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빛 자오선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이런 세계가 또 있는지, 아니면 이곳이 유일한 세계인지 궁금하군 그래. (p.409)

문장 하나하나에서 피가 뚝뚝 듣는 것 같았다.
장면 하나하나마다 약탈과 살육의 위협과 공포가 배어있었다.
마치 광대한 모래사막을 걷는 듯한 건조함. 뜨거운 사막의 햇살과도 같은 갑갑함.
차가운 사막의 밤과도 같은 공포. 사막의 모래폭풍과 같은 잔혹함이 숨김없이 드러나는 작품이었다.

[피빛 자오선]을 읽으면서 계속 생각나는 작품은 테츠오 하라의 [북두의권(북두신권)]이었다.
핵전쟁 이후의 황량함. 폭력만이 정의로 대우받던 시절.
강한 것은 선이며, 약한 것은 죄악이라는 인간 본성의 이분법이 자리하던 [북두신권].
그나마 [북두신권]에서는 인간의 양심을 지닌 주인공과 등장인물이라도 등장하지만,
[피빛 자오선]은 아예 인간의 양심이란 허구이며 폭력과 잔혹함만이 인간의 본성임을,
그리고 이 세계란 그와 같은 잔혹함이 만들어낸 비정함의 세계임을 그려준다.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영토분쟁이 끝나가던 무렵.
14살 한 소년이 가출하여 서부지역을 떠돌다가 글랜턴과 홀든 판사가 이끄는 ‘인디언 머리가죽 사냥꾼’들의 용병집단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소년은 학살과 피살, 약탈과 강탈, 살육과 도륙이 점철된 여정을 시작한다.
왜 그래야 하는지 의미를 알거나 묻지도 않은 채로...

예전에 서부영화를 보면 인디언들의 잔혹함을 보여주는 장면과 말이
‘머리가죽을 벗기는 인디언’이란 것이었다.
머리가죽을 벗기다니... 상상만 해도 구역질이 나고, 어떻게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그런 잔혹한 일을 할 수 있는지.
그러나 [피빛 자오선]에서는 그런 잔혹함이 늘상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그리고 그 일의 주체는 당초 알려진 인디언들이 아니다.
머리가죽을 벗긴 사람들은 백인들, 온갖 억지로 멕시코의 영토를 빼앗았던 미국인들, 평화롭게 살던 인디언의 땅을 빼앗은 미국인들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인간의 본성으로 얼굴을 교묘하게 감춘 미국식 자본의 미학, 미국식 패권의 미학이 숨어 있다.

역사적으로 미국은 다른 나라, 다른 민족, 다른 인종의 ‘머리가죽을 벗기는’ 가운데 성장해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3대 시민혁명으로까지 칭송받는 미국독립전쟁의 높은 이념....
그 이념은 인디언들을 삶의 터전에서 몰아내면서 허구성을 드러냈다.
그 이념은 흑인들을 노예로 부리면서 노동력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자 하는 자본의 추악함을 나타냈다.
북부의 노예해방론자들 역시 이러한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미국독립전쟁의 이념은 19세기 중반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그리고 20세기 후반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며 전세계에서 분쟁을 일으키면서 완전한 사망선고를 받은 것이다.
그 폭력의 미학, 패권의 미학, 자본의 미학, 피흘림의 미학,
나아가 ‘머리가죽 벗김’의 미학은 과연 이제 종식되었는가 진지하게 물어본다.

[피빛 자오선]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라 생각하는 홀든 판사는 마지막 장면에서 이렇게 자신을 합리화한다.

전쟁의 피에 자기 자신을 오롯이 바친 사람만이,
저 밑바닥으로 내려가 생생한 공포를 맛보고
급기야 참된 영혼으로 공포와 이야기 나누는 법을 배운 자만이
진정한 춤을 출 수 있네. (p.427)

판사는 계속하여 춤을 추고 또 춘다. 그는 결코 잠들지 않는다. 그는 결코 죽지 않는다.
홀든 판사를 미시화시켜서 인간 내면에 숨은 악한 본성으로 볼 수도 있고
아니면 이를 거시화시켜서 미국 사회가 걸어온 악한 본성으로 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모습은 죽지 않았다는 점이다.
마치 춤을 추듯이 자꾸만 모습을 바꾸면서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습관처럼, 당연한 것처럼 그 질서를 강요하고 받아들이라 한다.

자오선(meridian, 子午線)은 천구상에서 또는 지구상에서 한 점을 양 극(북극, 남극)과 연결한 선이다.
쉽게 말해서 ‘경도’라고 하는 것인데,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의 본초자오선을 기준으로 삼아 시각을 측정한다.
‘피빛 자오선’이란 제목은 시간이 흘러 한 자오선에서 다음 자오선으로 넘어갈 때
마치 그 자오선이 인간을 쓸어버리고 죽음으로 빠져들어가게 하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뒤를 돌아보면 핏빛이고, 앞으로도 핏빛을 예고하는 자오선의 이동.
코맥 매카시는 평화와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고
단호하게 폭력과 죽음을 직접 언급함으로써 그 거대해 보이는 피의 역사, 피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빠져나올지 되물어 보고 있다.

자, 그렇다면 현재의 핏빛 자오선을 건너가고 있는 우리의 선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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