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퀴엠 - CJK - 죽은자를 위한 미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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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죽음을 피하지 못한다. 죽음 이후에 되살아나는 사람도 없다.
그리고 죽기를 원하는 사람 역시 없다.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이나 생명을 걸고 대의를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도 애초부터 죽음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죽은 자의 영혼은 그가 누구든 위로를 받아야 한다.
이 단순한 경험칙이 인류에게 종교와 제의라는 특수한 형식을 낳게 했다.

진중권의 [레퀴엠]은 전통적인 레퀴엠 가사를 이용하여 작성된 인간의 죽음에 관한 글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인간의 죽음에 관한 글이라기보다 ‘전쟁’에 관한 글이라고 하는 편이 정확하다.
그는 왜 다양한 죽음 가운데 전쟁으로 인한 죽음을 다루었을까?
나는 전쟁에서의 죽음은 세 가지 특징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첫째, 죽음의 규모가 대규모이다. 이런 특징은 쓰나미나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 대규모 참사와 사고로 인한 죽음에도 해당된다.
둘째, 재해나 사고로 인한 죽음이 ‘순간’에 일어난다면, 전쟁으로 인한 죽음은 특정한 ‘기간’을 두고 일어난다.
이는 전쟁을 겪는 사회에서는 최소한 그 기간만큼은 죽음이 일상화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재해나 사고로 죽은 자들이 거의 모두 ‘피해자’인 반면, 전쟁에는 ‘가해자’가 존재한다.
이는 전쟁이 정치적, 사회적 현상으로서, 어떤 ‘의도’가 반영된 현상임을 의미한다.
정리하자면, 전쟁으로 인한 죽음은 <정치적, 사회적 의도를 가지고 일상화되어 버린 대규모 죽음>이라고 하겠다.

전쟁으로 인한 죽음의 첫 번째 대상자는 역시 전선의 병사들이다.
원해서였든 강제로였든 최일선에 나온 병사들은 적군이 아니라 사신(死神)과 싸워야 한다.
그래서 병사들은 전투가 끝나고 녹초가 된 몸을 참호에 누이면서 꿈에서만이라도 고향을 그리고, 가족들을 그리고, 사랑하는 연인을 그린다.
<릴리 마를렌(Lili Marleen>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선의 노래로 불렸던 이유는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전쟁으로 사랑하는 연인과 이별해야 했던 가슴 아픈 경험과 재회의 소망을 담은 노래 <릴리 마를렌>은 원래 독일에서 만들어진 노래였으나,
그 경쾌한 음율과 가슴저린 노랫말로 모든 병사들에게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오죽하면 이 노래가 나오던 9시 55분은 서로 암묵적 휴전상태였다고 했다나...
<릴리 마를렌>에 얽힌 유명한 이야기도 있다.
독일군 참호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오자 반대편 영국군 참호에서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Please louder!"

그러니까 독일군이든 소련군이든 영국군이든 미군이든 그 어떤 병사라 할지라도,
그들이 ‘군복’이라는 송아지 가죽을 뒤집어쓰기 전에는, 그리고 그 가죽 위에 ‘국가’라는 뜨거운 불도장이 찍히기 전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총부리를 들이댈 이유가 전혀 없는 똑같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무기를 버리고, 군복을 벗고, 지옥같은 전선을 떠나 저마다 사랑하는 릴리 마를렌을 찾아간다. 비록 그 밤이 지나면 다시 사신(死神)의 끄나풀이 될 지라도.

전쟁은 또한 아무 죄도 없는 민간인의 희생을 불러온다.
사실 이런 점 때문에라도 전쟁은 ‘필요악’이 아니라 ‘절대악’이다.
2003년에 이라크를 해방시킨다는 명분으로 바그다드를 폭격한 미군과 영국군 사령관들은 민간인 희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다. “어느 것도 완전한 해결책은 없다.”
아니... 해결책은 있었다. 핵무기가 있네, 대량살상무기가 있네 하는 증명되지 않은 명분을 갖다 맞춰놓은 전쟁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이런 점에 있어서 당시 우리나라 정부가 미국의 파병요구에 응한 것이 아쉽기만 하다.
그리고 이 결정은 개인적으로 참여정부에 실망하게 된 두 가지 사건 중에 하나이다.
당시 참여정부는 기존 정부들과 달리 대미관계에 있어서 자주성을 강조하였건만,
이라크 전쟁으로 인한 미국의 파병요구에 “국익을 위해서”라는 말로 응하였다.
‘이라크 민중의 해방’, ‘대량 살상무기 제거’와 같은 미국이 내건 명분이 허황된 것임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 아닌가.
결국 그들의 목적은 중동의 석유자원을 확보하고 친미 정권을 세워서 그 지역의 반미 국가들(특히 이란)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 뻔한데, 거기에 생뚱맞게 우리나라의 국익이 왜 들어가는지...
혹시라도 전후 복구에서 떨어질 경제적 떡고물을 기대하며 ‘국익’ 운운했나?
민간인 사망자와 부상자의 참혹한 광경, 가족을 잃은 어린아이의 공포와 망연자실, 삶의 의미가 송두리째 뽑혀진 그 곳을 보면서 돈 벌 궁리나 하고 있었단 말인가?
내가 지지했던 정부, 그래도 내가 표를 던져서 뽑은 정부는 우리가 가해자로 참여했던 베트남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단 말인가?

불타는 로마를 바라보며 안전한 황궁에 거했던 네로 황제는 그걸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시를 짓고 노래를 불렀겠지만,
로마 시민들은 생명과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우리는 네로 황제의 편을 들어야 하는가, 로마 시민의 편을 들어야 하는가?
파병 찬성 시위를 벌이며 ‘한미 혈맹’, ‘국익’ 운운하면서 이라크에서 벌어지는 일이 남의 일인 것처럼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
생지옥에 가족을 둔 이라크인들은 초라하게 앉아 슬픔과 걱정으로 식사도 하지 못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누구의 편에 서야 했는가?

대량 살상에 가해자가 있으며, 가해자가 승리자가 되는 순간 그가 행한 가해는 역사적 정당성을 획득한다는 것도 전쟁의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이다.
어느 프랑스 정치학자의 말을 인용해 보자면, “오늘날 전세계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유일한 위협은 오직 미국 자체다” 맞는 말이다.
우리 입장에서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가 두려운 이유는 그 원칙이 언제 어느 때고 한반도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베트남과 이라크를 비롯한 세계 각처에 엄청난 폭탄을 떨어뜨렸던 미군 폭격기가 한반도 상공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우리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미국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정치적 실체가 한반도 북쪽에 있으니까.

그런데 여기서 정말정말 웃기는 일이 일어난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부시 대통령이나 미국인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Pax Americana를 부르짖을 수 있다고 인정하자.
하지만 대한민국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걸핏하면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어대며
‘한미동맹 강화’,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를 외치는 한미동맹교 교주와 신자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란 말인가.
미국이 벌이는 전쟁에 온갖 도덕덕 정당성을 부여하고 파병이나 금전적 지원 등 실질적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목놓아 주장하는 사람들이여!
그 정성의 아주 조금이라도 양심의 소리에 귀기울여 죄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없겠는가.

진중권의 [레퀴엠]은 170여 페이지 정도 되는 얇은 책이면서, 짤막한 8개의 이야기로 다시 구분해 놓아 어려움없이 읽힌다.
하지만 서문에 써놓은 그의 말은 보통 무거운 무게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야만은 아직 우리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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