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뱀파이어 - 폭력의 시대 타자와 공존하기
임옥희 지음 /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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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가 채식을 한다? 이건 이율배반적이고 존재부정이다. 낮에는 관 속에서 잠을 자고 밤이 되면 박쥐나 늑대로 변신해 가면서 생명의 상징인 피를 빨아대는 영생불멸의 무서운 흡혈귀가 양순한 소처럼 풀을 뜯어 우물거리는 모습은 개그 프로의 소재로나 쓰일 법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게 단순히 웃긴 얘기로 끝나지 않는 이유는 ‘채식주의자 뱀파이어’라는 모순이 내 앞에 놓인 엄연한 현실에 대한 은유이기 때문이다.

한 국가를 지배하는 것도 모자라서 전세계를 지배권에 두고 확장된 신자유주의는 누가 뭐라고 해도 ‘승자독식’의  이데올로기다. 뱀파이어와 다르지 않다. 2등조차 기억하지 않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뒤쪽부터 세는 것이 빠른 사람들은 주변인도 되지 못하는 위치로 내몰린다.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빈곤과 차별, 배제와 학대로서, 마치 뱀파이어의 희생물처럼 말라 죽을 때까지 피를 빨리고 또 빨린다. 더 무서운 것은 뱀파이어에게 피를 빨리면 역시 뱀파이어가 되는 것처럼 신자유주의적 자본에 피를 빨린 우리도 무의식중에 이런 빈곤과 차별을 따라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점이다. 식인은 원시인의 풍습만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하에서 우리는 ‘식인주체’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조금이라도 인간다운 삶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자기부정을 통한 공존이라는 존재론적 문제가 제기된다.

페미니즘은 어떨까. 페미니즘 역시 자기부정을 통한 생존의 문제에 당면해 있지 않은가.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은 뿌리깊은 가부장적 문화와 성차별에 대항하여 투쟁하면서 존재 영역을 넓혀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때는 어쩔 수 없이 제도권 밖에서, 들판에서 외치던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지금은? 호주제는 폐지되고 부부별산제도 도입되었다. 공직에 여성할당제가 도입되었고 어떤 분야에서는 남성할당제의 도입이 거론될 정도로 제도적 성평등이 진전되었다. 여성가족부의 존재는 여성문제의 국가적 의제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정부의 예산편성에서부터 사업의 집행과 평가에 이르기까지 ‘성인지적 관점’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국책연구기관인 여성정책연구원과 여성단체들의 주장이다. 그런데 오히려 [채식주의자 뱀파이어]에서는 ‘페미니즘의 죽음’이 이야기되고 있다. 왜 그럴까?

[채식주의자 뱀파이어]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큰 흐름은 ‘페미니즘의 죽음’이다. 물론 다양한 처지와 조건을 가진 사람들과의 공존을 통한 페미니즘의 부활 또는 재발견도 이 책의 중요한 주제이긴 하다. 그렇지만, 부활이나 재발견이란 결국 죽음 또는 상실이 전제되어 있는 개념인만큼, 책의 논의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먼저 저자가 왜 ‘페미니즘은 죽었다’라는 용감한(?) 선언을 하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페미니즘의 죽음은 이중적 함의를 가진다. 어떤 사회운동이든지 지향하는 목적이 달성된 이후 그 운동이 소멸한다면(즉, 죽음을 맞는다면) 그야말로 바람직한 일이다. 소위 ‘발전적 해체’란 이럴 때 써먹는 말이다. 그래서 저자도 서문에서 지적한다. 여성억압이 없는 사회가 되어 페미니즘이 용도 폐기되었다면 그 죽음을 경축해야 마땅하다고. 하지만 실제로 이런 바람직한 일은 거의 없다. 오히려 원래의 목적도 달성하지 못했는데 운동의 성격은 자꾸만 변질되어 버리고, 사람들에게서 잊혀지면서 ‘살았다고 하나 실상은 죽은 자’가 되어 버리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 이런 죽음이야 말로 통탄해 마지않을 수 없는 죽음이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지금 이야기되는 페미니즘의 죽음이 경축할 만한 전자가 아니라 통탄해야 할 후자라는 점이다.

지금의 페미니즘이 통탄할 정도로 원통한 죽음을 당했다니... 너무 가혹한 말인가? 우리나라의 여성운동은 그동안 많은 제도적 성과를 달성했다. 물론 아직 가야할 길이 남아 있지만, 짧은 여성운동의 역사와 지난했던 과정을 감안한다면 지금까지의 성과들이 평가절하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따라서 단순히 과거의 성과가 미흡했다는 이유 때문에 페미니즘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페미니즘의 죽음은 성과의 미흡이 아니라 성과의 고착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페미니즘의 중병(重病)은 그 운동이 일정한 기틀을 잡고, 국가적으로 페미니즘 담론이 수용되면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그리고 중병으로 허약해진 페미니즘은 모든 것을(젠더라는 담론조차도) 물신화하고 자본화하는 신자유주의와, 그 속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계급적 대립구도 속에서 치명타를 맞는다.

[채식주의자 뱀파이어]를 읽으면서 저자가 은연중에 또는 직접적으로 페미니즘의 죽음의 원인으로 꼽고 있는 것이  ‘국가주의 페미니즘’으로의 변화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가족부의 존재와 여성문제의 국가적 의제화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여성의 지위 신장이라는 그럴 듯한 명분과 절차적이고 양적인 성평등 담론 속에 ‘국가’란 단어가 의미하는 절대적 권력관계와 제도가 의미하는 합리가 어느 틈엔가 페미니즘을 국가주의 속에 편입시킨다.
시민사회의 발전이 서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약한 반면 공동체의식은 강한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가 모든 것을 책임지고 해결해 주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다. 이게 바로 국가에 절대적 권한을 부여(혹은 반납)해 버리는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핵심인데, 여기서 국가는 한 가족의 가부장으로 대치되는 개념이다. 따라서 여성운동을 비롯한 제반 사회운동이 국가제도화 된다는 것은 이제 여성들이 겪는 문제들, 경계인과 주변인들이 겪는 문제들의 해결책은 모두 가부장인 국가의 손에 넘어간 것이다. 이제 여성운동의 존재 의미는 단 한 가지만 남는다. 가부장인 국가가 이런 일들을 잘할 수 있도록 여러 좋은 대안을 마련하여 국가에 제공(혹은 헌납)하고 그 하회를 기다리는 것이다. 아!!! 물론 그 대가도 있다. 정부보조금이라는 떡고물. 오히려 페미니즘 운동은 국가에 대해 어려움과 고통을 돌보는 자상한 아버지의 상을 만들도록 기여하고 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페미니즘은 그렇게 국가에 편입되었고, 또 국가로부터 배신당했다. 문제는 여성운동이 국가의 배신에도 변변히 저항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지금 당장 생각나는 MB정부의 여성관련 정책들을 나열해 보자. 여성부 축소와 폐지 논의, ‘퍼플잡’이라고 불리는 유연근무제도 도입과 일-가정양립, 여성 관련 부처에 가족과 청소년 업무가 붙은 상황, 저출산 사회에서 적정인구에 대한 고민없이 무조건적으로 양산되고 있는 출산장려운동 등등. 아! 그리고 하나 더 있다. 촛불집회를 비롯한 반정부 불법(!!!) 집회에 참석하지 않아야만 정부보조금을 줄 수 있다는 방침. 여성운동의 영역을 제한하고, 여성의 노동력을 가족에 얽어매려 하며, 저출산의 책임이 여성에게 귀결되는 이 현실과 정책들에 대해 과연 제도화된 여성단체들이 어떤 목소리를 내고 있는가?

국가주의 페미니즘으로의 편입은 종국적으로 계급적, 정치적 이해관계에 복무하는 페미니즘으로의 전락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그런 점에서 [채식주의자 뱀파이어]에 제시된 사례인 가족과 일자리에 대한 백인 중산층 여성운동가들의 관점과 유색인 하층 여성운동가들의 관점의 차이가 시사하는 바는 크다.
중산층 여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가족은 그들의 사회적 진출을 속박하는 족쇄로 작용한다. 따라서 그들은 가족구조의 해체와 여성의 사회진출을 주장하게 된다. 물론 가족이라는 사회적 제도에 대한 문제제기로 이들의 주장은 의미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유색 하층 여성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용감하게(?) 가족의 해체를 주장하는 것은 상류계급에 속한 백인 여성들의 배부른 푸념이자 자신들의 꿈을 산산조각내는 위험천만한 발상일 뿐이다. 상류층이 꺼려하는 사회의 질낮은 일자리에서 해고의 위험을 절박하게 감수하며서도 잠시의 휴식도 없이 노동해야 하는 이들에게 안정적인 소득을 가진 남편 및 사랑하는 아이들과의 가족생활은 해체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향해야 할 바이다. 동일한 사회적 현상 또는 사회적 제도에 대해 계급적 관점 차이는 이렇게 크다.
성매매에 대한 입장도 이런 복잡한 계급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어떤 이들에게 성매매 여성이 그 자리까지 전락하게 된 ‘신성한 노동에 대한 남성 독점주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특히 현대 자본주의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국가와 사회가 배제 또는 도구화한 여성들이 집창촌을 형성한 사실에는 눈을 감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합법적인 성, 그러니까 결혼과 가족의 구조 속에 있는 성일 뿐, 그 외에는 인정되지 않는다. 전형적인 순결주의 또는 가족중심주의적 입장이다. 그리고 그들은 가족중심주의의 가부장인 국가의 개입에 박수를 보내고 강력한 단속을 지지한다. 그 속에 숨은 국가의 폭력, 집창촌 지역의 개발을 통한 개발이익의 조장이라는 자본의 폭력에는 눈을 돌리지 않는다.

자. 그럼 이제 어려운 문제가 남는다. 사실 이 문제는 비단 페미니즘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사회운동의 문제이기도 하다. 질문 자체는 간단하다. 제도화된 페미니즘을 극복하고 초심으로 돌아가 부활 또는 재발견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여성운동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까? 질문은 간단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이제 우리의 삶은 가정, 교육현장, 노동현장 등을 가리지 않고 사소한 것 하나조차도 신자유주의의 물신화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해서 경쟁력을 갖추고 스펙을 높여야 하며, 다른 사람을 밟고 이겨내야만 한다는 생각이 부지불식간에 우리의 머리속을 지배하고 있다.

이렇듯 강력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맞서서 페미니즘을 재탄생시키기 위하여 [채식주의자 뱀파이어]에서 제시한 방법은 ‘성찰’과 ‘공존’이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주체와 타자의 분명한 구분이며 이것은 차별과 배제의 논리를 낳는다. 나와 남 사이의 경계를 확실히 그은 후, 그 경계 너머의 대상은 뱀파이어의 희생물이 된다. 그래서 나 자신이 뱀파이어가 되어 다른 사람의 피를 빨아 생존하거나, 타인을 내 생존의 걸림돌 또는 이용물로 삼아 잡아먹는 식인주체로서 살아가지 않았나 반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나와는 좀 더 떨어진 위치로 시선을 옮겨 자신을 타자해 보고, 경계를 넘어 내게로 들어오는 타자들을 적대시하는 것이 아니라 환대하고, 폭력이 아니라 포용으로 대하고, 그들과 함께 유머를 나누고 문화와 예술을 통해 인생을 풍부하게 하면서 일상의 뿌리를 공유한다.
이게 바로 ‘채식주의자 뱀파이어’의 삶이다. 천성적으로 생명의 피를 빨아야만 생존할 수 있는 뱀파이어에게 채식은 자기 존재의 부정이다. 빈혈에 시달리면서도 허기를 채식으로 달래는 뱀파이어의 모습은 아이러니하지만 완전히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 [채식주의자 뱀파이어]의 주장이다.

물론 나는 저자의 의견에 동의한다. 나를 돌아보고 타자들과 공존하는 것의 가치를 부정할 수 없다. 여기에 내 생각을 짧게 덧붙여보고자 한다. ‘앞으로 페미니즘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저자의 답을 들었으니 이제 틀리든 맞든 내 답안지를 제출하는 것이 좋은 책을 읽은 독자로서의 의무가 아닌가 한다.

앞에서 페미니즘의 죽음의 근거로 국가주의로의 편입과 제도화된 페미니즘의 모습을 지적하였다. 그렇다면 페미니즘을 되살리는 길은 국가주의로부터의 탈피와 생명력있고 자유로운 원래 모습의 재발견이 될 것이다.
내가 페미니즘에 바라는 첫 번째는 타자에 대한 환대와 공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연대’의 관계맺음과 운동으로의 발전이다. 함께 공존하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변화시키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버스나 지하철에 몸이 불편한 장애우가 탔을 때 일어나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개인적 수준의 공존이라면, 장애우들의 이동권을 위해서 함께 잘못된 것을 바꾸는 일에 참여하는 것은 페미니즘 차원의 연대이다. 물론 누가 타든 말든 엉덩이 붙이고 무관심하게 앉아 있는 사람도 많은 것이 현실이니 공존만으로도 의미가 있겠지만, 페미니즘의 외연을 확장한다는 측면에서 사회의 주변으로 밀려난 이들의 목소리를 함께 대변하고 함께 그들의 삶을 바꾸는 일에 목소리를 높이고 참여해 주기를 바란다.
연대란 것은 여성과 남성을 나누어 양자를 상호대립적으로 보게 하는 관점의 지양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군필자에 대한 가산점을 둘러싸고 남성들과 여성들의 감정섞인 이전투구는 페미니즘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다. 분단과 이데올로기 대립 상황에서 2년 내지 3년의 청춘을 군대에 바치는 것은 신성한 것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을 모두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피해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단체들이 군가산점을 주느냐 마느냐의 문제에만 매몰되는 것은 무척이나 안타깝다. 평등의 관점에서 가산점 폐지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동시에 우리 사회가 신성시하고 있는 군대의 환상을 깨뜨리는 일에 남성과 여성이 연대해야 한다. 그건 구체적으로 국민개병제의 모순을 지적하고 모병제로의 전환과 군대내 인권과 안전의 확보를 함께 요구하는 것이다.

또 한가지 바라는 모습은 국가주의와 계급적 이해관계를 뛰어 넘는 페미니즘이다. 이와 관련해서 여성운동 단체들이 최근의 저출산 현상과 관련하여 정부가 내놓고 있는 여러 가지 출산지원정책과 여성가족부의 퍼플잡(purple job, 유연근무제도)에 대한 입장을 어떻게 가지고 있는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일과 가정의 양립이란 것은 여성 입장에서 두 가지 위험성을 가지는 개념이다. 무엇보다 육아를 전적으로 여성의 몫으로 치환시키며, 또한 여성의 일-가정 양립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도입되는 유연근무제가 단순히 보육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체 노동현장에 적용되는 것으로 변질될 우려가 커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여성경제활동 참가율은 OECD 국가들에 비해 매우 낮은 수준이고, 그 나마 경제활동이 비정규직, 임시직의 ‘질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자본 입장에서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가 임신 또는 출산하여 산전후휴가나 육아휴직을 사용하려 할 때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내가 이윤율을 최고로 높이고자 노력하는 기업가라면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에게는 해고 또는 잘해야 무급휴직을 제안하고, 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에게는 최대한 근무시간과 임금을 줄인 후 그 자리를 비정규직으로 대체시키겠다. 그러면 인건비 절감 효과와 생산성 증대 효과를 동시에 얻을 수 있으니까. 지금 정부의 퍼플잡 정책에서는 이와 같은 노동시장의 재편에 대한 어떤 보호장치도 발견하기 힘들다.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 정말 여성들이 아이들을 많이 낳아야 하는가? 그리고 가정에서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을 많이 가지기 위해서 근무시간을 줄이고 일자리를 나눈다는 명분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를 양산할 위험성이 있는 정책을 받아들이는 것이 옳을까? 그럼 어떻게 여성의 가정과 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국가주의와 계급적 이해관계를 뛰어넘어야 할 페미니즘에서 반드시 고민해 봐야 할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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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의 나치 문학 을유세계문학전집 17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김현균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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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단 놀랍다!
로베르토 볼라뇨의 [아메리카의 나치문학]을 보면서 감탄하게 되는 이유는 기발한 발상과 그 발상을 하나의 책으로 만들어 낸 작가의 노력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이 책은 31명에 이르는 작가들의 인명사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중요한 것은 그 인물들이 모두 허구의 가상인물이라는 점이다. 물론 이런 형식 자체는 보르헤스의 [불한당들의 세계사]에서도 접한 바 있으니 완전히 신선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볼라뇨는 좀 더 치밀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해 보라. 말이 좋아 가상의 작가 31명이지, 볼라뇨가 창조한 것은 단지 전화번호부 찍듯이 만들어낸 작가들의 이름만이 아니다. 한 작가의 삶을 복원하려면 그의 작가로서의 활동, 그러니까 주요 작품의 제목과 내용과 주제들까지도 창조해 내야 할 뿐만 아니라 작가별로 서로 다른 성격, 가족관계, 인간관계, 관심사, 인생에서 전기가 된 중요한 사건들도 복원해 내야 한다. 그 뿐이랴. 가상의 인물에 개연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사실도 적절히 가미시켜야 한다. 작가들을 둘러싼 사회적 변화와 주요한 정치적 사건, 스포츠 이벤트 등등 모든 것이 맞물려야만 비로소 한 명의 작가가 탄생되는 것이다. 그런 작업을 한 두명도 아니고 30명 넘게 해 냈으니 [아메리카의 나치문학]은 단지 신선한 발상의 결과물이 아니라 이를 뒷받침하는 끈기와 노력의 결합물이라고 해야겠다.

2.
파블로 네루다, 이사벨 아옌데, 아리엘 도르프만, 그리고 이번의 로베르토 볼라뇨까지. 최소한 내가 알고 있는 칠레의 작가들에게서는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공통된 트라우마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칠레 현대사에서, 아니, 전세계 현대사의 비극이었던 1973년 피노체트의 쿠데타와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의 몰락이라는 트라우마 말이다.
왜 볼라뇨는 인류의 기형이라 할 수 있는 파시즘을 가지고 가상의 인명사전을 만들고자 했을까. 이후의 작품을 위한 습작일수도, 그냥 생각나서 썼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멋대로 내린 답은 로베르토 볼라뇨가 바로 칠레인, 그것도 파시스트들에 의해 몰락한 아옌데 정부의 비극을 현장에서 지켜보았던 칠레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간단히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에 대해서 언급하고 넘어가야겠다. 아옌데는 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 정부 수립에 성공한 칠레의 대통령이다. 그는 대외적으로는 반제국주의를 천명하고 대내적으로는 독점재벌과 다국적 매판자본의 손아귀에 있던 구리산업을 국유화하는 등 급진적인 정책을 추진한다. 쿠바에 이어 자신의 ‘앞마당’에 등장한 반미정권을 미국이 눈에 가시처럼 생각했던 것은 당연한 일. 미국은 비축해 놓았던 구리를 국제시장에 풀어 칠레산 구리의 가격을 하락시킴으로써 칠레에 경제적인 타격을 가하는 한편, 군부를 움직여 직접적인 체제전복에 나선다.
1973년 9월 11일 아침부터 라디오 방송에서는 계속하여 “산티아고에는 비가 내립니다”라는 멘트가 흘러 나온다. 이 멘트는 우익 군부의 쿠데타 암호였고, 미국의 사주를 받은 피노체트가 이끄는 군부는 대통령궁에 진입하여 망명을 거부한 채 총을 들고 저항하던 아옌데 대통령을 무참히 사살한다. 피노체트의 쿠데타 이후 한 달간 학살당하거나 실종당한 칠레 국민들은 10만명에 달했으며, 투옥과 고문을 받은 사람의 수는 아직도 규모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다. “나뭇잎 하나도 내 명령 없이는 움직이지 못한다”라면서 철권통치를 자행한 파시스트 괴물, 피노체트 정부는 1989년까지 계속된다. 개인적으로 시고니 위버 최고의 영화로 생각하는 <진실>은 바로 이 시기 칠레가 겪어야 했던 트라우마를 다룬 영화이다. 



로베르토 볼라뇨는 칠레 사회주의 정부의 수립과 몰락의 현장에 있었고, 칠레의 대부분의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피노체트의 쿠데타 이후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후 조국을 떠나 살게 된다. 비록 히틀러라는 개인, 국가사회당(나치)이라는 정당은 세계대전과 함께 사라졌지만 파시즘은 국가권력으로 시퍼렇게 살아 있음을, 그 파시즘이 자신의 조국과 자신의 일상을 철저하게 파괴할 수 있음을, 그리고 파시즘의 존재를 뒷받침하고 지원했던 지식인, 문필가, 언론인들이 근절되지 않고 엄연히 존재함을 체험한 것이다. 그는 결국 조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로 스페인에서 눈을 감는다.

3.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
이 말은 세상의 어떤 것도 한결같은 존재로 머물러 있지 않다는, 그래서 이 세계의 본질은 변화와 생성이라는 만물유전(萬物流轉)의 사상가 헤라클레이토스의 유명한 명제이다. 그런데 로베르토 볼라뇨는 첫 페이지에서 이 그리스 철학자의 말을 간단하게 뒤집어 버린다. 나는 이 문장을 보고 [아메리카의 나치문학]을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살이 완만하고 좋은 자전거나 말을 가지고 있다면 같은 강물에 두 번(개인의 위생적 필요에 따라 세 번까지도)까지도 멱을 감을 수 있다”

모든 것이 변하고 모든 것이 달라지는 것 같지만 역사를 보면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이 있었다. 볼라뇨는 파시즘에서 그 반복성을 보았다. 그리고 말한다. ‘완만한 물살’, ‘좋은 자전거’, ‘좋은 말’이라는 조건이 있을 때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있노라고.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히틀러와 그의 제3제국은 몰락했고, 그와 더불어 공동전선을 구축했던 이탈리아와 일본도 차례로 연합국에 항복한다. 수천만의 생명을 희생시킨 대가로,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목격한 대가로 인류가 배운 것은 다시는 나치와 같은 파시즘의 준동을 허락해서는 안된다는 진리였다. 그래서 독일과 일본의 전범들과 나치 부역자들은 사형에 처해졌으며, 각국은 국민들에게 파시즘의 재등장을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공식입장을 천명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보았을 때, 파시즘은 역사의 패배자이며, 흘러가는 강물처럼 다시는 나타나서는 안되는 죄악이다. 하지만 파시스트들은 포기를 모른다. 그들은 집요할 정도로 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역사의 무대에 다시 등장하고 있다.
얼마전 오스트리아 대통령 선거에서 극우 정당의 후보가 15.6%라는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제 외국인과 다른 인종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을 공공연히 표출하고 국수적인 자민족 우선주의를 공약으로 하는 극우 정당이 높은 지지를 얻는 현상은 유럽 거의 모든 국가들에서 나타난다. 독일과 러시아의 네오 나치스들과 스킨헤드족은 공공연한 장소에서조차 외국인을 습격하여 린치를 가하고 목숨을 빼앗는다. 세르비아와 아프리카에서 벌어졌던 인종청소, 일본에서의 군국주의 부활 움직임, 여전히 제3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군부’라는 괴물과 잊을만하면 신문 국제면을 장식하는 그들의 쿠데타 소식들. 우리도 그랬다. 50년 전에 시작된 군부독재는 1993년이 되어서야 겨우 형식적으로나마 종식되었다. 파시즘은 흘러가 버린 과거의 강물인가? 아니면, 또다시 우리가 발을 담궈야 할 지금 현재 시점의 강물인가?

피노체트라는 파쇼정부의 쿠데타를 직접 목격하고, 실제 그들에 의해 수감되었던 로베르토 볼라뇨가 그리고 있는 [아메리카의 나치문학]은 극우 파시스트들의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행태, 그렇지만 소름이 쫙쫙 돋는 행태가 여전히 반복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떤 점에서 이 소설은 ‘픽션’이 아니라 ‘논픽션’인 셈이다. 볼라뇨가 창조한 31명의 파시스트 작가들의 연보를 보면 2014년이나 2029년에 사망했다고 나오는 작가도 있는데, 바로 이것이 파시즘이 미래에도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우울한 예언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볼라뇨가 패러디한 헤라클레이토스의 명제에서 같은 강물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으로 제시된 두 가지, 즉 ‘완만한 물살’이라는 환경적 요인과 ‘좋은 자전거나 좋은 말’이라는 도구적 요인에 주목해야 한다.
독일에서 히틀러와 나치가 정권을 잡기까지의 과정에서도 알 수 있듯이 파시즘의 등장 배경에는 극도의 경제난과 살인적인 인플레, 고도화된 빈부격차가 존재한다. 히틀러는 이러한 현상들로 인해서 사회적 안전망이 와해되어 독일 국민들이 불안해 할 때, 그 책임을 이방인들, 그러니까 유태인과 집시들을 비롯한 외국인과 사회적 취약계층에게서 찾았고, 그들을 옹호하며 독일 제국을 붕괴시키는 집단이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하며 순식간에 반사적인 지지를 얻는다. 러시아를 비롯한 동구권과 유럽 국가들에게 지금 준동하고 있는 파시스트 정당들의 주장도 히틀러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 먼저 필요한 것은 인격체로서 최소한 생존할 수 있게 하는 사회 안전망(social safety net)이다.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고, 그 격차가 세습될 때, 주거‧교육‧의료와 같은 필수적인 사회서비스를 제공받지 못하게 되어 차별이 발생할 때 그 속에는 파시즘의 망령이 배회하고 전체주의의 독버섯이 자라게 된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가기’를 구현하고 있는 도구가 문학이라는 저에서 볼라뇨의 [아메리카의 나치문학]은 문학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며, 지금의 문화에 대한 날세운 공격인 셈이다. 임지현 교수가 [우리 안의 파시즘]에서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과연 우리는 부지불식중에 의식과 사고, 생활양식 가운데 파시즘적 습속들을 체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가부장주의, 외국인 노동자와 결혼이주여성 등 한국의 소수자들에게 들이대고 있는 이중의 잣대, 지역적 차별구조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 규율과 복종의 미덕을 공급하고 있는 학교와 군대조직들. 안토니오 그람시는 권력의 속성을 이렇게 지적해 낸다. “권력이 강한 것은 억압과 강제보다는 동의의 기제에 의존할 때이다.” 우리가 무의식중에 동의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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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로베르토 볼라뇨의 [아메리카의 나치문학]을 읽고 있다.
좋은 작품이라는 평가와 함께 지루하다는 평가도 있어서 지난 주에 도서관에 갔을 때 한 번 훑어나 보자고 집어든 책이다.

하지만 도서관에서 이 책을 들고 와서 읽는 데에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첫 페이지에서 인용한 멋진 패러디 때문이다.
이 문구를 보는 순간 [아메리카의 나치문학]을 읽지 않고 넘어갈 수 없었다.

“물살이 완만하고 좋은 자전거나 말을 가지고 있다면 같은 강물에 두 번(개인의 위생적 필요에 따라 세 번까지도)까지도 멱을 감을 수 있다”

이 말은 고대 그리스 사상가였던 헤라클레이토스의 유명한 명제, 그러니까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를 떠올리게 한다.
주지하다시피 헤라클레이토스는 세상의 어떤 것도 한결같은 존재로 머물러 있지 않다는, 그래서 이 세계의 본질은 변화와 생성이라는 만물유전(萬物流轉)의 사상을 설파했던 사상가.
따라서 [아메리카의 나치문학]에 언급된 이 패러디가 의미하는 바는
역사에서 반복이 있을 수 있음을, 그 반복이 반드시 긍정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음을 일깨워주는 한편,
그 반복을 가능하게 하는 도구라 할 수 있는 '좋은 자전거'나 '좋은 말'이 바로 문학이라는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는 셈이다.

볼라뇨가 반복으로 본 소재가 무엇일까? 바로 나치(파시스트) 문학이다.
[아메리카의 나치문학]에는 비록 가상이긴 하지만 수많은 파시스트 작가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그냥 로베르토 볼라뇨의 '픽션'이라고 가볍게 넘겨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히틀러로 대표되는 나치즘은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종식되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전세계 곳곳에서 극우 파시즘, 인종주의, 국수주의, 순결한 아리아인 운운하는 정치조직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고 보면(얼마전 유럽의 오스트리아 대통령 선거에서 극우정당의 후보가 15.6%를 득표했다), 볼라뇨의 책은 그들의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행태, 그렇지만 소름이 쫙쫙 돋는 행태에 대한 고발인 셈이다.

p.s. 그런데 이 책은 개인적으로는  참 재미있다. 인명사전이나 백과사전식 "나열"에 익숙해 있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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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의 고백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
미시마 유키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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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순정만화나 본다는 친구들의 구박과 작가의 사정(사이비종교에 빠져 있었다나)으로 여태 완간되지 않았다는 두 가지 점만 뺀다면 미우치 스즈에의 [유리가면]은 내가 읽었던 만화 중에 손가락 안에 꼽는 작품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만화를 보고 연극이나 영화를 볼 때 연기자들을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눠보는 못된(!) 버릇을 가지게 되었다.
첫 번째는 배역에 자기자신을 완전히 함몰시키는 유형이다. 혼신을 다한 연기란 바로 이런 경우를 가리키는 표현이 아닌가 싶은데, 연기가 진행되는 동안은 물론이고 그 연기를 준비하는 평상시에조차 연기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연기가 끝나고 나서도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오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것을 종종 본다. 두 번째는 맡은 배역을 세세하게 분석하여 자신을 거기에 맞추는 유형이다. 배역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일거수일투족, 몸짓, 말투까지 완벽하게 재현해 내는데, 놀라울 따름이다. 이런 유형의 연기자는 상반되는 성격을 가진 다양한 캐릭터도 능수능란하게 소화하는 법이다.

[유리가면]의 두 여주인공인 마야와 아유미의 연기는 두 번째 유형에서 첫 번째 유형으로 변화해 간다. 즉, 배역에 대한 해석 수준을 넘어 자신이 맡은 ‘인물되기’로 발전하는 것이다. ‘인물되기’로 한 차원 올라서는 순간 그들은 원래의 자아를 벗어난다. 츠키카게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완벽한 ‘유리가면을 쓰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면이 깨지거나 벗겨지는 순간에도 이들이 본래의 마야, 본래의 아유미로 돌아오지 않을 거란 점이다. 그들은 이미 가면의 주인공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면이 벗겨진 마야나 아유미는 자아에 상처입은 연약한 인간으로 전락해 버린다. 유리가면이 깨진 연기자에게는 자신의 자아를 지킬 어떤 도구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유리가면]의 최고 명장면 가운데 하나는 꼼짝말고 있어야 하는 인형을 연기하던 마야가 어머니 생각에 한 줄기 눈물을 흘려버리는 장면이 아닌가 한다.

미시마 유키오의 [가면의 고백]에서 가면이 의미하는 바는 [유리가면]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1) 가면은 한 사람의 자아를 가리고 다른 사람으로 보이게끔 한다. 2) 물론 가면 아래에는 본래 인물의 자아가 여전히 존재한다. 얼어붙은 강 아래에는 계속하여 물이 흐르는 것처럼. 3) 그렇지만 본래 자아가 가면의 자아와 동일화되는 과정을 밟게 될 때, 본래 자아는 질적인 변화를 겪는다.

[가면의 고백]은 일생을 가면을 쓰고 자신의 본질을 숨겨가면서, 그렇지만 종국에는 그 가면으로 변화해 가는 한 남자의 색다른 성장고백이다. 주인공인 ‘나’는 어려서부터 유약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고, 할머니의 권한이 막강했던 모계중심적 집안에서 자란다. 그런 환경 때문이었을까? ‘나’는 동성애적 성향을 가지게 된다. 귀도 레니(Guido Reni)의 <성 세바스찬의 순교>라는 작품에 나오는 탄탄한 근육을 가진 인물(물론 남성이다)을 보고 자위행위를 시작하는가 하면, 건장한 남자의 살을 가르고 피를 뿜게 하여 제단에 바치는 사디즘적인 환상 가운데 탐닉한다. 똥지게를 퍼나르던 청년의 근육을 일평생 기억하고, 겨드랑이부터 가슴까지 털로 뒤덮인 동급생의 벗은 몸에 애정과 질투를 느낀다.
그리고 어떤 원인인지 모르지만 ‘나’는 죽음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미국과의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시기. 거의 매일같이 공습경보와 대피가 반복되던 시절에 ‘나’는 폭탄에 맞아서 요절하는 생각에 깊이 빠진다. 유약한 신체를 가지고 있던 ‘나’였지만 그나마 생기가 넘치는 젊은 시절에 죽음으로써 그가 자위행위의 대상으로 삼았던 ‘성 세바스찬’과 같은 영광의 육체를 얻게 될 것을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이런 본성의 목소리에 가면을 씌운다. 이성에 관심이 있는 척 하고, 모범적이고 공부만 아는 법대생의 삶을 주위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요절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공습경보가 울리면 생명을 구하기 위해 방공호로 뛰어가는 자신의 모습에 비참함을 느끼기도 한다. 마치 유리가면을 쓴 마야가 전혀 다른 자아로 변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전혀 다른 사람인 양 연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연기는 비단 외부의 사람들에게만 하는 것이 아니다. 내면의 목소리, 본래의 자아를 향해서도 가면의 연기가 강요되고 있는 것이다.
가면과 본성이 어떻게 ‘나’의 내면에 뒤섞여 있는지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 마지막 부분이다. 친구의 여동생인 소노코를 사랑했던 ‘나’는, 하지만 가면을 쓴 자존심과 불안함으로 소노코와의 결혼을 거절했던 ‘나’는 전쟁이 종료된 이후 결혼한 그녀와 해후한다. 함께 무도장에 간 ‘나’는 그녀의 질문에 횡설수설한다. 왜? ‘나’는 그곳에서 소노코의 존재감보다 충실하고 탄탄한 근육을 가진, 팔뚝에 목단 문신을 한 남자의 야만적이면서도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반라의 육체를 발견하고 정욕에 휩싸여 버린 것이다.

나는 소노코라는 존재를 잊어버렸다. 오로지 한 가지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여름이 한창인 거리에 저렇게 벗어부친 모습 그대로 뛰어나가 야쿠자들과 한 판 싸움을 벌이는 것, 날카로운 비수가 저 하라마키를 뚫고 그의 몸통에 꽂히는 것, 저 더러운 하라마키가 피범벅으로 아름답게 칠해지는 것, 그리고 그 피투성이 시신이 들것에 실려 다시 이곳으로 오는 것....

그 때 소노코의 음성이 들린다. “이제 5분 남았네요.” ‘나’는 그 순간 부지불식간에 가면이 벗겨져 내렸음을 깨닫게 되고, 필사적으로 그 가면을 다시 쓰고자 한다.

이 순간 내 마음 속에서 무엇인가가 잔혹한 힘에 의해 두 쪽으로 쩍 갈라졌다. 번개가 떨어져 생나무가 쪼개지듯이, 내가 지금까지 온 영혼을 기울여 쌓아왔던 건축물이 엄청나게 무너져내리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나라는 존재가 뭔가 일종의 무시무시한 <부재>로 바뀌는 바로 그 순간을 본 것 같았다. 눈을 감고, 나는 아주 짧은 순간에 내 가면으로 다시 돌아와 얼어붙을 듯한 의무 관념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가면이 벗겨진 후 주인공에게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진실된 본래의 모습일까? 진정한 자아의 외침이었을까? 아니다. 분명 확신하건데, 가면이 벗겨진 모습은 진정성을 가진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방어능력을 상실한 채로 상처입고, 주위를 공격하고자 웅크린 인간의 모습일 뿐이다.
무서운 것은 이 가면을 벗어야 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가면을 쓴 사람은 이제 자신의 가장 큰 희망사항은 가면을 벗지 않고, 가면 자체가 자신의 얼굴이 되도록 하는 것이 된다. 본성과 가면이 뒤섞인 차원을 넘어서 가면이 본성이 되고, 가면이 자아가 되는 단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광기이다.

나는 미시마 유키오의 자전소설이라 할 수 있는 [가면의 고백]에 나타난 이 가면의 미학에서 그의 일생과 일본 군국주의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병약했던 자신의 육체를 각종 운동으로 단련하여 근육질의 모습으로 탈바꿈한 미시마 유키오, 태평양전쟁 당시 죽음을 바라면서도 방공호에 가장 먼저 뛰어가던 자신의 모습에 탄식하던 미시마 유키오. 동경대 전공투 학생들과의 대결(?)에서 “천황을 인정하지 않는 너희들과는 서로 죽일 뿐”이라고 사자후를 토하던 미시마 유키오.
세 번이나 노벨문학상 후보로 오르면서 천재작가로 칭송받았으나 결국 육상자위대 사령부에 난입하여 미일안보조약 개정과 평화헌법 폐지를 주장하다가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할복자살한 미시마 유키오의 일생은 가면의 일생이 아니었을까.
미시마 유키오 본인은 평소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가 단순히 우익적이거나 군국주의적인 것이 아닌 순수함과 신념이며, 그것을 위해 죽겠다는 각오를 밝혔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일본 전통의 집적인 천황을 인간으로 격하시키는 평화헌법과 미국의 존재를 부정하고 천황을 보호하는 것이 아름다운 가치라는 입장을 가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모든 행위들은 나약함을 가리기 위한 가면으로, 두렵고도 인정할 수 없는 한 인간의 광기로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가 그토록 탐미(耽美)하던 순수한 일본정신, 천황의 아름다움의 본질에는 결함이 있었고, 그 결함을 가리고자 드리운 가면을 진짜 얼굴인 양 전도시킬 때 자신은 파멸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음을 그는 몰랐던 것이다. 아니, 알았더라도 멈출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가면이 진짜 자신의 얼굴이 되었다고 자신하고 있던 그를 향해 자위대원들이 보낸 냉소와 조롱 앞에 미시마 유키오의 가면은 떨어져 나간다. 잃어버린 가면과 함께 상처입게 된 미시마 유키오의 영혼은 저항하거나 살아갈 힘을 잃는다. 그래서 그의 최후는 ‘할복’이라는 지극히 일본적 죽음의 미학으로 종결되고 만다. 마치 자신이 찬양하던 건물과 함께 죽음을 꿈꾸었던 [금각사]의 주인공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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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 21세기를 지배하는 네트워크 과학
알버트 라즐로 바라바시 지음, 강병남 외 옮김 / 동아시아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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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판 처음 만나는 사람과 이야기하다가 두 사람 모두가 알고 있는 누군가가 떠올라 ‘세상 참 좁구만!’이라고 느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의 동생이 내 후배였다거나 하는 경우이다. 아마 누구나 경험해 보았을 것인데, 이 때 처음 만난 두 사람 사이에는 후배(동생)라는 중간 매개가 있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 링크(link)가 형성되어 있는 셈이다.

미국의 영화배우인 케빈 베이컨의 이름을 딴 케빈 베이컨 게임(Six degree of Kevin Bacon)이 미국 대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케빈 베이컨과 함께 영화에 출연한 관계를 1단계라고 했을 때, 할리우드 배우들이 케빈 베이컨과 몇 단계만에 연결될 수 있는가를 찾아내는 것이 이 게임의 룰이다. 재미있는 것은 대부분의 할리우드 배우들이 여섯 단계 이내에 케빈 베이컨과 연결되더란 사실이다. 우리나라 배우 중에 안성기씨를 놓고 한 번 이 게임을 해보면 어떨까? 모르긴 몰라도 2-3단계 정도면 모두 연결되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네트워크(network) 속에서 타인과 링크를 맺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존재에 대해서는 경험적으로 어렴풋하게 느끼는데 비해 그 실체와 위력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네트워크이다. A.L. 바라바시의 [링크(LINKED)]는 네트워크 이론과 네트워크의 특징을 설명함으로써 우리의 일상에 내재되어 영향을 미치는 네트워크의 위력을 새삼 깨우쳐 주는 책이다. 저자는 미국 노트르담 대학의 물리학과 교수이다. 따라서 이 책은 기본적으로는 교양과학책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네트워크 이론이 분자의 연결(물리학)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사회학, 정치학), 웹(정보통신), 세포(생물학), 마케팅(경영학) 등의 영역으로 무한대로 확장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네트워크에 속하여 네트워크를 이루는 각 주체를 노드(node)라고 한다. 예를 들어 ‘한국고등학교’의 전교생이 100명이라고 한다면 ‘한국고등학교’ 네트워크 안의 노드는 100개가 있는 셈이다. 그리고 노드들은 저마다 연결되어 있다. 서로 알고 있는 학생들끼리 선을 이어서 노드에서 뻗어나가는 관계망을 그려보자. 아마 아래와 같은 형태의 그림이 될 것이다.
 




[링크]에서 바라바시 교수는 여러 가지 네트워크를 등장시킨다. 우리가 인터넷을 켜기만 하면 연결되는 웹(web)이라는 네트워크, 전력선의 네트워크, 종교 전파의 네트워크, 질병 전파의 네트워크, 항공노선의 네트워크 등등. 네트워크가 가지는 중요성은 단순히 관련성 있는 노드들의 2차원적 연결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네트워크의, 그리고 그 네트워크 속에 포함된 노드들의 가치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네트워크는 계속하여 확장되면서 중첩된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가 세포분열을 통해 계속 확장하는 것과 비슷하다. ‘한국고등학교’의 재학생 한 명이 새로운 친구 한 명을 사귀었다고 하자. 그러면 두 노드 사이에 새로운 연결망이 그려진다. 이러한 횡적 확대 뿐만 아니라 네트워크는 다차원적으로도 확대된다. 예를 들어 어떤 학생은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들의 네트워크에 속하면서 동시에 같은 동아리 활동을 하는 네트워크에 속할 수 있다. 만약 노드의 모집단이 전세계 인구라거나 인터넷 상의 홈페이지들이라면, 이들이 이루는 네트워크가 얼마나 커질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네트워크의 확장은 단순히 링크가 몇 개 추가되는 양적인 확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네트워크의 모든 구성원들은 각각 몇 단계를 거치느냐의 문제가 남겠지만 기본적으로 서로 ‘링크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배우는 케빈 베이컨과 일면식도 없지만 그와 함께 출연한 다른 배우를 알게 되어 케빈 베이컨과의 새로운 네트워크가 발생한다. 이론적으로는 대한민국 서울에 사는 나와 아프리카 정글에 거주하는 추장과의 네트워크도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내가 아프리카의 추장이나 북극의 에스키모 중 한 사람과 빠른 단계 내에서 연결되어 있을 확률은 대단히 낮다. 왜? 여기서 네트워크의 두 번째 가치가 나온다. 좀 매정한 얘기일지 모르겠지만 네트워크 상에 존재하는 구성원, 즉, 노드들은 평등한 지위를 가지지 못한다. 네트워크에서 각 노드들은 평등한 관계보다 위계질서를 갖춘 층위관계를 형성한다.
다시 위의 그림을 보자. 딱 보기에도 A, B, C, D는 다른 노드들과 달라 보인다. 이들은 다른 노드들과 연결되어 있는 빈도가 많다. 즉, 이들을 중심으로 네트워크가 구성되어 있다. 반면 주변을 보면 단 하나의 연결선만 가지고 외롭게 떨어져 있는 노드들도 발견된다. 관계망의 중심에 선 구성원과 따로 떨어진 구성원. 자.. 이제 네트워크에 어떤 특징이 내재되어 있는지 쉽게 잡아낼 수 있을 것이다. 많은 노드들과 연결되어 있을수록, 많은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을수록 power는 더 커진다.
내가 새로 책을 낸 출판사 직원이라고 가정해 보자. 인터넷 이용자들에게 공짜로 책을 주고 서평을 부탁하고 싶은데 어떻게 할까? 블로그 이웃이 100명인 사람과 달랑 1-2명에 불과한 사람 중에 누구에게 책을 보내주는 것이 좋은 전략인지는 자명하다. 포털사이트나 온라인서점 사이트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에 붙여진 ‘파워(power) 블로그’라는 명칭은 그냥 아무렇게나 붙인 말이 아닌 셈이다.

마지막으로 네트워크는 노드의 집합체로 발생하지만 어느 임계점을 넘어서는 순간 구성원(노드)에게 거꾸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강남 엄마들이 만든 네트워크를 생각해 보자. 이 네트워크의 탄생은 모여서 자녀들의 진로를 걱정하고 학원에 대한 정보를 서로 교환하던 모임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네트워크의 성격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단순한 정보교류의 네트워크가 아니라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지는 새로운 연결망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새롭게 태어난(?) 네트워크는 그 안팎의 구성원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작용을 시작한다. 보이지 않게 우리 일상에 영향을 미치는 Big Brother의 실체는 네트워크의 집합체일지도 모른다!!!
몇 년 전에 한겨레신문에서 서울시 25개 구별로 주민들의 사망률과 질병 유병율을 조사한 특집기사가 실렸다. 그 결과는 사람들이 ‘혹시나’하고 생각하던 예상 그대로였다. 강남 3구 주민들에 비해 강북 지역 주민들의 건강수준과 사망확률은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높았다. 직업과 교육수준, 근로형태가 건강수준에 영향을 준다는 연구결과는 서구와 우리나라에서 공통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경제적 변수들에서 우위를 점하는 소위 한국사회의 지도층이 모여 사는 강남 3구가 구성한 네트워크는 다른 지역에 비해 질높은 보건의료자원을 끌어 들일 확률이 훨씬 높았던 것이다.

신의 주사위와도 같아 보이는 전지전능한 네트워크에 약점은 없을까? 사실 우리는 네트워크의 약점을 잘 알고 있고, 또 그 약점을 이용하여 네트워크를 공격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앞서 언급한 네트워크의 두 번째 본질적 모습, 즉, 위계질서를 갖춘 네트워크의 성질을 이용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인터넷을 마비시키려고 하는 크래커(cracker)라고 생각해 보자.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싶은데 어디를 공격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겠는가. 방문자가 몇 안되는 개인의 홈페이지? 아니면 네이버나 다음과 같은 거대 포털사이트? 당연히 좀 더 힘은 들겠지만 더 큰 power를 갖춘, 그래서 네트워크 상의 상위 사이트를 공격해야 할 것이다.
지난 겨울 우리는 신종 플루 때문에 고생해야 했다. 전염병에 대항하여 싸울 때에는 언제나 동일한 질문이 제기된다. 백신이 개발되어 나왔을 때 누구에게 제일 먼저 접종할 것인가? 사람들마다 사정은 다르겠지만, 역학적으로 판단해 보았을 때 가장 효과가 높은 집단은 역시 학생들이다. 왜냐? 학생들만큼 광범위하면서도 긴밀한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집단이 없기 때문이다. 한 명이 감염되어 다른 사람에게 질병을 전파시킨다고 할 때, 그 최초 전파자에게 예방접종을 시행하는 것만으로도 질병 발생율은 급격히 떨어진다. 100명의 아이들 중 70명만 홍역 예방 접종을 맞아도 홍역이 거의 예방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이게 바로 네트워크의 아킬레스건이다.

개인적으로 네트워크에 대하여 접하면 좀 묘한 생각이 드는 것이 있는데,
노드들 간의 평등한 관계망이란 단순한 경우에나 어울릴까, 좀 더 복잡하고 고등적인 관계망은 예외없이 차별적이고 차등화되어 구성된다는 점이었다. 물론 네트워크의 속성이 그렇다면 그걸 이용하는 것도 사람의 몫. 나는, 그리고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 네트워크의 속성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 것인가.

무엇보다 네트워크의 형성 자체에 먼저 주안점을 두어야 하지 않을까. 동일한 지향점과 동일한 관심사를 가진 노드들의 네트워크 구성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겠다. 그리고 그 네트워크가 성장하고 외연이 확장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위해서는 사람들을 네트워크로 끌어들이는 ‘떡밥’이 있어야 한다(이 책에서는 그 떡밥을 document라고 표현한다). 생활에서 나오는 필요성과 요구를 만족시키는 떡밥. 그래서 그 떡밥으로 사회적 논의의 활성화를 이루고 네트워크로 찾아오도록 하는 사람이 많아지게 하는 것.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과제가 아닌가 한다.

p.s.
사실 네트워크 이론은 내가 학위논문에서 ‘집적거려 보고자 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나는 네트워크 상위 위치가 하나의 자본(capital)을 의미하며, 그 자본의 성격과 소유형태, 소유량에 따라 개인의 행동에는 차이가 발생한다고 생각하는데...
문제는 언제 이 논문을 쓸지 모른다는 것. 에헤라~
처음 [링크]를 읽고 네트워크 이론에 관심을 가졌을 때에도 그랬지만, 다시 한 번 읽어도 신선하고 무언가 영감을 주는 책이었다.
참! 네트워크 이론을 좀 쉽게 접하거나 케빈 베이컨 게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정재승 교수가 쓴 [과학 콘서트] 제1장을 보아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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