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할리스 대장 1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6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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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할리스 대장.
최근에 읽은 소설의 등장인물들 가운데 가장 묵직한 무게감으로 다가온 인물이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태백산맥]에서 염상진이라는 인물을 연상시키는 인물이다. 물론 두 사람의 성격은 정반대라고 할만큼 상이하다. 신념을 위해 목숨까지도 가볍게 여기는 강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같지만, 염상진에게서는 섬세하고 부드러우며 진중한 사람이라는 인상이 강한 반면에 미할리스 대장에게서는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굳건함과 불같은 고집을 느낄 수 있었다.

먼저 소설의 시대적 배경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미할리스 대장]은 19세기 후반, 터키의 지배를 받고 있던 크레타 섬을 배경으로 한다. 당시 크레타에는 기독교도들인 크레타인(피지배층)과 이슬람교도들인 터키인(지배층)이 섞여 살고 있었다. 그리스와 터키가 전통적인 앙숙 관계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이들이 바다로 둘러싸인 폐쇄적 환경(섬)에서 함께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게다가 낭만주의와 민족주의가 풍미했던 19세기 유럽의 상황이 겹쳐진다면?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크레타에서는 ‘무장봉기’가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피가 피를 부르는 복수와 살육이 반복된다. 지배를 받던 크레타인들의 외침은 이 한 마디로 간결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고향은 잘 알려진대로 바로 이 곳 크레타이며, 작품의 배경인 1889년 무장봉기를 6세 때 직접 경험한 바 있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서는 억압받는 민족이 분출하는 독립과 자유에의 열망을 잘 느낄 수 있다. 중과부적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목숨을 내놓고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무장투쟁에 나선 우리 민족의 독립군 이야기와 흡사하다. 그래서 미할리스 대장을 비롯한 크레타인들이 달아날 곳이 없는 산 속에서 목숨을 내놓고 전투에 임하는 모습은 숭고하고 장엄하기까지 하며, 그들의 최후에는 긴장감과 더불어 울컥하는 분노, 그리고 희생 앞에는 고귀함과 숙연함을 느끼게도 한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는 다음과 같이 아무 일도 아니란 듯이 미할리스 대장의 최후를 그리면서 끝을 맺는다.

미할리스 대장은 조카의 머리털을 잡고 머리를 깃발처럼 쳐들었다. 그의 얼굴에서 괴이한 광채가 감돌았다. 인간의 것이 아닌, 형용할 수 없는 환희가 떠올라 있었다. 긍지, 끝없는 저항, 아니면 죽음에 대한 멸시? 아니면 크레타에 대한 영원한 사랑? 미할리스 대장은 포효했다.
“자유가 아니면.....”
그러나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총알 하나가 그의 입을 꿰뚫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그의 관자놀이를 관통했다. 뇌수가 바위 위로 튀어 올랐다. (p.628)

미할리스 대장을 비롯한 크레타인들에게 그들이 살고 있던 크레타는 단순한 땅이 아니었다. 이 땅은 선조들의 기억이 맺힌 곳이요, 부모님과 자신들의 피와 땀이 맺혀서 된 땅이요, 이제 후손들이 영원히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살아야 할 곳이다. 그래서 카잔차키스는 크레타인들의 입을 빌려 자기 고향이 가지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감동적으로 역설한다.

크레타는 말하는 입과 우는 눈이 있는, 따뜻하게 살아 있는 동물이었다. 크레타는 바위와 흙과 나무뿌리로 이루어진 땅이 아니고, 영원히 죽지 않고 주일이면 교회에 모이는 수천 명의 선조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들은 몇 번이고 분노하며 무덤 속에서 자랑스러운 깃발을 펴고 산으로 내달았다. 그 깃발에는 영원한 모국이 오랜 세월의 맹세로 정한 불멸의 글귀가 회색으로 이렇게 수놓여 있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p.327)

하지만 솔직히 말한다면 읽는내내 가시가 목에 걸린 것처럼 불편하기도 했다. 나는 19세기 크레타가 아니라 21세기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나이를 먹어가는 만큼 내 위치에 안주하게 되었기 때문일까? 만약 조금 더 젊은 시절이었다면 크레타인들에게 일방적인 응원을 보냈을 것이고, 미할리스 대장의 지사적 풍모에 찬사를 바쳤을 것이다. 아마 이들에게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서 해방을 위해 싸운 우리 민족의 모습을 투영했을 지도 모른다.
역사를 통해서 자유나 해방과 같은 가치가 얼마나 고귀하며, 피흘리는 희생이 없이 그것을 성취한 것은 전무후무하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나는 [미할리스 대장]을 보면서 크레타인의 무장봉기에 대해 ‘과연 그렇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을까?’라는 방법론에 대한 회의감과 낯설음이 마음 한 구석에서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고백해야겠다.

[미할리스 대장]을 읽어 나가면서 불편했던 것은 역시 두 민족의 대립을 해결하는 방식이 ‘피가 피를 부르고, 복수가 복수를 부르는’ 끊어지지 않는 원한의 고리에 있다는 점이 첫째였고, 학살과 복수가 종교적 차원에서 정당화될 뿐만 아니라 더욱 장려되고 조장되어 진다는 점이 둘째였다.
지배-피지배 관계로만 본다면 크레타인들의 저항에 정당성을 부여해야 마땅하다.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크레타는 터키보다 그리스에 속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명분에도 불구하고 크레타의 불안정한 평화를 먼저 깨뜨린 것은 크레타인이었고, 그것이 종교적이고 인격적인 모욕으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아쉽다. 미할리스의 형인 마누사카스는 일부러 술에 취한 채로 나귀를 등에 업고 이슬람교도들이 기도하던 모스크에 들어가서 터키인들과 이슬람교를 모욕했으며, 미할리스 자신도 술에 취하여 터키인들이 모이는 찻집에 들어가 식탁과 의자를 부수고 모든 터키인들을 강제로 내쫓은 후, 혼자서 커피를 마시는 행동으로 모욕을 가한다. 크레타인들이 마누사카스와 미할리스의 행동에 열렬한 박수를 보냈음은 당연하다.

크레타인의 지도적인 가문이었던 세파카스 가문(미할리스 대장과 마누사카스는 모두 세파카스의 아들이다)이 앞장서서 벌인 ‘터키인 모욕’은 바로 복수로 돌아온다. 마누사카스는 살해당하지만 복수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마누사카스의 맏아들인 토도레스는 장관의 조카인 후세인을 살해함으로써 ‘피를 피로 갚는’ 복수를 이어간다. 이러한 행동은 터키인들의 증오감을 부추기고, 결국 터키인들은 기독교 수도원을 공격하여 주교의 목을 매달고, 크레타인들을 보이는대로 살육한다. 결국 크레타인들은 다시 한 번 총을 들고 무장봉기에 나서지만, 유럽과 그리스 본국이 침묵하는 사이, 터키에서 파견된 군대의 힘에 산 속으로 몰려 선택의 기로에 선다. 총을 놓고 마을로 돌아갈 것인가, 끝까지 저항하다 죽음을 맞을 것인가.

지도자로서 미할리스 대장과 마누사카스의 행동은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까? 정말 최선의 방법이었을까? 우리 민족도 독립과 해방을 위해 총칼을 들고 제국주의에 맞서 싸웠고, 나는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과 순수한 애국심에 감사와 존경을 느끼지만, 자신들과 섞여 살아가야만 하는 이웃들을 공개적으로 모욕하고, 이웃들의 소중한 부분을 폄훼함으로써 자유와 해방에 대한 욕구를 발산시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잘 모르겠다. 그래서 온 몸으로 크레타의 자유를 위해 투쟁한 미할리스 대장에게 감동하는 한편으로, 그 방식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다.

민족적, 종교적 대립이라는 부분을 제거한다면 크레타섬의 사람들은 세상의 다른 곳의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살고 있다. 사랑하고 다투며, 만나고 헤어지고, 처녀와 총각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며 얼굴이 붉어지고, 노인은 과거를 회상하며 누구나 받아주는 허세를 짐짓 부려본다. 유복한 사람도 있고 구걸해야만 먹고 사는 사람도 있으며, 구두쇠도 있고 호탕한 사람도 있으며, 우람한 신체를 갖춘 용사들이 있고 가냘픈 신체를 갖춘 지식인도 있다. 그들은 모두 자기 나름대로의 목적과 뜻을 가지고 살아간다. 여기에는 크레타인과 터키인의 구분이 없으며,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의 차이가 없다. 이렇게 바로 어제까지 얼굴을 맞대고 살아가던 선량했던 이웃들이 나와 다른 언어와 종교를 가진 사람은 지상에서 사라져야 하며, 그것을 위해서 피의 복수는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가진 약탈자와 강도로 돌변하는 상황이 마음을 쓰라리게 만든다.

[미할리스 대장]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 중의 하나는 터키인 지도자들이 모여서 크레타인들에 대한 보복방안을 논의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크레타인들에 대한 피의 보복은 코란의 성스러운 명령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터키 총독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말을 한다. “당신이 살육을 바라니 코란에서 그런 명령을 찾는 것이오. 평화를 원하는 이가 보면 평화라는 해답을 얻을 것이니 둘 다 신의 뜻이오.” 결국 모든 정치적 언사와 사회적 사고방식, 종교적 가르침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에게 달린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평화를 원하는 이가 많다고 하여 반드시 민족간의 비극이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극단적인 상황을 최대한 피하려는 노력과 실천이 나올 가능성은 조금이라도 더 높아지고, 우리는 그 가능성에 우리의 미래를 걸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런 점에서 [미할리스 대장]의 첫 부분에는 무척 아름다운 장면이 나온다. 크레타인인 미할리스 대장과 터키인인 누리 장관이 젊은 시절 피를 나누고 의형제가 되는 장면이다. 사실 30여년 전의 무장봉기에서 누리 장관의 아버지를 잡아 바위에 머리를 부숴 살해한 사람이 바로 미할리스의 맏형이었다. 복수의 화신이 되어도 부족함이 없을 것 같은 처지였고, 아버지의 망령에 시달리며 괴로워할지언정 그는 크레타인에게 복수하기 위한 칼을 뽑지 않는다. 그는 먼저 의형제인 미할리스 대장에게 화해의 손을 내밀고, 민족과 민족의 다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인다. 미할리스 대장의 거칠것 없는 우직한 전진이 자유를 향한 불꽃같은 갈구를 보여주어 비장미를 드러낸다면, 누리 장관의 신중함과 잠시의 모욕을 참아내는 인격은 불같은 증오를 식혀주는 축복의 비와 같은 깊은 숭고미를 드러내어 감동을 더해준다.

그는 이 성스러운 순간을 속된 언어로 타락시키지 않으리라 굳게 결심하고 어둠과 빗속을 걸었다. 기묘하고, 전혀 새로운, 그러나 극히 중요한 감정적 동요가 그를 사로잡은 것이었다. 그는 바위처럼, 크레타의 바위처럼 조용히 그 억수같이 퍼붓는 비를 참아 냈다. 그는 등줄기로, 갈증을 적시는 바위와 대지의 기쁨을 실감할 수 있었다.
비는 고맙게도 터키인들이 그리스인 마을과 수도원에도 지른 불을 꺼주고 있었다. 기독교인들이 파괴 행위의 일환으로 질렀던 터키 마을의 불도 꺼주고 있었다. 터키인들과 기독교인들은 폐허로 돌아가 돌 한 덩어리씩 쌓으며 다시 자기네 집을 지었다. (p.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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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과 마르가리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4
미하일 불가코프 지음, 정보라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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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의 모양을 한 악마가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최초의 죄를 범하게 했다는 이야기는 교회에 나가보지 않은 사람도 대부분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도 파우스트 박사와 악마의 계약을 맺는 메피스토펠레스가 등장하죠. 기독교 전통에서 인간을 유혹하는 악마의 역할은 그리 낯선 광경이 아닙니다.
하지만 유혹하는 악마가 있다고 해서 탐욕스러운 인간이 면죄부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유혹하는 악마’는 사실 ‘탐욕스러운 인간’과 동의어이니까요. 인간이 가진 여러 가지의 탐욕, 그러니까 소유욕이나 명예욕과 같은 것이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고 결국에는 자신과 이웃을 파멸로 몰아넣는 악마의 형상으로 변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비극이 다 탐욕에서 비롯된 것이지 않습니까? 성경의 한 구절은 악마의 본질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성장하여 죽음에 이른다”

초반부터 악마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은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에도 이런 악마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스탈린이 통치하던 1930년대 모스크바에 악마 볼란드와 그의 시종들(코로비요프, 베헤모트, 아자셀로, 젤라)이 나타나고, 이들이 벌이는 흑마술로 모스크바는 일대 혼란에 빠집니다. 악마가 극장에서 마구 뿌려대는 돈과 사치품에 모스크바 시민들의 혼이 나가 버립니다. 문인(文人)과 예술가들은 형식과 이념, 인맥에 의해 예술의 가치를 왜곡시켜왔던 자신의 치부를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모스크바 극장장은 하루 아침에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얄타에서 발견되고, 개인의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루블화를 감추어 둔 조택조합장은 순식간에 달러화로 변해 버린 돈 앞에서 외환은닉범으로 검거된 후 정신병원으로 실려갑니다. 조카의 아파트를 탐내던 삼촌은 볼란드 일당을 만나 혼비백산 도망치고, 외국인 대상의 고급상점을 비롯한 모스크바 곳곳에서는 탐욕을 채우기 위한 소동이 일어납니다.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에는 두 종류의 인물군이 대비됩니다. 한 쪽은 악마 볼란드의 유혹을 받는 모스크바 시민들, 특히 사회지도층에 있는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볼란드의 유혹 앞에 자신들의 마음속에 꼭꼭 숨겨 놓은 탐욕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이들은 소비에트 사회에서 특권을 누리고 당국의 권위에 아첨하며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쌓아 올린 사람들이지만 악마가 흔들어 대는 돈다발 앞에서, 값비싼 의복이나 주택, 명성과 같은 허영의 상징물들 앞에서 무너집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것이 악마의 장난이었다는 것을, 그 장난에 빠진 자신이 마치 벌거숭이 임금님처럼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비참한 꼬락서니(!!!)를 사방팔방에 보여주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약점과 은밀한 치부가 가차없이 폭로됨으로써 어떤 이들은 정신적인 충격으로 정신병원에 실려가고, 또 어떤 사람은 비밀경찰에 체포됩니다. 이런 속물 근성을 가진 인물들이 악마에게 조롱당하거나 정신병원으로 보내지는 광경은 속시원하면서도 나 자신도 역시 그러한 탐욕을 마음 한 구석에 숨기고 있음을 알고 있기에 섬뜩하기도 합니다.

속물 근성을 과시한 소비에트 지도층에 대비되는 인물이 거장(master)과 마르가리타입니다. 이들이 처한 현실은 참혹합니다. 가난과 불결한 환경 속에서 살던 거장은 일생을 바쳐 예수 그리스도와 본디오 빌라도에 관한 소설을 썼지만, 이미 기계적인 무신론에 경도되어 문학작품의 가치를 권위에만 기대어 해석하려던 비평가들의 철저한 무관심을 받습니다. 상심한 거장은 자신의 책을 불태운 후 제발로 정신병원에 들어가 스스로를 감금합니다. 거장을 사랑하던 마르가리타는 어디로 사라진지 모르는 연인을 찾아 모스크바 거리를 헤매고 다닙니다. 그렇지만 모스크바의 지도층을 경멸하고 기상천외한 흑마술을 동원하여 공개적으로 그들의 약점을 조롱하면서 폭로해내던 악마 볼란드와 그들의 시종들도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거장과 마르가리타에게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경의를 표합니다.

왜 그랬을까? 나는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순수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거장은 나약한 인간이기는 하였지만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여 비겁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정신병원으로 몰아넣을 정도로 자신을 채찍질하였지만 은밀하게 탐욕을 숨기면서 이웃을 속이지 않았습니다. 인간에 대한 거장의 태도는 그가 쓴 소설에 여실히 드러납니다. 거장의 소설은 [거장과 마르가리타] 속에 액자소설처럼 삽입되어 있는데, 거장이 인간을 대하는 태도는 명백히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예슈아 하노츠리’가 본디오 빌라도의 질문에 대답하는 이 한마디로 요약됩니다.

“그럼 말해 봐라. 어째서 항상 ‘착한 사람’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냐? 설마 모든 사람을 그렇게 부르는 건가?”
“모두를 그렇게 부르지요. 이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습니다.” (p.48)

마르가리타는 또 어떤가요. 그녀는 일편단심 사랑하는 거장을 믿으며, 스스로를 정신병원에 가두어서 아무도 종적을 모르는 거장을 찾아 다닙니다. 마르가리타는 오로지 거장을 찾기 위해서 볼란드가 제안한 악마의 무도회에서의 여주인 역할을 감당해 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마르가리타의 순수한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악마의 무도회에는 악한 죄를 지은 사람들이 참석하는데 그 중에 강간당하여 낳은 아이를 먹여 살릴 방법이 없어 손수건으로 질식사 시킨 '프리다‘라는 젊은 여성이 나옵니다(이건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그레트헨의 이야기 같습니다). 이 젊은 여성이 받은 벌은 어디를 가든지 자기 아이를 죽인 손수건이 따라다니면서 죄책감에 시달리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악마의 무도회가 끝난 후 볼란드는 마르가리타에게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다고 합니다. 거장을 찾아달라는 소원을 말하려는 순간 마르가리타는 불쌍한 프리다를 기억하고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소원을 말합니다.

“프리다가 자기 아기를 질식시켜 죽일 때 썼던 손수건이 더 이상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기를 원합니다.” (p.479)
“프리다! 그대는 용서받았다. 이제 손수건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프리다의 통곡 소리가 들렸고, 그녀는 바닥에 쓰러지더니 마르가리타 앞에 대자로 엎드려 누웠다. 볼란드가 손을 흔들자 프리다는 눈앞에서 사라졌다. (p.482)

거장이 자신이 소설에서 보여준 ‘착한 인간’에 대한 믿음, 마르가리타가 고통받는 인간에게 베풀어 준 자비심이야말로 악마들조차도 경의를 표하게 만든 이유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만이 모스크바 시민들 중 유일하게 구원(이 책에서는 ‘평안’으로 나옵니다)을 얻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모스크바의 시민들은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지만, 거장과 마르가리타만은 ‘영원한 안식의 집’에 들어가게 됩니다. 괴테의 [파우스트] 제1부에서 그레트헨의 구원이 ‘뉘우침을 통한 자기체념’ 때문이었고, 제2부에서 파우스트 박사의 구원이 ‘일편단심 자신의 길에 대한 고수’ 때문이었다면,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구원은 인간이 가져야 할 본성, 즉 서로에 대한 믿음과 연민이라는 고결하고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책에 대한 몇 가지 생각으로 글을 마무리짓고자 합니다.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러시아 현대문학의 최고 고전으로 일컬어질 정도로 극찬을 받는 책인데, 무척 흥미로우면서도 그야말로 독자들이 서있는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책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말은... 두 번 이상 읽어볼 가치가 분명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악마인 볼란드로 인해서 모스크바에서 벌어지는 환상적이고 괴이한 이야기들은 아주 재미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불가코프는 벌써 피로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던 1930년대 스탈린 치하의 소련 상황에 대한 예리한 비판을 곳곳에 숨겨두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순간 비밀경찰에 의해 사라지는 이웃들, 무신론에 대한 강박적인 주입, 부정과 부패가 만연한 특권층과 경직되어 버린 관료들의 이야기 말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모순을 폭로하는 볼란드 일당의 활약상은 아주 흥미진진하고 때로는 장난스러울 정도로 화려한 이야기 잔치를 벌여 놓습니다.
반면 거장의 작품으로 액자처럼 박혀 있는 예수 그리스도(예슈아 하노츠리)와 본디오 빌라도의 이야기는 기름기를 쫙 빼낸 무척 건조한 부분입니다. 환상적인 요인 보다는 사실적인 역사소설로 읽힐 정도로 전혀 다른 문체를 보여줍니다. 예슈아가 십자가 형벌을 받기 전부터 십자가 죽은 이후까지 다루고 있는 이 액자소설 역시 관심있는 독자에게는 귀중한 경험이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특히 마지막에 거장이 예슈아를 죽인 자책감으로 괴로워하던 본디오 빌라도를 해방시켜 주고, 빌라도가 달빛 속을 날아 다시 예슈아와 만나 나란히 서는 장면은 큰 감동을 주면서도 2000년의 시간적 제약을 뛰어넘어 한 작가에 의해 만나는 특이한 구성을 보여줍니다.

내용보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워낙 유명한 작품기는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국내 굴지의 출판사 3곳에서 이 책을 번역하였다는 점입니다. 물론 다양한 번역본이 나오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고, 현대 러시아 문학의 고전을 소개하겠다는 출판사 측의 의욕은 높이 삽니다만.... 어쩐지 독자들에게 보다 다양한 작품을 접할 수 있을 기회는 뒤로 밀린, 출판사들 간의 역량의 낭비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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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 (양장)
리처드 애덤스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사계절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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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유명한 동화책(?)을 예전에 중고책방에서 구해 모셔만 두다가 이번 설연휴 기간에 읽게 되었다. 특별히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토끼의 해’에 읽은 첫 번째 책이 토끼 이야기가 된 셈이다. 먼지 쌓여가던 묵은 빚을 청산하려던 것이 자연스럽게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진 것이니 나름 탁월한 선택인 것 같다. ㅎㅎㅎ  

평화로운 토끼마을인 샌들포드에서 살던 파이버는 엄청난 재앙이 마을에 다가오고 있다는 예지를 느낀다. 이 사실을 마을 족장에게 이야기했지만 돌아온 것은 무시와 경멸 뿐. 우여곡절 끝에 파이버의 예지를 믿은 헤이즐과 빅윅, 블랙베리, 실버, 댄더라이언 등 11마리의 토끼들만이 고향을 떠나 새로운 정착지를 향한 모험에 나선다. 이들은 여우, 족제비, 고양이, 올빼미, 인간 등 천적의 눈을 피하고(혹은 싸우고), 생소한 거주지역의 환경을 이겨내야 하는 어려운 조건들을 극복하면서 워터십 다운에 새로운 토끼 마을을 개척한다. 그리고 자기 마을의 존속과 번식을 위해 주변 지역의 최대 권력자이자 독재자인 에프라파의 운드워트 장군과 맞서게 된다.

[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를 읽는 즐거움 1: 미지의 세계를 향한 모험과 개성 강한 등장토물(登場兎物)

[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는 전형적인 ‘집단 성장 소설’이다. 원래 집단에서 떨어져 나온 소수의 무리가 온갖 역경과 난관을 극복한 끝에 마침내 새로운 땅에 정착하고 (그 과정에서 사랑도 찾고) 평화와 번영을 이루는 (그리고 주인공은 영광된 죽음을 맞게 되는) 구조에 충실하다. 패망한 트로이를 탈출한 아이네이아스가 길고 긴 여행 끝에 로마를 건설한 것이라든가, 고구려를 떠나온 온조가 새로운 국가인 백제를 세우고 왕이 된 것을 이런 집단 성장의 사례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정든 고향인 샌들포드를 떠나는 열한 마리의 토끼들은 목숨을 내걸어야 하는 무수한 난관과 모험을 돌파하면서 새로운 동료를 만들고, 마침내는 평화를 얻어 번성하는 마을을 건설한다.

집단 성장 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재미가 다양한 개성을 가진 구성원의 존재이다. 토끼를 호시탐탐 노리는 적들에게 맞서 싸우면서 정착 및 종족번식이라는 과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토끼들은 각자의 특기와 개성을 발휘한다. 다른 토끼들보다 뛰어난 점은 부족하지만 구성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약자를 배려하여 결국에는 지도자의 권위를 얻게 되는 헤이즐, 불굴의 용기를 가지고 물러서지 않고 적에게 맞서는 용사 빅윅, 숱한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책략을 짜내는 꾀주머니 블랙베리, 예지력을 갖춘 예언가 파이버, 타고난 입담으로 잠시나마 동료들에게 공포와 절망을 잊게 하고 새로운 힘을 불어넣는 이야기꾼 덴더라이언 등이 그들이다.

겨우 한 고비를 넘어가나 싶으면 새롭게 다가오는 위기, 그리고 그 위기를 ‘토끼답지않은(?)’ 지혜와 용기를 발휘하여 이겨내고, 그 과정에서 뜨거운 동료애를 보여주어 마침내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토끼들의 활약상은 이 책을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를 읽는 즐거움 2: 토끼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

[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는 첫 장을 펼칠 때부터 독자를 토끼로 변하게 하는 마법을 부린다. 그래서 이 책을 읽어나갈수록 인간의 눈높이에서 토끼를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초원과 관목숲으로 덮이고 작은 강이 흐르며, 때때로 신작로와 철길을 만날 수 있는 영국 남부의 언덕지대에서 살아가는 자연 속의 토끼의 눈과 귀로, 토끼의 다리로 함께 보고 듣고, 함께 뛰어다니고, 함께 모험에 나서고, 함께 싸우고, 함께 적으로부터 도망다니는 생생함을 경험하게 된다. 작가는 “먹는 것, 살아남는 것, 교미하는 것 외에는 거의 관심이 없는” 토끼들의 생태, 먹이를 찾는 습성, 굴을 파서 숨는 습성, 위험에 몰렸을 때 발톱과 뒷다리로 공격하는 습성 등을 철저히 연구한 문헌을 활용하여 개연성이 풍부한 동물 판타지를 창조해 냈다.

아마 이 책을 보면서 귀여운 토끼의 모습이 상상이 가면서 저절로 미소가 떠오를 사람도 적지 않으리라. 토끼가 풀을 뜯는 장면을 볼 때마다 그 묘사가 얼마나 사실적인지 모른다. 시골에 살면서 산토끼를 쫓아다녀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토끼가 굴에서 나오면 얼마나 조심스럽게 풀을 한 번 뜯고 뒷다리로 서서 귀를 쫑긋 한 채로 사방을 경계하다가 다시 풀을 뜯고, 또 경계를 반복하는 지를 말이다. 그러다가 순간적으로 작은 소리라도 들리면 후다닥 달아나서 굴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내며 들판으로 토끼굴로 토끼사냥을 다녀봤던 사람이라면 저 묘사의 정확함과 생생함에 무릎을 칠 것이다.

물론 [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는 동물도감이 아니기 때문에 토끼의 생태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그치지 않는다. 작가는 사실적인 토끼의 생태라는 ‘그릇’ 속에 토끼만의 언어와 토끼만의 신화, 토끼만의 계급체계, 토끼만의 책략 등 온갖 신기한 이야기들을 버무려 생동감을 부여하였다. ‘엘-어라이어’라는 토끼의 조상이 등장하는 신화 이야기는 그 자체로 재미있는 동화의 주제가 되며, 처음에는 좀 생뚱맞던 토끼의 언어는 반복하여 나오면서 어느새 익숙해져서 날씨가 따뜻해지면 ‘실플레이(밖에 나가서 풀을 뜯는 일을 의미하는 토끼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를 읽는 즐거움 3: 인간세상과의 비교, 자연의 천적 인간

[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를 단순한 아동용 동화책 수준에 머물지 않도록 하는 이유중 하나는 인간 문명이 보여주는 오만함과 어리석음에 대한 예리한 비판과 풍자가 놀랍기 때문이다.
열한 마리의 토끼들이 정든 샌들포드를 떠나 모험에 나선 후 실제로 샌들포드의 토끼들이 참혹하게 몰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런데 그 재앙이란 가뭄이나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도 아니었고 천적의 침략이 아니었다. 바로 샌들포드 마을이 있던 구릉지대를 사들인 부동산회사가 그곳을 고급주택지로 개발하기 시작한 것. 이 과정에서 인간은 들판의 토끼굴 구멍을 모두 막은 채 동굴 속으로 독가스를 퍼뜨렸고, 토끼들은 가스에 중독되거나 이리저리 몰려다니다가 곳곳에서 떼죽음에 이른다. 운좋게 막히지 않은 구멍을 찾아 들판으로 나온 토끼들 역시 인간의 총알을 피하지 못했다. 인간들이 담배 몇 대 피울 정도의 시간에 번성하던 한 마을이 완전히 짓밟힌 것이다. 인간의 고급 주택을 지을 터를 마련하기 위해서.

이 책은 헤이즐을 비롯한 열한 마리의 토끼들이 새로운 마을인 워터십 다운을 이루면서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그렇지만 과연 이들과 자식들인 아기토끼의 미래는 장미빛일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 같다. 몇 킬로미터 떨어지지 않은 샌들포드에 고급주택지가 들어선 이상 아마도 조만간 워터십 다운에도 굴삭기가 들이닥치고 토끼들의 마을에 총알세례와 독가스살포가 이루어질 것이다. 다른 동물이 생태계를 이루고 있거나말거나 자연을 경영의 대상으로 여기면서 인간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어떤 파괴도 서슴지 않는 오만과 탐욕이 사라지지 않는 한 말이다. 강줄기마다 개발의 삽을 꽂고 생태계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아시아 동쪽 어느 나라의 현재 모습이 오버랩되지 않을 수 없다. 이 쯤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다시 생각해 본다.

동물을 사랑하시오. 신은 동물들에게 근심 없이 생각하고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자질을 내리셨습니다. 동물을 괴롭히지 말고, 곤경에 빠뜨리지 말고, 행복을 빼앗지 마시오. 신의 뜻을 거스르지 마시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직접적으로 인간의 오만함을 비판하는 것 외에도 [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에 나오는 토끼 마을들은 인간 문명이 만들어낸 정치체제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처음 마을인 샌들포드에서는 대부분의 토끼들이 몸을 키워서 지배집단(아우슬라)에 들어가기를 희망한다. 이들 아우슬라 토끼들은 토끼사회에서도 지배층인 셈이다. 또한 중간에 만나는 카우슬립 마을의 토끼들은 주위 인간들이 주는 맛있는 음식과 쾌락에 빠져서 자연 속의 토끼로서의 생명력을 잃어버린 채, 동료들을 희생제물로 삼아 자리를 유지한다. 카우슬립 마을 토끼들에게 인간이 설치한 덫이란 동료들에게 알려서 함께 조심해야 할 함정이 아니라, 동료를 인간에게 바치게 함으로써 자신의 안전을 조금이라도 연장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러니 여기서 덫이나 올가미의 위치를 말할 수 있는 ‘어디’라는 단어는 터부시되는 금칙어가 되어 버린다. 운드워트 장군이 통치하던 에프라파 마을은 강력한 통치조직과 억압기제로 유지되는 전체주의 사회라고 할 것이다.

토끼는 약한 동물의 상징과도 같은 동물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생각이 바뀔 지도 모른다. 토끼들은 그렇게 무기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물론 여우나 고양이와 같은 포식자들을 두려워하긴 한다) 지혜롭고,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을 이용해서 싸우는 장면에서는 맹수의 모습까지도 보여준다. 재미있는 모험으로 가득하면서 마음을 포근하게 해주는 토끼들의 이야기를 읽는 순간만이라도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 생명에 대한 경건함과 대자연에 대한 겸손함을 배워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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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옷을 입은 여인
윌리엄 월키 콜린스 지음, 박노출 옮김 / 브리즈(토네이도)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빅토리아 시대 최고의 추리소설(이라고 책 소개에는 쓰여 있다)인 [흰 옷을 입은 여인]은 19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먼저 이 스릴 넘치고 흥미만점인 책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세기 영국, 리머리지 가의 자매에게 수채화를 가르치게 된 가난한 화가 월터 하트라이트는 런던을 떠나기 전날 밤 흰옷을 입은 의문의 여인과 마주친다. 하트라이트는 그림을 가르치면서 자신의 학생인 로라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로라 역시 그를 사랑하지만 로라에게는 이미 선친이 정해준 약혼자가 있었다. 로라의 행복을 위해 리머리지 가를 떠난 하트라이트는 로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의 무덤을 찾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 있는 그녀를 만나게 되면서 ‘로라의 죽음’을 둘러싼 비밀을 뒤쫓게 된다.

19세기 최고의 추리소설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추리소설의 ‘클래식’으로 불리기에는 손색이 없을 정도로 멋진 작품인 것은 확실하다. 이 책에는 독자들의 흥미를 자극하는 요소들이 가득하다. 무엇보다 이야기 자체가 눈을 뗄 수 없을만큼 재미있고 스릴이 넘친다. 물론 단순히 재미만 따진다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긴박하게 몰아치면서 책장을 휘리릭 넘겨버리게 만드는 요즘 추리소설에 따를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작품은 요즘 소설들과는 다른 종류의 재미를 우리에게 선사한다. 서서히 몸을 조여가는 느낌, 부지불식간에 코 앞까지 다가온 위기감이 바로 그것이다. 문장 하나하나, 등장 인물의 증언 하나하나가 퍼즐처럼 모여 들다가 어느 순간 폭주하듯이 마구 달린다! 그리고 그게 다가 아니다. 급격한 위기상황이 지나간 후에 다시 냉정을 되찾아 잠잠해 지다가 이전보다 한 단계 높아진 위기 상황으로 독자들을 인도해 나가면서 다시 한 번 몸을 조여드는 흥미를 유발시킨다.
그래서 이 작품을 짧은 호흡으로 대했다가는 제풀에 나가떨어져 버리고 말 것 같다. 결말을 알기 위해서 스카이콩콩 식으로 책을 읽었다가는 지루함만을 느낄 것이다. [흰 옷을 입은 여인]은 비유하자면 마치 나선계단을 오르는 것과 같은 작품이다. 그리 경사가 높지 않은 계단을 빙글빙글 돌면서 천천히 오르다 보면 어느 순간 위태로운 높은 곳에 올라간 아득함을 느끼게 되며, 걸어 올라온 계단들을 발 아래로 보는 순간 하나하나의 계단에 담긴 의미가 적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재미와 더불어 [흰 옷을 입은 여인]에서 만날 수 있는 매력은 이야기 전개에 자연스럽고 맛깔스럽게 녹아 있는 시대적 배경이다. 우리는 이 책에서 19세기 발전을 거듭하던 런던의 분주함과 근교 지역의 한적함을 경험할 수 있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야 했던 가난한 시민들과 물질적 부 및 사회적 지위를 독점했던 귀족들(이들은 하인/하녀라는 희한한 사회계층을 출현시키기도 했다)을 만날 수 있으며, 그 귀족들이 만들어낸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남녀관계와 지극히 ‘오바스러운’, 그래서 어딘지 모르게 형식적이고 허황되어 보이는 예절이 만들어내는 우스꽝스러운 불균형을 만날 수 있다.

빅토리아 여왕의 시대는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런 감정은 세라 워터스나 찰스 디킨스, 코난 도일 경의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이번에 [흰 옷을 입은 여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정한 개인이나 사건이 아닌 시대가 주는 매력은 어디에서 나올까? 나는 개인적으로 빅토리아 시대가 주는 흥미로움의 원인은 이 시기가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어슴푸레한’ 시기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빅토리아 여왕의 시대는 물질문명이 급속도로 발달하던 시기였다. 물질문명을 이루는 기본 바탕은 ‘계몽’에 있으며, 계몽이란 결국 자연과 사회, 개인의 일상까지도 밝은 빛 아래로 나오도록 이끄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 계몽의 시기에도 런던의 거리는 여전히 뿌옇기만 했다. 지난 시대보다 거리는 조금 밝아졌으나, 안개와 스모그, 추적추적 내리던 기분나쁜 비로 인해 여전히 런던의 뒷골목이나 시골의 어두움은 남아 있었다. 희뿌연 가스등 불빛으로는 이 어두움을 모두 밝혀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어두움의 영역은 가시적인 공간에만 적용되던 것이 아니었다. 이 시대 지배자들은 여성의 미덕을 ‘빛’으로 내세웠지만, 거기에는 여성들에게 복종만을 강요했던 가부장적인 사회체계의 ‘어두움’이 숨어 있었다. 영국을 가리켜 붙여주는 명예로운 존칭인 ‘신사의 나라’가 ‘빛’이라면 그 신사들의 생활을 떠받치고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소위 하인과 하녀라고 불리던 사람들이 ‘어두움’ 속에서 희생했기 때문이다. 폭발적인 생산력을 앞세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건설한 빛의 이면에는 평균수명 28세의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철저히 착취당한 순수자본주의 시대 노동자들과 해외 식민지 주민들의 피땀이라는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올리버 트위스트]와 [핑거 스미스]에서 시대적 균열 속에 아픔을 겪던 사람들, [셜록 홈즈의 모험]의 악의 제왕인 모리어티 교수는 모두 이렇게 여전히 남아 있는 어두움을 터전으로 삼아, 또는 어두움을 근거로 하여 자신의 영역을 구축한 셈이다.

[흰 옷을 입은 여인]에도 여전히 남아 있던 이 어두움의 영역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궁색하게 가정교사 일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었던 하트라이트 가족의 생활고, 공립 정신병원 또는 부랑인 수용시설의 열악한 환경에 대한 고발(앤 캐서릭은 이 때문에 사설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 신경질적이고 속좁은 귀족 가문 남성의 변덕에 맞춰서 섬겨야 했던 하인들, 주인의 말 한 마디에 일자리를 잃고 쫓겨나야 하는 하녀들, 가난으로 인해 새롭게 개발된 시가지로 이주할 수 없어서 빈곤의 악순환을 겪는 시골 주민들, 철저하게 남성 중심적으로 짜여져 있는 상속제도와 등기제도, 남편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을 미덕으로 알고 있는 여성들, 높은 사회적 지위의 인물들이 보내는 하층민들에 대한 노골적인 경멸 등이 바로 그 어두움의 영역인 것이다.

사실 추리소설의 기본적인 구조는 단순하다. 즉, 추리소설은 거의 예외없이 <범죄의 발생→범죄의 해결>이라는 기본틀 속에서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간다. [흰 옷을 입은 여인]은 이런 기본틀 속에서 범죄의 계획과 실행, 진상의 규명과 악인의 처벌까지를 충실하게 보여주어 독자들에게 재미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런 이야기를 진행시켜 나가는 곳곳에 시대의 어두움을 짙게 더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앞서 이 소설을 ‘추리소설의 클래식’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거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이며, 개인적으로는 요즘의 추리소설들에서는 좀처럼 맛보기 어려운 ‘책을 통해 시대를 볼 수 있는’ 즐거움을 주는 요인이 되었다는 점을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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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북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
귄터 그라스 지음, 장희창 옮김 / 민음사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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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브 폰팅은 20세기의 역사를 서술한 그의 책에 [진보와 야만]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이 책은 과학과 이성에 의한 지배에서 비롯된 인간 진보의 믿음과 그 믿음이 구현해낸 산업 발전 및 물질적 풍요로움 속에 전쟁과 학살, 차별과 불평등이라는 야만적 행태들이 내재되어 있었음을 20세기 역사를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사용한 ‘진보’라는 단어는 긍정적인 가치와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물질적 발전이란 것이 한 줌의 소수에게는 진보로, 압도적 다수에게는 야만으로 다가올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상대적인 단어입니다. 예를 들어서 한 국가, 한 민족 또는 한 문화권의 진보와 발전은 다른 국가, 다른 민족, 다른 문화권에 가해진 야만적 행태의 토대 위에서 가능했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인류가 발전시켰다고 믿고 있는 진보는 사실 절름발이처럼 한 쪽으로 치우친 것이었고, 왜곡된 것이며, 일그러진 것입니다.

귄터 그라스는 바로 이 시기, 진보와 야만이 공존하던 20세기 전반을 살아온 작가였습니다. 그의 고향은 식민지배와 독립을 반복했던 비극적 역사를 간직한 폴란드 단치히였으며, 얼마전 스스로 고백했듯이 나치 친위대(SS)로서 나치 정권에 협력했던 뼈아픈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19세기와 20세기는 인류의 생산성 증가 속도는 최고에 달하여 여러 부문에서 놀라운 성과를 거두던 진보의 시대였지만, 동시에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인류의 양심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던 야만의 시대, 그래서 인간으로서의 정체성과 존재이유에 심각한 문제제기가 이루어졌던 성찰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귄터 그라스는 난쟁이 오스카를 등장시킨 [양철북]을 통해서 그 시대가 얼마나 왜곡되어 있고, 또 얼마나 비뚤어져 있는지, 과연 인간이 돌아갈 곳은 어디인지를 통렬하게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양철북]에서 가장 인상깊은 것은 역시 주인공 오스카의 외모가 아닌가 합니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변하지 않는 3살의 외모, 90cm 정도에 불과한 신장. 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까지 유지하다가 그 이후에는 ‘꼽추’가 되어 버리는 오스카의 외모는 ‘발전’이라는 허황된 꿈속에서 기형적으로 변해 버린 20세기 인류의 모습을 비틀어 놓은 것에 다름없습니다.
동네 식료품가게 주인의 삶이 아니라 영원한 양철북 연주자로 남기 위해서 세 번째 생일날 스스로 사고를 일으켜 성장을 멈추었다고 주장하는 이 난쟁이의 맹랑한 고백 속에는 세상을 자신의 뜻대로 해석하면서 살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느끼게 합니다. 경악스러운 것은 이런 열망을 어린아이의 외양 속에 감춘 채 살아간다는 점입니다. 그의 실제 아버지조차도 죽음 직전에야 이 꼬맹이의 정신은 정상적인 청소년의 그것이었음을 깨달았을 정도이니 말입니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으면서 정신적으로는 성장하지만 외모는 세 살 어린아이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인데, 주위의 사람들은 영락없이 이런 외모에 속아서 어떤 이는 오해로 대하고, 어떤 이는 애정으로 대하며, 또 어떤 이는 숭배를 바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죽음과 파멸의 길을 가게 됩니다.
결국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의 외모 속에 시대적 뒤틀림과 비뚤어짐을 반영한 영악한 영혼이 함께 존재하고 있었던 셈인데, 이런 그로테스크한 설정 자체가 바로 그 시기 인류(최소한 유럽인)의 모습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오스카의 상태는 이 시기 인류 발전에 대한 믿음이라는 외양이 실제로는 자라나기를 멈춘 허구에 불과하며, 오히려 그 속에는 처참하게 파괴된 인류의 양심과 무너진 진보에 대한 자신감이 숨겨져 있음을 도전적으로 고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또 하나 인상깊은 기억은 역시 양철북이 아닌가 합니다. 오스카는 이상할 정도로 빨간색과 하얀색이 래커칠된 양철북에 집착합니다. 영화 [양철북]을 본 사람이라면 난쟁이 어린아이인 오스카가 미친듯이 두드려대던 양철북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마치 <진주 귀고리 소녀>를 바라보는 눈길이 어느새 하얀 진주 귀걸이에 머무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스카를 바라보는 눈은 종국적으로는 양철북으로 귀결됩니다. 이 양철북은 오스카의 분신이면서 모든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물건입니다.
[양철북]은 현재(1954년) 살인 용의자로 체포되어 정신병원에 수감된 오스카가 오래전 조부모의 만남 장면부터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 회상의 안내자가 양철북을 두드리는 행위입니다. 이 울림소리를 따라서 성장을 멈추기로 했던 고의적인 사고, 학교에서의 경험, 목소리로 유리를 깨뜨리던 오스카의 특수한 능력, 친구인 헤어베르트의 기괴한 죽음, 묘지에서의 경험, 연인 마리아와의 관계, 이웃들과의 관계와 죽음, 전쟁에의 참가, 가족(조부모, 두 아버지, 어머니, 계모, 아들이자 동생 등)들의 삶과 죽음이 차례로 나타납니다.
결국 양철북은 오스카로 상징되는 인류가 걸어온 길을 안내하는 일종의 도구이면서 동시에 그 길 자체로 확장됩니다. 양철북의 북소리를 따라 오스카는 사람들의 욕망을 시험하고, 마치 오래된 앨범을 보는 것처럼 격변의 시대 속에서 살아가고 희생되었던 사람들의 인생을 펼쳐놓습니다. 그리고 독일군에 이어 단치히를 점령한 소련군 앞에서 아버지인 마체라트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빌미를 제공한 오스카는 그의 무덤 속에 양철북을 함께 매장해 버림으로써 한 시대와 단절합니다. 양철북을 버린 후 3살에서 멈추었던 그의 신체적 성장이 다시 시작된 것도(그래봤자 30cm 정도 더 자라는 것에 그쳤지만) 한 시대의 메타포로서 양철북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양철북]은 매우 상징성이 강하긴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흥미로운 서사의 힘도 느낄 수 있는 책입니다. [양철북]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는 매력 가운데 하나가 오스카의 성장과정에서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과 그들이 엮어가는 사건들을 다양하게 배치함으로써 하나하나의 에피소드들이 모두 긴장감과 흥미를 끊임없이 자극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오스카의 친구 헤어베르트의 등에 새겨진 상처와 해양박물관에서 맞이하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종말, 나치군의 폴란드 침공과 폴란드 우체국 방어전, 단치히 지역의 불량 청소년이 규합된 ‘먼지떨이단’과 해체 과정, 종전 후 서독 지역으로의 이주, 메말라 버린 시대에 양파의 힘을 빌려 인위적인 눈물을 짜내던 ‘양파 주점’의 추억, 짝사랑하던 독일 간호사 도로테아의 빈 방 옷장 속에서의 경험 등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자.. 그럼 이렇게 일그러져 버린 오스카에게 구원은 어디에 있을까요? 오스카의 구원은 줄기차게 두드려대던 양철북에도, 자유자재로 유리를 깨뜨려 버리던 미성(美聲)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한 때나마 사랑했던 연인에게서도 구원을 찾지 못하였고, 조숙하게 경험하였던 세상의 어떤 쾌락들 가운데에도 있지 않았습니다.
[양철북]을 보면 귄터 그라스가 당시대에 대해서 얼마나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작가의 조롱이 미치지 않는 유일한 장소가 있습니다. 경찰에 쫓기던 오스카의 외조부 요셉을 숨겨 살려준 장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오스카의 어머니 아그네스가 잉태된 장소, 고통과 절망을 당할 때마다 오스카가 숨기를 원했던 곳. 바로 외할머니 안나 콜야이체크의 네 겹 치마 속입니다. 이 곳은 [양철북] 전체에서 유일하게 일그러지거나 왜곡되지 않은 공간이며, 따라서 성역이자 지성소(Sanctuary)로 그려집니다. 조국 폴란드의 식민지배와 독립,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라는 굵직한 정치적 사건들과 오스카를 둘러싼 가족의 해체와 비극이라는 운명적인 사건들 속에서도 할머니 안나의 네 겹 치마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오스카는 여전히 그 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바로 그 곳이 구원의 장소이기 때문이지요.
세계대전은 끝났고, 인류는 20세기 초반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발전을 다시 이룩하였습니다. 하지만 일그러진 현실은 사라졌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 사회로 눈을 돌려 보아도 각박한 사회적 현실과 승자독식의 신자유주의는 지금도 여전히 빈민, 워킹푸어 등의 기형적인 삶들을 양산하고, 외국인 노동자와 결혼이주여성, 비정규직 등에 대한 일그러진 차별을 확대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다른 진보의 이면에 야만이 자라나지 않도록 우리는 성역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의 잘못에 뼈저린 반성을 수행하는 마음, 도망자까지도 따뜻하게 품어주던 네 겹 치마와 같이 이웃을 품어줄 수 있는 마음, 차별과 불평등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이웃들의 울부짖음을 들어주고 그 입장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 묵묵히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의 마음 말입니다. (최근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던 홍익대학교의 청소용역노동자 분들과 학생들의 대응을 다시 한 번 곱씹어보게 됩니다.)

행동하는 지식인의 삶을 살았던 귄터 그라스는 세계대전과 과거에 대한 반성이 없는 전후 독일 사회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전후의 영광이란 결국 영광에 지나지 않으며, 어제까지만 해도 우리가 생생하고도 잔인하게 자랑했던 그 모든 행위와 범죄들을 끊임없는 야옹 소리와 함께 역사로 돌려버리려는 고양이의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p.501)

귄터 그라스는 오스카의 삶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경고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마음의 벽을 허물고 우리의 삶을 선한 인간 본성의 모습으로 회귀시키지 않는 한, 오스카와 가족, 이웃들이 고통 가운데 지나가야 했던 기형적이고 왜곡된 시대를 또다시 통과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참고로.......
이해삼아 귄터 그라스의 고향이자 [양철북]의 배경이 되는 도시인 단치히(Danzig)에 대해서 짤막하게나마 언급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단치히는 현재 ‘그다니스크’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위인전을 열심히 읽으셨던 분이라면 아마 퀴리부인과 쇼팽의 전기를 통해서 폴란드의 비극적인 상황을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프로이센과 러시아라는 동부 유럽의 두 강대국 사이에서 폴란드는 200여년간 독립된 국가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항복으로 끝나면서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단치히 지역은 자유시로 독립을 얻어냅니다.
하지만 1939년 9월 1일 히틀러는 단치히가 원래 독일의 땅이라는 주장과 함께 폴란드를 침공하게 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합니다. 독일군의 침공과 이후 소련군의 진주로 인해 단치히 시내의 대부분의 건물들이 파괴되거나 불타버리게 되는 비극을 맞이합니다. 그러니 이 시기를 살던 단치히 주민들이 경험한 고통과 공포, 절망감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양철북]은 바로 이 시기 단치히를 배경으로 삼음으로서 비정상적으로 일그러진 당시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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