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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공부 - 장정일의 인문학 부활 프로젝트
장정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우연의 일치였으나, 이 책을 읽기 시작한 날짜는 5월 23일, 즉,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한 날이었고,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날짜는 5월 29일 밤, 즉, 그의 영결식이 있던 날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 그리고 현재 우리의 정치와 사회에 대해서 적지 않은 생각을 하는 기회를 얻었다.
무엇보다 나는 인문학이란 것이 사회과학적 인식과 실천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의미가 반감된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꼈다.
굳이 마르크스가 말한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테제를 들먹이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책이 기존의 [독서일기] 시리즈를 이은 [장정일의 독서일기 7]이 되지 않은 이유도, 굳이 “공부”라는 제목을 가지고 태어나게 된 가장 큰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책읽기로부터 얻어진 지식과 사색의 결과물이 현재 우리 사회의 현실과 만나고,
현실에 대한 비판의 칼날로 빛날 때에 인문학은 의미가 있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미국 사회의 ‘과두정’을 말하고 있는 <과두정이 온다> 부분이었다.
왜 작가는 민주주의를 전가의 보도처럼 쓰고 있는 시대에 철지난 ‘과두정’을 이야기하는가?
그는 미국의 예를 든다. 미국이 지금과 같은 세계의 “깡패국가”가 된 원인에 대해서 모리스 버만의 [미국 문화의 몰락]에서 다음과 같은 부분을 인용한다.
“미국의 부는 생산 활동에서 나온게 아니라, 외부 세계에 대한 정치적 지배의 결과로 이룩됐다” 그래서 “20세기가 미국의 세기였다고 한다면 21세기는 미국화한 세기가 될 것이다”
그러면서 20세기 이후 미국의 정치지형을 관통하고 있는 흐름은 ‘과두정’이라고 지적한다.
과두정이란 소수 엘리트들이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행사하는 정치체제가 아닌가.
미국의 과두정을 이끄는 소수 엘리트들은 SWAP이란 인종적 방패와 근본주의 기독교라는 도덕적‧종교적 경직성을 보호막으로 삼고, 그 속에서 ‘군산복합체’로 표현되는 초국가적인 거대자본과 군사력의 힘에 기대어 있는 집단이라 하겠다.
이들에게 전세계는 팍스 아메리카나를 유지존속하기 위한 자기들의 앞마당일 따름이며,
외부 세계에 대한 정치적 지배를 강화하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최대화시킨다.
그리고 이를 위해 세계 어디라도 개입할 준비를 갖춘다.
문제는 이런 미국에서의 과두정이 21세기가 되면서 ‘미국화’하여 우리나라에도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이번에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와 장례 과정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inner circle이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 생각해 볼 기회를 가졌다.
그리고 그들은 입만 열면 반복하곤 하는 ‘자유민주주의’라는 가치와는 별 상관없는, 그래서 미국화하고 있는 과두정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와는 거리가 멀고 자신들의 지배계급적 이익에 충실한 사람들,
무엇이 그리 자신이 없는지 비판의 목소리에 귀를 닫고, 아예 그 비판이 나오지 못하도록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봉쇄해야 함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
자신이 속한 집단이 경제적, 교육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이를 심리적 우월감으로 발전시켜 다른 사람들에게는 낙인을 찍는 사람들.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 사람들로부터 경제적 이윤을 얻어 ‘아류제국주의’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이미 공고화될대로 공고화된 이들 집단을 어떻게 해체시킬 수 있는가
과두정화되어 미국화하는 지배체제에 대항해 어떻게 민주주의의와 자유, 평등의 가치를 지킬 수 있을까.
이런 점에서 가진자의 대통령이 아니라 서민대통령으로 일컬어지며 영면에 들어간 노무현 대통령은 어떤 의미였을까 생각해 본다.
같은 맥락에서 <촘스키와의 대화>도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촘스키가 누구인지는 여기서 길게 반복하지 않아도 상관없을 것이다.
장정일 작가가 왜 촘스키를 자신의 책에 ‘모셔오게’ 되었는지는 다음 인용문에 잘 나타나 있다. 좀 길더라도 그대로 인용해 본다.
소위 민주주의 국가의 통치 계급은 무력을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국민의 자발적인 동의를 구하거나 온갖 정책으로부터 국민을 소외시키기 위해 선전이라는 방법을 동원한다. 까다롭고 막중한 선전 사업을 수행하는 데 꼭 필요한 사람들이 학식을 쌓고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다. 다국적기업과 국가가 야합하고 있는 오늘과 같은 형식적인 민주주의 사회에서 신문과 방송, 광고와 예술 등을 통해 체제 선전의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체제에 의해 저명한 지식인 혹은 책임있는 지식인이라고 불리는 이들 지식인의 역할은 “민중을 소극적이고 순종적”이며 무지한 존재, 결국 프로그램된 존재“로 만드는 데 있다.
체제의 나팔수가 된 지식인들이 민중을 프로그램화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대중을 민주주의의 참여자에서 방관자 혹은 구경꾼으로 만드는 것이다. 통치 계급과 거기에 기식하는 지식인들은 대중이 민주주의에 참여하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결국 지배계급의 영구적인 자리보전을 위한 전략은 첫째, 대중들을 방관자로 만들 것, 둘째, 지식인들을 포섭하여 대중들을 소극적이고 순종적으로 만들 것 등 두 가지로 요약된다.
촘스키가 미국 사회를 보면서 했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의 우리나라 현실을 보면서 쓴 글이 아닐까 할 정도로 지금 우리사회의 모습과 합쳐진다.
방관자로서의 대중, 구경꾼으로서의 대중..... 가슴 한 구석을 아프게 찌르는 뜨끔한 말이 아닌가.
나는 개인적으로 참여정부의 가장 큰 공은 탈권위적 정치개혁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권위의 해체는 대중들로 하여금 참여할 수 있는 장을 열어주고, 대중들이 서로 소통하며 발전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준다.
물론 이런 현상을 본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을 했을 거다.
‘무식한 대중이 뭘 아나?’, ‘배우지도 못한 것들이 건방지게시리...’
[공부]에는 귀에 익숙한 사람, 생판 처음 듣는 사람 등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나는 이들 중 마르크 블로흐와 하이데거를 비교해 보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지을까 한다.
마르크 블로흐는 현대 역사학의 큰 족적을 남긴 역사학자로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되었을 당시
안전한 생활과 풍요로운 노후를 보장받는 망명의 길을 버리고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다.
그는 그 과정에서 역사학의 중요한 업적을 남기기도 했으나, 결국에는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대표적인 실존주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으며,
현상학적 측면에서 존재란 자신을 스스로 드러냄으로서 의미를 가진다는 유명한 테제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그는 ‘나치 부역자’라는 평생 씻을 수 없는 꼬리표를 달아야 했으며,
존재를 억압하는 기술문명과 싸운다는 명분 하에 나치에 협력하여 프라이부르크 총장을 지내면서 독일 대학 내의 ‘학문적 자율성’을 빼앗아 간다.
이번에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 과정과 생애를 돌아보면서
블로흐와 하이데거의 삶, 그리고 지식인으로서의 삶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