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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 1 - 이기원 장편소설
이기원 지음 / 삼성출판사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제중원]을 읽으면서 백구은(白救恩), 즉, 노먼 베쑨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대학 신입생 때 추천도서 목록에서 발견하여 읽은 [닥터 노먼 베쑨]은 ‘내 인생의 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는 캐나다에서의 안정적인 의사생활을 마다하고 파시즘과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했던 스페인 내전과 중국 혁명의 일선에 참전합니다.
그리고 헌신적으로 부상병을 치료하던 중 손가락 상처로 감염된 패혈증으로 사망합니다.
그의 나이 49세였습니다.
꽤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제게 잊혀지지 않는 것은 노먼 베쑨의 일생과 함께
인도주의실천의사협회(인의협)를 이끌었던 김록호 선생님이 쓰신 서문입니다.
질병을 돌보되 사람을 돌보지 못하는 의사를 작은의사(小醫)라 하고,
사람을 돌보되 사회를 돌보지 못하는 의사를 보통의사(中醫)라 하며,
질병과 사람, 사회를 통일적으로 파악하여 그 모두를 고치는 의사를 큰의사(大醫)라 한다.
이번에 [제중원]을 읽으면서 이 말이 다시 살아왔습니다.
비록 허구의 소설이요, 역사적 팩션이지만 인간의 건강과 생명을 책임지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게 했다는 점만으로도 높은 점수를 주고자 합니다.
[제중원]의 주인공 황정(黃正)은 이전의 여러 소설과 드라마를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캐릭터이며, 그의 성장기는 전형성을 가지고 전개됩니다.
그는 계급사회의 최하층, 백정이라는 태생적 차별을 응어리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마침내는 경쟁자들은 물론 적들까지도 탄복하게 만드는 실력과 인품을 가지게 됩니다.
여기서만 머물렀다면 드라마 속의 <허준>이나 <대장금>과 같은 개인적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도 죽을 고비를 무수히 넘겼고, 뛰어난 실력을 갖추었습니다.
금전적 이익이나 개인의 명예보다 백성을 사랑하고, 환자를 치료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그야말로 헌신적인 의사상을 구현하였습니다.
하지만, 주인공 황정의 일생은 마지막이 달랐습니다.
이 점이 의사로서 그의 삶을 곰곰이 음미해 봐야 하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황정은 해피엔딩으로 끝낼 수 있는 안락함을 포기하고 가시밭길을 선택합니다.
식민지배가 현실화되던 조국의 현실앞에 그는 의사로서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만주독립군에 참가하기 위하여 망명의 길에 오릅니다.
어쩌면 그는 고향 땅에 다시 못 돌아올지도 모릅니다.
만주 벌판 어딘가에서 일본군이나 마적단의 총에 희생당할 수도 있고, 위생상태가 좋지 못한 전선에서 어떤 질병에 쓰러질 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그는 좁은 길, 고난의 길을 선택합니다.
이제 우리는 독립된 나라를 되찾았고, 물질적 측면에서는 구한말과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의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습니다.
위생 관념은 철저해졌고, 좋은 의약품과 의료기술은 사람들의 평균수명을 높이고 있습니다.
수시로 이 땅을 습격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과 공포로 몰아넣은 천연두나 호열자는 이제 거의 완벽하게 예방이 가능한 전염병의 일종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사회의 의사 분들은 병을 잘 치료하고 환자들이 건강을 되찾게 해주면 그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일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치료받고 싶어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경제적인 양극화는 건강의 양극화로 이어집니다.
영국의 [Black Report]를 비롯한 수많은 연구에서는 빈곤층, 육체 노동자, 비정규직, 소외계층 등이 상대적으로 높은 사망률과 유병율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거주하는 지역이 어디냐에 따라서 사망과 질병의 확률이 차이가 난다는 것은 몇 년 전 신문보도까지 된 사실입니다.
저는 의사 선생님을 비롯한 보건의료계에 종사하시는 분들이 관심을 가지고 궁극적으로 치료해야 할 것은 바로 이 것, 즉, 가난과 차별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오래전, 그러니까 1995년도에 발표한 내용입니다.
The world's most ruthless killer and the greatest cause of suffering on earth is listed in the latest edition of WHO's International Classification of Disease, an A to Z of all ailments known to medical science, under the code Z59.5. It stands for extreme poverty.
Poverty is the main reason why babies are not vaccinated, clean water and sanitation are not provided, and curative drugs and other treatments are unavailable and why mothers die in childbirth. Poverty is the main cause of reduced life expectancy, of handicap and disability, and of starvation. Poverty is a major contributor to mental illness, stress, suicide, family disintegration and substance abuse.
그렇습니다. 가난은 가장 무자비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사망의 원인입니다.
가난 때문에 많은 아이들이 예방접종을 맞지 못하며, 위생적인 환경에서 살아가지 못합니다.
가난은 수명을 줄이고, 장애와 영양실조, 스트레스, 자살, 가정파괴의 근본적 원인입니다.
여기에는 가난으로 인한 차별도 포함됩니다.
출생 국가와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지역이 다르다는 이유로, 경제적 수준이 다르다는 이유로 받는 차별은 곧 가난을 유발하고, 이는 곧바로 건강불평등으로 이어집니다.
최근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의료민영화’에는 그 저면에 이러한 차별의 논리가 숨어 있기에 전적으로 찬성하기가 어렵습니다.
몇 년 전 의약분업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의사들의 파업은 보건의료계에 종사하던 사람으로서 엄청난 무력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의사 선생님들의 불만이 무엇이고, 그 요구에 일리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들이 선택했던 방식과 그 이후 보여준 ‘정치화’된 모습은 실망이었습니다.
때때로 차별의 논리와 경제적 이익 추구의 논리를 주장하는 것도 주객이 전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게 하였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전국에서 1% 안에는 들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의사는 멸시받는 직업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직업으로, 사회지도층으로 자리매김되어 있습니다.
많은 의사 분들이 진료 현장에서 묵묵히 환자들과 가족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애쓰고 계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층과 자신의 지위를 떠나 사회 문제에 목소리를 내는 의사 분들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 무척 아쉽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의사분 개개인은 존경을 받을지 몰라도 ‘의사 집단’은 국민들에게 질책과 불신을 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중원]을 읽고, 이제 우리에게도 노먼 베쑨이나 체 게바라와 같은 의사가 나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그들이 한 손엔 메스를, 한 손엔 총을 들고 억압과 차별과 제국주의에 대항해 싸웠듯이,
현재의 의사 선생님들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죽음과 질병의 근본적 원인에 대항해 싸워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덧붙여서.... [제중원]과 관련하여 두 가지 아쉬운 점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황정의 개인적인 노력과 백성사랑은 잘 나타나 있습니다만,
대의(大醫)로서의 일생, 즉, 만주에서 독립군에 가담한 일생이 약하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이 부분은 황정과 애비슨 원장 사이에 오고간 편지로만 구성되어 있는데,
최소한 몇 가지 에피소드라도 더 보강되었으면 어땠을까 합니다.
예를 들어 그의 의술을 통해 독립군 내에 존재하던 파벌이 화해하는 사건이라든지,
적군이지만, 부상당한 일본군을 몰래(?) 치료해 주는 것을 통해 의술이 담고 있는 보편적 사랑을 표현해 주는 것 등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둘째, 중반부에 등장하는 소년인 삼돌이가 갑자기 사라진 것이 아쉽습니다.
그는 제중원 원장 헤론에게 찍혔던 황정이 의학당에 입학할 수 있도록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는데, 그 이후로 갑자기 사라집니다.
역사의 격동기에서 제중원은 부침을 거듭하고, 당연히 제중원에 속한 사람들 역시 여러 변화를 겪게 될 것입니다.
삼돌이가 제중원에서의 경험을 통하여 어떻게 격동기를 살아가는지를 그려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