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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북 1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
귄터 그라스 지음, 장희창 옮김 / 민음사 / 1999년 10월
평점 :
클라이브 폰팅은 20세기의 역사를 서술한 그의 책에 [진보와 야만]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이 책은 과학과 이성에 의한 지배에서 비롯된 인간 진보의 믿음과 그 믿음이 구현해낸 산업 발전 및 물질적 풍요로움 속에 전쟁과 학살, 차별과 불평등이라는 야만적 행태들이 내재되어 있었음을 20세기 역사를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사용한 ‘진보’라는 단어는 긍정적인 가치와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물질적 발전이란 것이 한 줌의 소수에게는 진보로, 압도적 다수에게는 야만으로 다가올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상대적인 단어입니다. 예를 들어서 한 국가, 한 민족 또는 한 문화권의 진보와 발전은 다른 국가, 다른 민족, 다른 문화권에 가해진 야만적 행태의 토대 위에서 가능했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인류가 발전시켰다고 믿고 있는 진보는 사실 절름발이처럼 한 쪽으로 치우친 것이었고, 왜곡된 것이며, 일그러진 것입니다.
귄터 그라스는 바로 이 시기, 진보와 야만이 공존하던 20세기 전반을 살아온 작가였습니다. 그의 고향은 식민지배와 독립을 반복했던 비극적 역사를 간직한 폴란드 단치히였으며, 얼마전 스스로 고백했듯이 나치 친위대(SS)로서 나치 정권에 협력했던 뼈아픈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19세기와 20세기는 인류의 생산성 증가 속도는 최고에 달하여 여러 부문에서 놀라운 성과를 거두던 진보의 시대였지만, 동시에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인류의 양심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던 야만의 시대, 그래서 인간으로서의 정체성과 존재이유에 심각한 문제제기가 이루어졌던 성찰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귄터 그라스는 난쟁이 오스카를 등장시킨 [양철북]을 통해서 그 시대가 얼마나 왜곡되어 있고, 또 얼마나 비뚤어져 있는지, 과연 인간이 돌아갈 곳은 어디인지를 통렬하게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양철북]에서 가장 인상깊은 것은 역시 주인공 오스카의 외모가 아닌가 합니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변하지 않는 3살의 외모, 90cm 정도에 불과한 신장. 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까지 유지하다가 그 이후에는 ‘꼽추’가 되어 버리는 오스카의 외모는 ‘발전’이라는 허황된 꿈속에서 기형적으로 변해 버린 20세기 인류의 모습을 비틀어 놓은 것에 다름없습니다.
동네 식료품가게 주인의 삶이 아니라 영원한 양철북 연주자로 남기 위해서 세 번째 생일날 스스로 사고를 일으켜 성장을 멈추었다고 주장하는 이 난쟁이의 맹랑한 고백 속에는 세상을 자신의 뜻대로 해석하면서 살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느끼게 합니다. 경악스러운 것은 이런 열망을 어린아이의 외양 속에 감춘 채 살아간다는 점입니다. 그의 실제 아버지조차도 죽음 직전에야 이 꼬맹이의 정신은 정상적인 청소년의 그것이었음을 깨달았을 정도이니 말입니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으면서 정신적으로는 성장하지만 외모는 세 살 어린아이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인데, 주위의 사람들은 영락없이 이런 외모에 속아서 어떤 이는 오해로 대하고, 어떤 이는 애정으로 대하며, 또 어떤 이는 숭배를 바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죽음과 파멸의 길을 가게 됩니다.
결국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의 외모 속에 시대적 뒤틀림과 비뚤어짐을 반영한 영악한 영혼이 함께 존재하고 있었던 셈인데, 이런 그로테스크한 설정 자체가 바로 그 시기 인류(최소한 유럽인)의 모습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오스카의 상태는 이 시기 인류 발전에 대한 믿음이라는 외양이 실제로는 자라나기를 멈춘 허구에 불과하며, 오히려 그 속에는 처참하게 파괴된 인류의 양심과 무너진 진보에 대한 자신감이 숨겨져 있음을 도전적으로 고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또 하나 인상깊은 기억은 역시 양철북이 아닌가 합니다. 오스카는 이상할 정도로 빨간색과 하얀색이 래커칠된 양철북에 집착합니다. 영화 [양철북]을 본 사람이라면 난쟁이 어린아이인 오스카가 미친듯이 두드려대던 양철북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마치 <진주 귀고리 소녀>를 바라보는 눈길이 어느새 하얀 진주 귀걸이에 머무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스카를 바라보는 눈은 종국적으로는 양철북으로 귀결됩니다. 이 양철북은 오스카의 분신이면서 모든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물건입니다.
[양철북]은 현재(1954년) 살인 용의자로 체포되어 정신병원에 수감된 오스카가 오래전 조부모의 만남 장면부터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 회상의 안내자가 양철북을 두드리는 행위입니다. 이 울림소리를 따라서 성장을 멈추기로 했던 고의적인 사고, 학교에서의 경험, 목소리로 유리를 깨뜨리던 오스카의 특수한 능력, 친구인 헤어베르트의 기괴한 죽음, 묘지에서의 경험, 연인 마리아와의 관계, 이웃들과의 관계와 죽음, 전쟁에의 참가, 가족(조부모, 두 아버지, 어머니, 계모, 아들이자 동생 등)들의 삶과 죽음이 차례로 나타납니다.
결국 양철북은 오스카로 상징되는 인류가 걸어온 길을 안내하는 일종의 도구이면서 동시에 그 길 자체로 확장됩니다. 양철북의 북소리를 따라 오스카는 사람들의 욕망을 시험하고, 마치 오래된 앨범을 보는 것처럼 격변의 시대 속에서 살아가고 희생되었던 사람들의 인생을 펼쳐놓습니다. 그리고 독일군에 이어 단치히를 점령한 소련군 앞에서 아버지인 마체라트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빌미를 제공한 오스카는 그의 무덤 속에 양철북을 함께 매장해 버림으로써 한 시대와 단절합니다. 양철북을 버린 후 3살에서 멈추었던 그의 신체적 성장이 다시 시작된 것도(그래봤자 30cm 정도 더 자라는 것에 그쳤지만) 한 시대의 메타포로서 양철북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양철북]은 매우 상징성이 강하긴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흥미로운 서사의 힘도 느낄 수 있는 책입니다. [양철북]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는 매력 가운데 하나가 오스카의 성장과정에서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과 그들이 엮어가는 사건들을 다양하게 배치함으로써 하나하나의 에피소드들이 모두 긴장감과 흥미를 끊임없이 자극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오스카의 친구 헤어베르트의 등에 새겨진 상처와 해양박물관에서 맞이하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종말, 나치군의 폴란드 침공과 폴란드 우체국 방어전, 단치히 지역의 불량 청소년이 규합된 ‘먼지떨이단’과 해체 과정, 종전 후 서독 지역으로의 이주, 메말라 버린 시대에 양파의 힘을 빌려 인위적인 눈물을 짜내던 ‘양파 주점’의 추억, 짝사랑하던 독일 간호사 도로테아의 빈 방 옷장 속에서의 경험 등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자.. 그럼 이렇게 일그러져 버린 오스카에게 구원은 어디에 있을까요? 오스카의 구원은 줄기차게 두드려대던 양철북에도, 자유자재로 유리를 깨뜨려 버리던 미성(美聲)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한 때나마 사랑했던 연인에게서도 구원을 찾지 못하였고, 조숙하게 경험하였던 세상의 어떤 쾌락들 가운데에도 있지 않았습니다.
[양철북]을 보면 귄터 그라스가 당시대에 대해서 얼마나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작가의 조롱이 미치지 않는 유일한 장소가 있습니다. 경찰에 쫓기던 오스카의 외조부 요셉을 숨겨 살려준 장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오스카의 어머니 아그네스가 잉태된 장소, 고통과 절망을 당할 때마다 오스카가 숨기를 원했던 곳. 바로 외할머니 안나 콜야이체크의 네 겹 치마 속입니다. 이 곳은 [양철북] 전체에서 유일하게 일그러지거나 왜곡되지 않은 공간이며, 따라서 성역이자 지성소(Sanctuary)로 그려집니다. 조국 폴란드의 식민지배와 독립,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라는 굵직한 정치적 사건들과 오스카를 둘러싼 가족의 해체와 비극이라는 운명적인 사건들 속에서도 할머니 안나의 네 겹 치마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오스카는 여전히 그 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바로 그 곳이 구원의 장소이기 때문이지요.
세계대전은 끝났고, 인류는 20세기 초반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발전을 다시 이룩하였습니다. 하지만 일그러진 현실은 사라졌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 사회로 눈을 돌려 보아도 각박한 사회적 현실과 승자독식의 신자유주의는 지금도 여전히 빈민, 워킹푸어 등의 기형적인 삶들을 양산하고, 외국인 노동자와 결혼이주여성, 비정규직 등에 대한 일그러진 차별을 확대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다른 진보의 이면에 야만이 자라나지 않도록 우리는 성역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의 잘못에 뼈저린 반성을 수행하는 마음, 도망자까지도 따뜻하게 품어주던 네 겹 치마와 같이 이웃을 품어줄 수 있는 마음, 차별과 불평등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이웃들의 울부짖음을 들어주고 그 입장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 묵묵히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의 마음 말입니다. (최근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던 홍익대학교의 청소용역노동자 분들과 학생들의 대응을 다시 한 번 곱씹어보게 됩니다.)
행동하는 지식인의 삶을 살았던 귄터 그라스는 세계대전과 과거에 대한 반성이 없는 전후 독일 사회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전후의 영광이란 결국 영광에 지나지 않으며, 어제까지만 해도 우리가 생생하고도 잔인하게 자랑했던 그 모든 행위와 범죄들을 끊임없는 야옹 소리와 함께 역사로 돌려버리려는 고양이의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p.501)
귄터 그라스는 오스카의 삶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경고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마음의 벽을 허물고 우리의 삶을 선한 인간 본성의 모습으로 회귀시키지 않는 한, 오스카와 가족, 이웃들이 고통 가운데 지나가야 했던 기형적이고 왜곡된 시대를 또다시 통과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참고로.......
이해삼아 귄터 그라스의 고향이자 [양철북]의 배경이 되는 도시인 단치히(Danzig)에 대해서 짤막하게나마 언급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단치히는 현재 ‘그다니스크’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위인전을 열심히 읽으셨던 분이라면 아마 퀴리부인과 쇼팽의 전기를 통해서 폴란드의 비극적인 상황을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프로이센과 러시아라는 동부 유럽의 두 강대국 사이에서 폴란드는 200여년간 독립된 국가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항복으로 끝나면서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단치히 지역은 자유시로 독립을 얻어냅니다.
하지만 1939년 9월 1일 히틀러는 단치히가 원래 독일의 땅이라는 주장과 함께 폴란드를 침공하게 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합니다. 독일군의 침공과 이후 소련군의 진주로 인해 단치히 시내의 대부분의 건물들이 파괴되거나 불타버리게 되는 비극을 맞이합니다. 그러니 이 시기를 살던 단치히 주민들이 경험한 고통과 공포, 절망감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양철북]은 바로 이 시기 단치히를 배경으로 삼음으로서 비정상적으로 일그러진 당시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