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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과 마르가리타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4
미하일 불가코프 지음, 정보라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평점 :

뱀의 모양을 한 악마가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최초의 죄를 범하게 했다는 이야기는 교회에 나가보지 않은 사람도 대부분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도 파우스트 박사와 악마의 계약을 맺는 메피스토펠레스가 등장하죠. 기독교 전통에서 인간을 유혹하는 악마의 역할은 그리 낯선 광경이 아닙니다.
하지만 유혹하는 악마가 있다고 해서 탐욕스러운 인간이 면죄부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유혹하는 악마’는 사실 ‘탐욕스러운 인간’과 동의어이니까요. 인간이 가진 여러 가지의 탐욕, 그러니까 소유욕이나 명예욕과 같은 것이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고 결국에는 자신과 이웃을 파멸로 몰아넣는 악마의 형상으로 변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비극이 다 탐욕에서 비롯된 것이지 않습니까? 성경의 한 구절은 악마의 본질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성장하여 죽음에 이른다”
초반부터 악마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은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에도 이런 악마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스탈린이 통치하던 1930년대 모스크바에 악마 볼란드와 그의 시종들(코로비요프, 베헤모트, 아자셀로, 젤라)이 나타나고, 이들이 벌이는 흑마술로 모스크바는 일대 혼란에 빠집니다. 악마가 극장에서 마구 뿌려대는 돈과 사치품에 모스크바 시민들의 혼이 나가 버립니다. 문인(文人)과 예술가들은 형식과 이념, 인맥에 의해 예술의 가치를 왜곡시켜왔던 자신의 치부를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모스크바 극장장은 하루 아침에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얄타에서 발견되고, 개인의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루블화를 감추어 둔 조택조합장은 순식간에 달러화로 변해 버린 돈 앞에서 외환은닉범으로 검거된 후 정신병원으로 실려갑니다. 조카의 아파트를 탐내던 삼촌은 볼란드 일당을 만나 혼비백산 도망치고, 외국인 대상의 고급상점을 비롯한 모스크바 곳곳에서는 탐욕을 채우기 위한 소동이 일어납니다.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에는 두 종류의 인물군이 대비됩니다. 한 쪽은 악마 볼란드의 유혹을 받는 모스크바 시민들, 특히 사회지도층에 있는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볼란드의 유혹 앞에 자신들의 마음속에 꼭꼭 숨겨 놓은 탐욕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이들은 소비에트 사회에서 특권을 누리고 당국의 권위에 아첨하며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쌓아 올린 사람들이지만 악마가 흔들어 대는 돈다발 앞에서, 값비싼 의복이나 주택, 명성과 같은 허영의 상징물들 앞에서 무너집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것이 악마의 장난이었다는 것을, 그 장난에 빠진 자신이 마치 벌거숭이 임금님처럼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비참한 꼬락서니(!!!)를 사방팔방에 보여주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약점과 은밀한 치부가 가차없이 폭로됨으로써 어떤 이들은 정신적인 충격으로 정신병원에 실려가고, 또 어떤 사람은 비밀경찰에 체포됩니다. 이런 속물 근성을 가진 인물들이 악마에게 조롱당하거나 정신병원으로 보내지는 광경은 속시원하면서도 나 자신도 역시 그러한 탐욕을 마음 한 구석에 숨기고 있음을 알고 있기에 섬뜩하기도 합니다.
속물 근성을 과시한 소비에트 지도층에 대비되는 인물이 거장(master)과 마르가리타입니다. 이들이 처한 현실은 참혹합니다. 가난과 불결한 환경 속에서 살던 거장은 일생을 바쳐 예수 그리스도와 본디오 빌라도에 관한 소설을 썼지만, 이미 기계적인 무신론에 경도되어 문학작품의 가치를 권위에만 기대어 해석하려던 비평가들의 철저한 무관심을 받습니다. 상심한 거장은 자신의 책을 불태운 후 제발로 정신병원에 들어가 스스로를 감금합니다. 거장을 사랑하던 마르가리타는 어디로 사라진지 모르는 연인을 찾아 모스크바 거리를 헤매고 다닙니다. 그렇지만 모스크바의 지도층을 경멸하고 기상천외한 흑마술을 동원하여 공개적으로 그들의 약점을 조롱하면서 폭로해내던 악마 볼란드와 그들의 시종들도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거장과 마르가리타에게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경의를 표합니다.
왜 그랬을까? 나는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순수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거장은 나약한 인간이기는 하였지만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여 비겁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정신병원으로 몰아넣을 정도로 자신을 채찍질하였지만 은밀하게 탐욕을 숨기면서 이웃을 속이지 않았습니다. 인간에 대한 거장의 태도는 그가 쓴 소설에 여실히 드러납니다. 거장의 소설은 [거장과 마르가리타] 속에 액자소설처럼 삽입되어 있는데, 거장이 인간을 대하는 태도는 명백히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예슈아 하노츠리’가 본디오 빌라도의 질문에 대답하는 이 한마디로 요약됩니다.
“그럼 말해 봐라. 어째서 항상 ‘착한 사람’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냐? 설마 모든 사람을 그렇게 부르는 건가?”
“모두를 그렇게 부르지요. 이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습니다.” (p.48)
마르가리타는 또 어떤가요. 그녀는 일편단심 사랑하는 거장을 믿으며, 스스로를 정신병원에 가두어서 아무도 종적을 모르는 거장을 찾아 다닙니다. 마르가리타는 오로지 거장을 찾기 위해서 볼란드가 제안한 악마의 무도회에서의 여주인 역할을 감당해 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마르가리타의 순수한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악마의 무도회에는 악한 죄를 지은 사람들이 참석하는데 그 중에 강간당하여 낳은 아이를 먹여 살릴 방법이 없어 손수건으로 질식사 시킨 '프리다‘라는 젊은 여성이 나옵니다(이건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그레트헨의 이야기 같습니다). 이 젊은 여성이 받은 벌은 어디를 가든지 자기 아이를 죽인 손수건이 따라다니면서 죄책감에 시달리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악마의 무도회가 끝난 후 볼란드는 마르가리타에게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다고 합니다. 거장을 찾아달라는 소원을 말하려는 순간 마르가리타는 불쌍한 프리다를 기억하고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소원을 말합니다.
“프리다가 자기 아기를 질식시켜 죽일 때 썼던 손수건이 더 이상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기를 원합니다.” (p.479)
“프리다! 그대는 용서받았다. 이제 손수건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프리다의 통곡 소리가 들렸고, 그녀는 바닥에 쓰러지더니 마르가리타 앞에 대자로 엎드려 누웠다. 볼란드가 손을 흔들자 프리다는 눈앞에서 사라졌다. (p.482)
거장이 자신이 소설에서 보여준 ‘착한 인간’에 대한 믿음, 마르가리타가 고통받는 인간에게 베풀어 준 자비심이야말로 악마들조차도 경의를 표하게 만든 이유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만이 모스크바 시민들 중 유일하게 구원(이 책에서는 ‘평안’으로 나옵니다)을 얻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모스크바의 시민들은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지만, 거장과 마르가리타만은 ‘영원한 안식의 집’에 들어가게 됩니다. 괴테의 [파우스트] 제1부에서 그레트헨의 구원이 ‘뉘우침을 통한 자기체념’ 때문이었고, 제2부에서 파우스트 박사의 구원이 ‘일편단심 자신의 길에 대한 고수’ 때문이었다면,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구원은 인간이 가져야 할 본성, 즉 서로에 대한 믿음과 연민이라는 고결하고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책에 대한 몇 가지 생각으로 글을 마무리짓고자 합니다.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러시아 현대문학의 최고 고전으로 일컬어질 정도로 극찬을 받는 책인데, 무척 흥미로우면서도 그야말로 독자들이 서있는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책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말은... 두 번 이상 읽어볼 가치가 분명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악마인 볼란드로 인해서 모스크바에서 벌어지는 환상적이고 괴이한 이야기들은 아주 재미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불가코프는 벌써 피로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던 1930년대 스탈린 치하의 소련 상황에 대한 예리한 비판을 곳곳에 숨겨두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순간 비밀경찰에 의해 사라지는 이웃들, 무신론에 대한 강박적인 주입, 부정과 부패가 만연한 특권층과 경직되어 버린 관료들의 이야기 말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모순을 폭로하는 볼란드 일당의 활약상은 아주 흥미진진하고 때로는 장난스러울 정도로 화려한 이야기 잔치를 벌여 놓습니다.
반면 거장의 작품으로 액자처럼 박혀 있는 예수 그리스도(예슈아 하노츠리)와 본디오 빌라도의 이야기는 기름기를 쫙 빼낸 무척 건조한 부분입니다. 환상적인 요인 보다는 사실적인 역사소설로 읽힐 정도로 전혀 다른 문체를 보여줍니다. 예슈아가 십자가 형벌을 받기 전부터 십자가 죽은 이후까지 다루고 있는 이 액자소설 역시 관심있는 독자에게는 귀중한 경험이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특히 마지막에 거장이 예슈아를 죽인 자책감으로 괴로워하던 본디오 빌라도를 해방시켜 주고, 빌라도가 달빛 속을 날아 다시 예슈아와 만나 나란히 서는 장면은 큰 감동을 주면서도 2000년의 시간적 제약을 뛰어넘어 한 작가에 의해 만나는 특이한 구성을 보여줍니다.
내용보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워낙 유명한 작품기는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국내 굴지의 출판사 3곳에서 이 책을 번역하였다는 점입니다. 물론 다양한 번역본이 나오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고, 현대 러시아 문학의 고전을 소개하겠다는 출판사 측의 의욕은 높이 삽니다만.... 어쩐지 독자들에게 보다 다양한 작품을 접할 수 있을 기회는 뒤로 밀린, 출판사들 간의 역량의 낭비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