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의 고백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
미시마 유키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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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순정만화나 본다는 친구들의 구박과 작가의 사정(사이비종교에 빠져 있었다나)으로 여태 완간되지 않았다는 두 가지 점만 뺀다면 미우치 스즈에의 [유리가면]은 내가 읽었던 만화 중에 손가락 안에 꼽는 작품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만화를 보고 연극이나 영화를 볼 때 연기자들을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눠보는 못된(!) 버릇을 가지게 되었다.
첫 번째는 배역에 자기자신을 완전히 함몰시키는 유형이다. 혼신을 다한 연기란 바로 이런 경우를 가리키는 표현이 아닌가 싶은데, 연기가 진행되는 동안은 물론이고 그 연기를 준비하는 평상시에조차 연기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연기가 끝나고 나서도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오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것을 종종 본다. 두 번째는 맡은 배역을 세세하게 분석하여 자신을 거기에 맞추는 유형이다. 배역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일거수일투족, 몸짓, 말투까지 완벽하게 재현해 내는데, 놀라울 따름이다. 이런 유형의 연기자는 상반되는 성격을 가진 다양한 캐릭터도 능수능란하게 소화하는 법이다.

[유리가면]의 두 여주인공인 마야와 아유미의 연기는 두 번째 유형에서 첫 번째 유형으로 변화해 간다. 즉, 배역에 대한 해석 수준을 넘어 자신이 맡은 ‘인물되기’로 발전하는 것이다. ‘인물되기’로 한 차원 올라서는 순간 그들은 원래의 자아를 벗어난다. 츠키카게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완벽한 ‘유리가면을 쓰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면이 깨지거나 벗겨지는 순간에도 이들이 본래의 마야, 본래의 아유미로 돌아오지 않을 거란 점이다. 그들은 이미 가면의 주인공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면이 벗겨진 마야나 아유미는 자아에 상처입은 연약한 인간으로 전락해 버린다. 유리가면이 깨진 연기자에게는 자신의 자아를 지킬 어떤 도구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유리가면]의 최고 명장면 가운데 하나는 꼼짝말고 있어야 하는 인형을 연기하던 마야가 어머니 생각에 한 줄기 눈물을 흘려버리는 장면이 아닌가 한다.

미시마 유키오의 [가면의 고백]에서 가면이 의미하는 바는 [유리가면]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1) 가면은 한 사람의 자아를 가리고 다른 사람으로 보이게끔 한다. 2) 물론 가면 아래에는 본래 인물의 자아가 여전히 존재한다. 얼어붙은 강 아래에는 계속하여 물이 흐르는 것처럼. 3) 그렇지만 본래 자아가 가면의 자아와 동일화되는 과정을 밟게 될 때, 본래 자아는 질적인 변화를 겪는다.

[가면의 고백]은 일생을 가면을 쓰고 자신의 본질을 숨겨가면서, 그렇지만 종국에는 그 가면으로 변화해 가는 한 남자의 색다른 성장고백이다. 주인공인 ‘나’는 어려서부터 유약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고, 할머니의 권한이 막강했던 모계중심적 집안에서 자란다. 그런 환경 때문이었을까? ‘나’는 동성애적 성향을 가지게 된다. 귀도 레니(Guido Reni)의 <성 세바스찬의 순교>라는 작품에 나오는 탄탄한 근육을 가진 인물(물론 남성이다)을 보고 자위행위를 시작하는가 하면, 건장한 남자의 살을 가르고 피를 뿜게 하여 제단에 바치는 사디즘적인 환상 가운데 탐닉한다. 똥지게를 퍼나르던 청년의 근육을 일평생 기억하고, 겨드랑이부터 가슴까지 털로 뒤덮인 동급생의 벗은 몸에 애정과 질투를 느낀다.
그리고 어떤 원인인지 모르지만 ‘나’는 죽음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미국과의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시기. 거의 매일같이 공습경보와 대피가 반복되던 시절에 ‘나’는 폭탄에 맞아서 요절하는 생각에 깊이 빠진다. 유약한 신체를 가지고 있던 ‘나’였지만 그나마 생기가 넘치는 젊은 시절에 죽음으로써 그가 자위행위의 대상으로 삼았던 ‘성 세바스찬’과 같은 영광의 육체를 얻게 될 것을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이런 본성의 목소리에 가면을 씌운다. 이성에 관심이 있는 척 하고, 모범적이고 공부만 아는 법대생의 삶을 주위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요절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공습경보가 울리면 생명을 구하기 위해 방공호로 뛰어가는 자신의 모습에 비참함을 느끼기도 한다. 마치 유리가면을 쓴 마야가 전혀 다른 자아로 변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전혀 다른 사람인 양 연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연기는 비단 외부의 사람들에게만 하는 것이 아니다. 내면의 목소리, 본래의 자아를 향해서도 가면의 연기가 강요되고 있는 것이다.
가면과 본성이 어떻게 ‘나’의 내면에 뒤섞여 있는지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 마지막 부분이다. 친구의 여동생인 소노코를 사랑했던 ‘나’는, 하지만 가면을 쓴 자존심과 불안함으로 소노코와의 결혼을 거절했던 ‘나’는 전쟁이 종료된 이후 결혼한 그녀와 해후한다. 함께 무도장에 간 ‘나’는 그녀의 질문에 횡설수설한다. 왜? ‘나’는 그곳에서 소노코의 존재감보다 충실하고 탄탄한 근육을 가진, 팔뚝에 목단 문신을 한 남자의 야만적이면서도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반라의 육체를 발견하고 정욕에 휩싸여 버린 것이다.

나는 소노코라는 존재를 잊어버렸다. 오로지 한 가지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여름이 한창인 거리에 저렇게 벗어부친 모습 그대로 뛰어나가 야쿠자들과 한 판 싸움을 벌이는 것, 날카로운 비수가 저 하라마키를 뚫고 그의 몸통에 꽂히는 것, 저 더러운 하라마키가 피범벅으로 아름답게 칠해지는 것, 그리고 그 피투성이 시신이 들것에 실려 다시 이곳으로 오는 것....

그 때 소노코의 음성이 들린다. “이제 5분 남았네요.” ‘나’는 그 순간 부지불식간에 가면이 벗겨져 내렸음을 깨닫게 되고, 필사적으로 그 가면을 다시 쓰고자 한다.

이 순간 내 마음 속에서 무엇인가가 잔혹한 힘에 의해 두 쪽으로 쩍 갈라졌다. 번개가 떨어져 생나무가 쪼개지듯이, 내가 지금까지 온 영혼을 기울여 쌓아왔던 건축물이 엄청나게 무너져내리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나라는 존재가 뭔가 일종의 무시무시한 <부재>로 바뀌는 바로 그 순간을 본 것 같았다. 눈을 감고, 나는 아주 짧은 순간에 내 가면으로 다시 돌아와 얼어붙을 듯한 의무 관념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가면이 벗겨진 후 주인공에게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진실된 본래의 모습일까? 진정한 자아의 외침이었을까? 아니다. 분명 확신하건데, 가면이 벗겨진 모습은 진정성을 가진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방어능력을 상실한 채로 상처입고, 주위를 공격하고자 웅크린 인간의 모습일 뿐이다.
무서운 것은 이 가면을 벗어야 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가면을 쓴 사람은 이제 자신의 가장 큰 희망사항은 가면을 벗지 않고, 가면 자체가 자신의 얼굴이 되도록 하는 것이 된다. 본성과 가면이 뒤섞인 차원을 넘어서 가면이 본성이 되고, 가면이 자아가 되는 단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광기이다.

나는 미시마 유키오의 자전소설이라 할 수 있는 [가면의 고백]에 나타난 이 가면의 미학에서 그의 일생과 일본 군국주의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병약했던 자신의 육체를 각종 운동으로 단련하여 근육질의 모습으로 탈바꿈한 미시마 유키오, 태평양전쟁 당시 죽음을 바라면서도 방공호에 가장 먼저 뛰어가던 자신의 모습에 탄식하던 미시마 유키오. 동경대 전공투 학생들과의 대결(?)에서 “천황을 인정하지 않는 너희들과는 서로 죽일 뿐”이라고 사자후를 토하던 미시마 유키오.
세 번이나 노벨문학상 후보로 오르면서 천재작가로 칭송받았으나 결국 육상자위대 사령부에 난입하여 미일안보조약 개정과 평화헌법 폐지를 주장하다가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할복자살한 미시마 유키오의 일생은 가면의 일생이 아니었을까.
미시마 유키오 본인은 평소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가 단순히 우익적이거나 군국주의적인 것이 아닌 순수함과 신념이며, 그것을 위해 죽겠다는 각오를 밝혔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일본 전통의 집적인 천황을 인간으로 격하시키는 평화헌법과 미국의 존재를 부정하고 천황을 보호하는 것이 아름다운 가치라는 입장을 가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모든 행위들은 나약함을 가리기 위한 가면으로, 두렵고도 인정할 수 없는 한 인간의 광기로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가 그토록 탐미(耽美)하던 순수한 일본정신, 천황의 아름다움의 본질에는 결함이 있었고, 그 결함을 가리고자 드리운 가면을 진짜 얼굴인 양 전도시킬 때 자신은 파멸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음을 그는 몰랐던 것이다. 아니, 알았더라도 멈출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가면이 진짜 자신의 얼굴이 되었다고 자신하고 있던 그를 향해 자위대원들이 보낸 냉소와 조롱 앞에 미시마 유키오의 가면은 떨어져 나간다. 잃어버린 가면과 함께 상처입게 된 미시마 유키오의 영혼은 저항하거나 살아갈 힘을 잃는다. 그래서 그의 최후는 ‘할복’이라는 지극히 일본적 죽음의 미학으로 종결되고 만다. 마치 자신이 찬양하던 건물과 함께 죽음을 꿈꾸었던 [금각사]의 주인공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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