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의 몸값 1 오늘의 일본문학 8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제18회 도쿄 올림픽을 코 앞에 둔 1964년 여름 일본. 도쿄 시내에서 두 건의 폭발사고가 일어나고 범인을 자처하는 편지가 날아온다. 도쿄 경찰에 비상이 걸리고 수많은 형사들은 범인을 쫓기 시작한다. 일본의 전국민이 올림픽의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이 시기, 감히 폭발사고를 일으켜 올림픽을 방해하고자 하는 범인의 목적은 무엇일까?

오쿠다 히데오의 [올림픽의 몸값]은 표면적으로는 거대한 국가조직에 도전한 한 명의 영웅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그 아래에는 유일무이한 절대가치인 국가를 위하여 희생당해야 했던 수많은 평범한 민중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물론 오쿠다 히데오라는 작가의 명성에 걸맞게 이 소설은 재미있다. 일본판 돈키호테라고 해야 할 주인공의 활약과 그를 잡기 위한 일본 경찰의 분투는 다음 장면의 전개를 초조하게 기다리게 한다. 하지만 이 소설은 읽을수록 무척이나 마음을 아프게 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독서는 어느새 국가적 행사를 방해하기 위한 주인공에게 호감을 느끼고, 심지어는(!) 그의 ‘테러’에 응원을 보내게 되면서 당연히 예정되어 있는 그의 패배(!)에 마음 아파하게 된다. 왜? 범인의 행동은 탐욕이나 단순한 과시욕에서 비롯되지 않았으며, 그 행동이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라는 초월적 가치 아래 짓밟히고 빼앗긴 사람들의 저항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으로의 몰락 이후 일본인들이 느낀 상심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만세일계의 신의 후손이라 여겼던 천황의 육성 항복 선언, 짧은 기간이었다 하더라도 외국(미국)에 의한 지배, 국제적 지위의 하락과 국내 기반시설의 파괴에 따른 경제적 후퇴와 생활고 등등. 그러나 일본은 한국전쟁이라는 외생변수와 국민들의 성실성 등으로 인해 빠르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으며, 그 정점에 1964년 제18회 하계올림픽 개최가 있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가 20년도 되기 전에 전세계적인 행사를 주최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올림픽에 대한 일본인들의 자부심과 긍지가 얼마나 컸겠는가. 전통도시를 벗어나 대도시의 모습을 갖춰가는 도쿄의 모습에서, 도쿄와 오사카를 연결하는 신칸센 개통에서, 올림픽을 위해 지어지고 있는 국립경기장과 여러 시설들의 위용에서 그들은 감격하고 또 감격했다.

최근 1년 동안, 전 국민이 일본인이라는 것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동 모임에서는 주민들이 상의해서 동네를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빨래를 처마 밑에 널지 않기로 결정했고, 상이군인 걸인들도 외국인에게 창피하다고 자발적으로 너덜너덜한 군복을 벗어던졌다. 자위대도 요즘은 거의 청소부대였다. 세계에 자랑할만한 올림픽을 개최하기 위해 저마다 자기 책임을 다하려 애쓰고 있었다. 혹시라도 신칸센의 개통이 늦어지면 국민이 솔선해서 곡괭이를 들고 공사현장으로 향할 기세다. (제1권 p.57)

그런데 오쿠다 히데오는 이런 국가적 자긍심에 의문을 제기하고 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한 한 청년을 그려낸다. 그의 의문은 이런 거다. ‘과연 올림픽은 모든 일본 국민들에게 좋기만 한 것이었을까? 혹시나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와 그에 따른 과실은 모두 국가 또는 도쿄가 독점해 버리는 것이 아니었을까?’ [올림픽의 몸값]의 주인공인 시마자키 구니오 주변에는 올림픽 때문에 많은 것을 희생당해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시마자키는 그들의 피땀 하나하나가 모여서 된 1964년 일본 민초들의 화신(化身)이었던 것이다.

올림픽 경기장 건설을 위해 동원된 수많은 인부들의 일상을 보자. 그들은 올림픽 개최일에 맞추어 완공하기 위하여 고된 노동에 종사하지만 이들의 작업장은 열악하기만 하다. 합당한 급여가 주어지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안전보장 대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작업장 안전사고에 따른 사망 및 부상자가 속출한다. 뜨거운 8월 더위 가운데 탈수로 쓰러질 지경이지만, 올림픽을 위한 무리한 공사로 ‘도쿄 사막’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제한 급수로 메밀국수집이 휴업을 할 정도의 힘든 상황이다. 인부들의 급여를 착취해 가는 야쿠자들의 사기도박판과 하청-재하청의 구조적 문제에도 경찰을 비롯한 권력집단은 눈을 감는다. 일부 인부들은 현실의 괴로움을 잊고 순간의 쾌락을 얻기 위해 필로폰에 빠지기도 하고, 중독이 심해진 이들은 마약으로 인한 쇼크로 심장마비사한다. 물론 이들의 사인은 철저히 감추어지고, 보상은 없다.

일본의 가난한 시골 마을과 도시 달동네의 일본국민들은 어떠했을까. 올림픽 개최를 위하여 모든 부와 모든 자본이 도시, 특히 수도 도쿄로 독점된다. 도쿄의 번영은 반대로 도시 빈민층과 농민들의 몰락이라는 그림자와 동의어이다. 개인적으로 [올림픽의 몸값]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공사현장에서 죽은 남편의 장례를 위해 도쿄를 방문한 아키타의 시골 아낙네의 모습이었다. 집안의 가장이 사고로 사망한 상황에서 이 할머니는 도쿄 타워에 올라 올림픽 준비에 여념없던 도쿄를 바라보면서 일생의 구경을 했다고 감동한다. 이 할머니의 철없는(!) 모습이 말해주는 역설적인 페이소스! 모든 것을 도시로 흡수당하면서도 도시를 동경하는 농촌의 모습, 먹고 살기 위하여 도시로 들어왔다가 다시 도시 외곽으로 쫓겨나가야 하는 농촌 거주자들의 아픔이 고스란히 이 아낙네를 통하여 나타난다.

도쿄 올림픽을 배경으로 한 [올림픽의 몸값]이 더욱 흥미로웠던 이유는 24년의 시차를 두고 우리도 동일한 경험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둔 우리의 상황도 1964년 도쿄와 비슷했다. 식민지배와 전쟁, 분단,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딛고 일어나 ‘한강의 기적’을 일군 나라라는 칭송 속에 모든 국민들이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서 노력했다. 1987년 대통령 선거의 후유증이 남아있던 정치권은 정쟁을 멈추었고, 1987년 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던 노동자들과 대학생들의 투쟁도 이 시기만은 조용했다.
모두가 대한민국의 국위선양에 긍지를 가져야만 했고, 올림픽을 위해 어떤 희생도 정당화될 수 있었던 때가 그 시기였다. 물론 서울올림픽은 역대 최대의 성공이라는 평가와 함께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서울올림픽 최고의 기록물의 영예는 국가가 제작한 공식영상물이 아닌 김동원 감독의 다큐멘터리 <상계동 올림픽>으로 돌려야 한다. 시골에서 빈손으로 상경하여 도시 빈민층을 이루었던 상계동 주민들이 살던 달동네에 깡패와 포크레인을 앞세운 철거회사가 들이닥친다. 이들의 겉모습은 철거회사일지 모르나, 그들의 본질은 바로 국가다. 외국인들에게 가난한 서울의 모습을 보여서는 안되므로 ‘더러운’ 빈민들을 내쫓아야 한다는 당위성이 바로 국가의 당위성이었고, 국가권력의 집행기관인 경찰들은 철거깡패를 묵인하고 비호하였다. 이런 일이 올림픽을 앞두고 목동, 사당동, 상계동 등 소위 달동네 촌에서 일어났다.
 

 


국가의 발전과 대외적 체면을 위해서 국민들이 용인할 수 있는 희생은 어디까지일까. 무서운 것은 이렇게 집단을 위해 개인이 희생되어도 상관없다는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이 종식되지 않고 계속하여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도시 환경의 개선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청계천을 복개하면서 그 지역에 거주하던 판자촌 주민들을 강제이주시킨 곳이 지금의 성남시였고, 다시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많은 상인들과 노점상들이 더 깊은 골목 뒤편으로 사라져야 했다. 용산 참사의 고통이 가셔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수백조의 경제적 효과’ 운운하면서 치러진 G20 정상회의를 위해서 집회와 시위의 자유, 표현의 자유라는 기본권은 간단히 무시되었으며, 국민들은 쓰레기도 함부로 버려서는 안되는 존재로 전락해 버렸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개인주의는 좋지 않은 것이며,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가치관을 주입받아 왔다. 그렇지만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와 동의어가 아니며, 따라서 개인주의는 공동체주의와 반대말이 아니다. 그동안 개인들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라는 정체불명의 가치관으로 인해서 너무도 많은 것을 감수했고, 또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에 길들여져 온 것이 아닐까?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이기주의 뿐만 아니라 전체주의화 되어 가는 국가주의이다. 국가주의가 팽배할 때 어떤 비판도 무의미해지며, 개인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어떤 비합리적인 조치에도 ‘국가’라는 절대가치를 덧입혀 정당화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올림픽의 몸값]을 통해 본 희생당한 사람들의 아픔이, 서울 올림픽을 비롯하여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불결한 사람’으로 취급당해야만 했던 사람들의 고통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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