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어 산책 - 엉뚱하고 발랄한 미국의 거의 모든 역사
빌 브라이슨 지음, 정경옥 옮김 / 살림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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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영어산책]은 기본적으로 미국 문화사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미국 문화의 역사를 탐구하기 위하여 선택한 도구가 언어, 그러니까 ‘영어’다. 빌 브라이슨은 1620년 소위 Pilgrim Fathers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건너온 시기를 전후로 하여 최근까지 약 300여년 동안의 미국 정치, 산업, 문화, 일상생활 등을 씨줄로 하고, 영어를 날줄로 하여 한 편의 미국 문화사를 써낸 것이다.
따라서 (내 개인적으로는) 이 책은 생각보다 까다롭다. 물론 ‘Bill Being Bill'이긴 하다. 그의 ’글빨‘은 이 책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면서 독서의 어려움을 상당 부분 완화해 준다. 다양한 자료들로부터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뽑아내는 능력이나, 독설로까지 보일 정도의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던지는 태연함, 그러면서 독자를 킥킥거리게 만들어 책에서 손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그의 마법같은 힘을 새삼 느끼게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영어를 모국어로 쓸 운명을 가지고 태어나지도 않았고(영어권 국가에 가 본 적조차 없다), 미국 역사와 문화에 대한 지식도 얕다. 그래서 빌 브라이슨이 따발총처럼 내뱉는 영어에는 생경함이 먼저 든다. 책의 원제인 [Made in America]가 왜 [발칙한 영어산책]이 되었는지도 이해가 잘 안 가며(아마 빌 브라이슨의 다른 책들과 제목을 통일시키려고 한 게 아닌가 싶다), 영어를 어떻게 써야 발칙한 것인지 잘 모르겠고(우리말에서 ’에잇! 발칙한 것‘이라고 하면 변사또가 춘향이에게 쓰는 말 아닌가!), 비슷비슷해 보이는 영어 단어와 문장이 가지는 미묘한 뉘앙스 및 그 어원의 차이도 제대로 포착해 내지 못하겠다.
영어에 대한 내 실력을 처음부터 ‘뽀록내는’ 이유는 위에서도 말했듯이 영어 자체에 대해서는 뭐라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부터 쓰여질 글은 빌 브라이슨이 펼쳐 놓은 미국 역사의 이야기 가운데 인상 깊었던 것을 정리하고, 가끔 영어를 양념처럼 뿌리는 정도의 수준이 될 것이라는 변명을 미리 늘어놓은 것이다.
 

2.
개인적으로 미국의 특징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은 melting pot이 아닌가 한다. 원래 다인종사회를 의미하는 단어이지만, 여러 인종이 모였다는 것은 단순히 피부색깔 다르고 생김새가 각각인 사람들이 한 장소에 섞여 살게 되었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처한 환경조건에 적응하여 생존을 위해 노력하며, 그 과정에서 여러 유형의 관계망이 성립되는 것은 진화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 아닌가. 인간도 예외일 수 없는 것이, 다종다기한 문화적 특색을 가진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여서 다른 문화와의 상호작용을 발생시키는 것은 역사적으로 증명된 필연의 과정이다. 하위 문화로 분열하기도 하고 때때로 문화 간의 다툼과 분쟁이 일어나 비극적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미국이 그랬다. 인디언과 버팔로만이 초원을 누비던 시절에 유럽에서 건너간 사람들, 그리고 그 이후 미국을 찾은 유럽 ‘변두리’ 지역의 사람들, 노예의 신분으로 끌려 들어온 아프리카의 사람들, 유대인들, 그리고 상대적으로 늦게 미국을 찾은 아시아 지역의 사람들, 원래 미국에 거주하던 원주민들. 미국의 역사는 이들이 300년의 역사를 가진 용광로 안에서 뒤섞이는 과정이었고, 이들의 문화가 화학작용을 일으키는 과정이었다. 미국문화가 가지는 독특함은 역설적이게도 ‘미국만의’ 문화가 없다는 점에 있다. [모비딕]의 저자인 허먼 멜빌은 이런 미국의 특징을 “미국은 국가라기보다는 세계이다”라는 한 문장으로 명쾌하게 정의내렸다. 용광로로서 미국의 특징을 잘 볼 수 있는 것이 미국인들의 언어, 영어다(어쩌면 그래서 빌 브라이슨은 미국 문화사의 ‘도구’를 영어로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작은 섬나라 영국의 언어에 불과했던 영어는 미국에서 인디언들의 언어, 프랑스, 독일, 러시아,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언어, 유대인들의 언어, 아프리카 계열의 언어, 아시아 국가들의 언어가 혼합되면서 비로소 더욱 풍성해지고 ‘세계언어’로 발전해 가기 시작한다.
미국이 지금처럼 세계 최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한, 아마도 American Dream이라는 말은 여전히 유효할 것이고, melting pot의 불꽃은 꺼지지 않으리라. 현재진행형인 미국의 변화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궁금하지 않은가.
 

3.
예전에 세계사를 공부할 때 세계 3대 혁명을 배운 적이 있었는데, 프랑스 대혁명, 영국 명예혁명, 미국 독립전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왕권신수설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던 시기에 공화정 체제의 수립이라는 정치적 의미와 <독립선언문>을 통해 만방에 표출한 천부인권 및 자유/평등의 가치는 결코 낮지 않지만, 미국의 역사가 과연 이런 자랑거리에 명실상부한 것이었나라는 의문 또한 어쩔 수 없다.
빌 브라이슨은 식민지 아메리카 거주민들이 독립을 요구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우선 파고든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미국 독립전쟁의 직접적인 원인 가운데 하나는 ‘대표없이 과세없다’라는 논리. 그러나 빌 브라이슨에 따르면 독립선언 당시 미국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들이었다. 어떤 측면에서 보아도 목숨걸고 영국에 대항해 독립전쟁을 일으킬만한 건덕지가 없었던 셈이다.

1776년 미국인은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들”이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경제적인 유동성, 지역 대표를 뽑을 권리, 언론의 자유, 한때 어느 영국인이 열을 올리며 말한 “가장 역겨운 평등”의 혜택을 누리고 있었다. 더 좋은 음식을 먹었고, 더 안락한 집에서 살았고, 짐작컨대 전반적으로 영국의 사촌들보다 훨씬 더 높은 교육을 받았다. 요컨대 미국의 혁명은 자유를 찾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p.64)

미국혁명이란 당시 식민지 미국인들의 기득권 수호 움직임에서 출발했다는 것이다. 자유를 얻기 위한 혁명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혁명은 그 과정과 결과에서 차이점을 보일 수밖에 없을텐데, 이런 모습이 미국 역사가 보여준 ‘배반의 역사’에 원초적인 출발점이 아니었는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부인권과 개인의 자유의 가치를 그토록 숭배하는 미국 사회는 어째서 같은 인간을 피부색깔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토록 차별했는가? (그리고 지금도 차별하고 있는가?) 새뮤얼 존슨이 지적한 바대로 “흑인을 부리는 사람들이 꽥꽥거리며 자유를 부르짖다니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노예제도 뿐만 아니라 마치 지금의 미국이 있게 만든 시대정신인 것처럼 찬양되는 서부개척과 프론티어 정신이란 것도 입장을 돌려놓고 보면 동부 백인들의 거주지역을 확장하고 풍요로움을 얻는 도상에서 인디언들을 비롯한 기존 거주민들을 쫓아내는 행위이지 않았던가? 인디언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미국인’으로 인정받지 못하였고, 그래서 자신들의 정든 고향을 떠나 보호지역(reservation)에서 살다가 쫓겨나거나 비참한 일생을 마쳐야 했는지는 여기서 재삼 말할 필요도 없다. 자신이 누리는 자유를 지키기 위한 독립전쟁은 <독립선언문>에 명시한 고상한 겉모습과 달리 차별받으면서 비참한 생활을 영위해야 했던 또다른 미국인들을 향한 양날의 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미국은 인디언과 400가지의 조약을 맺고는 그 모두를 어겼다. 인디언은 1924년까지도 미국 시민이 되지 못했다. (p.230)
 

4.
미국은 현재 세계 최강대국이며, 번영과 광명의 상징처럼 되어 있다. [발칙한 영어산책]의 원제가 [Made in America]라는 점은 무척 흥미롭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은 유형의 도로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모든 가치의 판단기준으로서 ‘로마’가 가지는 세계제국의 입지를 의미하기도 하였다. 요즘은? 막말로 세계정치와 경제의 판단기준에서 ‘모든 길은 USA로 통한다’. Made in America는 막강한 힘의 상징이면서 문질문명의 중심이자 자부심과 자긍심의 상징이다.
하지만 빌 브라이슨은 은근히 이 ‘Made in America’에는 그다지 자랑스러워 할 수 없는 역사가 숨겨져 있음을 보여준다. 내가 보기에 빌 브라이슨이 미국의 역사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적어도 표면적으로라도) 세계 다른 국가들에게 선망이 되면서 가장 높은 생산성을 보여주었던 시기는 melting pot이 제대로 작동하던 시기, 그러니까 다인종들이 역동적으로 미국사회에 정착하던 시기였다. 반대로 노예제도를 유지하고 인디언들을 속이며, 외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나치 뺨치는 편협함을 드러낸 시기는 미국이 주장하는 고상한 가치들의 실상이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음을 지적해 낸다.
현실 정치는 Pax Romana는 Pax Britanica를 거쳐 Pax America로 넘어왔다. 남들 다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미국의 ‘혈맹’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우리나라도 조금은 미국의 본질과 앞으로 나가고 있는 방향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나는 상대에 대한 배려, 합리성, 정당성에 대한 감각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 뿐만 아니라 언어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에게 필요한 자질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하고 싶다. (p.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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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조선 운동사 - 대한민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역사
한윤형 지음 / 텍스트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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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티조선운동’과 그 취지에 동감했던 사람들의 온라인 모임인 ‘우리모두’는 내게도 최소한의 인연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나는 가입 이후 뚜렷한 활동이 없는 눈팅족에 불과했지만 나름 안티조선운동의 목표에 공감했고, 그렇게 공감대를 이룬 사람들이 모여서 펼치는 백가쟁명이 스스로의 생각 정리에 좋은 기회도 되었다. 지금은 유명해진, 그러나 당시로서는 그렇지 않았던 진중권, 홍세화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였고,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진보정당 지지자에게 보여준 민주당 지지자들의 배타적 태도에 혼자 분개하기도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후보의 당선에 환호했다.

안티조선운동은 언제 시작된 것일까? 어떤 활동가들은 그 출발점을 1970년대의 언론운동에서 찾는다. 반드시 틀린 말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본격적인 의미의 안티조선운동은 1998년 조선일보가 시도한 소위 ‘최장집 교수 사상검증기사’에서 촉발되어 1999년 ‘우리모두’ 사이트가 개설된 시기부터 2007 대통령선거에서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기까지의 기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인문좌파의 촉망받는(?) 재원이면서 ‘아흐리만’이라는 닉네임으로 안티조선운동에서 활동했던 한윤형은 이 10여년 동안 펼쳐졌던 역사를 꼼꼼하게 되살려낸다.

여기서 잠깐! 나는 바로 앞 문장에서 저자인 한윤형을 ‘인문좌파’라고 지칭했다. 사실 이건 이택광 교수의 표현을 빌려온 것인데, 그가 정의내린 바, 인문좌파의 특징은 정치지형도 상에서 왼쪽에 속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양쪽의 이념을 모두 회의하고 냉정히 평가하는 사유를 보여주는 사람을 의미한다. 한윤형 본인은 ‘인문좌파’라는 나의 멋대로 평가에 동의할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안티조선운동사]를 읽으면서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저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기에 그에게 이런 명칭을 붙여도 큰 문제는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인문좌파라느니, 치우치지 않는다느니 하는 말을 꺼낸 것은 그게 바로 이 책, [안티조선운동사]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나만 해도 조선일보, 월간조선 등등 ‘조선’ 형제들에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조선일보의 정치적 지향점이 나와 다른 위치라는 점도 그렇지만, 자신들과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에 서슴없이 사상의 굴레를 씌우고, 기사나 인터뷰를 정치적으로 ‘마사지’하여 교묘하게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윤색해 내기 때문이다. 나는 조선일보가 사용하는 ‘좌파’라는 용어를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붙이는 ‘좌파’라는 용어의 이면에는 <좌파=빨갱이>라는 이미지를 부지불식중에 각인시킴으로써 좌파라는 딱지가 붙여진 정치적 입장을 우리 사회에서 매도시키고자 하는 사고방식이 숨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를 싫어하는 이유가 또 하나 있다. 내 성질을 버려놓는다는 거다. 마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아침마다 ‘만나’가 내려왔듯이 아침마다 우리 집 현관문 밖에 곱게 접은 조선일보를 놔 둔다. 출근하려고 문을 나서면서 그 제호를 보는 순간 짜증이 확 몰려온다. 말을 섞기도 싫고 배달하는 양반들이 뭔 죄가 있으랴 싶어서 “조선일보 사절”을 붙여 놓아도 별반 소용이 없다. 결국에는 보급소에 전화하여 소리를 빽빽 질러 기분을 상하게 한 후에야 겨우 그만 둔다. 그리고 한 1-2년 지나면 또 슬며시 ‘만나’를 내려주신다.

2.
개인적 글이 좀 길어졌지만 결론은 하여튼 ‘나는 조선일보가 싫어요!’ 이거다. 이런 내가 한윤형만한 필력과 기억력을 가지고 안티조선운동에 대해 글을 쓴다면 어떠했을까? 아마 제1장에서는 친일행각, 냉전적 사고방식 등 ‘조선일보의 죄악상(!)’을 들이대어 조선일보가 ‘악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했을 것이고, 제2장에서는 안티조선운동이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영웅적으로 활동해 왔는가를 찬양할 것이다. 그런데 한윤형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일방적이거나 근거없이 조선일보를 비판하거나 안티조선운동을 옹호하지 않는다. 그는 매우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안티조선운동을 평가한다. 그가 책 말미에서 내린 결론은 이렇다.

안티조선 운동의 공과를 판단해 볼 때, 나는 이 운동이 한국 사회에 충분히 기여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게 안티조선운동은 실패한 운동이다. (중략) 그러나 본질적으로 볼 때, 안티조선 운동은 <조선일보>의 보도 행태로 대표되는 기존 매체의 저급한 편향성을 극복해야 했다. 그 점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이 운동이 실패했다고 감히 말하는 것이다. (p.464)

저자의 결론을 내 마음대로 정리하면 이거다. ‘좋다. 조선일보는 언론이 가져야 한다고 믿어지는 불편부당함을 가진 매체가 아니라 특정 정파의 이해관계를 대변해 온 매체였다. 저급한 보도행태이고 반드시 개선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조선일보의 행태에 대한 잣대는 반대편의 소위 ’진보지‘라고 하는 언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안티조선운동은 단순한 일개 신문에 대한 반대에서 출발했는지 모르지만, 그것이 성공적인 운동으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언론 전체에 편향성 극복이라는 메스를 들이대고, ’공론‘이란 것을 형성하기 위한 그릇으로 기능하도록 노력했어야 한다.’

일면 양비론으로 들릴 수도 있는 주장이지만 자신이 몸담고 참여했던 사회운동에 대한 냉정한 자기 성찰과 새로운 언론운동의 방향성 제시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조선일보에 대한 비판 지점 중 하나는 자신들의 입장에 유/불리한 주장을 구분한 후, 유리한 주장들로 일종의 ‘세력’을 이루고, 그 세력을 통해 불리한 주장들을 배타적으로 밀어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 아프게도 이런 모습은 안티조선운동 내부에서도 있었다. 오히려 좀 더 유치한 방법으로 말이다. 우리모두 사이트가 2002년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겪은 심각한 내홍은 ‘민노당이건 다른 진보정당이건 민주당 후보(노무현)를 지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둘러싼 대립이었다. 민주당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일방적으로 진보정당의 희생을 강요하였던 측면이 있었고, 그 반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나는 진중권씨가 이 시기 민주당 지지자들을 ‘김대중 광신도’로 거칠게 비판(비난?)하였던 것을 아직도 기억한다.

물론 이런 갈등은 우리나라에서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한 진보진영에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고 안티조선운동에 참여한 사람이라고 해서 특정 후보를 지지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가장 큰 문제는 그 때문에 안티조선운동이 ‘선명성’을 획득했다는 자화자찬에 있지 않았을까. 선명했었는지는 모르지만 안티조선운동은 그 폭을 협소하게 만들었다. 안티조선운동은 조선일보에 제 몫을 찾아주어야 한다는 취지에 동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여가능한 장이었고, 또 계속하여 그런 원칙 하에서 외연을 확장함으로써 우리나라 전체 언론, 나아가 정치행태에 대한 문제게기가 가능했던 운동이었다. ‘적과 싸우면서 적을 닮아간다’라고 했던가. 안티조선운동에서 일어났던 그 모든 일들은 또다른 분열이었고, 또다른 무리짓기였으며, 세상과 사람들을 향해 날선 대립각만을 세운 모습이었다.

3.
저자의 성찰을 바탕삼아 본다면, 안티조선운동은 조선일보의 편향성을 지적하고 그것에 대한 대중의 여론을 환기시켰다는 점에서는 성과가 없지 않으나, 편향성의 문제를 조선일보의 문제로 축소시킴으로서 한국사회에서 언론의 역할과 바람직한 보도행태라는 좀 더 큰 담론으로까지 끌고 가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남겼다고 하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안티조선운동 내부에서 나타난 ‘조선일보스러운’ 모습은 상당히 뼈아프다고 할 것이다.

전술하였듯이 안티조선운동의 본격적인 출발은 조선일보가 최장집 교수의 논문 중 일부를 발췌, 짜깁기 하여 <최장집 교수=국가관에 의심이 가는 좌파>라는 꼬리표를 달아 당시 김대중 정부에 대한 생채기를 내고자 하였던 의도적인 보도행태에서 비롯하였다. 이것은 사상과 학문의 자유에 대한 침해일 뿐만 아니라 정확한 사실관계는 부차적인 것으로 돌려지고 목적에 따라 기사를 재구성하는 전형적인 ‘세력화’ 행태였다. 따라서 안티조선운동은 일차적으로 특정 정치사상의 시녀로 전락하여 기사를 윤색함으로써 상대방을 견딜 수 없도록 몰아붙이는 보도행태에 경종을 울리는 것이어야 했다. 이 점에서 안티조선운동의 성과는 작지 않다. 어쩌면 이후 모든 진보진영의 운동에서 ‘조중동’은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아이템,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아이템이 되었으니 말이다.

안티조선운동이 제기한 문제의 출발점은 옳았다. 그리고 그 대상이 어쨌거나 가장 영향력있는 언론인 조선일보였기 때문에 더더욱 문제를 본격화시키기에 좋았고 대중화시키기에도 좋았다. 그러나 운동 과정에서 안티조선운동은 우리 사회의 언론이 지향해야 할 바를 제시하고 새로운 언론의 상을 창조해 내는 데에는 실패했다. 오히려 소설가 이문열이 제기한 소위 ‘홍위병’으로 대표하는 보수 진영의 공세 속에서, 그리고 스스로의 운신폭을 좁혀 버린 배타성 속에서 안티조선운동이 원래 가지고 있던 건강한 비판이 힘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해 본다. 그런 점에서 저자인 한윤형이 인용하여 지적한 다음 내용은 매우 가슴 아프다.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한국 언론의 심각한 문제는 이른바 ‘세력화 방식에 의한 여론화’다. 이를테면 언론이 자기주장에 동조하는 지지자에게 아첨하거나 그런 지지자를 규합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는 양적 분석을 통해 볼 때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의 사설이 ‘세력화 방식에 의한 여론화’를 가장 많이 추구한다는 사실을 씁쓸하게 지적했다. (p.467)

4.
매우 딱딱할 것 같은 책이지만 [안티조선운동사]는 매우 재미있는 책이다. 어떤 대목은 마치 무협지처럼 흥미진진하게 읽힐 정도이고, 만약 안티조선운동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면 더더욱 실감나게 책을 읽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참여정부에 대한 적극적 지지층에게는 조금 불편할 수도 있겠다.

안티조선운동에 대한 저자의 평가에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하지만, 나는 그래도 안티조선운동은 성과가 많았던 운동이라는 평가 쪽에 좀 더 점수를 주고 싶다. 언론은 불가피하게 현실 정치와 이런저런 관련성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이런 점을 인정한다면, 사실 다종다양한 이해관계와 성격을 가진 집단의 목소리를 객관적인 틀로 받아 안는 ‘공론화’ 또는 ‘공론장’으로서의 언론은 매우 이상적인 상이다. 그리고 이상적이라는 것은 다분히 실현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저자도 한겨레신문이나 경향신문의 사례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지금은 정부 권력과 불화하는 매체가 겪는 어려움보다 자본 권력과 불화하는 매체가 겪는 어려움이 훨씬 크다. 공론장으로서의 역할을 위한 물적 조건이 이렇게 열악한 상황에서 과연 고상한 이상을 이룰 수 있는 시기는 언제쯤이 될 것인가. 어쩌면 지금 우리가 해 나가야 할 언론운동은 싫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훨씬 더 지저분하면서, 그래서 흙탕물에 뒹굴거려야 하는 것이 아닐런지. 그리고 그런 각오를 하고 뛰어들었을 때에만 언론 민주주의에 한발자국 더 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다시 총선과 대선이 펼쳐질 2012년을 앞두고 있다. ‘보수라는 이름의 야만’, ‘자본 권력’이 지배하는 시대에 안티조선운동이 제기했던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래서 나는 [안티조선운동사]가 과거 참된 언론의 모습을 고민하며 들었던 깃발을 다시 한 번 세우는 계기로 작용하기를 바란다. 안티조선운동의 과정은 세련되지 못하였고, 수많은 시행착오와 한계, 상처를 거쳐 ‘일단은’ 실패한 운동으로 나타났지만, 그 경험이 결코 ‘파산’이 아닌 승리의 자양분이 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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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의 몸값 1 오늘의 일본문학 8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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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 도쿄 올림픽을 코 앞에 둔 1964년 여름 일본. 도쿄 시내에서 두 건의 폭발사고가 일어나고 범인을 자처하는 편지가 날아온다. 도쿄 경찰에 비상이 걸리고 수많은 형사들은 범인을 쫓기 시작한다. 일본의 전국민이 올림픽의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이 시기, 감히 폭발사고를 일으켜 올림픽을 방해하고자 하는 범인의 목적은 무엇일까?

오쿠다 히데오의 [올림픽의 몸값]은 표면적으로는 거대한 국가조직에 도전한 한 명의 영웅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그 아래에는 유일무이한 절대가치인 국가를 위하여 희생당해야 했던 수많은 평범한 민중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물론 오쿠다 히데오라는 작가의 명성에 걸맞게 이 소설은 재미있다. 일본판 돈키호테라고 해야 할 주인공의 활약과 그를 잡기 위한 일본 경찰의 분투는 다음 장면의 전개를 초조하게 기다리게 한다. 하지만 이 소설은 읽을수록 무척이나 마음을 아프게 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독서는 어느새 국가적 행사를 방해하기 위한 주인공에게 호감을 느끼고, 심지어는(!) 그의 ‘테러’에 응원을 보내게 되면서 당연히 예정되어 있는 그의 패배(!)에 마음 아파하게 된다. 왜? 범인의 행동은 탐욕이나 단순한 과시욕에서 비롯되지 않았으며, 그 행동이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라는 초월적 가치 아래 짓밟히고 빼앗긴 사람들의 저항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으로의 몰락 이후 일본인들이 느낀 상심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만세일계의 신의 후손이라 여겼던 천황의 육성 항복 선언, 짧은 기간이었다 하더라도 외국(미국)에 의한 지배, 국제적 지위의 하락과 국내 기반시설의 파괴에 따른 경제적 후퇴와 생활고 등등. 그러나 일본은 한국전쟁이라는 외생변수와 국민들의 성실성 등으로 인해 빠르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으며, 그 정점에 1964년 제18회 하계올림픽 개최가 있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가 20년도 되기 전에 전세계적인 행사를 주최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올림픽에 대한 일본인들의 자부심과 긍지가 얼마나 컸겠는가. 전통도시를 벗어나 대도시의 모습을 갖춰가는 도쿄의 모습에서, 도쿄와 오사카를 연결하는 신칸센 개통에서, 올림픽을 위해 지어지고 있는 국립경기장과 여러 시설들의 위용에서 그들은 감격하고 또 감격했다.

최근 1년 동안, 전 국민이 일본인이라는 것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동 모임에서는 주민들이 상의해서 동네를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빨래를 처마 밑에 널지 않기로 결정했고, 상이군인 걸인들도 외국인에게 창피하다고 자발적으로 너덜너덜한 군복을 벗어던졌다. 자위대도 요즘은 거의 청소부대였다. 세계에 자랑할만한 올림픽을 개최하기 위해 저마다 자기 책임을 다하려 애쓰고 있었다. 혹시라도 신칸센의 개통이 늦어지면 국민이 솔선해서 곡괭이를 들고 공사현장으로 향할 기세다. (제1권 p.57)

그런데 오쿠다 히데오는 이런 국가적 자긍심에 의문을 제기하고 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한 한 청년을 그려낸다. 그의 의문은 이런 거다. ‘과연 올림픽은 모든 일본 국민들에게 좋기만 한 것이었을까? 혹시나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와 그에 따른 과실은 모두 국가 또는 도쿄가 독점해 버리는 것이 아니었을까?’ [올림픽의 몸값]의 주인공인 시마자키 구니오 주변에는 올림픽 때문에 많은 것을 희생당해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시마자키는 그들의 피땀 하나하나가 모여서 된 1964년 일본 민초들의 화신(化身)이었던 것이다.

올림픽 경기장 건설을 위해 동원된 수많은 인부들의 일상을 보자. 그들은 올림픽 개최일에 맞추어 완공하기 위하여 고된 노동에 종사하지만 이들의 작업장은 열악하기만 하다. 합당한 급여가 주어지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안전보장 대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작업장 안전사고에 따른 사망 및 부상자가 속출한다. 뜨거운 8월 더위 가운데 탈수로 쓰러질 지경이지만, 올림픽을 위한 무리한 공사로 ‘도쿄 사막’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제한 급수로 메밀국수집이 휴업을 할 정도의 힘든 상황이다. 인부들의 급여를 착취해 가는 야쿠자들의 사기도박판과 하청-재하청의 구조적 문제에도 경찰을 비롯한 권력집단은 눈을 감는다. 일부 인부들은 현실의 괴로움을 잊고 순간의 쾌락을 얻기 위해 필로폰에 빠지기도 하고, 중독이 심해진 이들은 마약으로 인한 쇼크로 심장마비사한다. 물론 이들의 사인은 철저히 감추어지고, 보상은 없다.

일본의 가난한 시골 마을과 도시 달동네의 일본국민들은 어떠했을까. 올림픽 개최를 위하여 모든 부와 모든 자본이 도시, 특히 수도 도쿄로 독점된다. 도쿄의 번영은 반대로 도시 빈민층과 농민들의 몰락이라는 그림자와 동의어이다. 개인적으로 [올림픽의 몸값]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공사현장에서 죽은 남편의 장례를 위해 도쿄를 방문한 아키타의 시골 아낙네의 모습이었다. 집안의 가장이 사고로 사망한 상황에서 이 할머니는 도쿄 타워에 올라 올림픽 준비에 여념없던 도쿄를 바라보면서 일생의 구경을 했다고 감동한다. 이 할머니의 철없는(!) 모습이 말해주는 역설적인 페이소스! 모든 것을 도시로 흡수당하면서도 도시를 동경하는 농촌의 모습, 먹고 살기 위하여 도시로 들어왔다가 다시 도시 외곽으로 쫓겨나가야 하는 농촌 거주자들의 아픔이 고스란히 이 아낙네를 통하여 나타난다.

도쿄 올림픽을 배경으로 한 [올림픽의 몸값]이 더욱 흥미로웠던 이유는 24년의 시차를 두고 우리도 동일한 경험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둔 우리의 상황도 1964년 도쿄와 비슷했다. 식민지배와 전쟁, 분단,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딛고 일어나 ‘한강의 기적’을 일군 나라라는 칭송 속에 모든 국민들이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서 노력했다. 1987년 대통령 선거의 후유증이 남아있던 정치권은 정쟁을 멈추었고, 1987년 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던 노동자들과 대학생들의 투쟁도 이 시기만은 조용했다.
모두가 대한민국의 국위선양에 긍지를 가져야만 했고, 올림픽을 위해 어떤 희생도 정당화될 수 있었던 때가 그 시기였다. 물론 서울올림픽은 역대 최대의 성공이라는 평가와 함께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서울올림픽 최고의 기록물의 영예는 국가가 제작한 공식영상물이 아닌 김동원 감독의 다큐멘터리 <상계동 올림픽>으로 돌려야 한다. 시골에서 빈손으로 상경하여 도시 빈민층을 이루었던 상계동 주민들이 살던 달동네에 깡패와 포크레인을 앞세운 철거회사가 들이닥친다. 이들의 겉모습은 철거회사일지 모르나, 그들의 본질은 바로 국가다. 외국인들에게 가난한 서울의 모습을 보여서는 안되므로 ‘더러운’ 빈민들을 내쫓아야 한다는 당위성이 바로 국가의 당위성이었고, 국가권력의 집행기관인 경찰들은 철거깡패를 묵인하고 비호하였다. 이런 일이 올림픽을 앞두고 목동, 사당동, 상계동 등 소위 달동네 촌에서 일어났다.
 

 


국가의 발전과 대외적 체면을 위해서 국민들이 용인할 수 있는 희생은 어디까지일까. 무서운 것은 이렇게 집단을 위해 개인이 희생되어도 상관없다는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이 종식되지 않고 계속하여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도시 환경의 개선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청계천을 복개하면서 그 지역에 거주하던 판자촌 주민들을 강제이주시킨 곳이 지금의 성남시였고, 다시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많은 상인들과 노점상들이 더 깊은 골목 뒤편으로 사라져야 했다. 용산 참사의 고통이 가셔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수백조의 경제적 효과’ 운운하면서 치러진 G20 정상회의를 위해서 집회와 시위의 자유, 표현의 자유라는 기본권은 간단히 무시되었으며, 국민들은 쓰레기도 함부로 버려서는 안되는 존재로 전락해 버렸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개인주의는 좋지 않은 것이며,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가치관을 주입받아 왔다. 그렇지만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와 동의어가 아니며, 따라서 개인주의는 공동체주의와 반대말이 아니다. 그동안 개인들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라는 정체불명의 가치관으로 인해서 너무도 많은 것을 감수했고, 또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에 길들여져 온 것이 아닐까?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이기주의 뿐만 아니라 전체주의화 되어 가는 국가주의이다. 국가주의가 팽배할 때 어떤 비판도 무의미해지며, 개인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어떤 비합리적인 조치에도 ‘국가’라는 절대가치를 덧입혀 정당화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올림픽의 몸값]을 통해 본 희생당한 사람들의 아픔이, 서울 올림픽을 비롯하여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불결한 사람’으로 취급당해야만 했던 사람들의 고통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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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계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5
시마자키 도손 지음, 노영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요즘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 방송 프로그램이라면 단연 <나는 가수다>가 아닌가 합니다.방송국에서 당초에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나는 가수다>는 현재 우리 가요계의 대세라고 할 수 있는 기획된 상품으로서 가수상(像)에 대한 반격이며 ‘가수’라는 존재에 대한 정체성 찾기의 일환이라는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는 생각입니다.
불과 20여년 전만 하더라도 많은 가수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에서 일가를 이루기 위해 극심한 가난과 가족들과의 갈등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아니면 최소한 ‘딴따라’라는 설움을 참아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과거와는 너무나 달라져 버린 환경과 달라져 버린 유행에서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여지는 별로 없어 보입니다. 시류를 따르느냐 아니면 자신의 세계를 고수하느냐. <나는 가수다>는 대체적으로 후자 쪽의 가수들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부르는 노래의 뒤편에는 숨겨진 또 다른 목소리가 들립니다. “나는 가수다!”라는 다른 목소리는 결국 자기 정체성의 확인이며, 그 확인이 청중들의 마음을 붙들고 흔들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가수다> 이야기를 꺼낸 것은 문득 시마자키 도손의 [파계(破戒)]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메이지 유신 이전 막부시대에 일본에는 ‘에타’라는 계층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가축의 도살, 가죽제품의 제조, 죄인의 처형 등에 종사하였는데, 일본 근대사회에서는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던 천민 중에 천민이었습니다. 이들이 당했던 차별은 우리나라의 백정들이 당하던 편견과 차별을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예전에 읽었던 [파계]에서는 원어 그대로 ‘에타’라는 단어를 썼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최근에 다시 읽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에는 ‘백정’이라는 용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도 ‘에타’ 대신에 ‘백정’이라는 단어를 쓰려고 합니다)
어쨌거나 메이지 유신 이후 ‘해방령’이 반포되면서 백정에 대한 차별이 사라지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명목 상의 평등에 불과할 뿐, 여전히 당시 일본 사회에는 백정 출신이라고 하면 무시하고 멸시하면서 인간 이하의 존재로 취급하던 풍조가 남아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 속에서 당사자들은 체념하거나 설움과 분노 속에서 일생을 보내야 했을 것입니다.

[파계]의 주인공인 세가와 우시마쓰는 학생들에게 신망을 얻고 있는 촉망받는 젊은 교사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는 비밀이 한 가지 있는데, 바로 백정 출신이라는 사실입니다. 일평생을 차별과 비애 속에서 살아야 했던 우시마쓰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야말로 피맺힌 훈계를 남깁니다.

설령 어떤 경우를 당하더라도,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결코 백정이라고 고백하지 마라. 한때의 분노나 비애로 이 훈계를 잊으면 그때는 사회에서 버려지는 거라 생각해라.(문학동네판, p.16)

아버지의 훈계와 반대편에 존재하는 것이 이노코 렌타로의 책 <참회록>의 첫 문장입니다. “나는 백정이다.” 두 어절의 짧은 문장이 울리는 파동은 렌타로의 일생과 조응하면서 높은 파고를 만들어 우시마쓰의 마음을 후려 때립니다. 렌타로는 백정 출신이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쫓겨났지만 자신의 출신성분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세상 앞에 용감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선언한 후, 일본 사회에 만연한 차별과 편견의 구조를 파헤치는 글을 씁니다.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정치인의 당선을 위하여 선거에서 힘을 보태다가 결국 정치테러의 희생범이 되어 목숨을 잃습니다. 그의 죽음 앞에서 우시마쓰는 자신이 지켜오던 아버지의 훈계를 깨뜨리고 마침내 자기 정체성의 긍정을 결심합니다.

‘파계(破戒)’의 뜻은 따라야할 계율을 깨뜨린다는 것입니다. 우시마쓰가 깨뜨린 계율은 단순히 아버지의 유언이 아닙니다. 렌타로와 우시마쓰가 먼저 깨뜨리고자 한 계율은 출신 성분으로 인간을 평가하고, 인위적인 위계질서로 비인간적인 대우를 정당화하며 하층 계급에게 편견과 멸시, 따돌림을 가하는 차별의 계율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 앞에서 “정말로 나는 백정입니다, 조리입니다. 불결한 인간입니다. (p.336)”라고 말하는 우시마쓰의 고백은 개인적 차원의 파계가 아니라 사회에 만연한 차별과 절망의 심급을 뛰어넘고자 하는 ‘사회적 파계’일 뿐만 아니라 불합리한 계급/계층 구조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그 계율을 깨뜨리려는 사명을 확인하는 분명한 자기 정체성의 수립이기도 합니다. 우시마쓰의 고백이, 그리고 친구와 학생들의 호응과 눈물이 인상깊게 다가오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파계]는 또한 현대 사회에도 근절되지 않는 차별의 잔재를 생각하게 합니다. 일본에는 과거의 하층계급을 일컫는 ‘부라쿠민(部落民 ぶらくみん)’들, 과거 일본의 원주민이었던 홋카이도의 아이누족과 오키나와 원주민들에 대한 마음 깊은 곳 차별의식이 여전히 강하다고 합니다. 우리 동포들인 재일 조선인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도 이 범주에 속합니다.
그런데 마음 아픈 사실은 일본의 이런 모습이 우리 땅에서도 그렇게 낯설지 않다는 점입니다. 일본에서 동포들이 당하는 고통에 분개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이는 외침 뒤편에는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외국인 노동자, 결혼이주여성, 취약계층(장애인, 노숙인, 결손가족 등), 동성애자 등 ‘소수’에 대한 편견이라는 부끄러움이 그림자처럼 남아 있습니다.

앞에서 최근 <나는 가수다>는 가수의 정체성에 대한 확인이며, 이것이 가수상(像)에 대한 논의를 증폭시키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렌타로와 우시마쓰의 “나는 백정이다”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모순된 사회적 인식을 파계하는 첫 번째 조건은 당연히 당사자들의 자기발견과 ‘대자적 존재’로의 전환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차별과 편견이 만연한 우리 사회에 주는 외침이 작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울러 이들의 자기긍정과 외침에 이웃인 우리가 어떻게 호응하고 함께 올바른 길로 돌아갈 수 있느냐를 반성해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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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관의 살인 1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권일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가끔 동네 도서관에 들러서 특별히 찾는 책없이 서가 곳곳을 기웃거리면 매번 눈에 밟히는 책들이 있다. 아야츠지 유키토의 [암흑관의 살인]은 바로 그런 책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이렇게 눈길은 자꾸 가면서도 막상 대출해 오지는 못하던 책이 이 책이었다. ‘암흑’, ‘살인’과 같은 자극적인(?) 제목은 어서 읽어달라고 유혹했지만, 때로는 대출 제한권수 때문에, 때로는 한 두권만 있어서, 때로는 다른 책을 먼저 보느라고 미루기만 했다. 어쨌거나 이번에 도서관에 갔을 때 눈 딱 감고 세 권을 모두 집어와서 읽어 보았다. 밀린 빚 갚는다는 마음도 좀 있었던 것 같다.

젊어서부터 자수성가하여 큰 돈을 모은 후 이탈리아 여인인 ‘달리아’와 결혼하여 암흑관을 지은 ‘우라도 겐요’는 그 곳에서 자식을 낳고 은거생활에 들어간다. 우라도 겐요의 증손자인 겐지의 초대를 받아 암흑관을 방문한 ‘츄야(작중 화자)’는 그 곳에서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비밀스러운 분위기와 함께 신체적, 정신적 결함을 하나씩 가진 우라도 가문의 구성원들을 만나게 된다. 암흑관의 고용인 한 명이 살해당해 뒤숭숭한 가운데 다가온 ‘달리아의 밤’. 외부인으로 초대받은 츄야는 연회에서 수수께끼의 음식을 먹게 되고, 이것을 계기로 18년 전에 일어난 의문의 살인사건과 현재의 살인사건을 파헤친다.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館) 시리즈>는 일본 추리소설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한 번쯤은 접해 보았을 상당히 유명한 작품이다. 나도 십각관, 시계관, 미로관을 접한 경험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물론 [암흑관의 살인]에 대해서 사람들의 평가는 여러 가지로 엇갈린다. 하지만 내게 이 책은 세 가지 점에서 흥미로운 작품이다. ① 먼저 그 무지막지한 책의 두께. 사회파 추리소설이 아닌 본격추리소설로 이 정도 분량을 뽑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곁다리 군더더기가 많이 붙은 ‘그저 그런’ 작품 아니면 흥미와 작품성을 모두 갖춘 명작이라는 얘기이니 한 번 도전해 볼 만 하다는 생각이었다. ② 둘째, 아야츠지 유키토가 8년이나 걸려 쓴 작품이라는 점(번역까지 고려하면 우리나라 독자들의 손에 들어오기까지 10년이 넘게 걸린 셈이다). 그만큼 지난한 과정을 거쳐서 낸 책이니 뭔가 있을거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③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이유인데, <관 시리즈>의 기묘한 일련의 건물들을 설계한 나카무라 세이지라는 건축가의 첫 번째 작품이 바로 ‘암흑관’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 책에는 수수께끼로 휩싸인 천재 건축가 나카무라 세이지의 비밀을 알아 볼 수 있는 단초가 숨겨져 있을 수도 있다.

꽤나 오랜 시간을 투자하여 읽었다. 분량 만큼이나 등장인물도 많고 가계도도 난해하다. 그리고 동관, 서관, 남관, 북관 등 4개 부속건물로 이루어진 ‘암흑관’의 복잡한 구조도 집중하여 책을 읽는 데에 어려움을 주었다. 가계도와 건물 평면도를 복사하여 옆에 놓고 보아야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그나마 출근길 만원 지하철에서는 이렇게 읽지도 못했다).
[암흑관의 살인]은 트릭이 대단하다거나 반전이 기가 막힌 작품으로 평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우선 곳곳에 등장하는 비밀통로의 존재는 오래된 저택이라는 점을 감안하여도 독자들에게 그다지 유쾌한 장치는 아니다. 물론 비밀통로나 비밀장치가 독자들을 속이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열심히 범인을 추리해 보면서 짱구 굴리는 중에 갑자기 나타나는 Deus ex Machina는 허탈감을 준다. 또한 샴쌍둥이, 조로증, 선천적 신체접합증 등 기형적인 신체가 동시 다발적으로 나타나는 것도 과연 가능한 것인지 의문점이다. 암흑관의 거주자들에게 뭔가 비정상적이면서도 ‘저주’로까지 인식될만큼의 상황을 부여하고 싶은 저자의 마음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한 집안의 같은 대(사촌간)에서 한 명 보기도 어려운 이런 기형적 유전상황이 한꺼번에 나타날 확률은 너무나 낮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1950년대 일본의 시대적 상황이 나오는 부분은 한국 독자들에게는 매우 낯설게 다가올 것 같다.

이런 단점들도 있고, 지루하고 분량만 많아서 읽다가 지쳐버리는 책이라는 혹평도 있지만 그래도 이 책은 분명 매력적이다. 흔히 아야츠지 유키토에게 본격추리소설의 대가라는 칭호를 붙이지만 이 책은 미스테리 풀기보다 오히려 몽환적이고 신비적인 분위기에서 매력을 풍긴다. ‘암흑’이란 단어는 앞을 알 수 없는 불안과 공포, 불확실성과 불투명성이 연상시킨다. 이 검은색은 건물 자체의 색깔일 뿐만 아니라, 건물에 거주하는 우라도 가문의 구성원 모두에게 덧입혀져 그들의 약점과 수치를 숨기는 힘으로 작용하여 뭔가 앞을 알 수 없는 불확실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암흑관은 온통 검은색 자재를 이용하여 지은 건물이다. 창문에는 덧창까지 달려 있고 실내 조명도 최소한으로 제한되어 있다. 이런 어두움 속에는 반드시 숨기고 싶은 비밀이 숨어 있는 법이며, 그것이 밝은 광명 아래 드러날 때 비밀은 비극이 되고 등장인물들의 욕망과 갈등, 미움과 질투는 고스란히 파멸이 되어 돌아온다. 특히 암흑관의 핵심부라 할 수 있는 서관의 연회장에서 ‘달리아의 밤’에 벌어지는 수수께끼의 연회 장면, 저택의 정원에 자리잡은 의문의 건물인 ‘방황의 우리’에 숨겨진 비밀, 신체적‧정신적 결함을 하나씩 가진 가족 구성원 및 암흑관 고용인 한 명 한 명의 사연들은 책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마치 악몽을 꾸는 듯한 느낌을 들도록 만들어 독자들의 궁금증을 증폭시키고 때론 압박감으로, 때론 공포감으로 다가온다.
18년전 우라도 겐요를 살해한 범인은 누구인가? 그리고 현재 일어난 살인사건과 18년 전의 사건은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가? 달리아의 밤에 가족들이 먹는 의문의 음식이 무엇일까? 우라도 가문과 그 고용인들에게 숨겨진 비밀은 무엇인가? 어둡고 무거우면서도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와 함께 추리소설을 즐기고 싶은 사람들에게 [암흑관의 살인]은 꽤 괜찮은 작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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