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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 1 ㅣ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5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평점 :

“인간 최초의 거역-저 금단의 나무열매”
예전에 나온 세계문학전집이라면 5권 이내에 반드시 있었던 고전 중의 고전.
존 밀턴의 [실락원(失樂園]의 유명한 첫 번째 행입니다.
개인적으로 책 전체의 내용을 한 문장, 그것도 첫번째 문장으로 가장 명료하게 요약한 영문학사의 명문장이자 뛰어난 프롤로그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失樂園’은 말 그대로 ‘낙원을 잃어 버리다’란 의미로서,
여기서 낙원은 에덴 동산을, 낙원을 잃었다는 것은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 낙원에서 쫓겨난 사건을 의미합니다.
미야베 미유키 여사의 [낙원]은 여러 가지로 밀턴의 [실락원]을 생각나게 합니다.
미미 여사 본인이 실낙원-복락원의 모티브를 따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표지에 큼직하게 그려진 사과와 몰래 사과를 먹었다가 들킨 여성(분명 ‘이브’임에 틀림없다)의 그림은 분명 ‘낙원을 잃어버리다’란 이미지를 재생산하고 있습니다.
에덴 동산이 ‘낙원’의 이데아라면, 그래서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만들어낸 현실 속 최고의 낙원은 아마 가족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인류는 무던히도 가족이 가진 이미지를 유지하고 확대재생산 하는 데에 애써왔습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키우는 요람이자 교육장으로서의 가족,
인생사에 지치고 피곤한 몸에 가장 따뜻한 휴식을 주는 마지막 안전망으로서의 가족.
그러나 미야베 미유키 여사의 [낙원]에 나오는 가족운 낙원의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
물론 인간이 만든 가족 속에서 신이 창조한 에덴 동산의 완벽함을 기대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이며,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 땅의 모든 가족들은 불완전함을 안고 있겠지요.
하지만 가족 구성원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애정과 이해가 사라진 가족은 더 이상 ‘불완전한 낙원’이 아니라 ‘완전한 지옥’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도시코는 어머니인 치야의 점술로 자신의 꿈과 사랑도 이루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랑하던 아들 히토시를 사고로 잃었습니다.
도이자키 가족은 어떤가요? 이유야 어떤 것이든 부모는 친딸인 아카네를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죄책감으로 평생을 고통당합니다. 아카네의 동생인 세이코 역시 그 고통에 동반되어 이혼해야 하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도이자키 가족을 협박한 시게(미와 아키오)의 가족 역시 편모-아들 가정으로서, 사회의 무관심 속에 파탄의 길로 접어듭니다.
마치 선악과를 따먹은 인류의 조상들의 죄가 전지전능한 신 앞에 드러났듯이,
미야베 미유키 여사를 비롯한 일본의 사회파 추리소설 작가들은 현대 사회 속에 숨겨진 병폐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놓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작품은 무섭고 겁이 나면서도 지금 우리가 선 자리를 돌아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극복해야 할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낙원의 상실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일어날 수 있으며, 일단 상실된 낙원을 되찾고 복원하기 위해서는 처음보터 몇 배나 더 힘들고 막대한 대가를 지불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밀턴의 [실락원]에서 인상깊었던 장면으로 돌아가 봅니다.
[실락원]에서 가장 인상깊은 장면은 역시 신에게 대항한 사탄이 혼돈 한 가운데 떨어져 깨어난 후,
자신과 함께 타락하여 잠들었던 다른 ‘타락천사’들을 깨워 반역을 준비하는 장면입니다.
결국 사탄과 타락천사들은 금단의 열매를 매개로 인류를 유혹하는데 성공하고 낙원을 빼앗습니다.
지금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불완전하게나마 ‘낙원’은 무엇이고, 또 그 낙원을 잃도록 만드는 ‘금단의 열매’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합니다.
단순한 개인적인 차원에서부터 사회적인 차원으로 확장시켜서 말이죠.
뱀꼬리.
신앙심이 깊었던 존 밀턴에게 낙원인 에덴 동산을 잃어버린 것은 못내 아쉬운 사건이었을까요?
그는 [실락원]의 속편으로 [복락원(復樂園)], 즉, ‘낙원을 복원하다’라는 작품을 썼습니다.
미미 여사도 역시 책의 뒷부분에서 잃어버린 낙원을 되찾는 복원을 강하게 암시하는 장면을 삽입합니다.
즉, 아들 히토시를 잃은 도시코가 한 때 사랑하던 오가미 씨의 아들 요시미를 만나는 장면 말입니다. 아마 이 두 사람은 같이 살게 될 것 같습니다. 결국 낙원의 복원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냥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복락원]에서 [실락원] 같은 긴장감을 느끼지 못했던 것처럼
미미 여사의 [낙원]도 왠지 마지막에서 힘이 빠져버렸습니다.
미미 여사도 낙원의 복원 없이 그냥 끝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오히려 그랬다면 낙원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대가는 지불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더 잘 드러나지 않았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