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도시를 디자인하다 1
정재영 지음 / 풀빛 / 200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주 매력적인 책이었다. 아마 누구든 이 책을 붙잡기 시작하면 그 매력에서 쉽게 빠져나오기 어려울 것 같다.
이 매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이 책의 매력은,
단지 살았던 시대만 천차만별로 다를 뿐 우리와 똑같이 느끼고 우리와 똑같이 생각하고 우리와 똑같이 부대끼며 살아온
우리 이웃, 우리 친구, 우리 가족의 삶이 축적된 공간과 철학을 연결시킴으로써
철학이 가졌다고 오해받아온 고리타분함과 딱딱함을 씻어주고 있다는 점에 있다.
또 한 가지 이 책의 매력은,
한 시대를 풍미한 철학이 태어나고 성장해온 유럽의 도시를 선정하고,
그 도시를 둘러싼 시대적 배경과 철학자들의 삶을 연결시켜서
마치 도시의 오래된 거리를 느릿하게 산책하며, 때론 노상의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사색에 잠기는 듯한 편안한 접근성에 있다.

이 책은 서로 관련되어 있는 두 가지의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한 가지는 다른 철학책이 고대→중세→근대→현대의 시간 순서를 따르는 데 비해
이 책은 거꾸로 현대→근대→고대 및 중세의 순서를 취한다.
또 한 가지 특징은 철학을 ‘동사로서의 철학’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특징은 아마도 저자도 밝혔듯이 ‘이번 유럽 철학 여행의 목표로 설정한 지금 여기, 그리고 우리에 대한 정체성을 다시 생각하기’ 위한 것이리라.
철학의 역사는 단절의 역사가 아니다.
비록 위대한 철학자들의 자연인으로서의 생명은 종료되었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남긴 철학 유산은 계속하여 확대되고, 재생산되고, 반박되고, 공박당하며, 재발견되고, 공격하면서 끊임없이 변증법적 나선형으로 발전되어 왔다.
어쩌면 변증법적 나선형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며 보기 보다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볼 때에 아래에 토대로 깔린 전(前)단계들이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는지 더 잘 보일 수 있겠다.

나는 철학을 동사로 파악하는 저자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철학을 비롯하여 인문학에 ‘위기’가 운운되는 가장 큰 원인은 오히려 그 학문에 있지 않았던가 하는 반성이다.
전문가들에 의하여 독점되는 학문, 고상하고 현학적으로 보이는 말의 성찬, 대중성을 얻고자 하는 노력에 대하여 순수성을 훼손시킨다는 비판 등.
최근에 와서야 학문의 대중화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 기본적으로 우리 학문이 대중 속에서 호흡하기 보다는 정형화된 모습으로 고정되었던 측면을 부인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변화의 양상으로 철학을 바라보고,
그 변화의 주체를 독자들 개인에게 돌리고자 하는 저자의 모습, 그러면서도 본인이 제시한 문제에 성실한 답안을 제시하는 저자의 모습에서 ‘동사’로서의 철학이 나아가야 할 길을 본다.
물론 저자가 말한 ‘동사’로서의 철학은 다소 다른 의미이다. 안다. 하지만, 말 그대로 동사는 움직임, 즉, 변화를 내포한 개념이다.
어쩌면 철학의 변화가능성과 다양성에 항상 눈을 열어두어야 하는 것이 철학자의 사상 몇 가지를 기계적으로 외우는 것보다 더 나은 철학적 자세가 아닐까.

저자는 제3장에서 ‘실재’의 귀환으로 본인의 답안지를 작성하여 독자들에게 제출하였다.
그리고 독자에게 스스로의 답안지를 작성해 볼 것을 권하였다. 그렇다면 이제 내 개인적인 답안지를 써서 정리해 보는 것이 예의가 될 것이다.

저자는 중세 이후 철학사의 가장 큰 흐름으로 ‘근대 프로젝트’를 지적하고 있다.
이는 ‘이성 프로젝트’, 또는 ‘계몽 프로젝트’라고 부르는, 서양철학사 전체를 관통하는 뼈대라고 할 수 있겠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자기를 발견하고, 철학의 제일 원리를 이성에서 출발하였다.
물론 경험주의는 이성과 다른 경험을 강조함으로써 또다른 거대한 물줄기를 이루었으나,
칸트는 이성과 경험을 비판적으로 종합하였고, 헤겔은 이를 절대정신으로까지 끌어올려 독일 관념론 철학의 정수를 구성한다.
어쩌면 자본주의를 비판한 맑스 역시 그 주체를 프롤레타리아로 바꾸었을 뿐, 본질적으로는 이성 중심의 사고와 이성 중심의 프로젝트, 근대 프로젝트를 뒤집지 않았다.
이성 중심은 근대를 넘어올수록 ‘과학’과 결합한다. 비엔나에서 시작한 논리실증주의는 기본적으로 ‘과학’을 이성의 최고봉으로까지 상정하고, 과학적 세계관 하에서 세계를 해석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68혁명세대로 대표되는 파리, 프랑스의 철학자들은 이 모든 이성과 근대를 해체하고 이전 시대와의 단절을 선언하였다.
이제 만능의 이성과 절대불변의 과학적 세계관 대신에 모든 것이 처지와 조건에 따라 ‘구성’되어 왔으며, 그 구성의 이면에는 권력이 숨어 있음을 대대적으로 폭로하게 된다.

80년대 사회과학도에게 필수적인 학습대상이 맑스라면, 90년의 필수 학습대상은 미셀 푸코라는 이야기가 있었던 적이 있었다.
미셀 푸코에 대한 대대적인 붐은 실상 우리나라에 있어서 90년대 들어 갑자기 등장하기 시작한 ‘신세대’, ‘X세대’라는 인구 구성상 새로운 세대의 출현과,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으로 대표되는 문화적 격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사조의 문분별할 정도의 유입으로 대표되는 사상적 혼돈이 결합된 시대에서 나온 측면이 분명히 있다.
그렇지만, 열풍처럼 불었던,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과도한 일반화의 오류를 감안해 준다면 ‘구조주의’라고 부르는 철학의 과제가 현재 우리 사회의 과제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갈 수밖에 없다.
물론 서양철학사에서 구조주의가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절대화된 과학과 이성에 반기를 들었고, 맥락에 따른 사상과 그 사상의 구현체인 사회의 구성가능성 및 변화가능성을 새롭게 제기하였다.
이 과정에서 푸코 등은 그동안 신성하게까지 여겨왔던 권력(power) 아래에 감추어진 본질적인 면을 ‘폭로’함으로써 새로운 담론과 새로운 실천방안을 제시한 것은 인류 지성사에서 소중한 성과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일부 구조주의에서 주장하는 진리의 상대성 개념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문이다.
또한 과연 서양의 탈근대 프로젝트가 우리 사회에 적용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수준이 아니라 확신의 수준으로 ‘아직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이런 점에서 하버마스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맑시스트들이 주장하는 당파성 개념의 유효성을 여전히 인정한다.
맑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그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이다”라고 갈파한다.
우리 사회는 지금 근대 사회에 접어들어 있는가.
이성이 신격화될 정도로, 더 이상 계몽의 과제의 유효성을 제기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우리 사회가 이성중심적이고 합리적인가의 물음이 반드시 필요하다.
개인의 일상생활에서부터 사회 각 부분이 돌아가는 모습 속에는 계급간에, 성별간에, 지역간에, 세대간에 아직도 ‘전근대적인 야만이 독버섯처럼 남아있다’
근대 프로젝트는 이러한 전근대적 억압과 착취의 틀에 대해 개혁적이다.
그리고 이 개혁성이 유효한 사회에서 근대 프로젝트의 단절과 포스트모던으로의 해체는 하버마스가 푸코에 대해 공격한대로 ‘보수주의적’일 수 있다.

탈근대의 전제조건은 누가 뭐래도 ‘주체의 성숙’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회사는 다양성과 다원성을 갖추는 것이 선결조건이다.
양극화로 대표되는 계급 또는 계층간 불평등이 여전히 크고,
그 불평등이 교육을 통해 세대를 거쳐가며 여전히 확대재생산되는 우리 사회의 문제해결지점은 근대의 해체가 아니라 여전히 정치경제학적 문제에 있다는 생각이다.

우연이겠으나, 2008년 마지막 책으로 [철학, 도시를 디자인하다]를 읽게 되었다.
그리고 평소에 나름대로 관심이 있었던 분야를 정리하게 된 계기가 되었는데,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아주 뜻깊은 독서였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의 말을 보니, 아마도 이 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서양철학사에서 끈질기게 대치하고 경쟁했던 사상의 충돌을 그린 ‘생각의 전쟁’에 대한 이야기와, 이러한 생각의 전쟁에서 승리한 자의 오만과 독선을 논파한 ‘생각의 함정’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준비하고 있는 것 같다.
저자의 시도에 응원을 보내면서 또 하나의 의미있는 철학적 소산을 남겨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핏빛 자오선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이런 세계가 또 있는지, 아니면 이곳이 유일한 세계인지 궁금하군 그래. (p.409)

문장 하나하나에서 피가 뚝뚝 듣는 것 같았다.
장면 하나하나마다 약탈과 살육의 위협과 공포가 배어있었다.
마치 광대한 모래사막을 걷는 듯한 건조함. 뜨거운 사막의 햇살과도 같은 갑갑함.
차가운 사막의 밤과도 같은 공포. 사막의 모래폭풍과 같은 잔혹함이 숨김없이 드러나는 작품이었다.

[피빛 자오선]을 읽으면서 계속 생각나는 작품은 테츠오 하라의 [북두의권(북두신권)]이었다.
핵전쟁 이후의 황량함. 폭력만이 정의로 대우받던 시절.
강한 것은 선이며, 약한 것은 죄악이라는 인간 본성의 이분법이 자리하던 [북두신권].
그나마 [북두신권]에서는 인간의 양심을 지닌 주인공과 등장인물이라도 등장하지만,
[피빛 자오선]은 아예 인간의 양심이란 허구이며 폭력과 잔혹함만이 인간의 본성임을,
그리고 이 세계란 그와 같은 잔혹함이 만들어낸 비정함의 세계임을 그려준다.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영토분쟁이 끝나가던 무렵.
14살 한 소년이 가출하여 서부지역을 떠돌다가 글랜턴과 홀든 판사가 이끄는 ‘인디언 머리가죽 사냥꾼’들의 용병집단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소년은 학살과 피살, 약탈과 강탈, 살육과 도륙이 점철된 여정을 시작한다.
왜 그래야 하는지 의미를 알거나 묻지도 않은 채로...

예전에 서부영화를 보면 인디언들의 잔혹함을 보여주는 장면과 말이
‘머리가죽을 벗기는 인디언’이란 것이었다.
머리가죽을 벗기다니... 상상만 해도 구역질이 나고, 어떻게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그런 잔혹한 일을 할 수 있는지.
그러나 [피빛 자오선]에서는 그런 잔혹함이 늘상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그리고 그 일의 주체는 당초 알려진 인디언들이 아니다.
머리가죽을 벗긴 사람들은 백인들, 온갖 억지로 멕시코의 영토를 빼앗았던 미국인들, 평화롭게 살던 인디언의 땅을 빼앗은 미국인들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인간의 본성으로 얼굴을 교묘하게 감춘 미국식 자본의 미학, 미국식 패권의 미학이 숨어 있다.

역사적으로 미국은 다른 나라, 다른 민족, 다른 인종의 ‘머리가죽을 벗기는’ 가운데 성장해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3대 시민혁명으로까지 칭송받는 미국독립전쟁의 높은 이념....
그 이념은 인디언들을 삶의 터전에서 몰아내면서 허구성을 드러냈다.
그 이념은 흑인들을 노예로 부리면서 노동력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자 하는 자본의 추악함을 나타냈다.
북부의 노예해방론자들 역시 이러한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미국독립전쟁의 이념은 19세기 중반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그리고 20세기 후반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며 전세계에서 분쟁을 일으키면서 완전한 사망선고를 받은 것이다.
그 폭력의 미학, 패권의 미학, 자본의 미학, 피흘림의 미학,
나아가 ‘머리가죽 벗김’의 미학은 과연 이제 종식되었는가 진지하게 물어본다.

[피빛 자오선]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라 생각하는 홀든 판사는 마지막 장면에서 이렇게 자신을 합리화한다.

전쟁의 피에 자기 자신을 오롯이 바친 사람만이,
저 밑바닥으로 내려가 생생한 공포를 맛보고
급기야 참된 영혼으로 공포와 이야기 나누는 법을 배운 자만이
진정한 춤을 출 수 있네. (p.427)

판사는 계속하여 춤을 추고 또 춘다. 그는 결코 잠들지 않는다. 그는 결코 죽지 않는다.
홀든 판사를 미시화시켜서 인간 내면에 숨은 악한 본성으로 볼 수도 있고
아니면 이를 거시화시켜서 미국 사회가 걸어온 악한 본성으로 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모습은 죽지 않았다는 점이다.
마치 춤을 추듯이 자꾸만 모습을 바꾸면서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습관처럼, 당연한 것처럼 그 질서를 강요하고 받아들이라 한다.

자오선(meridian, 子午線)은 천구상에서 또는 지구상에서 한 점을 양 극(북극, 남극)과 연결한 선이다.
쉽게 말해서 ‘경도’라고 하는 것인데,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의 본초자오선을 기준으로 삼아 시각을 측정한다.
‘피빛 자오선’이란 제목은 시간이 흘러 한 자오선에서 다음 자오선으로 넘어갈 때
마치 그 자오선이 인간을 쓸어버리고 죽음으로 빠져들어가게 하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뒤를 돌아보면 핏빛이고, 앞으로도 핏빛을 예고하는 자오선의 이동.
코맥 매카시는 평화와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고
단호하게 폭력과 죽음을 직접 언급함으로써 그 거대해 보이는 피의 역사, 피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빠져나올지 되물어 보고 있다.

자, 그렇다면 현재의 핏빛 자오선을 건너가고 있는 우리의 선택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미집으로 가는 오솔길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전쟁은 모든 것을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만들어 버린다.
지배자들에게 전쟁은 자신의 개인적인 야욕을 실현시켜 주는 도구임과 동시에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이기 때문에
애국심과 투쟁심을 고취하기 위한 온갖 번지르르한 말들을 쏟아낸다.
그리고 전쟁을 이용하여 자신들에게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세력을 ‘악한 것’으로 규정하여 배제시키는 방법을 즐겨 사용한다.

그렇다면 일반 민중들에게 전쟁은 무엇일까?
이들에게 전쟁은 합목적적이지도 않으며,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어쩌면 그저 자기 나라에서 전쟁이 벌어졌다는 이유만으로 총칼을 들고 직접, 또는 후방에서 지원하며 간접적으로 나서야 하며,
그 과정에서 재산과 삶의 터전은 물론이고 생명을 잃을 위험까지도 감수해야 하는 사건이 건강이다.
따라서 오래전부터 지배자들이 무언가를 얻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다면’
민중들은 자신의 최소한의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전쟁에 ‘끌려들어간다’

 

이탈로 칼비노는 [거미집으로 가는 오솔길]에서 이처럼 전쟁에 ‘끌려들어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들이 지키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으며, 전쟁은 이들이 지키고자 한 것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매춘부인 누나와 함께 살고 있던 주인공 ‘핀’은 누나를 찾아오는 독일군에게서 권총을 훔친다.
권총을 자신만의 장소인 ‘거미집’에 감춘 핀은 감옥에서 탈출하여 독일군에 저항하던 레지스탕스들의 유격대에 속하게 된다.
어린아이라는 이유로 독일군과의 격렬한 전투에서 한 발 물러서 있던 어느 날
핀은 유격대를 떠나 권총을 숨겨두었던 거미집으로 향한 오솔길로 돌아온다.

 

핀이 속했던 레지스탕스 유격대의 사람들은 ‘이름’으로 불리워지지 않는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도 나오듯이
한 인물이 가지는 이름은 고유명사로서 그의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거미집으로 가는 오솔길]의 등장인물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라,
사촌, 오른팔, 왼손잡이, 헌병, 공작, 후작, 남작, 펠레 등등 비아냥의 뉘앙스가 담긴 그들만의 불리워진다.
그들에게는 레지스탕스라는 정체성도 부족하고, 공산주의든 파시즘이든 사상적 기반도 없었다.
그들은 어중이떠중이들이었고, 오히려 전쟁에 방해만 되는 쓸모가 없는 낙오자들이다.
이들이 전쟁에 참여한 이유는 간단했다. 자기가 가진 최소한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 아이는 왜 싸우는 것일까?
자신이 더 이상 창녀의 동생이 되지 않기 위해 싸운다는 것을 모르고 있겠지.
그리고 ‘남부 출신’의 네 동서들은 가난한 이주자이며 이방인으로 비치는 ‘남부 출신’이 되지 않기 위해 싸운다.
그리고 저 헌병은 자기 동료들과 붙어 다니는 똘마니, 헌병이라는 것을 느끼지 않기 위해 싸운다.
그리고 사촌은, 사람들은 그가 자신을 배반한 여인에게 복수하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우린 모두 비밀스러운 상처를 하나씩 가지고 있고 그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해 싸운다.
(page 161)

 

나는 개인적으로 칼비노가 말한 ‘상처’는 ‘희망’과 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벗어나고자 하는 상처란 것은 곧 새로운 자신의 희망이 되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핀이 숨겨놓은 권총은 상처의 의미 뿐만 아니라 자신이 최소한으로 수호하고자 하는 마지막 희망의 근거를 의미하는 것이며,
허구일지도 모르게 환상적으로 그려진 ‘거미집’은 전쟁이란 피폐상황 속에서 자신의 마지막 가치를 간직하고 있는 마음의 한 구석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상태에 있더라도 자기가 숨긴 권총을 생각하여 힘을 얻고,
자신만이 알고 있는 거미집으로 가는 오솔길에서 자기 정당성을 찾는 핀의 모습에서
총칼을 들지 않았다 뿐이지 ‘생존전쟁’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현재의 전쟁에 끌려나온 우리의 모습도 투영되는 것 같았다.

 

마지막에 핀이 마음을 연 진실된 친구 사촌을 얻어서
그 마음의 마지막 부분을 함께 공유하며 캄캄한 밤을 밝히는 반딧불 속으로 걸어 들어갔듯이
지켜야 할 희망의 근거를 공유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전쟁’ 속에 기대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펭귄의 섬 - 1921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아나톨 프랑스 지음, 김우영 옮김 / 다른우리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아나톨 프랑스의 [펭귄의 섬]은 금방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재미있는 책이지만,
그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은 이만저만 무거운 것이 아니었다.
그냥 단순히 말해도 한 국가의 역사를 담고 있는 책이라는 점에서 보통 무게가 아닌데,
인류가 처한 디스토피아와 그 속에서 지식인의 역할 등을 담은 주제의 무게가 더해져 있다.

경건한 마엘 신부는 어느 날 떠내려온 여물통을 타고 전도를 하던 중
북극까지 떠내려가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펭귄들을 만난 마엘 신부는 이들을 원주민으로 착각하고 세례를 준다.
동물이 세례를 받게 된 전대미문의 사건.
하느님은 결국 펭귄들에게 인간의 형상으로의 변화를 결정한다.
이제 펭귄의 역사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전쟁과 다툼이 난무하고, 권력관계가 성립하며,

신을 믿기도 하고 신을 이용하기도 하는 것으로 흘러간다.

디스토피아(Dystopia).
이 말은 ‘가상사회’라는 점에서 유토피아와 같지만, 그 성격은 전체주의적인 감시사회, big brother에 의한 통제사회 또는 인류의 멸망 이후 사회 등 매우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아나톨 프랑스의 [펭귄의 섬]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1921년은 매우 어수선한 시기였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무한한 진보에의 믿음은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으로 산산조각났다.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하여 찬란했던 유럽의 문명사회를 초토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대량학살하는 모습은 ‘동물보다 못한’ 인간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었고,
인간 문명의 총아였던 과학은 거꾸로 인간을 죽음으로 내몰아 가는 일에 복무하게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빈부의 격차는 갈수록 커져갔으며, 계급투쟁은 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격렬해졌다.
1920년대는 유럽의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던 유토피아적 환상 속에 디스토피아적 염세론이 비집고 들어가기 시작하던 시기이다.

왜 이런 디스토피아적 상황이 도래할 때까지 오게 되었는가?
아나톨 프랑스는 펭귄의 역사로 치환시켜 놓은 자기 조국 프랑스의 역사 속에서
디스토피아의 뿌리를 허황된 기존 질서에 대한 집착에서 찾고 있다.

프랑스혁명이 발생하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는 구체제가 가지고 있던 모순, 즉, 앙시앵 레짐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구체제의 모순이 프랑스혁명 이후에도 반복되었다는 데에 있다.
기존의 질서가 극복된 것이 아니라 교묘하게 치장된 채로 다시 확대재생산되는 것이다.
혁명 이전에는 귀족들에게 사회적 특권과 경제적 부가 집중되었다.
이 모순은 혁명 이후에도 ‘부르조아’라는 주체만 바뀌었을 뿐 다시 반복되었다.
혁명 이전에는 귀족과 성직자들이 결탁하여 모순된 사회체제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이 모순 역시 혁명 이후에도 지배층을 위한 종교, 옛 체제를 찬미하는 종교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러한 모순의 반복은 현대까지도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마도 [펭귄의 섬]을 보는 독자들은 1921년에 아나톨 프랑스가 보여준 혜안에 크게 탄복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뒤집어 말하자면, 당시의 문제점이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힘의 논리는 여전히 세계를 지배한다.
특권층으로의 사회적 권한과 부의 집중은 역시 여전히 존재한다.
변화를 이야기하는 움직임, 작은 저항은 권력관계의 유지를 위하여 간단히 무시된다.
사회의 유지와 통합을 위하여 다른 목소리, 소수자의 목소리는 인정받지 못한다.
세계 곳곳에서 지금도 인종청소가 일어나고,
산업화와 농업혁명으로 생산성은 갖추었지만 전세계의 절반은 굶주린다.
어쩌면 이제 인류는 멸망할지도 모른다.
마르크스가 말한 계급투쟁과 지배체제의 붕괴는 이제 한 계급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향한 예언이 되어 새롭게 탄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이런 상황은 어떻게 타개해야 할 것인가.
그냥 이렇게저렇게 흘러가는대로 적당히 살아가는 모습이어야 하는가.
아나톨 프랑스는 [펭귄의 섬]에서 <건초 8만단 사건>이란 사건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 사건은 1894년에 실제로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를 모델로 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사건 전개도 그렇고, 등장하는 인물들도 드레퓌스 사건의 실제 인물들을 모델로 하고 있다.
드레퓌스 사건의 구체적인 전개과정이나 의의에 대해서는
아르망 이스라엘의 [다시 읽는 드레퓌스 사건]이라는 별도의 책도 있고,
또 유명한 [거꾸로 읽는 세계사]의 첫 번째 장에도 잘 요약되어 설명되어 있으니 더 반복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나톨 프랑스는 드레퓌스 사건을 직접 경험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이 사건을 통해서 모순된 사회를 향해 냈던 용기있는 저항의 목소리를 암울한 현재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중요한 단초로 보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사건을 [펭귄의 섬] 속에 많은 분량으로 삽입하였다.

드레퓌스 사건은 유대인 희생양을 통해 국가 권력을 강화하고, 대중의 분노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자 권력에 의하여 조작된 사건이었다.
전체 프랑스 사회가 미치고 유대인들에 대한 근거없는 공격이 횡행할 때,
이 사건 뒤에 숨은 모순을 폭로하여 저항한 지식인들과 언론이 있었다.
그 유명한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라는 문장(지금 읽어봐도 대단한 문장이다!!!)
그리고 사회정의를 위해 함께 싸운 지식인들.

인류가 멸망한다면, 그것은 인류의 오만함에서 기인하는 것이리라.
나를 남보다 우월하게 여기고, 나보다 강한 자에게는 한없이 아부하면서 약한 자들 위에는 군림하고자 하는 오만함,
사회적으로 약한 사람들을 경시하고, 그들에 대한 차별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오만함.
자연과 생태계를 파괴하면서도 자신의 이익만을 유지하면 된다는 오만함 말이다.

이 오만함을 막기 위하여, 사회정의와 인간으로서의 겸손함을 실천하기 위하여 지식인들이나 언론은 용기있게 저항의 목소리를 내어야 하지 않을까?
점차 ‘정의’가 낯선 단어가 되어 가는 세상.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이면서도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애써 외면하고만 있는 세상. 
그  세상을 향하여 어떤 목소리를 낼 수 있을지 고민을 던져주는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암스테르담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제가 성격이 못되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블랙코미디 류의 작품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주인공들에게 다가오는 ‘운명의 장난’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사회가 가진 모순이 충돌해서 발생한 것이거나,
인간 본성의 약점에서 기인한 것임을 보여주는 블랙코미디는 어쩌면 소설이라는 일종의 허구를 그토록 오랫동안 존재하게 했던 힘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언 매큐언의 [암스테르담]은 인간 본성에 숨겨진 추악한 양면성과,
그 양면성이 사회적 위치와 결합되어 나타난 도덕이나 사회적 모랄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선적인지를 그야말로 신랄하게 까고(!!!) 있는 시원한 작품입니다.

구조주의나 후기구조주의 철학자들은
사회적 현상 뿐만 아니라 그 현상에 대한 해석이란 사회적 관계와 사회적 맥락 속에서
‘구성’되어지는 것이라고 파악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귀가 따갑게 듣고 있는 도덕 역시 교묘하게 ‘구성되어진’ 것은 아닌지 의심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은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배웠죠. 착하게 살아야 하고, 남을 돕고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까지는 그래도 고개를 끄덕일만합니다.
그런데 ‘국민의 일원’으로서 의무를 다하고 살아야 한다, 국가를 위해 개인은 희생해야 한다는 이야기에 오면 약간 고개가 갸우뚱해지는군요.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나 ‘국가의 안녕을 해치는 데모나 파업은 나쁜 것이다’라는 도덕에 오면 이것 참...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지경입니다.

도덕이나 사회적 규범이란 이런 것입니다.
누가 주장하느냐에 따라서, 누가 주도권을 잡고 있느냐에 따라서, 또 누가 그것을 이용하느냐에 따라서 나 이외에 다른 사람을 모두 ‘비도덕적’으로 몰아붙일 수도 있고,
또 이지메 현상에서 보이듯이 단순히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집단적 폭력이 가해지는 광기로 치달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암스테르담]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다들 각자의 도덕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가진 도덕의 위대함은 다른 상대방이 가진 도덕의 정당성 앞에 빛을 잃게 되고 위선으로 몰락해 버립니다.

클라이브는 예술가로서 자신의 세계, 자신의 감정을 소중히 생각합니다.
따라서 각자의 다른 취향을 인정해 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언론이라는 대중매체로 한 개인을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려 하는 버넌의 행각은 부도덕합니다.
그럼 클라이브가 행한 일, 즉, 강간미수범을 신고하지 않은 일은 개인의 취향이라는 도덕성으로 가려질까요?

버넌은 언론인으로서 공인인 외무장관의 독특한 취향을 알리는 것이 당연하며, 그것이 도덕적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황색저널리즘으로 비하하거나, 불의를 알리지 못하게 하는 것은 언론의 역할이 아닌 것이죠.
그런데 이런 버넌의 고상한 도덕성 이면에 외무장관 개인에 대한 사적인 감정이 개입되어 있는 것은 어떻게 해석하죠?

조지에게 아내인 몰리와 과거에 사귄 남자들은 모두 부정직한 사람일 수 있겠죠.
‘결혼의 신성성’이라는 신화와 같은 도덕율을 어기는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조지가 취한 사진의 공개라는 조치는 옳다고 할 수 있을까요? 거기다 재력을 바탕으로 한 특수관계를 이용해서까지 말이죠.

외무장관 가머니는 자칫 사회적 생명을 잃을뻔한 위기를 아내의 도움으로 일단 극복합니다.
클라이브와 마찬가지로 독특한 그의 취향은 ‘개인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조지나 아내인 로즈 앞에서는 어떨까요? ‘남의 아내와 놀아난 놈’이라고 비난한다면 가머니는 무엇이라 답합니까?
자신과 관련없는 아내의 힘으로 자기의 책임을 모면한 것은 고도의 이미지전술이 아닐까요?

그리고 버넌을 배신한 프랭크나 버넌의 성공을 배아파하며 떡고물이라도 기대하다가 일순 도덕의 투사로 변신하는 다른 언론사들도
자신이 외치는 도덕의 그림자 속에 지저분한 자기합리화와 자기정당화를 숨겨놓고 있을 뿐입니다.

많은 분들이 마지막 배경으로 ‘암스테르담’을 선택한 것에 대해 서평을 쓰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 분들 지적대로 네덜란드는 안락사, 낙태, 동성애, 매춘 등이 허용된 나라입니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안락사, 낙태, 동성애, 매춘에 대한 도덕적 잣대는 어떻습니까?
전통적인 도덕에서 이런 일들은 절대 허용될 수 없는 그야말로 ‘비도덕적’인 일들입니다.
입으로 지고지순한 도덕을 외쳤던 사람들이
‘비도덕적’인 곳에 들어가서, 가장 비도덕적인 방법인 ‘살인’을 통해 자신의 솟구치는 분노와 복수심을 해결하여 했다니...
역설적이지만, 그 도덕은 근거가 얼마나 허위적인 것이었나를 말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순간적이든 일정 기간이든 ‘비도덕적’일 수가 있습니다. 그게 불완전한 인간의 숙명이기도 하구요.
하지만 라인홀드 니버가 그의 명저인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말한 바와 같이
비도덕적인 세상에 대한 무조건적인 수용이나 배척 이상의 ‘변화’에 대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마음과 행동만은 잊지 않아야 할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