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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뛰노는 땅에 엎드려 입 맞추다
김용택 지음, 김세현 그림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제가 다니던 학교는 참 예뻤습니다. 무엇보다도 해질녘, 파란 하늘과 든든한 산등성이가 만나는 곳에, 아주 가느다란 달이 하루내내 머금은 햇빛을 은은하게 내보내며 저녁을 알려줄 때의 광경은 아직도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집니다. 그리고 그 옆에서 빛나는, 오래오래 흘러 비추는 작은 별이 저녁을 재촉하는 광경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멍하니 쳐다보는 하루는 무엇을 했든, 무엇을 못했든 그와 상관없이 소중했습니다. 가슴이 쿵쿵, 심장의 고동이 온 몸을 타고 나와 지구의 고동소리와 만나게 되니까요.
그렇게 나와 우주가 만나는 그 순간은, 매일매일 다르더군요. 그럼에도 매일의 다름속에서도 항상 같았던 건 나와 온 세상의 만물이 서로를 서로에게 담는 그 진심이었습니다. 그 진심이 그리웠던 저는 당연히 매일매일을 그리워했습니다. 어떤 날은 상처를 담아, 어떤 날은 슬픔을 담아, 어떤 날은 사랑의 희열을 담아, 어떤 날은 아무 생각없이 그렇게. 매일, 나와 나의 만남을 그리워 하며 살았습니다. 아직도 가슴을 뛰게 하는 그 광경과 그 광경에 담아둔 제 소중한 기억과 추억은 욕심이 많은 자에게도 나누어주는 하늘의 축복이었다고 저는 감히 믿습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저는 이미 어느 축축한 그늘가에 썩어 문드러져 버린지 오래였을테니까요.
선생님의 글을 저는 오늘 처음 보았습니다. 언제나 눈으로 지나치는 간략한 헤드라인으로 섬진강과 선생님의 이름을 정보로는 기억했지만, 이렇게 예쁜 책을 찬찬히, 잠시 낮잠도 자고 음식도 먹어가며, 이리저리 자리를 바꿔가며 읽은 오늘 오후는 참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선생님이 쓴 싯구대로 잠잠히 마음에 고인 생각을 급히 꺼내지 않고 고인 생각이 말이 되고 다시 고인 말들이 스스로 넘쳐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써낸 알알이 영근 알밤같은 글에 저는 웃다가도 허전하고, 허전하다가도 기쁘며, 기쁘다가도 슬프지만, 그럼에도 편안히 찬찬히 젖어들었답니다.
사실, 여전히 하늘은 푸르고, 날은 날마다 제 목소리로 저를 부르지만, 스스로의 욕심으로 땅만 쳐다보며 사는 저는 낭만이든 풍류든, 여유든, 그다지 느끼지 못하며 삽니다. 그저 화장실의 통유리로 바깥을 쳐다보며 조금 더 긴 숨을 내쉰 후에 다시 자리로 돌아가는 일상을 천직처럼, 태어나서 한번도 바깥에 나가본 적 없는 사람처럼 살고 그럽니다. 일에 쓰는 시간은 아깝지 않아도 마치 밖에 나가 따스한 봄내음을 맡는 시간은 괜히 아까워 하며 살때가 많아졌습니다. 따듯함과 싱그러움, 등등 다가가지 못하고서는 얻을 수 없는 그런 단어들의 감격과 감흥은 점점 희미해져 갑니다.
게다가 뭐 그렇게 잘 해보겠다고 욕심을 부리는지, 언제나 좋은 책을 읽었다고 말은 던져놓지만, 고이지도 않고 영글지도 않은 말들을 저는 어디에든 뱉어놓고 잊고 삽니다. 내 앞의 것과 나의 것에 그렇게 집착하며 집착하다 정작 내게 가장 소중한 것들을 떠나보내는 것이 참 부끄럽습니다. 그리고 부끄러움이 가져다주는 분함과 어지러움을 그저 순간의 감정으로 여겨 다시 덮어버리는 거짓도 참 부끄럽습니다. 비단 이 부끄러움은 제 안에서만 일어나지는 않겠지요, 언제나 제게 외치는 다른 이들의 목소리, 아우성, 그리고 거기서 느껴야 할 부끄러움은 제 출근길에, 그리고 멋들어지게 꾸미는 겉옷자락의 매끄러운 다림줄을 타고 제 발밑으로 미끄러져 가고있을 테니까요.
한 몸 살기도 버겁다는 핑계로 입에 풀칠하며 산지 점점 오래됩니다. 나를 살리겠다는 마음을 언제나 주변의 다른 것들로 덮는 두려움과 무지함이 책에 나오는 대길이, 소희, 현아, 재영이 같은 아이들 앞에 하나하나 발가벗겨질 때의 그 느낌은 그저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렸을 적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다 먹은 사과씨를 땅을 파고 물을 주겠다고 입술을 땅에 대고 침을 아주 예의바르게 뱉던 순진무구했던 모습(ㅋ)과 놀이터에 큰 나무를 심는다고 파낸 구멍이 뭐냐고 물어볼 때 어른들이 수영장을 만든다고 하니 신이나서 엄마에게 놀이터에 수영장이 생길 거라고 온동네 뛰어다니던 바보같은 천진함, 눈 덮인 날은 누가 부르지 않아도 라면박스라도 구해 언덕위에서 눈썰매를 타며 손과 코가 새빨개지도록 타던 그 순수함. 문앞에 열쇠를 꽂아놓고 열쇠를 못찾으면 큰일 난다고 온 동네를 샅샅이 뒤지다 지쳐 거의 울음보가 터지기 직전에 집에 돌아와 꽂힌 열쇠를 보며 정말 크게 안도의 한숨을 쉬던 그 마음. 그 때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세상에 대해 가졌던 맑은 마음과 그럼에도 새로울 것이 없는 세상을 또 새로 해석할 수 있도록 조금 더 힘을 내서 잘 살아보겠습니다. 아무리 못잡고 또 지나킬 봄날이래도, 무엇보다도 행복하게 보낼 수 있도록 말입니다. 사실 지난 한주 내내 풀리지 않은 날이 참 싫기도 했었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저는 이제야 봄맞이를 할 준비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제 찾아올,
다시 잡지 못한다 해도 이 봄날을 가슴벅차게, 수줍고, 고맙게 기다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