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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옷을 입은 여인
윌리엄 월키 콜린스 지음, 박노출 옮김 / 브리즈(토네이도)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빅토리아 시대 최고의 추리소설(이라고 책 소개에는 쓰여 있다)인 [흰 옷을 입은 여인]은 19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먼저 이 스릴 넘치고 흥미만점인 책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세기 영국, 리머리지 가의 자매에게 수채화를 가르치게 된 가난한 화가 월터 하트라이트는 런던을 떠나기 전날 밤 흰옷을 입은 의문의 여인과 마주친다. 하트라이트는 그림을 가르치면서 자신의 학생인 로라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로라 역시 그를 사랑하지만 로라에게는 이미 선친이 정해준 약혼자가 있었다. 로라의 행복을 위해 리머리지 가를 떠난 하트라이트는 로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의 무덤을 찾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 있는 그녀를 만나게 되면서 ‘로라의 죽음’을 둘러싼 비밀을 뒤쫓게 된다.
19세기 최고의 추리소설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추리소설의 ‘클래식’으로 불리기에는 손색이 없을 정도로 멋진 작품인 것은 확실하다. 이 책에는 독자들의 흥미를 자극하는 요소들이 가득하다. 무엇보다 이야기 자체가 눈을 뗄 수 없을만큼 재미있고 스릴이 넘친다. 물론 단순히 재미만 따진다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긴박하게 몰아치면서 책장을 휘리릭 넘겨버리게 만드는 요즘 추리소설에 따를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작품은 요즘 소설들과는 다른 종류의 재미를 우리에게 선사한다. 서서히 몸을 조여가는 느낌, 부지불식간에 코 앞까지 다가온 위기감이 바로 그것이다. 문장 하나하나, 등장 인물의 증언 하나하나가 퍼즐처럼 모여 들다가 어느 순간 폭주하듯이 마구 달린다! 그리고 그게 다가 아니다. 급격한 위기상황이 지나간 후에 다시 냉정을 되찾아 잠잠해 지다가 이전보다 한 단계 높아진 위기 상황으로 독자들을 인도해 나가면서 다시 한 번 몸을 조여드는 흥미를 유발시킨다.
그래서 이 작품을 짧은 호흡으로 대했다가는 제풀에 나가떨어져 버리고 말 것 같다. 결말을 알기 위해서 스카이콩콩 식으로 책을 읽었다가는 지루함만을 느낄 것이다. [흰 옷을 입은 여인]은 비유하자면 마치 나선계단을 오르는 것과 같은 작품이다. 그리 경사가 높지 않은 계단을 빙글빙글 돌면서 천천히 오르다 보면 어느 순간 위태로운 높은 곳에 올라간 아득함을 느끼게 되며, 걸어 올라온 계단들을 발 아래로 보는 순간 하나하나의 계단에 담긴 의미가 적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재미와 더불어 [흰 옷을 입은 여인]에서 만날 수 있는 매력은 이야기 전개에 자연스럽고 맛깔스럽게 녹아 있는 시대적 배경이다. 우리는 이 책에서 19세기 발전을 거듭하던 런던의 분주함과 근교 지역의 한적함을 경험할 수 있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야 했던 가난한 시민들과 물질적 부 및 사회적 지위를 독점했던 귀족들(이들은 하인/하녀라는 희한한 사회계층을 출현시키기도 했다)을 만날 수 있으며, 그 귀족들이 만들어낸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남녀관계와 지극히 ‘오바스러운’, 그래서 어딘지 모르게 형식적이고 허황되어 보이는 예절이 만들어내는 우스꽝스러운 불균형을 만날 수 있다.
빅토리아 여왕의 시대는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런 감정은 세라 워터스나 찰스 디킨스, 코난 도일 경의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이번에 [흰 옷을 입은 여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정한 개인이나 사건이 아닌 시대가 주는 매력은 어디에서 나올까? 나는 개인적으로 빅토리아 시대가 주는 흥미로움의 원인은 이 시기가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어슴푸레한’ 시기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빅토리아 여왕의 시대는 물질문명이 급속도로 발달하던 시기였다. 물질문명을 이루는 기본 바탕은 ‘계몽’에 있으며, 계몽이란 결국 자연과 사회, 개인의 일상까지도 밝은 빛 아래로 나오도록 이끄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 계몽의 시기에도 런던의 거리는 여전히 뿌옇기만 했다. 지난 시대보다 거리는 조금 밝아졌으나, 안개와 스모그, 추적추적 내리던 기분나쁜 비로 인해 여전히 런던의 뒷골목이나 시골의 어두움은 남아 있었다. 희뿌연 가스등 불빛으로는 이 어두움을 모두 밝혀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어두움의 영역은 가시적인 공간에만 적용되던 것이 아니었다. 이 시대 지배자들은 여성의 미덕을 ‘빛’으로 내세웠지만, 거기에는 여성들에게 복종만을 강요했던 가부장적인 사회체계의 ‘어두움’이 숨어 있었다. 영국을 가리켜 붙여주는 명예로운 존칭인 ‘신사의 나라’가 ‘빛’이라면 그 신사들의 생활을 떠받치고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소위 하인과 하녀라고 불리던 사람들이 ‘어두움’ 속에서 희생했기 때문이다. 폭발적인 생산력을 앞세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건설한 빛의 이면에는 평균수명 28세의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철저히 착취당한 순수자본주의 시대 노동자들과 해외 식민지 주민들의 피땀이라는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올리버 트위스트]와 [핑거 스미스]에서 시대적 균열 속에 아픔을 겪던 사람들, [셜록 홈즈의 모험]의 악의 제왕인 모리어티 교수는 모두 이렇게 여전히 남아 있는 어두움을 터전으로 삼아, 또는 어두움을 근거로 하여 자신의 영역을 구축한 셈이다.
[흰 옷을 입은 여인]에도 여전히 남아 있던 이 어두움의 영역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궁색하게 가정교사 일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었던 하트라이트 가족의 생활고, 공립 정신병원 또는 부랑인 수용시설의 열악한 환경에 대한 고발(앤 캐서릭은 이 때문에 사설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 신경질적이고 속좁은 귀족 가문 남성의 변덕에 맞춰서 섬겨야 했던 하인들, 주인의 말 한 마디에 일자리를 잃고 쫓겨나야 하는 하녀들, 가난으로 인해 새롭게 개발된 시가지로 이주할 수 없어서 빈곤의 악순환을 겪는 시골 주민들, 철저하게 남성 중심적으로 짜여져 있는 상속제도와 등기제도, 남편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을 미덕으로 알고 있는 여성들, 높은 사회적 지위의 인물들이 보내는 하층민들에 대한 노골적인 경멸 등이 바로 그 어두움의 영역인 것이다.
사실 추리소설의 기본적인 구조는 단순하다. 즉, 추리소설은 거의 예외없이 <범죄의 발생→범죄의 해결>이라는 기본틀 속에서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간다. [흰 옷을 입은 여인]은 이런 기본틀 속에서 범죄의 계획과 실행, 진상의 규명과 악인의 처벌까지를 충실하게 보여주어 독자들에게 재미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런 이야기를 진행시켜 나가는 곳곳에 시대의 어두움을 짙게 더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앞서 이 소설을 ‘추리소설의 클래식’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거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이며, 개인적으로는 요즘의 추리소설들에서는 좀처럼 맛보기 어려운 ‘책을 통해 시대를 볼 수 있는’ 즐거움을 주는 요인이 되었다는 점을 고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