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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에게 보내는 편지
대니얼 고틀립 지음, 이문재.김명희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음악, 멀리서 친구들과 걸어오는 아이들... 그 속에 예쁘게 생긴 여자 주인공은 공주처럼 곱게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그 골목의 끝 어귀에서 난전을 펼치다 쫓기는 한 여인과 그녀를 붙잡기 위해서 출동한 사람들이 뛰어오고 있다. 여인은 그들에게 붙잡혔고 두 손을 싹싹 빌면서 용서를 구하고 있다. 공주처럼 예쁜 그 여자 아이는 그녀를 피해 모른 척 지나쳤고.... 두 손을 모아 빌던 그 가엾은 여인은 멍하니 그 공주처럼 정말 공주처럼 예쁜 자신의 딸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다. 아마도 여인은 울었을 것이다. 한 참 전에 본 어느 여가수의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장면이다. 너무도 익숙한 너무도 많이 써 먹은 3류 영화의 신파적인 장면을 보면서 아직도 저런 것 써 먹느냐고 코웃음을 치면서 돌아서서 나도 그 여인같이 울었다. 내 속에 깃든 부끄러움이 움찔 몸을 틀었고 불어오는 바람에 눈물을 닦아 보냈다.
어느 시인은 말한다. 자신을 키운 것은 8할의 바람이라고... 나는.... 날 키운 것은 8할이 훨씬 넘는 날 향한 부끄러움이었다.
도저히 행복할 수 없는 사나이 대니얼 고틀립...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 행복이란 이름보다는 “왜 하필이면 제가, 왜 저만 이러나요?”를 더 많이 외칠 삶의 주인공인 샘... 그들이 엮어가는 이야기 “샘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그들은 불행해야 했고, 그들은 부끄러워야 했고, 그들은 고통스러워야 했다. 내 기준에서는 아니 내 속의 8할이 넘는 부끄럼의 기준으로는 절대적으로 꼭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이 책은 끝까지 나의 기대를 모질게도 비웃고 있었다. “너의 상처가 크다고... 하하하, 네가 가진 부끄럼이 진짜 누구를 위한 거니... 뭐가 부끄러웠니? 그 부끄럼 속에 살아 온 네가 혹시 그 부끄럼의 전부가 아니니?” 책을 읽는 동안 날 향해 던져지던 질문들이 가슴에 칼날같이 베이고 그 상처의 틈을 비집고 부끄럼들이 흥건히 흘러넘치고 있었다.
대니얼 고틀립, 그는 말한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문제가 아니라고, 그건 그냥 다른 것일 뿐이라고. 그렇지만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이며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면, 그 생각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놓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스스로 남과 다르다고 ‘생각’ 할수록 더욱 외로워질 뿐이라고... 교통사고를 당하고 병원 복도에서 들려온 주치의의 말 “301호 전신마비한테 약 투여했나요?” 불과 두주 전만 해도 고틀립 박사로, 댄으로, 아빠로 불렸던 한 사나이가 이젠 ‘전신마비’로 불리고 있었지만, 그는 또 말한다. 지난 세월의 아픔이 곧 내가 전신마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었고. 나는 전신마비가 ‘있는’ 사람일 뿐이지 내가 곧 ‘전신마비’는 아니라고.
그래서 그는 웃을 수 있었다. 삼백오십 쪽에 달하는 박사 논문을 썼던 한 사나이가 겨우 책장을 넘길 수 있게 된 것을 좋아할 수 있었고, 소변이 새어 바지가 흥건하게 젖은 것을 소녀에게 보여주고도 편안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모든 아픔은 과거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우리가 예전에 무엇을 가지고 있었든, 예전에 어떤 존재였든 관계없이 말이다.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고 싶은 마음이 고통을 낳는다.”라고... 부끄러움 속에 숨어 있는 놀라운 기회를 찾고 어제보다 조금 더 사랑하며 살아가라 그는 나에게 조용히 말하고 있다.
장애를 선택하는 사람은 없다. 운명이 단지 그 사람을 택했을 뿐이다. 대니얼 고틀립에게 닥친 교통사고도, 샘에게 짐 지워진 자폐의 덩이도... 그리고 나의 아버지도 그랬을 뿐이다. 아버지 앞에서는 한 번도 힘든 척 하지 않았던 그 자랑스러운 장녀가 어릴 적 당신을 피해서 친구들과 함께 골목길을 돌아선 것을 아시면.... 그럴 수밖에 없었던 나의 모습이 너무 부끄러워 그 후론 더 과장되게 골목에서 아빠를 부르던 사춘기 소녀의 마음을 60평생 자신이 선택하지도 않은 삶을 힘겹게 살아내신 나의 아버지는 이해해 주시겠지.
세상의 수많은 샘들에게 그는 말한다. 상처가 깊어도, 그래서 아파도 참으라고... 상처에 새살이 돋기 위해선 아픈 것이 당연하다고 그리고 그 상처까지 더 많이 사랑하라고... 바로 고틀립 자기 자신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