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의 섬 - 1921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아나톨 프랑스 지음, 김우영 옮김 / 다른우리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아나톨 프랑스의 [펭귄의 섬]은 금방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재미있는 책이지만,
그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은 이만저만 무거운 것이 아니었다.
그냥 단순히 말해도 한 국가의 역사를 담고 있는 책이라는 점에서 보통 무게가 아닌데,
인류가 처한 디스토피아와 그 속에서 지식인의 역할 등을 담은 주제의 무게가 더해져 있다.

경건한 마엘 신부는 어느 날 떠내려온 여물통을 타고 전도를 하던 중
북극까지 떠내려가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펭귄들을 만난 마엘 신부는 이들을 원주민으로 착각하고 세례를 준다.
동물이 세례를 받게 된 전대미문의 사건.
하느님은 결국 펭귄들에게 인간의 형상으로의 변화를 결정한다.
이제 펭귄의 역사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전쟁과 다툼이 난무하고, 권력관계가 성립하며,

신을 믿기도 하고 신을 이용하기도 하는 것으로 흘러간다.

디스토피아(Dystopia).
이 말은 ‘가상사회’라는 점에서 유토피아와 같지만, 그 성격은 전체주의적인 감시사회, big brother에 의한 통제사회 또는 인류의 멸망 이후 사회 등 매우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아나톨 프랑스의 [펭귄의 섬]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1921년은 매우 어수선한 시기였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무한한 진보에의 믿음은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으로 산산조각났다.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하여 찬란했던 유럽의 문명사회를 초토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대량학살하는 모습은 ‘동물보다 못한’ 인간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었고,
인간 문명의 총아였던 과학은 거꾸로 인간을 죽음으로 내몰아 가는 일에 복무하게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빈부의 격차는 갈수록 커져갔으며, 계급투쟁은 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격렬해졌다.
1920년대는 유럽의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던 유토피아적 환상 속에 디스토피아적 염세론이 비집고 들어가기 시작하던 시기이다.

왜 이런 디스토피아적 상황이 도래할 때까지 오게 되었는가?
아나톨 프랑스는 펭귄의 역사로 치환시켜 놓은 자기 조국 프랑스의 역사 속에서
디스토피아의 뿌리를 허황된 기존 질서에 대한 집착에서 찾고 있다.

프랑스혁명이 발생하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는 구체제가 가지고 있던 모순, 즉, 앙시앵 레짐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구체제의 모순이 프랑스혁명 이후에도 반복되었다는 데에 있다.
기존의 질서가 극복된 것이 아니라 교묘하게 치장된 채로 다시 확대재생산되는 것이다.
혁명 이전에는 귀족들에게 사회적 특권과 경제적 부가 집중되었다.
이 모순은 혁명 이후에도 ‘부르조아’라는 주체만 바뀌었을 뿐 다시 반복되었다.
혁명 이전에는 귀족과 성직자들이 결탁하여 모순된 사회체제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이 모순 역시 혁명 이후에도 지배층을 위한 종교, 옛 체제를 찬미하는 종교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러한 모순의 반복은 현대까지도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마도 [펭귄의 섬]을 보는 독자들은 1921년에 아나톨 프랑스가 보여준 혜안에 크게 탄복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뒤집어 말하자면, 당시의 문제점이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힘의 논리는 여전히 세계를 지배한다.
특권층으로의 사회적 권한과 부의 집중은 역시 여전히 존재한다.
변화를 이야기하는 움직임, 작은 저항은 권력관계의 유지를 위하여 간단히 무시된다.
사회의 유지와 통합을 위하여 다른 목소리, 소수자의 목소리는 인정받지 못한다.
세계 곳곳에서 지금도 인종청소가 일어나고,
산업화와 농업혁명으로 생산성은 갖추었지만 전세계의 절반은 굶주린다.
어쩌면 이제 인류는 멸망할지도 모른다.
마르크스가 말한 계급투쟁과 지배체제의 붕괴는 이제 한 계급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향한 예언이 되어 새롭게 탄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이런 상황은 어떻게 타개해야 할 것인가.
그냥 이렇게저렇게 흘러가는대로 적당히 살아가는 모습이어야 하는가.
아나톨 프랑스는 [펭귄의 섬]에서 <건초 8만단 사건>이란 사건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 사건은 1894년에 실제로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를 모델로 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사건 전개도 그렇고, 등장하는 인물들도 드레퓌스 사건의 실제 인물들을 모델로 하고 있다.
드레퓌스 사건의 구체적인 전개과정이나 의의에 대해서는
아르망 이스라엘의 [다시 읽는 드레퓌스 사건]이라는 별도의 책도 있고,
또 유명한 [거꾸로 읽는 세계사]의 첫 번째 장에도 잘 요약되어 설명되어 있으니 더 반복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나톨 프랑스는 드레퓌스 사건을 직접 경험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이 사건을 통해서 모순된 사회를 향해 냈던 용기있는 저항의 목소리를 암울한 현재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중요한 단초로 보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사건을 [펭귄의 섬] 속에 많은 분량으로 삽입하였다.

드레퓌스 사건은 유대인 희생양을 통해 국가 권력을 강화하고, 대중의 분노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자 권력에 의하여 조작된 사건이었다.
전체 프랑스 사회가 미치고 유대인들에 대한 근거없는 공격이 횡행할 때,
이 사건 뒤에 숨은 모순을 폭로하여 저항한 지식인들과 언론이 있었다.
그 유명한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라는 문장(지금 읽어봐도 대단한 문장이다!!!)
그리고 사회정의를 위해 함께 싸운 지식인들.

인류가 멸망한다면, 그것은 인류의 오만함에서 기인하는 것이리라.
나를 남보다 우월하게 여기고, 나보다 강한 자에게는 한없이 아부하면서 약한 자들 위에는 군림하고자 하는 오만함,
사회적으로 약한 사람들을 경시하고, 그들에 대한 차별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오만함.
자연과 생태계를 파괴하면서도 자신의 이익만을 유지하면 된다는 오만함 말이다.

이 오만함을 막기 위하여, 사회정의와 인간으로서의 겸손함을 실천하기 위하여 지식인들이나 언론은 용기있게 저항의 목소리를 내어야 하지 않을까?
점차 ‘정의’가 낯선 단어가 되어 가는 세상.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이면서도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애써 외면하고만 있는 세상. 
그  세상을 향하여 어떤 목소리를 낼 수 있을지 고민을 던져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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