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관의 살인 1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권일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가끔 동네 도서관에 들러서 특별히 찾는 책없이 서가 곳곳을 기웃거리면 매번 눈에 밟히는 책들이 있다. 아야츠지 유키토의 [암흑관의 살인]은 바로 그런 책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이렇게 눈길은 자꾸 가면서도 막상 대출해 오지는 못하던 책이 이 책이었다. ‘암흑’, ‘살인’과 같은 자극적인(?) 제목은 어서 읽어달라고 유혹했지만, 때로는 대출 제한권수 때문에, 때로는 한 두권만 있어서, 때로는 다른 책을 먼저 보느라고 미루기만 했다. 어쨌거나 이번에 도서관에 갔을 때 눈 딱 감고 세 권을 모두 집어와서 읽어 보았다. 밀린 빚 갚는다는 마음도 좀 있었던 것 같다.

젊어서부터 자수성가하여 큰 돈을 모은 후 이탈리아 여인인 ‘달리아’와 결혼하여 암흑관을 지은 ‘우라도 겐요’는 그 곳에서 자식을 낳고 은거생활에 들어간다. 우라도 겐요의 증손자인 겐지의 초대를 받아 암흑관을 방문한 ‘츄야(작중 화자)’는 그 곳에서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비밀스러운 분위기와 함께 신체적, 정신적 결함을 하나씩 가진 우라도 가문의 구성원들을 만나게 된다. 암흑관의 고용인 한 명이 살해당해 뒤숭숭한 가운데 다가온 ‘달리아의 밤’. 외부인으로 초대받은 츄야는 연회에서 수수께끼의 음식을 먹게 되고, 이것을 계기로 18년 전에 일어난 의문의 살인사건과 현재의 살인사건을 파헤친다.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館) 시리즈>는 일본 추리소설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한 번쯤은 접해 보았을 상당히 유명한 작품이다. 나도 십각관, 시계관, 미로관을 접한 경험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물론 [암흑관의 살인]에 대해서 사람들의 평가는 여러 가지로 엇갈린다. 하지만 내게 이 책은 세 가지 점에서 흥미로운 작품이다. ① 먼저 그 무지막지한 책의 두께. 사회파 추리소설이 아닌 본격추리소설로 이 정도 분량을 뽑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곁다리 군더더기가 많이 붙은 ‘그저 그런’ 작품 아니면 흥미와 작품성을 모두 갖춘 명작이라는 얘기이니 한 번 도전해 볼 만 하다는 생각이었다. ② 둘째, 아야츠지 유키토가 8년이나 걸려 쓴 작품이라는 점(번역까지 고려하면 우리나라 독자들의 손에 들어오기까지 10년이 넘게 걸린 셈이다). 그만큼 지난한 과정을 거쳐서 낸 책이니 뭔가 있을거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③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이유인데, <관 시리즈>의 기묘한 일련의 건물들을 설계한 나카무라 세이지라는 건축가의 첫 번째 작품이 바로 ‘암흑관’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 책에는 수수께끼로 휩싸인 천재 건축가 나카무라 세이지의 비밀을 알아 볼 수 있는 단초가 숨겨져 있을 수도 있다.

꽤나 오랜 시간을 투자하여 읽었다. 분량 만큼이나 등장인물도 많고 가계도도 난해하다. 그리고 동관, 서관, 남관, 북관 등 4개 부속건물로 이루어진 ‘암흑관’의 복잡한 구조도 집중하여 책을 읽는 데에 어려움을 주었다. 가계도와 건물 평면도를 복사하여 옆에 놓고 보아야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그나마 출근길 만원 지하철에서는 이렇게 읽지도 못했다).
[암흑관의 살인]은 트릭이 대단하다거나 반전이 기가 막힌 작품으로 평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우선 곳곳에 등장하는 비밀통로의 존재는 오래된 저택이라는 점을 감안하여도 독자들에게 그다지 유쾌한 장치는 아니다. 물론 비밀통로나 비밀장치가 독자들을 속이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열심히 범인을 추리해 보면서 짱구 굴리는 중에 갑자기 나타나는 Deus ex Machina는 허탈감을 준다. 또한 샴쌍둥이, 조로증, 선천적 신체접합증 등 기형적인 신체가 동시 다발적으로 나타나는 것도 과연 가능한 것인지 의문점이다. 암흑관의 거주자들에게 뭔가 비정상적이면서도 ‘저주’로까지 인식될만큼의 상황을 부여하고 싶은 저자의 마음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한 집안의 같은 대(사촌간)에서 한 명 보기도 어려운 이런 기형적 유전상황이 한꺼번에 나타날 확률은 너무나 낮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1950년대 일본의 시대적 상황이 나오는 부분은 한국 독자들에게는 매우 낯설게 다가올 것 같다.

이런 단점들도 있고, 지루하고 분량만 많아서 읽다가 지쳐버리는 책이라는 혹평도 있지만 그래도 이 책은 분명 매력적이다. 흔히 아야츠지 유키토에게 본격추리소설의 대가라는 칭호를 붙이지만 이 책은 미스테리 풀기보다 오히려 몽환적이고 신비적인 분위기에서 매력을 풍긴다. ‘암흑’이란 단어는 앞을 알 수 없는 불안과 공포, 불확실성과 불투명성이 연상시킨다. 이 검은색은 건물 자체의 색깔일 뿐만 아니라, 건물에 거주하는 우라도 가문의 구성원 모두에게 덧입혀져 그들의 약점과 수치를 숨기는 힘으로 작용하여 뭔가 앞을 알 수 없는 불확실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암흑관은 온통 검은색 자재를 이용하여 지은 건물이다. 창문에는 덧창까지 달려 있고 실내 조명도 최소한으로 제한되어 있다. 이런 어두움 속에는 반드시 숨기고 싶은 비밀이 숨어 있는 법이며, 그것이 밝은 광명 아래 드러날 때 비밀은 비극이 되고 등장인물들의 욕망과 갈등, 미움과 질투는 고스란히 파멸이 되어 돌아온다. 특히 암흑관의 핵심부라 할 수 있는 서관의 연회장에서 ‘달리아의 밤’에 벌어지는 수수께끼의 연회 장면, 저택의 정원에 자리잡은 의문의 건물인 ‘방황의 우리’에 숨겨진 비밀, 신체적‧정신적 결함을 하나씩 가진 가족 구성원 및 암흑관 고용인 한 명 한 명의 사연들은 책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마치 악몽을 꾸는 듯한 느낌을 들도록 만들어 독자들의 궁금증을 증폭시키고 때론 압박감으로, 때론 공포감으로 다가온다.
18년전 우라도 겐요를 살해한 범인은 누구인가? 그리고 현재 일어난 살인사건과 18년 전의 사건은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가? 달리아의 밤에 가족들이 먹는 의문의 음식이 무엇일까? 우라도 가문과 그 고용인들에게 숨겨진 비밀은 무엇인가? 어둡고 무거우면서도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와 함께 추리소설을 즐기고 싶은 사람들에게 [암흑관의 살인]은 꽤 괜찮은 작품이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