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퀴엠 - CJK - 죽은자를 위한 미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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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죽음을 피하지 못한다. 죽음 이후에 되살아나는 사람도 없다.
그리고 죽기를 원하는 사람 역시 없다.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이나 생명을 걸고 대의를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도 애초부터 죽음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죽은 자의 영혼은 그가 누구든 위로를 받아야 한다.
이 단순한 경험칙이 인류에게 종교와 제의라는 특수한 형식을 낳게 했다.

진중권의 [레퀴엠]은 전통적인 레퀴엠 가사를 이용하여 작성된 인간의 죽음에 관한 글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인간의 죽음에 관한 글이라기보다 ‘전쟁’에 관한 글이라고 하는 편이 정확하다.
그는 왜 다양한 죽음 가운데 전쟁으로 인한 죽음을 다루었을까?
나는 전쟁에서의 죽음은 세 가지 특징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첫째, 죽음의 규모가 대규모이다. 이런 특징은 쓰나미나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 대규모 참사와 사고로 인한 죽음에도 해당된다.
둘째, 재해나 사고로 인한 죽음이 ‘순간’에 일어난다면, 전쟁으로 인한 죽음은 특정한 ‘기간’을 두고 일어난다.
이는 전쟁을 겪는 사회에서는 최소한 그 기간만큼은 죽음이 일상화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재해나 사고로 죽은 자들이 거의 모두 ‘피해자’인 반면, 전쟁에는 ‘가해자’가 존재한다.
이는 전쟁이 정치적, 사회적 현상으로서, 어떤 ‘의도’가 반영된 현상임을 의미한다.
정리하자면, 전쟁으로 인한 죽음은 <정치적, 사회적 의도를 가지고 일상화되어 버린 대규모 죽음>이라고 하겠다.

전쟁으로 인한 죽음의 첫 번째 대상자는 역시 전선의 병사들이다.
원해서였든 강제로였든 최일선에 나온 병사들은 적군이 아니라 사신(死神)과 싸워야 한다.
그래서 병사들은 전투가 끝나고 녹초가 된 몸을 참호에 누이면서 꿈에서만이라도 고향을 그리고, 가족들을 그리고, 사랑하는 연인을 그린다.
<릴리 마를렌(Lili Marleen>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선의 노래로 불렸던 이유는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전쟁으로 사랑하는 연인과 이별해야 했던 가슴 아픈 경험과 재회의 소망을 담은 노래 <릴리 마를렌>은 원래 독일에서 만들어진 노래였으나,
그 경쾌한 음율과 가슴저린 노랫말로 모든 병사들에게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오죽하면 이 노래가 나오던 9시 55분은 서로 암묵적 휴전상태였다고 했다나...
<릴리 마를렌>에 얽힌 유명한 이야기도 있다.
독일군 참호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오자 반대편 영국군 참호에서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Please louder!"

그러니까 독일군이든 소련군이든 영국군이든 미군이든 그 어떤 병사라 할지라도,
그들이 ‘군복’이라는 송아지 가죽을 뒤집어쓰기 전에는, 그리고 그 가죽 위에 ‘국가’라는 뜨거운 불도장이 찍히기 전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총부리를 들이댈 이유가 전혀 없는 똑같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무기를 버리고, 군복을 벗고, 지옥같은 전선을 떠나 저마다 사랑하는 릴리 마를렌을 찾아간다. 비록 그 밤이 지나면 다시 사신(死神)의 끄나풀이 될 지라도.

전쟁은 또한 아무 죄도 없는 민간인의 희생을 불러온다.
사실 이런 점 때문에라도 전쟁은 ‘필요악’이 아니라 ‘절대악’이다.
2003년에 이라크를 해방시킨다는 명분으로 바그다드를 폭격한 미군과 영국군 사령관들은 민간인 희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다. “어느 것도 완전한 해결책은 없다.”
아니... 해결책은 있었다. 핵무기가 있네, 대량살상무기가 있네 하는 증명되지 않은 명분을 갖다 맞춰놓은 전쟁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이런 점에 있어서 당시 우리나라 정부가 미국의 파병요구에 응한 것이 아쉽기만 하다.
그리고 이 결정은 개인적으로 참여정부에 실망하게 된 두 가지 사건 중에 하나이다.
당시 참여정부는 기존 정부들과 달리 대미관계에 있어서 자주성을 강조하였건만,
이라크 전쟁으로 인한 미국의 파병요구에 “국익을 위해서”라는 말로 응하였다.
‘이라크 민중의 해방’, ‘대량 살상무기 제거’와 같은 미국이 내건 명분이 허황된 것임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 아닌가.
결국 그들의 목적은 중동의 석유자원을 확보하고 친미 정권을 세워서 그 지역의 반미 국가들(특히 이란)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 뻔한데, 거기에 생뚱맞게 우리나라의 국익이 왜 들어가는지...
혹시라도 전후 복구에서 떨어질 경제적 떡고물을 기대하며 ‘국익’ 운운했나?
민간인 사망자와 부상자의 참혹한 광경, 가족을 잃은 어린아이의 공포와 망연자실, 삶의 의미가 송두리째 뽑혀진 그 곳을 보면서 돈 벌 궁리나 하고 있었단 말인가?
내가 지지했던 정부, 그래도 내가 표를 던져서 뽑은 정부는 우리가 가해자로 참여했던 베트남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단 말인가?

불타는 로마를 바라보며 안전한 황궁에 거했던 네로 황제는 그걸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시를 짓고 노래를 불렀겠지만,
로마 시민들은 생명과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우리는 네로 황제의 편을 들어야 하는가, 로마 시민의 편을 들어야 하는가?
파병 찬성 시위를 벌이며 ‘한미 혈맹’, ‘국익’ 운운하면서 이라크에서 벌어지는 일이 남의 일인 것처럼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
생지옥에 가족을 둔 이라크인들은 초라하게 앉아 슬픔과 걱정으로 식사도 하지 못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누구의 편에 서야 했는가?

대량 살상에 가해자가 있으며, 가해자가 승리자가 되는 순간 그가 행한 가해는 역사적 정당성을 획득한다는 것도 전쟁의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이다.
어느 프랑스 정치학자의 말을 인용해 보자면, “오늘날 전세계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유일한 위협은 오직 미국 자체다” 맞는 말이다.
우리 입장에서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가 두려운 이유는 그 원칙이 언제 어느 때고 한반도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베트남과 이라크를 비롯한 세계 각처에 엄청난 폭탄을 떨어뜨렸던 미군 폭격기가 한반도 상공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우리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미국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정치적 실체가 한반도 북쪽에 있으니까.

그런데 여기서 정말정말 웃기는 일이 일어난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부시 대통령이나 미국인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Pax Americana를 부르짖을 수 있다고 인정하자.
하지만 대한민국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걸핏하면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어대며
‘한미동맹 강화’,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를 외치는 한미동맹교 교주와 신자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란 말인가.
미국이 벌이는 전쟁에 온갖 도덕덕 정당성을 부여하고 파병이나 금전적 지원 등 실질적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목놓아 주장하는 사람들이여!
그 정성의 아주 조금이라도 양심의 소리에 귀기울여 죄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없겠는가.

진중권의 [레퀴엠]은 170여 페이지 정도 되는 얇은 책이면서, 짤막한 8개의 이야기로 다시 구분해 놓아 어려움없이 읽힌다.
하지만 서문에 써놓은 그의 말은 보통 무거운 무게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야만은 아직 우리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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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사생활
이응준 지음 / 민음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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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사생활]은 흥미있는 텍스트다. 물론 소설적 재미라든가 작가의 자료조사에서 나온 개연성 있는 상상도 좋지만, 이 작품은 현재 우리나라와 사회가 맞닥뜨려 있는 가장 거시적인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생각해 볼 여지가 많은 작품이다.
오랫동안 통일은 우리 민족의 최대 과제로 ‘우리의 소원’이라는 당위성을 가져 왔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보자. 통일을 원하는가? 원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되어야 하겠는가? 오히려 통일된 이후가 두렵지 않은가?
글이 좀 딱딱해질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미리 ‘예방접종’ 삼아 말해 둔다.

반세기 넘게 분단되어 있던 두 개의 한국, 즉, 남한과 북한은 마침내 2011년에 남한의 흡수통일에 의해 통일을 이룬다. (이제 보니 1년 남짓 남은 셈이다!!!) 그리고 [국가의 사생활]은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과연 지상명령과 같았던 남북통일 이후 우리의 삶은 더 나아졌는가?’

작가는 이 질문에 디스토피아의 암울한 상황으로 답한다.
휴전선이 걷혀 영토상의 통일은 이루어졌으나 남한과 북한 주민들 사이에는 갈등과 반목만이 존재한다. 빈부격차와 사회적 차별은 고착화되어 가기만 하고, 식량은 부족하여 북한주민들의 거주지에서는 도둑고양이조차 씨가 마른다. 북한군의 무기로 무장한 폭력조직이 난립하고 살인, 강도, 폭행이 횡행하는 한편 공공연하게 마약이 판매된다.
행복이란 찾아볼 수 없는 통일한국의 황폐한 모습을 통해 작가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 셈이다. “통일의 당위성 못지않게 통일에 대한 준비가 중요하다.”

[국가의 사생활]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남한이 북한을 ‘흡수통일’하였다는 점이고, 이것이 통일 한국이 맞이한 디스토피아의 큰 원인이 되었다는 점이다.
북한의 현재 정치경제 체제의 급속한 붕괴 후에 강력한 일방이 우위에 선 종속적 관계에서의 통일, 그러니까 남한이 주도하는 흡수통일은 아직도 네오콘들에 의해서 주장되는 통일방안이다. 뭐.. 통일방안이야 각자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니 그 양반들을 공격할 생각은 없다. 그리고 실패한 북한의 현재 체제가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흡수통일은 그렇지 않아도 엄청나게 소요될 사회적 비용을 더욱 증가시킬 것이라는 지적이 만만치 않다. 아무리 남한의 경제수준이 북한보다 월등하게 높다고 하더라도 급격한 체제 변동은 이 격차를 뛰어넘는 비용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취약계층을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현재 남한은 북한의 체제가 붕괴할 경우 발생할 엄청난 탈북자와 난민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부족하다. 그들은 복잡한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능숙하지 않으며, 60년이 넘는 분단으로 고착화된 이질감을 단번에 해소할만큼 변신에 익숙하지도 않다. 이들은 고스란히 통일한국의 주변인으로 전락하고 이들의 거주지는 게토가 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방파제와 같던 북한 체제가 붕괴하고 미국의 영향력이 강한 남한정부가 주도하는 통일한국을 중국이나 러시아가 얼씨구나 환영하겠는가? 흡수통일은 한반도를 또다시 주변국의 각축장으로 변모시킬 위험성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다.

[국가의 사생활]이 그리는 디스토피아가 그냥 소설적 허구였으면 좋겠다. 그냥 한 소설가의 상상에서 그치고 영화 정도로나 제작되었으면 좋겠다. 너무 암울하고 비극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암울한 건 저런 소설적 상황이 충분히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는 점이다.
그래서 디스토피아를 허구로 만들려면 흡수통일은 지양되고 먼 길이지만 점진적인 통일방안이 옳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북한 주민의 극악한 생활수준을 그래도 어느 정도는 끌어 올려야 하지 않을까. 그 과정에서 필요하다면 국제사회나 남한 정부의 지원도 지속되어야 할 것이고. 남북한 간의 복잡한 상황이야 십분 이해한다고 쳐도, 도대체 틈만 나면 북한주민의 인권 운운하는 사람들이 왜 북한에 식량을 지원해도 반대, 의약품을 지원해도 반대만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사실 이런게 인권의 최소한의 필요충분조건 아닌가.
그들 말마따나 ‘거지 같이 빈곤한’ 북한 주민들이 통일된 후에 어디로 가겠는가? 그들의 표현대로 ‘사회보장비용을 축내던가’, ‘사회악의 근원’이 될텐데, 통일이라는 변동이 가져올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북한 주민의 삶의 질을 남한 주민의 절반 정도만이라도 끌어 올리는 게 오히려 유리하게 생각되지 않는가.

다시 한 번 반복하건데, [국가의 사생활]에 나온 통일한국의 황폐함을 미리 방지하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한 문제다. 당위적 통일이 우리를 불행하게 하고, 날로 높아져 가는 사회적 비용을 부담하기 위해 지금보다 허리띠를 더 졸라매면서 ‘차라리 통일이 되지 말았으면...’이라고 한탄한다면 그보다 더한 비극이 어디 있겠는가? ‘꿈에도 소원이었고, 이 정성을 다해서’ 이룩한 ‘우리의 소원’으로부터 배신당한 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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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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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이 되어도 캄캄해지지 않고 환하다면 무슨 느낌일까?
백야(白夜) 현상을 본 적 없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신기한 구경거리일 것이겠으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엄청나게 피곤한 일일 것 같다. 잠을 자고 쉬어야 하는 때가 밤인데, 대낮같은 밤이 얼마나 사람을 짜증나게 하겠는가? 그것도 후텁지근한 여름에 말이다.
‘환한 밤’은 이율배반적 모순표현이다. 밤은 캄캄해야 한다는 경험논리에 대한 모순이며, ‘환하다’라는 말의 긍정적 의미가 짜증의 원천이 되는 의미의 역설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모순, 그 백야(白夜)가 현실에 실제로 있는 현상이란 점이다!!!!
[죄와 벌]은 ‘환한 밤’과 같은 소설이라고 멋대로 규정내려 버린다. 경험과 이성, 논리로 해(解)를 구할 수 없는 이율배반적 인간성을 가진 등장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들이 이중삼중으로 얽혀 이루어지는 수많은 조합 속에 궁극적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인간성의 모순이 마치 ‘밤은 밤이로되 잠들지 못하는 환한 밤’처럼 펼쳐지기 때문이다.

뻬쩨르부르그의 후텁지근한 날씨가 주는 찝찝함을 가지고 [죄와 벌]은 시작한다.
‘살인’ 여부를 두고 갈등하던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는 마침내 도끼를 휘둘러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살해한다. 여기서 첫 번째 모순이 발생한다. 살인은 당연히 죄, 그것도 아주 무거운 죄에 해당한다. 그런데 그의 이성은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 그는 피해자를 사람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더러운 기생생물인 ‘이’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라스꼴리니꼬프에게 인간의 종류는 ‘비범한 인간’과 ‘평범한 인간’의 두 종류이다. 그리고 비범한 인간에게는 인류발전을 위해 도덕과 법, 윤리를 초월하는 모든 행동이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기 때문에 죄를 뉘우치는 일이란 있을 수 없다.
‘이 한 마리 잡아 죽였다고 누가 나에게 손가락질 하랴? 이건 죄가 아니라 비범한 내가 인류를 위해 행하는 거룩한 의식이다’ 뭐... 요약하면 이런 생각이다.

그런데 어쩌나. 라스꼴리니꼬프의 이 숭고한 이성이 고양되어 형성된 자의식은 논리적으로도 모순이거니와 신성해 보이는 신념과 목적 역시 허구임이 금세 폭로된다. 여기서 모순의 모순이 발생한다. 먼저 라스꼴리니꼬프의 ‘비범인 vs 범인’의 논리가 가지는 허점은 분명하다. 그의 친구 라주미힌이 말했듯이 그런 논리야말로 ‘합법적으로 피를 흘려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위험한, 유혈을 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굳게 믿고 있는 ‘비범인의 도덕초월성’이란 신념도 실상은 죄의식을 가리고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다. 노파와 그녀의 여동생 리자베따를 살해한 그 순간부터, 아니 살인을 계획했던 순간부터 라스꼴리니꼬프는 극심한 불안과 고통, 두통과 불면증, 수시로 찾아드는 졸도에 시달린다. 라스꼴리니꼬프 본인은 인정하고 있지 않지만, 이러한 현상은 양심의 가책과 죄의식에서 나오는 고통이며, 언제 자신의 범죄행각이 만천하에 알려져 교수대 사형집행 또는 시베리아 유형의 길로 나서게 될지 모르는 불안감의 발로이다.

그러니까, 결국 라스꼴리니꼬프가 범한 ‘죄’란 무엇이었나? 살인죄? 위증죄? 절도죄? 형법 법전에나 나오는 그런 딱딱한 죄 말고. 내가 생각하기에 그의 가장 큰 죄는 자신을 속인 거다.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한 거다. 자기 영혼은 죄의식으로 채워져 가는데, 이성으로는 그걸 거부하면서 스스로를 정당화시키는 것이 그의 ‘죄악’이다. 폐결핵에 걸린 친구를 도와주고 불에 타서 죽을 뻔한 아이를 살리고, 생면부지의 마르멜라도프가 마차에 치어 죽게 되었을 때 전재산을 털어 유족들은 도왔던 라스꼴리니꼬프가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거리낌없이 도끼를 휘두른다? 이건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어딘가 안 어울리지 않은가? 이게 뭔가? 마음속에 선한 영혼과 선한 목적, 선한 수단이 있다는 것을 모두 인정하는 그가 일순간의 사상에 경도되어 인간을 ‘이’로 파악한 것도 ‘죄’이지만, 자기 마음속에 있는 선함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악으로 속이는 모습이야말로 바로 그의 ‘제1의 죄’이다. 그 이중성, 그 모순, 그 이율배반, 그 격렬한 ‘두 세계’의 싸움이 보여주는 역설의 파워게임.

서구 사회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죄’와 그에 따르는 ‘형벌’은 등가의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인식된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는 낙원에서 쫓겨났고, 신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억울하게(?) 죽은 이유도 바로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죄에는 반드시 형벌 또는 희생이 따른다. 그럼 라스꼴리니꼬프가 받은 ‘벌’이 무엇인가?

라스꼴리니꼬프는 종국에 가서 자신이 살인범임을 자백하고 8년 동안의 시베리아 유형생활에 들어간다. 물론 시베리아 유형도 법적인 ‘형벌’에 틀림없겠으나, 이건 그가 한 살인에 대한 처벌에 불과할 뿐, 스스로를 속이고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애써 외면했던 죄에 대한 벌은 아니다. 그가 받은 진짜 형벌은 다른 곳에 있다. 라스꼴리니꼬프의 삶은 마치 황량하고 차가운 시베리아 벌판처럼 살인을 저지르고 난 후 파멸로 치닫는다. 그는 스스로 불안과 고통에 허덕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그가 맺어 놓은 관계가 모조리 비정상적으로 왜곡되어 버린다. 최후의 순간까지 그는 전당포 노파를 백해무익한 벌레로 간주한 행위를 이성과 논리로 정당화하면서도 동시에 혹시나 자신의 행위가 드러났을까 전전긍긍한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행위가 드러날 위험에는 정신착란 증세를 보일 정도로 모든 의지력을 상실한다.

이 과정에서 어머니 뿔헤리야와도, 여동생 두냐와도 사랑의 관계가 단절된다. 친구의 조언도 소용없고, 그동안 그가 쌓아왔던 학문과 지적인 성찰, 잘생긴 외모도 모두 껍데기에 불과한 것으로 전락한다. 그의 삶에서 이제 사랑, 안정, 여유, 기쁨과 같은 가치들은 찾아볼 수 없다. 그의 양심은 빈사상태에 빠졌고, 그의 이성은 정당성을 잃었다. 자수하기 전까지 라스꼴리니꼬프의 겉모습인 육체는 자유였다. 그는 숨쉬고 두 발로 걸어다니며 이야기를 하며 뻬쩨르부르그를 헤맨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이미 죽었다. 그는 자신을 지탱해주던 모든 것에서 단절되었다. 이것이 그가 죄의 대가로 받은 ‘형벌’이다.

죽은 영혼을 구원하는 방법은 희생과 참된 참회밖에 없다. 이를 위해 소냐라는 여성이 등장한다. 그녀는 최하층인이기 때문에 재산도, 명예도 없다. 아버지는 비명횡사했고, 어머니는 폐결핵에 정신착란으로 생을 마감했다. 직업? 백주대낮에도 돌팔매질이 가해질 수 있고 공공연하게 차별을 받아도 당연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지던 사람이 기독교적 가치관이 뿌리내린 사회에서의 ‘창녀’ 아닌가.

그러나 소냐는 라스꼴리니꼬프와 달리 영혼이 살아있는 여성이었다. 그래서 신약성서에 나오는 <라자로 이야기>를 원용하여 볼 경우 소냐가 예수 그리스도라면, 라스꼴리니꼬프는 죽어 무덤 속에 매장된 라자로에 해당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라자로는 죽은지 나흘이 지나 시체에서 썩은 냄새가 풍길 정도였으나 예수 그리스도가 그를 부활시킨다. 무덤에서 걸어나온 라자로를 보고 예수 그리스도가 내린 첫 번째 명령이 이것이었다. “풀어 놓아서 다니도록 해라.”

라스꼴리니꼬프의 영혼은 이미 죽었다. 그의 영혼에서는 자기기만과 이율배반의 악취가 풍겼고, 그의 이성은 스스로를 ‘비범인’으로 특출나게 생각하는 광포함에 둘둘 말려 있었다. 그가 구원을 얻고 부활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둘러쳐진 이성의 덮개를 걷어버리고 솔직한 영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후, 자신이 느끼는 죄의식과 가책,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임으로써 단절되었던 주위와의 관계를 복원시키는 것이다. 즉, 그에게도 ‘풀어 놓아 다니게 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고, 바로 그것이 구원인 것이다.

그래서 소냐는 라스꼴리니꼬프에게 두 가지 참회의 방법을 제안한 것이었다. 자수하여 자신의 죄를 고백하라는 것과 함께 ‘대지에 키스할 것’ 말이다. 자수하여 죄를 인정하는 것이 표면적인 것이라면 대지에 키스하는 것은 죽은 라스꼴리니꼬프의 영혼을 부활시키고 단절된 관계를 처음으로 되돌리는 아주 중요한 의식인 것이다. [죄와 벌]의 이 장면은 읽을 때마다 내게 가장 큰 감동을 주는 부분이다. 아직 라스꼴리니꼬프의 영혼은 완벽하게 부활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땅에 입을 맞추는 순간 마치 꽉 막혀 있던 물길이 뚫리면서 맑은 물이 흘러 넘쳐 들어오듯, 대지의 신선한 기운이 그의 영혼에 힘을 공급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는 갑자기 소냐의 말이 생각났다. <네거리에 가서 사람들에게 절을 하고 대지에 키스하세요. 당신은 대지 앞에 죄를 지었으니까요. 그리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소리 내어 말하세요. “내가 죽였습니다”라고.> 그는 그 말을 기억해 내고,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 출구가 없는 비탄과 그동안, 특히 지금 몇 시간 동안의 불안이 그를 너무나도 깊이 압박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금방 이 완전하고 새롭고 충만한 감정 속으로 뛰어들어 버렸다. 감동이 발작처럼 갑자기 그에게 북받쳐 올랐던 것이다. 한꺼번에 그의 마음은 녹아 내렸고, 눈물이 쏟아졌다. 그는 서 있던 모습 그대로 땅에 엎드렸다. 그는 광장의 한가운데에 무릎을 꿇고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고는 달콤한 쾌감과 행복감을 느끼면서 더러운 땅에 입을 맞추었다. (p.774)

이제 ‘환한 밤’이라는 모순과 역설의 시기는 지나갔다. 마지막 에필로그의 배경이 ‘부활절’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라스꼴리니꼬프의 영혼은 새롭게 살아 부활하는 길에 들어선다. 답답하고 짜증나던 여름의 후텁지근함은 부드럽고 포근한 봄날의 햇볕으로 바뀐다. 소냐와 라스꼴리니꼬프는 불꽃과 얼음이 마주치는 것과 같이 격렬했던 ‘두 세계’의 투쟁에서 승리한 것이다. 역시 도스토예프스키답다. 왜 그를 ‘본좌’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지 알 것 같다.

덧붙여서 1
소냐와 라스꼴리니꼬프에 가려져서 그렇지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그야말로 연구(?)가 필요한 인간이다. 선함을 가리는 악함을 풀어 놓아야만 구원을 얻는 라스꼴리니꼬프와 정반대로 그는 악함이 선함과 고뇌로 치장되어 있는 인물이다. 라스꼴리니꼬프와 정반대의 투쟁이 필요한 인간형인 것 같은데, 이런 인물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권총자살’이라는 편안한 방법을 선택한 것일까?

덧붙여서 2
독일의 작가 토마스 만이 도스토예프스키를 평한 말, “도스토예프스키는 육체와 영혼의 고귀함보다는 불행과 악덕, 욕망과 범죄에 기독교적인 공감을 보인 작가였다.” 와! 역시! 말만 멋진 게 아니라 그야말로 명쾌하다. 토마스 만의 평가는 [죄와 벌]에서 시작하여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로 이루어지는 도스토예프스키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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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 민음사 모던 클래식 10
재닛 윈터슨 지음, 김은정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1.
기도와 선교에 편집증적으로 집착하는 한 어머니가 어린 여자아이를 입양한다.
그리고 입양된 딸에게는 ‘하느님께 바쳐져 살아갈 것’을 인생의 목표로 주입시킨다.
충실히 하느님의 어린 양으로 자라는 것 같던 딸은 어느 날 시장에서 한 소녀를 만나게 되고 뜻하지 않은 사랑에 빠진다.
엄격하고 보수적인 기독교 문화에서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던 동성애.
악마가 들었다는 비난과 손가락질 끝에 마침내 딸은 집과 교회를 떠나 독립한다.

2.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
복잡하게,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 않은가.
세상에 철따라 나는 과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 뿐이랴. 듣도 보도 못한 요상한 형체의 나무열매가 ‘열대과일’이란 이름으로 내 눈과 입을 자극하는 세상에서 오렌지만이 유일한 과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어디가 좀 이상한 사람이 분명하다.

그럼 다음 단계. ‘오렌지’와 ‘과일’ 대신에 다른 말을 넣어 보자.
“코끼리만이 동물은 아니다” 당연한 말. “장미꽃만이 꽃은 아니다” 이것도 당연한 말.
소개념(오렌지, 코끼리, 장미)과 그 개념을 내포하는 대개념(과일, 동물, 꽃)으로 이루어지는 이러한 문장은 상식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문장이다.
(그냥 보통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이런 문장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이런 걸 비꼬아서 다르게 봤다는 건 좀 다른 얘기니 여기선 따지지 말자.)

그럼 이 문장은 어떤가? “기독교만이 종교는 아니다”
음... 갸우뚱. 근본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일부 독실한 분들 중에는 분명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거다. (실제로 봤다.)
“아니야. 기독교만이 진실한 종교지.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없어. 성경은 무오하고,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아.”
이런 사고 방식은 비단 종교의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우리 주위의 정치경제, 사회적 현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비일비재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혹자는 여기에 ‘독선’, ‘독단’이란 말을 붙여 표현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상식은 종교논리와 이데올로기논리 앞에서 허물어진다.

3.
소설이 사회적 현상을 반영하고, 또한 사회적 논의를 이끌어내는 상호작용을 한다고 할 때,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의 가장 큰 강점은 개인에 대한 가족과 지역사회, 종교의 독단에서 비롯되는 ‘거대한 괴물’ 3종 세트의 억압기제를 가감없이 드러내었다는 점에 있다.
특히 지금보다 전반적으로 사회가 보수적이고 폐쇄되었던 1980년대 대처 정부 시기에 쓰여졌다는 점에서 더욱 그 의미가 적지 않다.
작가 자신의 성장경험이 그대로 소설의 배경이 되어 버린 이 책은(그래서 작가와 책 속 주인공의 이름이 동일하다)
개인이 성 정체성을 깨닫는 단순한 동성애 코드의 소설이나 성장소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 대한 사회적 억압을 고발하는 소설로 한 단계 나아간다.

이는 주인공 지넷의 인생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입양에서부터 잘 나타난다.
지넷의 어머니가 가지고 있는 입양목적에서 아이의 미래에 대한 고려는 빠져있다.
그녀의 목적은 단 한 가지, 신을 위해 복무하는 ‘신의 자녀’를 만드는 것 뿐이다.
그녀는 자신을 성모 마리아와 동일시한 것이다!!!
아이의 미래에 대해 관심없는 부모가 어디 있겠냐마는 그 관심이 부모의 일방적 요구, 또는 아이가 가진 다양한 가능성의 제한으로 발현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지넷의 아버지는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는 무능함만을 보여준다.

지넷이 겪게 될 고초의 근원은 가족에 그치지 않는다.
지역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지넷이 나름대로 충실하게 몸담고 있던 교회와 성직자, 신도들에게도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권은 멀고 먼 안드로메다 이야기일 따름이다.
지넷의 동성애적 성향이 밝혀지자마자 이 지역공동체는 그녀에게 비난을 퍼붓고, 다른 사람과의 접근을 막는 한편, 마침내는 축출한다.
그들에게는 <동성애=마귀의 유혹>이란 단순한 도식이 진리였고,
이 진리에 따르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자의 종말은 추방과 ‘지옥행’임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마지막 장면에서 다소 어정쩡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가출하여 생활하던 지넷은 결국에는 어머니에게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러한 행동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일종의 ‘화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지넷의 이러한 ‘회귀’는 과거 자신의 정체성을 짓밟고 획일성만을 강조하였던 가족과 교회의 변화와 반성이 전제되지 않은 복귀라는 점이 아쉽다.
물론 선교단체와 성직자들의 비리는 그들의 힘을 잃게 만들긴 하였으나, 이는 지넷의 적극적 투쟁의 결과라기 보다는 자체적인 모순이 더 큰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4.
이 책에서 눈에 띄는 형식상의 특징은 장 구분을 구약성서에 따라 하였다는 점이다.
즉, <1부/창세기 2부/출애굽기 3부/레위기 4부/민수기 5부/신명기 6부/여호수아 7부/판관기 8부/룻기>와 같이 내용을 구분하여 놓았는데,
아마도 기독교라는 종교적 권위에의 도전이라는 작가의 주제의식이 반영된 것과 아울러 각 장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일종의 이중적 장치로 여겨진다.
예를 들어 <1부/창세기>.
널리 알려져있다시피 구약성서 창세기는 인류, 죄, 이스라엘 민족 등의 ‘기원(genesis)’에 대한 책이다.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에서 1부는 지넷 가정의 기원과 지넷이 장차 범할 죄악, 즉, 동성애의 기원을 암시해 두고 있다.
<2부/출애굽기>는 지넷이 최초로 어머니의 영향력을 벗어나는 ‘학교’라는 곳으로의 탈출(Exodus)을, <6부/여호수아>에서는 자신의 성정체성을 확고히 함으로써 견고한 여리고(Jerico) 성의 붕괴 내용을 담고 있다고 여겨진다.
마지막 장인 <8부/룻기>에서 룻은 이방인임에도 시어머니에 대한 효성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 따라서 이 장에서 ‘죄인’이란 이방인이었던 지넷은 다시 어머니에게로 돌아오게 된다.

또 하나 중간중간에 들어있는 ‘원탁의 기사’ 이야기와 ‘위닛과 마법사’에 대한 이야기 역시 재미있는 형식이었다.
지넷 윈터슨은 이러한 고전적인 이야기들을 통해 자신에게 익숙해 있던 절대적 영역으로부터의 일탈과 회귀는 영원히 반복되며 변주되는 주제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려 한 것 같다.

5.
‘정상’과 ‘비정상’, ‘진실’과 ‘거짓’의 경계는 어느 지점일까?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 즉, 다양성과 개성 보장은 인간관계와 사회의 건강함을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요인이 된다.
남이 나와 다르며, 나 역시 남과 반드시 같아져야 할 필요는 없다는 차이의 인정이 현재 우리 사회가 금쪽처럼 숭상하고 있는 “사회 통합”의 첫 번째 조건이다.
우리 사회가, 그리고 나 자신도 오렌지만이 과일이 아니라는 명료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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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3부작 Mr. Know 세계문학 17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뉴욕(New York)’이란 말에서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물론 저는 뉴욕은 고사하고 미국령 괌이나 사이판도 가 본적이 없습니다만, 언제부터인가 뉴욕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환상을 가지는 도시가 되어 버린게 아닌가 합니다.
뉴요커라는 말에는 언제부터인가 소위 엣지있고 세련된, 유행의 정점에 서 있는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었습니다.
브루클린과 브로드웨이, 소호에서 가난하지만 꿈을 향해 가는 젊은 예술가들을 떠올린다면, 아마도 오헨리의 작품을 꽤나 분명하게 뇌리에 각인한 사람일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꽃, 세계 금융의 중심이라는 월 스트리트의 분주함과 밀레니엄 행사 때의 타임스퀘어의 화려함도 빼놓을 수 없는 뉴욕의 풍경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어쨌거나 제게 뉴욕은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곳입니다.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의 <대부 2>에서 꼴레오네가 미국에 들어올 때 지나가는 자유의 여신상 장면은 꽤나 큰 충격이었나 봅니다.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작가 가운데 한 명인 폴 오스터에게 뉴욕은 어떨 도시였을까요?
최소한 그의 대표작 [뉴욕 3부작]에서의 뉴욕은 ‘고독한 군중’이 거주하는 곳입니다.
이 속에서 뉴요커들은 길을 잃습니다.
달리는 자전거에서 페달 돌리기를 그만두면 자전거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쓰러집니다.
마찬가지로 폴 오스터가 그리는 뉴요커들은
그들의 주변을 분주하게 흘러가는 사람과 사건들 속에서 페달밟기를 멈출 수 없어서,
그래서 목표를 지향하기보다 그저 달리는 것에 주력하여 내가 서 있는 곳을 알지 못한 채로 길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열심히 앞만 보고 페달을 밟아 마침내 당도하여 고개를 들어보니 생판 처음 보는 곳에 와 있는 것이죠.

[뉴욕 3부작]은 시종일관 세계적 대도시 뉴욕 속에서 일어나는 ‘잃어버림’과 ‘찾음’의 변증법적 통일을 반복하여 보여줍니다.
[뉴욕 3부작]에 실린 세 편의 중편소설이 가진 구도는 기본적으로 동일합니다.
각 작품에는 두 명의 중요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들에게는 ‘쫓는 자’ 또는 ‘지켜보는 자’와 ‘쫓기는 자’ 또는 ‘숨겨진 자’라는 특징을 찾아 볼 수 있겠습니다.
이 두 명의 인물이 서로를 잃어버린 채로 헤매어 돌다가 한 자리로 수렴하여 마침내 ‘내 속에서 너를 찾고, 네 속에서 나를 찾는’ 여로를 마무리짓습니다.

이들은 무엇을 잃어버리고, 무엇을 찾으며, 무엇을 쫓고, 무엇에 쫓기고 있는 것일까요?
이 ‘무엇’이라는 목적어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고유한 자아입니다. 정체성이라고 해도 되겠군요.
자아 혹은 정체성은 절대 불가침을 의미합니다. 어느 누구도 이것을 참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뉴욕 3부작]에서는 자아의 절대성과 개인의 개성이 어떻게 허물어지는지, 그리고 어떻게 새로운 자아와 개성을 향해 변증법적으로 발전하는지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뉴욕’이라는 공간은 그 과정을 확대재생산하는 중요한 촉매제가 됩니다.

[뉴욕 3부작]을 구성하는 세 편의 중편소설에서 ‘쫓는 자’와 ‘쫓기는 자’는 다음과 같습니다.  

<유리의 도시>  쫓는 자: 퀸, 쫓기는 자: 피터 스틸먼
<유령들>  쫓는 자: 블루, 쫓기는 자: 블랙
<잠겨있는 방>  쫓는 자: 나, 쫓기는 자: 팬쇼

쫓는 자들은 스스로의 정당성을 가지고 쫓기는 자들을 따라갑니다.
작가(퀸), 정보요원(블루), 평론가(나)는 직업적 전문성과 오랜 기간 축적해온 경험을 따라 추적 또는 감시 나섭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쫓는 과정에서 뜻하지 못하는 장애물에 봉착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들이 익숙해 왔던 자신의 경험과 지식이 일순간 깨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퀸이 쫓던 스틸먼은 어느 날 밤에 갑자기 사라져 버립니다.
블랙이 쫓던 블루는 도대체가 하는 일도 없이 지루하게 시간만 때우고 있을 뿐입니다.
‘나’는 팬쇼가 행방불명이 되어 죽은 줄로만 여겼으나, 사실은 그가 살아 있음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이런 당황스런 상황은 쫓는 자들로 하여금 추적에 더욱 침잠케 합니다.
쫓기는 자들의 삶과 생각을 좀 더 잘 알아보고자 깊숙이 들어가 버린다는 것이죠.
그리고 종국에는 자신이 쫓아다니던 대상자들과 동일해져가는 스스로를 발견합니다.
이런 관계는 두 번째 작품인 <유령들>에서 가장 극적으로 나타납니다.
몇 달간 계속하여 블루는 블랙을 감시하다가 뭔가 이상한 점을 알아차립니다.
감시당하는 블랙이 자신과 유사한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는 블랙이 무엇을 할 것인지를 스스로 예상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 블루는 블랙을 계속 지켜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생각하기에 블랙이 가만히 집에 머무를 것 같으면 안심하고 나와서 술 한 잔 하고 들어가도 될 정도입니다.
쫓는 자 블루가 쫓기는 자 블랙의 삶 속에 들어갔다가 원래 자신이 서 있는 길을 잃은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동안 억눌러 왔던 스스로의 본성, 스스로의 이드(ID)를 발견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마치 거울 속의 ‘나’를 보는 것과 같은....

이런 ‘표상의 길잃기’와 ‘억눌려 있던 다른 자아의 발견’은 다른 두 중편 <유리의 도시>와 <잠겨있는 방>에서도 유사하게 반복됩니다.
<잠겨있는 방>에서 ‘나’는 팬쇼가 남긴 글을 정리하여 출판하고, 팬쇼의 아내와 결혼하여 살면서 점차로 팬쇼 속에서 자신의 길을 잃어버립니다.
그가 팬쇼의 어머니와 벌이는 성관계는 그의 길잃음의 정점이며, 어릴 적부터 ‘팬쇼되기’를 얼마나 갈망해 왔던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유리의 도시>에서 스틸먼을 찾아내기 위하여 몇 달을 노숙하며 지낸 퀸이 결국 그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지막으로 찾아가 사라진 곳이 바로 스틸먼의 아들이었던 피터 스틸먼과 그의 아내 버지니아의 집이라는 점은 무척 의미심장합니다.

[뉴욕 3부작]에는 구약 성서에 기록된 유명한 바벨탑 이야기가 나옵니다.
신은 인간의 바벨탑 역사를 그르치고 인간들을 세상에 흩어 버리기 위해서 그때까지 하나였던 언어를 여러 가지로 갈라놓습니다.
언어가 인간의 자아 형성과 정체성 확립에 미치는 엄청난 영향력을 생각해 볼 때,
‘동일했던 언어를 갈라놓는다’라는 것은 동일 또는 유사한 자아의 가능성은 봉인하고, 각자의 개성에 따른 자아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는 의미와 다를 바 없습니다.

[뉴욕 3부작]의 등장인물들이 겪는 길잃기와 되찾음은 메트로폴리스에서 생활을 영위하는 바로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 책의 마지막 장면은 ‘내’가 팬쇼로부터 얻은 최후의 빨간 공책을 찢어내어 쓰레기통에 내던지는 것으로 끝납니다.
길잃기(팬쇼되기)와 되찾음(공책찢기)의 변증법 속에서 스스로의 길찾기에 나선 행동을 보여준 ‘나’는 결국 어떻게 될까요? 폴 오스터가  쓰지 않은 진짜 결말이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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