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뱀파이어 - 폭력의 시대 타자와 공존하기
임옥희 지음 /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 / 201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뱀파이어가 채식을 한다? 이건 이율배반적이고 존재부정이다. 낮에는 관 속에서 잠을 자고 밤이 되면 박쥐나 늑대로 변신해 가면서 생명의 상징인 피를 빨아대는 영생불멸의 무서운 흡혈귀가 양순한 소처럼 풀을 뜯어 우물거리는 모습은 개그 프로의 소재로나 쓰일 법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게 단순히 웃긴 얘기로 끝나지 않는 이유는 ‘채식주의자 뱀파이어’라는 모순이 내 앞에 놓인 엄연한 현실에 대한 은유이기 때문이다.

한 국가를 지배하는 것도 모자라서 전세계를 지배권에 두고 확장된 신자유주의는 누가 뭐라고 해도 ‘승자독식’의  이데올로기다. 뱀파이어와 다르지 않다. 2등조차 기억하지 않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뒤쪽부터 세는 것이 빠른 사람들은 주변인도 되지 못하는 위치로 내몰린다.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빈곤과 차별, 배제와 학대로서, 마치 뱀파이어의 희생물처럼 말라 죽을 때까지 피를 빨리고 또 빨린다. 더 무서운 것은 뱀파이어에게 피를 빨리면 역시 뱀파이어가 되는 것처럼 신자유주의적 자본에 피를 빨린 우리도 무의식중에 이런 빈곤과 차별을 따라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점이다. 식인은 원시인의 풍습만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하에서 우리는 ‘식인주체’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조금이라도 인간다운 삶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자기부정을 통한 공존이라는 존재론적 문제가 제기된다.

페미니즘은 어떨까. 페미니즘 역시 자기부정을 통한 생존의 문제에 당면해 있지 않은가.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은 뿌리깊은 가부장적 문화와 성차별에 대항하여 투쟁하면서 존재 영역을 넓혀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때는 어쩔 수 없이 제도권 밖에서, 들판에서 외치던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지금은? 호주제는 폐지되고 부부별산제도 도입되었다. 공직에 여성할당제가 도입되었고 어떤 분야에서는 남성할당제의 도입이 거론될 정도로 제도적 성평등이 진전되었다. 여성가족부의 존재는 여성문제의 국가적 의제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정부의 예산편성에서부터 사업의 집행과 평가에 이르기까지 ‘성인지적 관점’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국책연구기관인 여성정책연구원과 여성단체들의 주장이다. 그런데 오히려 [채식주의자 뱀파이어]에서는 ‘페미니즘의 죽음’이 이야기되고 있다. 왜 그럴까?

[채식주의자 뱀파이어]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큰 흐름은 ‘페미니즘의 죽음’이다. 물론 다양한 처지와 조건을 가진 사람들과의 공존을 통한 페미니즘의 부활 또는 재발견도 이 책의 중요한 주제이긴 하다. 그렇지만, 부활이나 재발견이란 결국 죽음 또는 상실이 전제되어 있는 개념인만큼, 책의 논의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먼저 저자가 왜 ‘페미니즘은 죽었다’라는 용감한(?) 선언을 하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페미니즘의 죽음은 이중적 함의를 가진다. 어떤 사회운동이든지 지향하는 목적이 달성된 이후 그 운동이 소멸한다면(즉, 죽음을 맞는다면) 그야말로 바람직한 일이다. 소위 ‘발전적 해체’란 이럴 때 써먹는 말이다. 그래서 저자도 서문에서 지적한다. 여성억압이 없는 사회가 되어 페미니즘이 용도 폐기되었다면 그 죽음을 경축해야 마땅하다고. 하지만 실제로 이런 바람직한 일은 거의 없다. 오히려 원래의 목적도 달성하지 못했는데 운동의 성격은 자꾸만 변질되어 버리고, 사람들에게서 잊혀지면서 ‘살았다고 하나 실상은 죽은 자’가 되어 버리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 이런 죽음이야 말로 통탄해 마지않을 수 없는 죽음이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지금 이야기되는 페미니즘의 죽음이 경축할 만한 전자가 아니라 통탄해야 할 후자라는 점이다.

지금의 페미니즘이 통탄할 정도로 원통한 죽음을 당했다니... 너무 가혹한 말인가? 우리나라의 여성운동은 그동안 많은 제도적 성과를 달성했다. 물론 아직 가야할 길이 남아 있지만, 짧은 여성운동의 역사와 지난했던 과정을 감안한다면 지금까지의 성과들이 평가절하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따라서 단순히 과거의 성과가 미흡했다는 이유 때문에 페미니즘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페미니즘의 죽음은 성과의 미흡이 아니라 성과의 고착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페미니즘의 중병(重病)은 그 운동이 일정한 기틀을 잡고, 국가적으로 페미니즘 담론이 수용되면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그리고 중병으로 허약해진 페미니즘은 모든 것을(젠더라는 담론조차도) 물신화하고 자본화하는 신자유주의와, 그 속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계급적 대립구도 속에서 치명타를 맞는다.

[채식주의자 뱀파이어]를 읽으면서 저자가 은연중에 또는 직접적으로 페미니즘의 죽음의 원인으로 꼽고 있는 것이  ‘국가주의 페미니즘’으로의 변화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가족부의 존재와 여성문제의 국가적 의제화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여성의 지위 신장이라는 그럴 듯한 명분과 절차적이고 양적인 성평등 담론 속에 ‘국가’란 단어가 의미하는 절대적 권력관계와 제도가 의미하는 합리가 어느 틈엔가 페미니즘을 국가주의 속에 편입시킨다.
시민사회의 발전이 서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약한 반면 공동체의식은 강한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가 모든 것을 책임지고 해결해 주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다. 이게 바로 국가에 절대적 권한을 부여(혹은 반납)해 버리는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핵심인데, 여기서 국가는 한 가족의 가부장으로 대치되는 개념이다. 따라서 여성운동을 비롯한 제반 사회운동이 국가제도화 된다는 것은 이제 여성들이 겪는 문제들, 경계인과 주변인들이 겪는 문제들의 해결책은 모두 가부장인 국가의 손에 넘어간 것이다. 이제 여성운동의 존재 의미는 단 한 가지만 남는다. 가부장인 국가가 이런 일들을 잘할 수 있도록 여러 좋은 대안을 마련하여 국가에 제공(혹은 헌납)하고 그 하회를 기다리는 것이다. 아!!! 물론 그 대가도 있다. 정부보조금이라는 떡고물. 오히려 페미니즘 운동은 국가에 대해 어려움과 고통을 돌보는 자상한 아버지의 상을 만들도록 기여하고 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페미니즘은 그렇게 국가에 편입되었고, 또 국가로부터 배신당했다. 문제는 여성운동이 국가의 배신에도 변변히 저항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지금 당장 생각나는 MB정부의 여성관련 정책들을 나열해 보자. 여성부 축소와 폐지 논의, ‘퍼플잡’이라고 불리는 유연근무제도 도입과 일-가정양립, 여성 관련 부처에 가족과 청소년 업무가 붙은 상황, 저출산 사회에서 적정인구에 대한 고민없이 무조건적으로 양산되고 있는 출산장려운동 등등. 아! 그리고 하나 더 있다. 촛불집회를 비롯한 반정부 불법(!!!) 집회에 참석하지 않아야만 정부보조금을 줄 수 있다는 방침. 여성운동의 영역을 제한하고, 여성의 노동력을 가족에 얽어매려 하며, 저출산의 책임이 여성에게 귀결되는 이 현실과 정책들에 대해 과연 제도화된 여성단체들이 어떤 목소리를 내고 있는가?

국가주의 페미니즘으로의 편입은 종국적으로 계급적, 정치적 이해관계에 복무하는 페미니즘으로의 전락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그런 점에서 [채식주의자 뱀파이어]에 제시된 사례인 가족과 일자리에 대한 백인 중산층 여성운동가들의 관점과 유색인 하층 여성운동가들의 관점의 차이가 시사하는 바는 크다.
중산층 여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가족은 그들의 사회적 진출을 속박하는 족쇄로 작용한다. 따라서 그들은 가족구조의 해체와 여성의 사회진출을 주장하게 된다. 물론 가족이라는 사회적 제도에 대한 문제제기로 이들의 주장은 의미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유색 하층 여성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용감하게(?) 가족의 해체를 주장하는 것은 상류계급에 속한 백인 여성들의 배부른 푸념이자 자신들의 꿈을 산산조각내는 위험천만한 발상일 뿐이다. 상류층이 꺼려하는 사회의 질낮은 일자리에서 해고의 위험을 절박하게 감수하며서도 잠시의 휴식도 없이 노동해야 하는 이들에게 안정적인 소득을 가진 남편 및 사랑하는 아이들과의 가족생활은 해체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향해야 할 바이다. 동일한 사회적 현상 또는 사회적 제도에 대해 계급적 관점 차이는 이렇게 크다.
성매매에 대한 입장도 이런 복잡한 계급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어떤 이들에게 성매매 여성이 그 자리까지 전락하게 된 ‘신성한 노동에 대한 남성 독점주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특히 현대 자본주의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국가와 사회가 배제 또는 도구화한 여성들이 집창촌을 형성한 사실에는 눈을 감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합법적인 성, 그러니까 결혼과 가족의 구조 속에 있는 성일 뿐, 그 외에는 인정되지 않는다. 전형적인 순결주의 또는 가족중심주의적 입장이다. 그리고 그들은 가족중심주의의 가부장인 국가의 개입에 박수를 보내고 강력한 단속을 지지한다. 그 속에 숨은 국가의 폭력, 집창촌 지역의 개발을 통한 개발이익의 조장이라는 자본의 폭력에는 눈을 돌리지 않는다.

자. 그럼 이제 어려운 문제가 남는다. 사실 이 문제는 비단 페미니즘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사회운동의 문제이기도 하다. 질문 자체는 간단하다. 제도화된 페미니즘을 극복하고 초심으로 돌아가 부활 또는 재발견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여성운동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까? 질문은 간단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이제 우리의 삶은 가정, 교육현장, 노동현장 등을 가리지 않고 사소한 것 하나조차도 신자유주의의 물신화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해서 경쟁력을 갖추고 스펙을 높여야 하며, 다른 사람을 밟고 이겨내야만 한다는 생각이 부지불식간에 우리의 머리속을 지배하고 있다.

이렇듯 강력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맞서서 페미니즘을 재탄생시키기 위하여 [채식주의자 뱀파이어]에서 제시한 방법은 ‘성찰’과 ‘공존’이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주체와 타자의 분명한 구분이며 이것은 차별과 배제의 논리를 낳는다. 나와 남 사이의 경계를 확실히 그은 후, 그 경계 너머의 대상은 뱀파이어의 희생물이 된다. 그래서 나 자신이 뱀파이어가 되어 다른 사람의 피를 빨아 생존하거나, 타인을 내 생존의 걸림돌 또는 이용물로 삼아 잡아먹는 식인주체로서 살아가지 않았나 반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나와는 좀 더 떨어진 위치로 시선을 옮겨 자신을 타자해 보고, 경계를 넘어 내게로 들어오는 타자들을 적대시하는 것이 아니라 환대하고, 폭력이 아니라 포용으로 대하고, 그들과 함께 유머를 나누고 문화와 예술을 통해 인생을 풍부하게 하면서 일상의 뿌리를 공유한다.
이게 바로 ‘채식주의자 뱀파이어’의 삶이다. 천성적으로 생명의 피를 빨아야만 생존할 수 있는 뱀파이어에게 채식은 자기 존재의 부정이다. 빈혈에 시달리면서도 허기를 채식으로 달래는 뱀파이어의 모습은 아이러니하지만 완전히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 [채식주의자 뱀파이어]의 주장이다.

물론 나는 저자의 의견에 동의한다. 나를 돌아보고 타자들과 공존하는 것의 가치를 부정할 수 없다. 여기에 내 생각을 짧게 덧붙여보고자 한다. ‘앞으로 페미니즘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저자의 답을 들었으니 이제 틀리든 맞든 내 답안지를 제출하는 것이 좋은 책을 읽은 독자로서의 의무가 아닌가 한다.

앞에서 페미니즘의 죽음의 근거로 국가주의로의 편입과 제도화된 페미니즘의 모습을 지적하였다. 그렇다면 페미니즘을 되살리는 길은 국가주의로부터의 탈피와 생명력있고 자유로운 원래 모습의 재발견이 될 것이다.
내가 페미니즘에 바라는 첫 번째는 타자에 대한 환대와 공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연대’의 관계맺음과 운동으로의 발전이다. 함께 공존하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변화시키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버스나 지하철에 몸이 불편한 장애우가 탔을 때 일어나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개인적 수준의 공존이라면, 장애우들의 이동권을 위해서 함께 잘못된 것을 바꾸는 일에 참여하는 것은 페미니즘 차원의 연대이다. 물론 누가 타든 말든 엉덩이 붙이고 무관심하게 앉아 있는 사람도 많은 것이 현실이니 공존만으로도 의미가 있겠지만, 페미니즘의 외연을 확장한다는 측면에서 사회의 주변으로 밀려난 이들의 목소리를 함께 대변하고 함께 그들의 삶을 바꾸는 일에 목소리를 높이고 참여해 주기를 바란다.
연대란 것은 여성과 남성을 나누어 양자를 상호대립적으로 보게 하는 관점의 지양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군필자에 대한 가산점을 둘러싸고 남성들과 여성들의 감정섞인 이전투구는 페미니즘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다. 분단과 이데올로기 대립 상황에서 2년 내지 3년의 청춘을 군대에 바치는 것은 신성한 것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을 모두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피해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단체들이 군가산점을 주느냐 마느냐의 문제에만 매몰되는 것은 무척이나 안타깝다. 평등의 관점에서 가산점 폐지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동시에 우리 사회가 신성시하고 있는 군대의 환상을 깨뜨리는 일에 남성과 여성이 연대해야 한다. 그건 구체적으로 국민개병제의 모순을 지적하고 모병제로의 전환과 군대내 인권과 안전의 확보를 함께 요구하는 것이다.

또 한가지 바라는 모습은 국가주의와 계급적 이해관계를 뛰어 넘는 페미니즘이다. 이와 관련해서 여성운동 단체들이 최근의 저출산 현상과 관련하여 정부가 내놓고 있는 여러 가지 출산지원정책과 여성가족부의 퍼플잡(purple job, 유연근무제도)에 대한 입장을 어떻게 가지고 있는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일과 가정의 양립이란 것은 여성 입장에서 두 가지 위험성을 가지는 개념이다. 무엇보다 육아를 전적으로 여성의 몫으로 치환시키며, 또한 여성의 일-가정 양립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도입되는 유연근무제가 단순히 보육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체 노동현장에 적용되는 것으로 변질될 우려가 커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여성경제활동 참가율은 OECD 국가들에 비해 매우 낮은 수준이고, 그 나마 경제활동이 비정규직, 임시직의 ‘질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자본 입장에서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가 임신 또는 출산하여 산전후휴가나 육아휴직을 사용하려 할 때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내가 이윤율을 최고로 높이고자 노력하는 기업가라면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에게는 해고 또는 잘해야 무급휴직을 제안하고, 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에게는 최대한 근무시간과 임금을 줄인 후 그 자리를 비정규직으로 대체시키겠다. 그러면 인건비 절감 효과와 생산성 증대 효과를 동시에 얻을 수 있으니까. 지금 정부의 퍼플잡 정책에서는 이와 같은 노동시장의 재편에 대한 어떤 보호장치도 발견하기 힘들다.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 정말 여성들이 아이들을 많이 낳아야 하는가? 그리고 가정에서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을 많이 가지기 위해서 근무시간을 줄이고 일자리를 나눈다는 명분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를 양산할 위험성이 있는 정책을 받아들이는 것이 옳을까? 그럼 어떻게 여성의 가정과 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국가주의와 계급적 이해관계를 뛰어넘어야 할 페미니즘에서 반드시 고민해 봐야 할 문제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