 한 일을 보면 어이가 없다.
벼슬아치를 사칭했다는 죄목으로 안용복을 죄주고 귀양까지 보냈으니 말이다.

또 하나. 숙종은 그야말로 정국을 전환시키는 데에는 뛰어난 판단력과 과감한 결단력을 보였지만,
곪아 터진 민생 문제 해결과 지배층의 부패에 대해서는 무능한 편이었다.
왕실 종친들이 소유한 전답으로 인해 국가의 재정이 황폐해 지는 것에도,
중앙 사대부들의 뇌물과 지방 사대부들의 공공연한 백성 착취에도 이렇다할 대책을 내놓지 못했고,
군포의 폐단이 불러온 백골징포, 황구첨정, 인징, 족징 등은 문제는 알고 있으면서도 과감한 개혁에는 주저하였다.
백성들은 세금으로 죽어나가는 상황에서 궁중의 암투라... 과연 무슨 의미인지?

민생을 외면한 왕을 비롯한 지배층의 모습,
우리 땅을 지키고자 한 백성에게 가해진 어이없는 죄.
그 때나 지금이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우리 땅에서 요원한 일일까?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 한 가지 소개한다.
조선왕조실록이 한글로 모두 번역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책을 보면서 조선왕조실록 사이트(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에서 관련된 내용을 찾아가면서 읽는 것이다.
아무래도 내용을 짧게 요약한 만화에서 찾을 수 없었던 새로운 재미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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