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어 산책 - 엉뚱하고 발랄한 미국의 거의 모든 역사
빌 브라이슨 지음, 정경옥 옮김 / 살림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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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영어산책]은 기본적으로 미국 문화사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미국 문화의 역사를 탐구하기 위하여 선택한 도구가 언어, 그러니까 ‘영어’다. 빌 브라이슨은 1620년 소위 Pilgrim Fathers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건너온 시기를 전후로 하여 최근까지 약 300여년 동안의 미국 정치, 산업, 문화, 일상생활 등을 씨줄로 하고, 영어를 날줄로 하여 한 편의 미국 문화사를 써낸 것이다.
따라서 (내 개인적으로는) 이 책은 생각보다 까다롭다. 물론 ‘Bill Being Bill'이긴 하다. 그의 ’글빨‘은 이 책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면서 독서의 어려움을 상당 부분 완화해 준다. 다양한 자료들로부터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뽑아내는 능력이나, 독설로까지 보일 정도의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던지는 태연함, 그러면서 독자를 킥킥거리게 만들어 책에서 손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그의 마법같은 힘을 새삼 느끼게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영어를 모국어로 쓸 운명을 가지고 태어나지도 않았고(영어권 국가에 가 본 적조차 없다), 미국 역사와 문화에 대한 지식도 얕다. 그래서 빌 브라이슨이 따발총처럼 내뱉는 영어에는 생경함이 먼저 든다. 책의 원제인 [Made in America]가 왜 [발칙한 영어산책]이 되었는지도 이해가 잘 안 가며(아마 빌 브라이슨의 다른 책들과 제목을 통일시키려고 한 게 아닌가 싶다), 영어를 어떻게 써야 발칙한 것인지 잘 모르겠고(우리말에서 ’에잇! 발칙한 것‘이라고 하면 변사또가 춘향이에게 쓰는 말 아닌가!), 비슷비슷해 보이는 영어 단어와 문장이 가지는 미묘한 뉘앙스 및 그 어원의 차이도 제대로 포착해 내지 못하겠다.
영어에 대한 내 실력을 처음부터 ‘뽀록내는’ 이유는 위에서도 말했듯이 영어 자체에 대해서는 뭐라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부터 쓰여질 글은 빌 브라이슨이 펼쳐 놓은 미국 역사의 이야기 가운데 인상 깊었던 것을 정리하고, 가끔 영어를 양념처럼 뿌리는 정도의 수준이 될 것이라는 변명을 미리 늘어놓은 것이다.
 

2.
개인적으로 미국의 특징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은 melting pot이 아닌가 한다. 원래 다인종사회를 의미하는 단어이지만, 여러 인종이 모였다는 것은 단순히 피부색깔 다르고 생김새가 각각인 사람들이 한 장소에 섞여 살게 되었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처한 환경조건에 적응하여 생존을 위해 노력하며, 그 과정에서 여러 유형의 관계망이 성립되는 것은 진화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 아닌가. 인간도 예외일 수 없는 것이, 다종다기한 문화적 특색을 가진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여서 다른 문화와의 상호작용을 발생시키는 것은 역사적으로 증명된 필연의 과정이다. 하위 문화로 분열하기도 하고 때때로 문화 간의 다툼과 분쟁이 일어나 비극적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미국이 그랬다. 인디언과 버팔로만이 초원을 누비던 시절에 유럽에서 건너간 사람들, 그리고 그 이후 미국을 찾은 유럽 ‘변두리’ 지역의 사람들, 노예의 신분으로 끌려 들어온 아프리카의 사람들, 유대인들, 그리고 상대적으로 늦게 미국을 찾은 아시아 지역의 사람들, 원래 미국에 거주하던 원주민들. 미국의 역사는 이들이 300년의 역사를 가진 용광로 안에서 뒤섞이는 과정이었고, 이들의 문화가 화학작용을 일으키는 과정이었다. 미국문화가 가지는 독특함은 역설적이게도 ‘미국만의’ 문화가 없다는 점에 있다. [모비딕]의 저자인 허먼 멜빌은 이런 미국의 특징을 “미국은 국가라기보다는 세계이다”라는 한 문장으로 명쾌하게 정의내렸다. 용광로로서 미국의 특징을 잘 볼 수 있는 것이 미국인들의 언어, 영어다(어쩌면 그래서 빌 브라이슨은 미국 문화사의 ‘도구’를 영어로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작은 섬나라 영국의 언어에 불과했던 영어는 미국에서 인디언들의 언어, 프랑스, 독일, 러시아,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언어, 유대인들의 언어, 아프리카 계열의 언어, 아시아 국가들의 언어가 혼합되면서 비로소 더욱 풍성해지고 ‘세계언어’로 발전해 가기 시작한다.
미국이 지금처럼 세계 최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한, 아마도 American Dream이라는 말은 여전히 유효할 것이고, melting pot의 불꽃은 꺼지지 않으리라. 현재진행형인 미국의 변화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궁금하지 않은가.
 

3.
예전에 세계사를 공부할 때 세계 3대 혁명을 배운 적이 있었는데, 프랑스 대혁명, 영국 명예혁명, 미국 독립전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왕권신수설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던 시기에 공화정 체제의 수립이라는 정치적 의미와 <독립선언문>을 통해 만방에 표출한 천부인권 및 자유/평등의 가치는 결코 낮지 않지만, 미국의 역사가 과연 이런 자랑거리에 명실상부한 것이었나라는 의문 또한 어쩔 수 없다.
빌 브라이슨은 식민지 아메리카 거주민들이 독립을 요구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우선 파고든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미국 독립전쟁의 직접적인 원인 가운데 하나는 ‘대표없이 과세없다’라는 논리. 그러나 빌 브라이슨에 따르면 독립선언 당시 미국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들이었다. 어떤 측면에서 보아도 목숨걸고 영국에 대항해 독립전쟁을 일으킬만한 건덕지가 없었던 셈이다.

1776년 미국인은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들”이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경제적인 유동성, 지역 대표를 뽑을 권리, 언론의 자유, 한때 어느 영국인이 열을 올리며 말한 “가장 역겨운 평등”의 혜택을 누리고 있었다. 더 좋은 음식을 먹었고, 더 안락한 집에서 살았고, 짐작컨대 전반적으로 영국의 사촌들보다 훨씬 더 높은 교육을 받았다. 요컨대 미국의 혁명은 자유를 찾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p.64)

미국혁명이란 당시 식민지 미국인들의 기득권 수호 움직임에서 출발했다는 것이다. 자유를 얻기 위한 혁명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혁명은 그 과정과 결과에서 차이점을 보일 수밖에 없을텐데, 이런 모습이 미국 역사가 보여준 ‘배반의 역사’에 원초적인 출발점이 아니었는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부인권과 개인의 자유의 가치를 그토록 숭배하는 미국 사회는 어째서 같은 인간을 피부색깔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토록 차별했는가? (그리고 지금도 차별하고 있는가?) 새뮤얼 존슨이 지적한 바대로 “흑인을 부리는 사람들이 꽥꽥거리며 자유를 부르짖다니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노예제도 뿐만 아니라 마치 지금의 미국이 있게 만든 시대정신인 것처럼 찬양되는 서부개척과 프론티어 정신이란 것도 입장을 돌려놓고 보면 동부 백인들의 거주지역을 확장하고 풍요로움을 얻는 도상에서 인디언들을 비롯한 기존 거주민들을 쫓아내는 행위이지 않았던가? 인디언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미국인’으로 인정받지 못하였고, 그래서 자신들의 정든 고향을 떠나 보호지역(reservation)에서 살다가 쫓겨나거나 비참한 일생을 마쳐야 했는지는 여기서 재삼 말할 필요도 없다. 자신이 누리는 자유를 지키기 위한 독립전쟁은 <독립선언문>에 명시한 고상한 겉모습과 달리 차별받으면서 비참한 생활을 영위해야 했던 또다른 미국인들을 향한 양날의 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미국은 인디언과 400가지의 조약을 맺고는 그 모두를 어겼다. 인디언은 1924년까지도 미국 시민이 되지 못했다. (p.230)
 

4.
미국은 현재 세계 최강대국이며, 번영과 광명의 상징처럼 되어 있다. [발칙한 영어산책]의 원제가 [Made in America]라는 점은 무척 흥미롭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은 유형의 도로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모든 가치의 판단기준으로서 ‘로마’가 가지는 세계제국의 입지를 의미하기도 하였다. 요즘은? 막말로 세계정치와 경제의 판단기준에서 ‘모든 길은 USA로 통한다’. Made in America는 막강한 힘의 상징이면서 문질문명의 중심이자 자부심과 자긍심의 상징이다.
하지만 빌 브라이슨은 은근히 이 ‘Made in America’에는 그다지 자랑스러워 할 수 없는 역사가 숨겨져 있음을 보여준다. 내가 보기에 빌 브라이슨이 미국의 역사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적어도 표면적으로라도) 세계 다른 국가들에게 선망이 되면서 가장 높은 생산성을 보여주었던 시기는 melting pot이 제대로 작동하던 시기, 그러니까 다인종들이 역동적으로 미국사회에 정착하던 시기였다. 반대로 노예제도를 유지하고 인디언들을 속이며, 외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나치 뺨치는 편협함을 드러낸 시기는 미국이 주장하는 고상한 가치들의 실상이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음을 지적해 낸다.
현실 정치는 Pax Romana는 Pax Britanica를 거쳐 Pax America로 넘어왔다. 남들 다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미국의 ‘혈맹’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우리나라도 조금은 미국의 본질과 앞으로 나가고 있는 방향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나는 상대에 대한 배려, 합리성, 정당성에 대한 감각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 뿐만 아니라 언어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에게 필요한 자질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하고 싶다. (p.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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