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베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9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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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문학을 읽는 이유중 하나는 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한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읽다보면 분명 악한 짓을 저지른 사람임에도,
그래서 그로 인해 자신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파멸로 몰아감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행위를 ‘인정’할 수는 없어도 안타까움과 연민을 느끼게 된다.
이게 바로 아마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이중성을 작품 속 인물들에게 구현해 놓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가진 힘이 아닐까 한다.

[맥베스]의 주인공인 스코틀랜드의 장군 맥베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는 권력욕으로 반역하여 왕을 죽였고, 자신의 경쟁자를 암살할 것을 사주하였다.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는 신하의 성을 공격하여 그 가족을 학살하였다.
그의 악행은 분명 계획적이며 의도적인 것이었고, 그래서 햄릿과 달리 그의 악행은 훨씬 질이 나쁘다고 할 수 있다.
맥베스는 파멸당하고 정의의 심판을 받는 것이 당연한 인물인 것이다.

그런데 [맥베스]를 읽다보면 욕망의 화신과도 같은 겉모습 뒤편에
죄의식으로 인한 불안과 양심의 소리에 괴로워하는 인간의 모습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맥베스는 자신의 손에 남겨진 죄악의 흔적을 세상의 모든 바닷물로도 씻을 수 없음을 깊이 탄식한다.

저 대양 모든 물로 내 손에서 이 피를
씻어낼 수 있을까? 아냐, 내 손이 오히려
광대무변 온 바다를 핏빛으로 물들여
푸른 물을 다 붉게 하리라.

맥베스는 ‘권력획득’이라는 소원을 계속하여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마음의 틈에 스며든 마녀의 예언과 부인의 부추김은 탐욕을 키웠고,
자신이 모시던 왕을 암살하는 구체화되고 실제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제 맥베스의 탐욕은 어떤 윤리나 종교, 지혜로도 씻을 수 없는 마음 속의 낙인이 되어 거꾸로 맥베스 자신에 대한 심판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맥베스는 수백년 전 스코틀랜드의 한 특수한 인물이지만,
그의 인생행로는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인 모습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는 탐욕 앞에 무너졌고, 죄의식으로 고통 당하였으며, 정의의 심판을 받아 몰락하였다.
어쩌면 탐욕의 대상이 금전, 권력, 명예, 사랑 등으로 다양하고,
죄의식과 심판의 정도만 다를 뿐, 맥베스의 모습은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래서 종교창시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탐심을 다스리는 방법을 강조하였고,
수많은 작가들은 탐욕으로 무너지는 인간군상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다 놓아 버리고 무소유, 나눔, 비움 등이 종교지도자들의 가르침이지만,
인간의 나약하고 불완전한 본성이란 것이, 세상살이란 것이 그렇게 쉽게 바뀌겠는가?
그래서 정의의 회복이라는 측면에서 맥베스의 파멸은 이성적으로 정당한 것이지만,
한 고귀한 영혼이 욕심 때문에 파멸당하는 모습에서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었고,
그 모습이 또한 탐욕과 양심을 가진 나의 모습이라는 점이 깊은 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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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 '수유+너머'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
고미숙 지음 / 휴머니스트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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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놀랍고 또 놀랍다.
한없이 부러운 마음과, 기쁜 마음으로 이 책을 읽었다.

연구공간 ‘수유+너머’.
이 학습공동체(?)의 이름은 지인을 통해서 들은지 꽤 되었다.
물론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기 때문에 금새 잊어버리긴 했지만.
이번에 우연히 ‘수유+너머’의 인류학적 보고서라 할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을 읽게 되었고,
올해 들어 읽은 최고의 책으로 꼽게 되었다.
왜 이런 책을 지금에야 접하게 되었나 싶은 한탄과 함께.
(이 책은 2004년 1월에 나왔으니, 벌써 5년이 지난 책이다.)

나는 이 책에서 대학 시절 꿈꿔왔던 것,
나름대로 ‘공부’란 것을 하면서 이상향으로 삼아왔던 모습이 현실화된 것을 보게 되었다.
물론 이상을 실천에 옮기지 못한 ‘학삐리’의 한계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나의 삶이지만,
나는 이 책을 통해 마음 한 구석에 영원히 가지고 있을 꿈, ‘돈키호테의 꿈’과 다시 한 번 마주치게 되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동체’를 꿈꾸고 있지 않을까.
특히 요즘처럼 매일매일이 생존을 위한 삭막한 경쟁의 연속이며,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승자독식사회에서 지친 사람일수록 더욱 공동체를 원한다.
내 것 네 것 없이 공유하고 나누며, 서로에게 기여하고,
생존의 걱정 없이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하면서 스스로를 더 깊게 성장시키는 공간.

여기 승자독식의 사회를 거부하고 ‘공부’와 ‘학문’ 영역에서 출발하여 코뮨을 꿈꾸는 이들이 있다.
‘수유+너머’라고 이름붙여진 공동체을 꾸려가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솔직히 ‘수유+너머’에 대한 나의 인식은 공부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인문학 공개강의를 하는 연구단체 정도에만 그쳤었다.
그렇지만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를 통해서 이들의 실험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 책은 문턱→탈주→배치→축제→비전의 순서로 ‘수유+너머’가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공동체의 시작은 ‘문턱넘기’부터 시작한다.
넘어야 할 문턱은 무엇보다 권위에 빠진 제도권과 내 한 몸 편안한 안식을 찾는 조로증이다.
고정된 사고와 답답함 가운데 조금만 생각을 ‘전복’시키면 출구가 보이고
모든 것을 풀어놓아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기만 하면 내 삶을 어디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길을 찾아감을 알려준다. 이것이 문턱넘기이다.
한 번 문턱을 넘고, 또 하나의 문턱을 넘으면 이제 공동체는 본격적으로 달려나간다.
사회가 미리 세워 둔 골인지점이 아니라, 주체가 이끄는대로, 내 삶이 개척되어나가는 곳으로 탈주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몇가지 몸으로 체득해야만 하는 자세가 있다.
희생과 손해를 감수하는 공동체가 아닌, 구성원 개개인의 삶이 비옥해지는 공동체.
소유나 집착이 아닌, 상대의 본성을 촉발시키는 사랑이 발현되는 공동체.
일사불란함과 조직이 아닌, 이질성과 다중심, 밴드식 결합, 우발성이 범람하는 공동체.

그리고 이런 탈주를 위해서 공동체 구성원들은 자신의 습속과 버릇을 다시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배치’가 바로 그러한 통과의례이다.
이 배치는 단순한 마음가짐의 변화만 의미하지 않는다.
먼저 ‘몸’의 배치를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진지함’의 미덕도 바꿀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스스로의 ‘자의식’이란 가장 공고한 습속을 바꾸어 내야 한다.
그리고 이 배치의 과정은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한다.
이렇게 배치가 바뀐 사람들은 이제 공동체를 형성하고 ‘축제’의 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앞서도 언급한 것과 같이 현대의 삶이란 것은 얼마나 팍팍한가.
명문 대학=좋은 직장=부자의 등식은 이 사회 구성원 거의 전부를 구속하는 등식이 되었다.
(조금만 생각하면 모든 사람이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없는데도 말이다.)
하나의 코뮌을 만들기 위한 실험을 계속하고 있는 ‘수유+너머’는
바로 이렇게 우리에게 당연하게 습속화된, 뭔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그 시스템 속에서 적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왔던 것에 당당하게 반기를 들고 미래의 비전을 찾기 위한 ‘인류학적 보고서’이다.

얼마전 유목하는 인간, ‘호모 노마드’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유목의 특징은 어느 한 군데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것을 향해 떠나는 데에 있다고 한다면,
끊임없이 변화해 가는 ‘수유+너머’의 유목이 이제 어떤 모습으로 바뀌어 갈지 궁금해진다.
이 책을 읽고 ‘수유+너머’의 홈페이지를 방문해 보았다.
2004년 나온 책의 내용과 또 다른 모습이었다.
다만 여전히 북적거리며 활기찬 모습이라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어 보였다.
바라기는 이들의 실험이 반드시 성공하여
인간과 자연이 상생하는 생활공간, 인간의 규격화된 경계를 넘는 공동체간 네트워크가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새로운 삶의 모습이 되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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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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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짜여진 요리 레시피처럼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책이며,
수면 위는 잔잔한데, 그 아래는 소용돌이가 치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하는 책이다.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은 상당히 격정적이고 치명적이면서 한 번 툭 치기만 하면 폭발해 버릴 것 같은 긴장감을 담고 있는데,
이야기하는 방식은 요리책을 읽듯이 조단조단하다.

사랑하던 연인을 전직 모델에게 빼앗겨 버린 요리사 정지원.
그녀는 자신의 연인 한석주를 가로챈 연적을 납치하여 그녀의 혀를 자르고, 그것으로 요리를 만들어 애인에게 이별의 선물로 대접한다.
한석주와 혀를 맞대는 입맞춤을 의식처럼 치르면서 말이다.
이 부분은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감각의 제국]에서 사다가 동거하던 기치조의 목을 졸라 살해하고, 그의 성기를 잘라내어 간직한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사랑하는 연인을 영원히 ‘자기의 것’으로 두고 싶어했던 러브홀릭이 빚어낸 엽기를 [혀]에서도 보았기 때문인 것 같다.

연인의 혀 요리를 먹은 한석주가 이후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는지는 나와 있지 않으나,
적어도 정지원은 애인이었던 한석주를 영원히 간직하게 된 셈이다. 마치 사다처럼 말이다.

조경란의 [혀]는 읽는 내내 붉고 축축한 혀를 상상하게 만든다.
평소에는 입 속에 감추어져 있지만, 혀가 모습을 드러낼 때는 동시에 반드시 주인의 쾌락 충족이라는 목적도 함께 드러내게 된다.
먹는 행동에서, 말하는 행동에서, 사랑을 나누는 행동에서 혀는 단순한 신체 기관의 일부가 아니라 ‘본능’과 ‘생존’, ‘본질’과 ‘자아’의 표상으로 격상된다.
그래서일까? [혀]라는 제목은 묘하게 ‘미각’이라는 하나의 감각에만 구속되어 있지 않다.
주인공에게 혀를 사용하는 모든 의식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자신의 존재를 가치있게 하는 거룩한 종교적 제의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혀를 매개로 맺어진 연인 한석주는 자신에게서 절대로 떨어질 수 없고,
그 혀를 빼앗아간 연적의 혀를 잘라 제물로 내어 놓을 때에만 복수는 완성된다.

그렇지만 이런 ‘러브홀릭’은 나 같은 사람에게 엽기적으로 보인다.
정지원식 자아찾기와 정지원식 복수는 이해하기도 어렵고 인정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혀]라는 작품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이 보여준 감각의 제의화, 감각의 격상, 감각의 독점, 감각의 환유가 내게는 상상하기 어려웠다는 뜻이다.
어쩌면 그래서 내가 요리를 잘 못하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작가인 조경란의 마지막 말.
“다 읽고 나면 입에 군침이 돌게 하는 그런 소설을 쓰고 싶었다.”
나는 작가에게 낚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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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5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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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 최초의 거역-저 금단의 나무열매”

예전에 나온 세계문학전집이라면 5권 이내에 반드시 있었던 고전 중의 고전.
존 밀턴의 [실락원(失樂園]의 유명한 첫 번째 행입니다.
개인적으로 책 전체의 내용을 한 문장, 그것도 첫번째 문장으로 가장 명료하게 요약한 영문학사의 명문장이자 뛰어난 프롤로그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失樂園’은 말 그대로 ‘낙원을 잃어 버리다’란 의미로서,
여기서 낙원은 에덴 동산을, 낙원을 잃었다는 것은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 낙원에서 쫓겨난 사건을 의미합니다.

미야베 미유키 여사의 [낙원]은 여러 가지로 밀턴의 [실락원]을 생각나게 합니다.
미미 여사 본인이 실낙원-복락원의 모티브를 따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표지에 큼직하게 그려진 사과와 몰래 사과를 먹었다가 들킨 여성(분명 ‘이브’임에 틀림없다)의 그림은 분명 ‘낙원을 잃어버리다’란 이미지를 재생산하고 있습니다.

에덴 동산이 ‘낙원’의 이데아라면, 그래서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만들어낸 현실 속 최고의 낙원은 아마 가족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인류는 무던히도 가족이 가진 이미지를 유지하고 확대재생산 하는 데에 애써왔습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키우는 요람이자 교육장으로서의 가족,
인생사에 지치고 피곤한 몸에 가장 따뜻한 휴식을 주는 마지막 안전망으로서의 가족.

그러나 미야베 미유키 여사의 [낙원]에 나오는 가족운 낙원의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
물론 인간이 만든 가족 속에서 신이 창조한 에덴 동산의 완벽함을 기대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이며,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 땅의 모든 가족들은 불완전함을 안고 있겠지요.
하지만 가족 구성원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애정과 이해가 사라진 가족은 더 이상 ‘불완전한 낙원’이 아니라 ‘완전한 지옥’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도시코는 어머니인 치야의 점술로 자신의 꿈과 사랑도 이루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랑하던 아들 히토시를 사고로 잃었습니다.
도이자키 가족은 어떤가요? 이유야 어떤 것이든 부모는 친딸인 아카네를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죄책감으로 평생을 고통당합니다. 아카네의 동생인 세이코 역시 그 고통에 동반되어 이혼해야 하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도이자키 가족을 협박한 시게(미와 아키오)의 가족 역시 편모-아들 가정으로서, 사회의 무관심 속에 파탄의 길로 접어듭니다.

마치 선악과를 따먹은 인류의 조상들의 죄가 전지전능한 신 앞에 드러났듯이,
미야베 미유키 여사를 비롯한 일본의 사회파 추리소설 작가들은 현대 사회 속에 숨겨진 병폐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놓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작품은 무섭고 겁이 나면서도 지금 우리가 선 자리를 돌아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극복해야 할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낙원의 상실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일어날 수 있으며, 일단 상실된 낙원을 되찾고 복원하기 위해서는 처음보터 몇 배나 더 힘들고 막대한 대가를 지불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밀턴의 [실락원]에서 인상깊었던 장면으로 돌아가 봅니다.
[실락원]에서 가장 인상깊은 장면은 역시 신에게 대항한 사탄이 혼돈 한 가운데 떨어져 깨어난 후,
자신과 함께 타락하여 잠들었던 다른 ‘타락천사’들을 깨워 반역을 준비하는 장면입니다.
결국 사탄과 타락천사들은 금단의 열매를 매개로 인류를 유혹하는데 성공하고 낙원을 빼앗습니다.
지금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불완전하게나마 ‘낙원’은 무엇이고, 또 그 낙원을 잃도록 만드는 ‘금단의 열매’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합니다.
단순한 개인적인 차원에서부터 사회적인 차원으로 확장시켜서 말이죠.

뱀꼬리.
신앙심이 깊었던 존 밀턴에게 낙원인 에덴 동산을 잃어버린 것은 못내 아쉬운 사건이었을까요?
그는 [실락원]의 속편으로 [복락원(復樂園)], 즉, ‘낙원을 복원하다’라는 작품을 썼습니다.
미미 여사도 역시 책의 뒷부분에서 잃어버린 낙원을 되찾는 복원을 강하게 암시하는 장면을 삽입합니다.
즉, 아들 히토시를 잃은 도시코가 한 때 사랑하던 오가미 씨의 아들 요시미를 만나는 장면 말입니다. 아마 이 두 사람은 같이 살게 될 것 같습니다. 결국 낙원의 복원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냥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복락원]에서 [실락원] 같은 긴장감을 느끼지 못했던 것처럼
미미 여사의 [낙원]도 왠지 마지막에서 힘이 빠져버렸습니다.
미미 여사도 낙원의 복원 없이 그냥 끝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오히려 그랬다면 낙원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대가는 지불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더 잘 드러나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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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공부 - 장정일의 인문학 부활 프로젝트
장정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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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연의 일치였으나, 이 책을 읽기 시작한 날짜는 5월 23일, 즉,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한 날이었고,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날짜는 5월 29일 밤, 즉, 그의 영결식이 있던 날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 그리고 현재 우리의 정치와 사회에 대해서 적지 않은 생각을 하는 기회를 얻었다.

무엇보다 나는 인문학이란 것이 사회과학적 인식과 실천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의미가 반감된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꼈다.
굳이 마르크스가 말한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테제를 들먹이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책이 기존의 [독서일기] 시리즈를 이은 [장정일의 독서일기 7]이 되지 않은 이유도, 굳이 “공부”라는 제목을 가지고 태어나게 된 가장 큰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책읽기로부터 얻어진 지식과 사색의 결과물이 현재 우리 사회의 현실과 만나고,
현실에 대한 비판의 칼날로 빛날 때에 인문학은 의미가 있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미국 사회의 ‘과두정’을 말하고 있는 <과두정이 온다> 부분이었다.
왜 작가는 민주주의를 전가의 보도처럼 쓰고 있는 시대에 철지난 ‘과두정’을 이야기하는가?
그는 미국의 예를 든다. 미국이 지금과 같은 세계의 “깡패국가”가 된 원인에 대해서 모리스 버만의 [미국 문화의 몰락]에서 다음과 같은 부분을 인용한다.

“미국의 부는 생산 활동에서 나온게 아니라, 외부 세계에 대한 정치적 지배의 결과로 이룩됐다” 그래서 “20세기가 미국의 세기였다고 한다면 21세기는 미국화한 세기가 될 것이다”

그러면서 20세기 이후 미국의 정치지형을 관통하고 있는 흐름은 ‘과두정’이라고 지적한다.
과두정이란 소수 엘리트들이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행사하는 정치체제가 아닌가.
미국의 과두정을 이끄는 소수 엘리트들은 SWAP이란 인종적 방패와 근본주의 기독교라는 도덕적‧종교적 경직성을 보호막으로 삼고, 그 속에서 ‘군산복합체’로 표현되는 초국가적인 거대자본과 군사력의 힘에 기대어 있는 집단이라 하겠다.
이들에게 전세계는 팍스 아메리카나를 유지존속하기 위한 자기들의 앞마당일 따름이며,
외부 세계에 대한 정치적 지배를 강화하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최대화시킨다.
그리고 이를 위해 세계 어디라도 개입할 준비를 갖춘다.

문제는 이런 미국에서의 과두정이 21세기가 되면서 ‘미국화’하여 우리나라에도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이번에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와 장례 과정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inner circle이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 생각해 볼 기회를 가졌다.
그리고 그들은 입만 열면 반복하곤 하는 ‘자유민주주의’라는 가치와는 별 상관없는, 그래서 미국화하고 있는 과두정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와는 거리가 멀고 자신들의 지배계급적 이익에 충실한 사람들,
무엇이 그리 자신이 없는지 비판의 목소리에 귀를 닫고, 아예 그 비판이 나오지 못하도록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봉쇄해야 함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
자신이 속한 집단이 경제적, 교육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이를 심리적 우월감으로 발전시켜 다른 사람들에게는 낙인을 찍는 사람들.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 사람들로부터 경제적 이윤을 얻어 ‘아류제국주의’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이미 공고화될대로 공고화된 이들 집단을 어떻게 해체시킬 수 있는가
과두정화되어 미국화하는 지배체제에 대항해 어떻게 민주주의의와 자유, 평등의 가치를 지킬 수 있을까.
이런 점에서 가진자의 대통령이 아니라 서민대통령으로 일컬어지며 영면에 들어간 노무현 대통령은 어떤 의미였을까 생각해 본다.

같은 맥락에서 <촘스키와의 대화>도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촘스키가 누구인지는 여기서 길게 반복하지 않아도 상관없을 것이다.
장정일 작가가 왜 촘스키를 자신의 책에 ‘모셔오게’ 되었는지는 다음 인용문에 잘 나타나 있다. 좀 길더라도 그대로 인용해 본다.

소위 민주주의 국가의 통치 계급은 무력을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국민의 자발적인 동의를 구하거나 온갖 정책으로부터 국민을 소외시키기 위해 선전이라는 방법을 동원한다. 까다롭고 막중한 선전 사업을 수행하는 데 꼭 필요한 사람들이 학식을 쌓고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다. 다국적기업과 국가가 야합하고 있는 오늘과 같은 형식적인 민주주의 사회에서 신문과 방송, 광고와 예술 등을 통해 체제 선전의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체제에 의해 저명한 지식인 혹은 책임있는 지식인이라고 불리는 이들 지식인의 역할은 “민중을 소극적이고 순종적”이며 무지한 존재, 결국 프로그램된 존재“로 만드는 데 있다.
체제의 나팔수가 된 지식인들이 민중을 프로그램화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대중을 민주주의의 참여자에서 방관자 혹은 구경꾼으로 만드는 것이다. 통치 계급과 거기에 기식하는 지식인들은 대중이 민주주의에 참여하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결국 지배계급의 영구적인 자리보전을 위한 전략은 첫째, 대중들을 방관자로 만들 것, 둘째, 지식인들을 포섭하여 대중들을 소극적이고 순종적으로 만들 것 등 두 가지로 요약된다.
촘스키가 미국 사회를 보면서 했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의 우리나라 현실을 보면서 쓴 글이 아닐까 할 정도로 지금 우리사회의 모습과 합쳐진다.
방관자로서의 대중, 구경꾼으로서의 대중..... 가슴 한 구석을 아프게 찌르는 뜨끔한 말이 아닌가.

나는 개인적으로 참여정부의 가장 큰 공은 탈권위적 정치개혁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권위의 해체는 대중들로 하여금 참여할 수 있는 장을 열어주고, 대중들이 서로 소통하며 발전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준다.
물론 이런 현상을 본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을 했을 거다.
‘무식한 대중이 뭘 아나?’, ‘배우지도 못한 것들이 건방지게시리...’

[공부]에는 귀에 익숙한 사람, 생판 처음 듣는 사람 등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나는 이들 중 마르크 블로흐와 하이데거를 비교해 보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지을까 한다.

마르크 블로흐는 현대 역사학의 큰 족적을 남긴 역사학자로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되었을 당시
안전한 생활과 풍요로운 노후를 보장받는 망명의 길을 버리고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다.
그는 그 과정에서 역사학의 중요한 업적을 남기기도 했으나, 결국에는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대표적인 실존주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으며,
현상학적 측면에서 존재란 자신을 스스로 드러냄으로서 의미를 가진다는 유명한 테제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그는 ‘나치 부역자’라는 평생 씻을 수 없는 꼬리표를 달아야 했으며,
존재를 억압하는 기술문명과 싸운다는 명분 하에 나치에 협력하여 프라이부르크 총장을 지내면서 독일 대학 내의 ‘학문적 자율성’을 빼앗아 간다.

이번에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 과정과 생애를 돌아보면서
블로흐와 하이데거의 삶, 그리고 지식인으로서의 삶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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