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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 '수유+너머'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
고미숙 지음 / 휴머니스트 / 2004년 1월
평점 :
절판

놀랍고 또 놀랍다.
한없이 부러운 마음과, 기쁜 마음으로 이 책을 읽었다.
연구공간 ‘수유+너머’.
이 학습공동체(?)의 이름은 지인을 통해서 들은지 꽤 되었다.
물론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기 때문에 금새 잊어버리긴 했지만.
이번에 우연히 ‘수유+너머’의 인류학적 보고서라 할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을 읽게 되었고,
올해 들어 읽은 최고의 책으로 꼽게 되었다.
왜 이런 책을 지금에야 접하게 되었나 싶은 한탄과 함께.
(이 책은 2004년 1월에 나왔으니, 벌써 5년이 지난 책이다.)
나는 이 책에서 대학 시절 꿈꿔왔던 것,
나름대로 ‘공부’란 것을 하면서 이상향으로 삼아왔던 모습이 현실화된 것을 보게 되었다.
물론 이상을 실천에 옮기지 못한 ‘학삐리’의 한계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나의 삶이지만,
나는 이 책을 통해 마음 한 구석에 영원히 가지고 있을 꿈, ‘돈키호테의 꿈’과 다시 한 번 마주치게 되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동체’를 꿈꾸고 있지 않을까.
특히 요즘처럼 매일매일이 생존을 위한 삭막한 경쟁의 연속이며,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승자독식사회에서 지친 사람일수록 더욱 공동체를 원한다.
내 것 네 것 없이 공유하고 나누며, 서로에게 기여하고,
생존의 걱정 없이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하면서 스스로를 더 깊게 성장시키는 공간.
여기 승자독식의 사회를 거부하고 ‘공부’와 ‘학문’ 영역에서 출발하여 코뮨을 꿈꾸는 이들이 있다.
‘수유+너머’라고 이름붙여진 공동체을 꾸려가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솔직히 ‘수유+너머’에 대한 나의 인식은 공부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인문학 공개강의를 하는 연구단체 정도에만 그쳤었다.
그렇지만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를 통해서 이들의 실험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 책은 문턱→탈주→배치→축제→비전의 순서로 ‘수유+너머’가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공동체의 시작은 ‘문턱넘기’부터 시작한다.
넘어야 할 문턱은 무엇보다 권위에 빠진 제도권과 내 한 몸 편안한 안식을 찾는 조로증이다.
고정된 사고와 답답함 가운데 조금만 생각을 ‘전복’시키면 출구가 보이고
모든 것을 풀어놓아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기만 하면 내 삶을 어디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길을 찾아감을 알려준다. 이것이 문턱넘기이다.
한 번 문턱을 넘고, 또 하나의 문턱을 넘으면 이제 공동체는 본격적으로 달려나간다.
사회가 미리 세워 둔 골인지점이 아니라, 주체가 이끄는대로, 내 삶이 개척되어나가는 곳으로 탈주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몇가지 몸으로 체득해야만 하는 자세가 있다.
희생과 손해를 감수하는 공동체가 아닌, 구성원 개개인의 삶이 비옥해지는 공동체.
소유나 집착이 아닌, 상대의 본성을 촉발시키는 사랑이 발현되는 공동체.
일사불란함과 조직이 아닌, 이질성과 다중심, 밴드식 결합, 우발성이 범람하는 공동체.
그리고 이런 탈주를 위해서 공동체 구성원들은 자신의 습속과 버릇을 다시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배치’가 바로 그러한 통과의례이다.
이 배치는 단순한 마음가짐의 변화만 의미하지 않는다.
먼저 ‘몸’의 배치를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진지함’의 미덕도 바꿀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스스로의 ‘자의식’이란 가장 공고한 습속을 바꾸어 내야 한다.
그리고 이 배치의 과정은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한다.
이렇게 배치가 바뀐 사람들은 이제 공동체를 형성하고 ‘축제’의 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앞서도 언급한 것과 같이 현대의 삶이란 것은 얼마나 팍팍한가.
명문 대학=좋은 직장=부자의 등식은 이 사회 구성원 거의 전부를 구속하는 등식이 되었다.
(조금만 생각하면 모든 사람이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없는데도 말이다.)
하나의 코뮌을 만들기 위한 실험을 계속하고 있는 ‘수유+너머’는
바로 이렇게 우리에게 당연하게 습속화된, 뭔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그 시스템 속에서 적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왔던 것에 당당하게 반기를 들고 미래의 비전을 찾기 위한 ‘인류학적 보고서’이다.
얼마전 유목하는 인간, ‘호모 노마드’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유목의 특징은 어느 한 군데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것을 향해 떠나는 데에 있다고 한다면,
끊임없이 변화해 가는 ‘수유+너머’의 유목이 이제 어떤 모습으로 바뀌어 갈지 궁금해진다.
이 책을 읽고 ‘수유+너머’의 홈페이지를 방문해 보았다.
2004년 나온 책의 내용과 또 다른 모습이었다.
다만 여전히 북적거리며 활기찬 모습이라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어 보였다.
바라기는 이들의 실험이 반드시 성공하여
인간과 자연이 상생하는 생활공간, 인간의 규격화된 경계를 넘는 공동체간 네트워크가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새로운 삶의 모습이 되기를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