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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상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1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한밤중이 되어도 캄캄해지지 않고 환하다면 무슨 느낌일까?
백야(白夜) 현상을 본 적 없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신기한 구경거리일 것이겠으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엄청나게 피곤한 일일 것 같다. 잠을 자고 쉬어야 하는 때가 밤인데, 대낮같은 밤이 얼마나 사람을 짜증나게 하겠는가? 그것도 후텁지근한 여름에 말이다.
‘환한 밤’은 이율배반적 모순표현이다. 밤은 캄캄해야 한다는 경험논리에 대한 모순이며, ‘환하다’라는 말의 긍정적 의미가 짜증의 원천이 되는 의미의 역설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모순, 그 백야(白夜)가 현실에 실제로 있는 현상이란 점이다!!!!
[죄와 벌]은 ‘환한 밤’과 같은 소설이라고 멋대로 규정내려 버린다. 경험과 이성, 논리로 해(解)를 구할 수 없는 이율배반적 인간성을 가진 등장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들이 이중삼중으로 얽혀 이루어지는 수많은 조합 속에 궁극적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인간성의 모순이 마치 ‘밤은 밤이로되 잠들지 못하는 환한 밤’처럼 펼쳐지기 때문이다.
뻬쩨르부르그의 후텁지근한 날씨가 주는 찝찝함을 가지고 [죄와 벌]은 시작한다.
‘살인’ 여부를 두고 갈등하던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는 마침내 도끼를 휘둘러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살해한다. 여기서 첫 번째 모순이 발생한다. 살인은 당연히 죄, 그것도 아주 무거운 죄에 해당한다. 그런데 그의 이성은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 그는 피해자를 사람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더러운 기생생물인 ‘이’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라스꼴리니꼬프에게 인간의 종류는 ‘비범한 인간’과 ‘평범한 인간’의 두 종류이다. 그리고 비범한 인간에게는 인류발전을 위해 도덕과 법, 윤리를 초월하는 모든 행동이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기 때문에 죄를 뉘우치는 일이란 있을 수 없다.
‘이 한 마리 잡아 죽였다고 누가 나에게 손가락질 하랴? 이건 죄가 아니라 비범한 내가 인류를 위해 행하는 거룩한 의식이다’ 뭐... 요약하면 이런 생각이다.
그런데 어쩌나. 라스꼴리니꼬프의 이 숭고한 이성이 고양되어 형성된 자의식은 논리적으로도 모순이거니와 신성해 보이는 신념과 목적 역시 허구임이 금세 폭로된다. 여기서 모순의 모순이 발생한다. 먼저 라스꼴리니꼬프의 ‘비범인 vs 범인’의 논리가 가지는 허점은 분명하다. 그의 친구 라주미힌이 말했듯이 그런 논리야말로 ‘합법적으로 피를 흘려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위험한, 유혈을 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굳게 믿고 있는 ‘비범인의 도덕초월성’이란 신념도 실상은 죄의식을 가리고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다. 노파와 그녀의 여동생 리자베따를 살해한 그 순간부터, 아니 살인을 계획했던 순간부터 라스꼴리니꼬프는 극심한 불안과 고통, 두통과 불면증, 수시로 찾아드는 졸도에 시달린다. 라스꼴리니꼬프 본인은 인정하고 있지 않지만, 이러한 현상은 양심의 가책과 죄의식에서 나오는 고통이며, 언제 자신의 범죄행각이 만천하에 알려져 교수대 사형집행 또는 시베리아 유형의 길로 나서게 될지 모르는 불안감의 발로이다.
그러니까, 결국 라스꼴리니꼬프가 범한 ‘죄’란 무엇이었나? 살인죄? 위증죄? 절도죄? 형법 법전에나 나오는 그런 딱딱한 죄 말고. 내가 생각하기에 그의 가장 큰 죄는 자신을 속인 거다.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한 거다. 자기 영혼은 죄의식으로 채워져 가는데, 이성으로는 그걸 거부하면서 스스로를 정당화시키는 것이 그의 ‘죄악’이다. 폐결핵에 걸린 친구를 도와주고 불에 타서 죽을 뻔한 아이를 살리고, 생면부지의 마르멜라도프가 마차에 치어 죽게 되었을 때 전재산을 털어 유족들은 도왔던 라스꼴리니꼬프가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거리낌없이 도끼를 휘두른다? 이건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어딘가 안 어울리지 않은가? 이게 뭔가? 마음속에 선한 영혼과 선한 목적, 선한 수단이 있다는 것을 모두 인정하는 그가 일순간의 사상에 경도되어 인간을 ‘이’로 파악한 것도 ‘죄’이지만, 자기 마음속에 있는 선함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악으로 속이는 모습이야말로 바로 그의 ‘제1의 죄’이다. 그 이중성, 그 모순, 그 이율배반, 그 격렬한 ‘두 세계’의 싸움이 보여주는 역설의 파워게임.
서구 사회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죄’와 그에 따르는 ‘형벌’은 등가의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인식된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는 낙원에서 쫓겨났고, 신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억울하게(?) 죽은 이유도 바로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죄에는 반드시 형벌 또는 희생이 따른다. 그럼 라스꼴리니꼬프가 받은 ‘벌’이 무엇인가?
라스꼴리니꼬프는 종국에 가서 자신이 살인범임을 자백하고 8년 동안의 시베리아 유형생활에 들어간다. 물론 시베리아 유형도 법적인 ‘형벌’에 틀림없겠으나, 이건 그가 한 살인에 대한 처벌에 불과할 뿐, 스스로를 속이고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애써 외면했던 죄에 대한 벌은 아니다. 그가 받은 진짜 형벌은 다른 곳에 있다. 라스꼴리니꼬프의 삶은 마치 황량하고 차가운 시베리아 벌판처럼 살인을 저지르고 난 후 파멸로 치닫는다. 그는 스스로 불안과 고통에 허덕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그가 맺어 놓은 관계가 모조리 비정상적으로 왜곡되어 버린다. 최후의 순간까지 그는 전당포 노파를 백해무익한 벌레로 간주한 행위를 이성과 논리로 정당화하면서도 동시에 혹시나 자신의 행위가 드러났을까 전전긍긍한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행위가 드러날 위험에는 정신착란 증세를 보일 정도로 모든 의지력을 상실한다.
이 과정에서 어머니 뿔헤리야와도, 여동생 두냐와도 사랑의 관계가 단절된다. 친구의 조언도 소용없고, 그동안 그가 쌓아왔던 학문과 지적인 성찰, 잘생긴 외모도 모두 껍데기에 불과한 것으로 전락한다. 그의 삶에서 이제 사랑, 안정, 여유, 기쁨과 같은 가치들은 찾아볼 수 없다. 그의 양심은 빈사상태에 빠졌고, 그의 이성은 정당성을 잃었다. 자수하기 전까지 라스꼴리니꼬프의 겉모습인 육체는 자유였다. 그는 숨쉬고 두 발로 걸어다니며 이야기를 하며 뻬쩨르부르그를 헤맨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이미 죽었다. 그는 자신을 지탱해주던 모든 것에서 단절되었다. 이것이 그가 죄의 대가로 받은 ‘형벌’이다.
죽은 영혼을 구원하는 방법은 희생과 참된 참회밖에 없다. 이를 위해 소냐라는 여성이 등장한다. 그녀는 최하층인이기 때문에 재산도, 명예도 없다. 아버지는 비명횡사했고, 어머니는 폐결핵에 정신착란으로 생을 마감했다. 직업? 백주대낮에도 돌팔매질이 가해질 수 있고 공공연하게 차별을 받아도 당연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지던 사람이 기독교적 가치관이 뿌리내린 사회에서의 ‘창녀’ 아닌가.
그러나 소냐는 라스꼴리니꼬프와 달리 영혼이 살아있는 여성이었다. 그래서 신약성서에 나오는 <라자로 이야기>를 원용하여 볼 경우 소냐가 예수 그리스도라면, 라스꼴리니꼬프는 죽어 무덤 속에 매장된 라자로에 해당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라자로는 죽은지 나흘이 지나 시체에서 썩은 냄새가 풍길 정도였으나 예수 그리스도가 그를 부활시킨다. 무덤에서 걸어나온 라자로를 보고 예수 그리스도가 내린 첫 번째 명령이 이것이었다. “풀어 놓아서 다니도록 해라.”
라스꼴리니꼬프의 영혼은 이미 죽었다. 그의 영혼에서는 자기기만과 이율배반의 악취가 풍겼고, 그의 이성은 스스로를 ‘비범인’으로 특출나게 생각하는 광포함에 둘둘 말려 있었다. 그가 구원을 얻고 부활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둘러쳐진 이성의 덮개를 걷어버리고 솔직한 영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후, 자신이 느끼는 죄의식과 가책,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임으로써 단절되었던 주위와의 관계를 복원시키는 것이다. 즉, 그에게도 ‘풀어 놓아 다니게 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고, 바로 그것이 구원인 것이다.
그래서 소냐는 라스꼴리니꼬프에게 두 가지 참회의 방법을 제안한 것이었다. 자수하여 자신의 죄를 고백하라는 것과 함께 ‘대지에 키스할 것’ 말이다. 자수하여 죄를 인정하는 것이 표면적인 것이라면 대지에 키스하는 것은 죽은 라스꼴리니꼬프의 영혼을 부활시키고 단절된 관계를 처음으로 되돌리는 아주 중요한 의식인 것이다. [죄와 벌]의 이 장면은 읽을 때마다 내게 가장 큰 감동을 주는 부분이다. 아직 라스꼴리니꼬프의 영혼은 완벽하게 부활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땅에 입을 맞추는 순간 마치 꽉 막혀 있던 물길이 뚫리면서 맑은 물이 흘러 넘쳐 들어오듯, 대지의 신선한 기운이 그의 영혼에 힘을 공급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는 갑자기 소냐의 말이 생각났다. <네거리에 가서 사람들에게 절을 하고 대지에 키스하세요. 당신은 대지 앞에 죄를 지었으니까요. 그리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소리 내어 말하세요. “내가 죽였습니다”라고.> 그는 그 말을 기억해 내고,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 출구가 없는 비탄과 그동안, 특히 지금 몇 시간 동안의 불안이 그를 너무나도 깊이 압박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금방 이 완전하고 새롭고 충만한 감정 속으로 뛰어들어 버렸다. 감동이 발작처럼 갑자기 그에게 북받쳐 올랐던 것이다. 한꺼번에 그의 마음은 녹아 내렸고, 눈물이 쏟아졌다. 그는 서 있던 모습 그대로 땅에 엎드렸다. 그는 광장의 한가운데에 무릎을 꿇고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고는 달콤한 쾌감과 행복감을 느끼면서 더러운 땅에 입을 맞추었다. (p.774)
이제 ‘환한 밤’이라는 모순과 역설의 시기는 지나갔다. 마지막 에필로그의 배경이 ‘부활절’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라스꼴리니꼬프의 영혼은 새롭게 살아 부활하는 길에 들어선다. 답답하고 짜증나던 여름의 후텁지근함은 부드럽고 포근한 봄날의 햇볕으로 바뀐다. 소냐와 라스꼴리니꼬프는 불꽃과 얼음이 마주치는 것과 같이 격렬했던 ‘두 세계’의 투쟁에서 승리한 것이다. 역시 도스토예프스키답다. 왜 그를 ‘본좌’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지 알 것 같다.
덧붙여서 1
소냐와 라스꼴리니꼬프에 가려져서 그렇지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그야말로 연구(?)가 필요한 인간이다. 선함을 가리는 악함을 풀어 놓아야만 구원을 얻는 라스꼴리니꼬프와 정반대로 그는 악함이 선함과 고뇌로 치장되어 있는 인물이다. 라스꼴리니꼬프와 정반대의 투쟁이 필요한 인간형인 것 같은데, 이런 인물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권총자살’이라는 편안한 방법을 선택한 것일까?
덧붙여서 2
독일의 작가 토마스 만이 도스토예프스키를 평한 말, “도스토예프스키는 육체와 영혼의 고귀함보다는 불행과 악덕, 욕망과 범죄에 기독교적인 공감을 보인 작가였다.” 와! 역시! 말만 멋진 게 아니라 그야말로 명쾌하다. 토마스 만의 평가는 [죄와 벌]에서 시작하여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로 이루어지는 도스토예프스키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