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람이 무섭다고 생각한 적은 거의 없다고 생각해왔는데, 이렇게 또 순간 섬찟한 것도 참 오랜만이다.
대학시절 친구들과 함께 자취한 적이 있었는데. 그 집에 엄청난 비바람이 몰아쳐 집 앞의 유리가 와장창 깨지고, 방에는 빗물이 흘러들어와 당시 공연을 위해 각자가 출력했던 전지크기의 내 사진에. 하필 인중에 빗물이 고여 찰리채플린 수염처럼 되어 어이없어하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순번이 지나 이미 한번 걸렸다 내렸기 망정이지.. 젖은 채 올라갔으면 어쩔뻔 했어.
여튼 그때 정말 더 어이없었던 건, 스릴을 즐겨보겠다고 한 친구의 아토즈에 모조리 올라타고 해안가로 가다가 물에 차가 뜨는 기이하고도 소름끼치는 경험을 하며 겨우 살아 돌아온 기억도 있다. 정말 나도 가끔 돌아보면 뭣하러 그렇게 무모하게 굴었는지.. 하긴 그 무모함이 가끔은 이상하게 들어맞은 때도 있긴 했다만, 그래도 그렇지. 하긴.. 그놈.. 한겨울에 차 위에 쌓인 눈을 치우는 데에는 드리프트가 제격이라며 드리프트로 차 지붕의 눈을 떨군적이 있었지.. 네놈 차가 카트라이더 카도 아니고.
그와 좀 비슷한 기분을 지금 이 순간 만끽하고 있다. 태풍의 상세스펙은 그때보다 조금 더 강하다. 풍속은 약 80키로. 푸하하 처음 겪는 풍속이다. 비가 내리는 풍경은 마치 수차에서 물 뿌리듯 비가 물보라처럼 내리는 광경. 분명 비닐봉지였을 녀석들이 헬륨풍선 행세도 하고 바람빠진 풍선처럼 속력도 내는 저 하늘의 난리도 함께인 광경. 도무지 어디든 젖지 않을 곳이 없을 것 같은 비가 내리고 그 비를 열심히 몰아왔다는 듯 뽐내는 바람이 부는 이 밤.
오늘 태풍덕에 강제조퇴를 당했다. 태풍을 구경하느라 일을 못(안)하거나 인격적인 문제가 있어 조퇴를 당한 게 아니라(아 그런거 였다면 어쩌지) 일정 태풍단계를 넘어서면 집에 무조건 가야 한대서 태어나 처음으로 바람의 속도에 의해 퇴근하는 경험을 했다. 좋으면서도 좀 두려운 기분. 그거 참 경험하기 쉬운 감정은 아닌 것 같은데.. 이것도 나름 공감각적 심상이려나. ;
나름 집에 돌아와서 일단 저녁을 먹어야겠다 싶어 쌀국수집에 갔더니 평소같으면 10시까지 한다는 집이 오늘은 6시에 닫는댄다. 다행히 시간은 가능할 것 같아 먹고 왔는데(너무 맛있었다. 설렁탕을 시킨건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고기의 양이 엄청난 최고의 국수, 추천합니다.), 종업원 모두가 건너편에 모여 함께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배고파서 먹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집에 무사히 가야 하기 위해 먹는 밥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드니 기분이 묘했다. 물론 이런 경우를 처음 겪기에 조금더 괜한 마음을 쓰는 것일수도 있겠다. 이들에게는 이게 여름이면 겪는 연중 어느때의 일상일 수 있으니. 하지만 때로는 귀가의 공포를 겪어야 할지도 모르는 것이고, 예쁘게 단장한 차림새가 모두 비바람에 이리저리 채인 채로 돌아올 수도 있고, 마음있는 상대와 잡은 데이트가 취소될 수도 있는 것이다. 여느 어떤 날 맑고 습한 밤 눈물을 흘리며 지나가던 어여쁜 아가씨가 행색마저 물을 잔뜩 뒤집어 진채 더 서러워질 수도 있고, 나름 사무치는 감정을 다스리고 싶어 산책하던 어떤 남자는 담배마저 다 젖은 채 더 처량하게 들어와야 할수도 있는 거다. 별것도 아닌 것에 별것아닌 감정을 너무 붓는 것 같지만, 내가 좋아하고 맘에 둔 상대를 만나는 데에도 날씨가 위협이 되는 땅이라.. 이거 뭐 무슨 오작교없어 못만나는 견우직녀도 아니고, 서로 비에 함뿍 젖은 채 서로의 감정을 확인할 수도 아주 가아끔 있을 수도 있겠지만, 다시 돌아보면 꼭 좋지만은 않겠다, 싶다. 이건 좀 그렇잖아.
바람과 비가 여전히 세다. 정도로 나름 관조롭게 마치고 싶지만, 현실은.. 대충 날씨를 보니 현재 풍속은 시속 80키로 정도. 대략 풍속 63키로 이상이 출근시간까지 지속되면 회사도 안가고(물론 다시 떨어지고 계속 떨어질 것으로 판명되면 2시간 내에 회사에 나타나야 한다고는 함) 그러겠지만.. 오래된 집을 리모델링을 한 곳이라 그런지(하긴 우리집 바로 앞에 홍콩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 있을 정도니..) 벽을 통해 비가 벽을 타고 들어와 콘센트는 비가 새지 않는 쪽으로 옮겨 꽂고, 이렇게 쓰는 와중에도 커텐을 열어 젖은 부분을 닦아내고 확인한다. 어느 부분은 나름 잘 막은 것 같은데 어느 부분은 그새 벽을 타고 온 물기가 바닥을 만나버렸다. 뭐 그래도 아직은 별탈은 없고,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르는 물방울은 계속 똑, 똑 떨어진다.
본래 이번주에는 '술을 마트에서 사지 않고 무조건 얻어마시자'가 나름의 목표였는데, 이런 날씨에는 도저히 잠을 이루기란 불가능해서 아까의 비바람 속에서 고민고민하다 마트서 술을 사왔다. 어차피 주세따윈 없으니 산다고 별 탈이 생기는 건 아닌데(언제는 있다고 탈났나? 핑계는), 나름 오랜만에 잡은 한주의 목표가 이렇게 첫날에 무너지는 게 너무 안타깝다. 쳇.
갑자기 1층에 밤만되면 사람들 - 특히 서양인들 - 이 많이 모이는 펍이 열었나 궁금해졌다.
비가 오니 우산을 펼쳐들고 밖에서 얘기하던 모습에 놀랐었는데.
뭐. 설마 이런날까지 그러겠어. 정 그러려면 우산이 아닌 우비를 입어야 할텐데.
우얏건, 사온 술을 계속 노려보고 있다. 저놈을 딸까 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