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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사생활
이응준 지음 / 민음사 / 2009년 4월
평점 :

[국가의 사생활]은 흥미있는 텍스트다. 물론 소설적 재미라든가 작가의 자료조사에서 나온 개연성 있는 상상도 좋지만, 이 작품은 현재 우리나라와 사회가 맞닥뜨려 있는 가장 거시적인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생각해 볼 여지가 많은 작품이다.
오랫동안 통일은 우리 민족의 최대 과제로 ‘우리의 소원’이라는 당위성을 가져 왔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보자. 통일을 원하는가? 원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되어야 하겠는가? 오히려 통일된 이후가 두렵지 않은가?
글이 좀 딱딱해질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미리 ‘예방접종’ 삼아 말해 둔다.
반세기 넘게 분단되어 있던 두 개의 한국, 즉, 남한과 북한은 마침내 2011년에 남한의 흡수통일에 의해 통일을 이룬다. (이제 보니 1년 남짓 남은 셈이다!!!) 그리고 [국가의 사생활]은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과연 지상명령과 같았던 남북통일 이후 우리의 삶은 더 나아졌는가?’
작가는 이 질문에 디스토피아의 암울한 상황으로 답한다.
휴전선이 걷혀 영토상의 통일은 이루어졌으나 남한과 북한 주민들 사이에는 갈등과 반목만이 존재한다. 빈부격차와 사회적 차별은 고착화되어 가기만 하고, 식량은 부족하여 북한주민들의 거주지에서는 도둑고양이조차 씨가 마른다. 북한군의 무기로 무장한 폭력조직이 난립하고 살인, 강도, 폭행이 횡행하는 한편 공공연하게 마약이 판매된다.
행복이란 찾아볼 수 없는 통일한국의 황폐한 모습을 통해 작가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 셈이다. “통일의 당위성 못지않게 통일에 대한 준비가 중요하다.”
[국가의 사생활]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남한이 북한을 ‘흡수통일’하였다는 점이고, 이것이 통일 한국이 맞이한 디스토피아의 큰 원인이 되었다는 점이다.
북한의 현재 정치경제 체제의 급속한 붕괴 후에 강력한 일방이 우위에 선 종속적 관계에서의 통일, 그러니까 남한이 주도하는 흡수통일은 아직도 네오콘들에 의해서 주장되는 통일방안이다. 뭐.. 통일방안이야 각자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니 그 양반들을 공격할 생각은 없다. 그리고 실패한 북한의 현재 체제가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흡수통일은 그렇지 않아도 엄청나게 소요될 사회적 비용을 더욱 증가시킬 것이라는 지적이 만만치 않다. 아무리 남한의 경제수준이 북한보다 월등하게 높다고 하더라도 급격한 체제 변동은 이 격차를 뛰어넘는 비용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취약계층을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현재 남한은 북한의 체제가 붕괴할 경우 발생할 엄청난 탈북자와 난민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부족하다. 그들은 복잡한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능숙하지 않으며, 60년이 넘는 분단으로 고착화된 이질감을 단번에 해소할만큼 변신에 익숙하지도 않다. 이들은 고스란히 통일한국의 주변인으로 전락하고 이들의 거주지는 게토가 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방파제와 같던 북한 체제가 붕괴하고 미국의 영향력이 강한 남한정부가 주도하는 통일한국을 중국이나 러시아가 얼씨구나 환영하겠는가? 흡수통일은 한반도를 또다시 주변국의 각축장으로 변모시킬 위험성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다.
[국가의 사생활]이 그리는 디스토피아가 그냥 소설적 허구였으면 좋겠다. 그냥 한 소설가의 상상에서 그치고 영화 정도로나 제작되었으면 좋겠다. 너무 암울하고 비극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암울한 건 저런 소설적 상황이 충분히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는 점이다.
그래서 디스토피아를 허구로 만들려면 흡수통일은 지양되고 먼 길이지만 점진적인 통일방안이 옳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북한 주민의 극악한 생활수준을 그래도 어느 정도는 끌어 올려야 하지 않을까. 그 과정에서 필요하다면 국제사회나 남한 정부의 지원도 지속되어야 할 것이고. 남북한 간의 복잡한 상황이야 십분 이해한다고 쳐도, 도대체 틈만 나면 북한주민의 인권 운운하는 사람들이 왜 북한에 식량을 지원해도 반대, 의약품을 지원해도 반대만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사실 이런게 인권의 최소한의 필요충분조건 아닌가.
그들 말마따나 ‘거지 같이 빈곤한’ 북한 주민들이 통일된 후에 어디로 가겠는가? 그들의 표현대로 ‘사회보장비용을 축내던가’, ‘사회악의 근원’이 될텐데, 통일이라는 변동이 가져올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북한 주민의 삶의 질을 남한 주민의 절반 정도만이라도 끌어 올리는 게 오히려 유리하게 생각되지 않는가.
다시 한 번 반복하건데, [국가의 사생활]에 나온 통일한국의 황폐함을 미리 방지하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한 문제다. 당위적 통일이 우리를 불행하게 하고, 날로 높아져 가는 사회적 비용을 부담하기 위해 지금보다 허리띠를 더 졸라매면서 ‘차라리 통일이 되지 말았으면...’이라고 한탄한다면 그보다 더한 비극이 어디 있겠는가? ‘꿈에도 소원이었고, 이 정성을 다해서’ 이룩한 ‘우리의 소원’으로부터 배신당한 셈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