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무제 - 너무도 위풍당당한, 지극히 시끌벅적했던―
요시카와 고지로 지음, 이목 옮김 / 천지인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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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제 유철(漢武帝 劉徹, B.C.156년-87년)의 일대기를 현재 방영되고 있는 칭TV의 정통사극 '한무제'를 보면서 극의 오프닝과 클로징의 장엄한 울림과 동시에 더욱더 한무제 유철의 생애를 알고 싶어서 구입한 책.. 국내 유일무이한 한무제 평전이 되겠다. 요약하면 16세 젊은 나이에 제위(帝位)에 오른 한무제 유철.. 제국 한나라의 오랜 숙원인 흉노 정벌을 시작으로 '실크로드'가 상징하는 동서 문물문화 교류등의 장대하고 화련한 외치(外治), 유교의 국교화, 군현제와 향거리 선제, 균수법, 평준법, 소금과 철의 국가 전매를 통해 국가 재정을 공고히 하고 중앙 집권을 강화하는 등 전방위적으로 한 제국을 확장하고 전성기를 완성하고 구가했던 중국 시스템의 완성자..

이렇게 이 책은 한무제 유철에 대한 어린시절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생애와 치세를 다루면서 중국 역사상 가장 빛나는 시대였다고 일본 저자 요시카와 고지로는 감히 말한다. 그러면서 소제목으로 '너무도 위풍당당한, 지극히 시끌벅적했던.."으로 표출하며 이 시대야말로 중국 역사상 최초의 대전환기였다고 평가하는 그는 무제의 개인사부터 무제의 치적과 그 시대의 분위기를 엄정한 사료와 문학적 상상력을 교직하여 엮어낸 한 편의 장대한 서사시처럼 풀어썼으니 읽는이로 하여금 한편의 전기 소설을 읽는듯 빠져들게 만든다. 그렇게 많지 않은 200여페이지의 분량속에 한무제 유철을 그대로 담아낸 내용들은 이렇다.

1-0 아교阿嬌―금옥을 지어 그녀에게 주리라
- 여기서는 유철의 어린시절에 있었던 일화중에 제목처럼 '금옥장교(金玉藏嬌)'의 고사의 유래와 즉위 초반의 과정을 다루면서 두영과 전분의 두 대신을 통한 할머니 두태후와 유학의 충돌 과정속에서 논쟁과 고민.. 그리고 진황후와 위자부를 맞이하는 과정이 소상히 드러난다. 2-1 흉노匈奴―국토의 기본 윤곽을 확정하다 - 말 그대로 대흉노전의 모든것을 담고 있다. 흉노족 정벌을 통한 대외적 영역의 팽창은 한무제의 유명한 업적중에 하나로 꼽고 있다. 그런 대흉노전에 앞장선 두 장수는 바로 위자부의 동생 위청과 위청의 조카 청년장수 곽거병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에 이야기가 사료를 바탕으로 드라마처럼 펼쳐지니 한무제 치세 50여년중 가장 정력적인 중반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2-2 현량賢良―정신문화의 시스템을 구축하다 - 여기서는 할머니 두태후 붕어후 유교의 국교화를 위해서 열정적으로 문학지사들인 현량과 문사들을 대거 등용한다. 그들의 면면들만 봐도 동중서, 사마상여, 엄조, 주매신, 매고, 동방삭, 그리고 승상으로 가장 이름을 떨쳤던 공손홍과 직언을 서슴치 않았던 급암, 그리고 혹리(酷吏)의 대표적 인물 장탕까지 굵직한 인물들을 통해 한무제의 웅혼대략을 말한다. 3-1 서역西域―실크로드를 열다 - 이 부분은 흉노전에서 눈을 돌려 바로 서방세력 서역과 남방에 눈을 돌려 천하중심으로 서고자 그가 웅대한 지계를 펼친 실크로드 개척.. 이 중심에는 다 알다싶이 '장건'이라는 인물이 있었으니 장건의 서역 개척의 그림이 그려지는데.. 그런 가운데 장건의 개고생은 이루 말할 정도가 아니었지만 개척후 홀대받은 장건이었다니 의외다.

3-2 신선神仙―하늘의 아들, 스스로 신이 되려 하다 - 치세가 중반이 넘어서면서 한무제는 독재권력의 마수를 들어냈으니 그것은 바로 봉선(封禪)의식을 통한 '천지(天地)의 사(祀)'에 무단히도 열심이었다는 기록과 함께 특히 신에 대한 과도한 존숭과 주술에 대한 맹목적 신앙으로 점철된 황제의 욕망을 이야기하며 그것으로 인한 대규모 건축 사업을 벌인 이야기가 사료를 통해 전해진다. 4-1 반혼返魂―스러져가는 꽃의 설화 - 치세 말년의 한무제의 비극을 애기하는 장이다. 말년에 얻은 후궁 이부인과의 애뜻한 러브스토리와 이부인의 오빠인 이사장군 이광리를 통한 서역 원정과 흉노 정벌 과정에서 이광리와 이릉의 투항사건.. 그리고 이를 두둔한 사마천의 궁형처벌.. 하지만 말년의 흉노정벌은 잘 나가던 시절의 위청과 곽거병 시절처럼 시원치 않았으니 무제는 스러져가는 꽃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4-2 망사望思―아들을 그리워하다 - 결국 위자부의 소생인 여태자인 황태자가 음험하기 짝이 없는 강충이라는 인물의 모함으로 반란세력으로 탈바꿈 되면서 무제인 아비와 칼을 겨누고 황태자는 스스로 목을 매 자결했으니.. 그때 무제 나이 66세로 늙은 황제의 마음은 삭막해지더니 억울하게 누명을 뒤집어쓴채 죽어간 아들의 원죄(寃罪)를 위해서 '사자궁(思子宮)'을 짓고 '귀래망사(歸來望思)'의 대(臺)라는 이름을 붙여 달랬다 한다.

이렇게 황태자 '여태자'가 죽은후 5년뒤 기원전 87년 후원 2월 정묘일에 무제는 자신의 70년 생애를 마치며.. 그의 유조(遺詔)를 받는 사람은 바로 한무제가 그렇게 총예하며 24살에 요절한 청년 장수 곽거병의 동생 곽광과 흉노의 왕자로 한나라에 항복해온 김일제였다. 물론, 이 두사람은 각자의 성실한 재간으로 이후 황제 소제와 선제를 특히 곽광이 잘 보필했고 선제는 바로 황태자 여태자 유복의 손자였으니 운명의 장난이 아니냐며 저자는 반문한다.

이렇게 본 책은 다른 평전들처럼 전기 형식을 빌려 생애를 고스란히 조명하고 있다. 비록 페이지는 200여페이로 걸출한 인물을 다룬 책치고는 짧은 편이지만.. 그 짧은 내용속에 한무제 유철의 그림은 충분히 그려질 수 있다고 읽은 이는 말하고 싶다. 더군다나 저자는 맺음말 부분을 통해서 '시스템 구축의 제왕학'으로 총정리를 했는데.. 이것이야로 한무제 시대가 중국 역사에서 최초의 대환기를 맞이하며 할아버지 문제와 아버지 경제 시절에 쌓아놓은 기반위에 그림을 완성했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하지만 50여년이나 되는 재위기간 오로지 좋은 것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니.. 하지만 그런것을 무색시킬 정도의 치적은 지금도 중국인들의 가슴속에는 웅대한 울림으로 다가서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반고의 한서(漢書)는 한무제를 이렇게 평가했으니 풀어쓰면 이렇다.
 
한나라가 흥하기까지 인류는 이미 여러 시대를 경과했으며, 한나라는 여러 시대의 바람직하지 못한 잔재를 부득불 물려받아야 할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맨 먼저 무질서를 질서로 되돌려놓은 것은 초대 고조였으며, 그 뒤 3대 문제와 4대 경제는 모두 백성을 편히 휴양시키는 일을 주요 사안으로 삼았다. 다만 고전을 규범으로 삼아 시행하는 문화적인 사업만은 지극히 불완전했다. 그 일을 수행한 이가 효무황제였다. 먼저, 즉위 초에 유가의 고전인 '육경(六經)'의 가치를 드높이고 그 외의 학파는 배제하겠다고 당당히 선언한 후, 온 나라를 물색하여 널리 인재를 발탁하고 그들과 더불어 대사업을 수행했다. 대학의 개설, 제사의 정돈, 역법의 개정, 악률(樂律)의 정비, 악기의 창작, 봉선의 거행이 모두 지난날의 문화 시대 주나라의 뒤를 잇는 일들이었다.

또한 조정의 언어문화도 찬연히 빛을 발하여 어디에 내놓더라도 부끄럽지 않게 되었다. 이후의 천자들이 그것을 조술(祖述)할 수 있었고, 인류의 문화를 옛날 이상의 시대에 접근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아닌 무제 덕분이었다. 무제는 무엇보다도 적극적인 영웅이었다. '웅지대략(雄志大略)'이었다. 만일 무제의 적극적인 성격이, 한편으로는 문제와 경제의 온화한 정책까지 유지하면서 백성들의 행복을 증진시켰다면, 고전에서 칭송하는 옛 성천자(聖天子)라 할지라도, 무제보다 더 뛰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중략) 만약 무제의 웅지대략으로 문제와 경제의 공손함과 검소함을 바꾸지 않고 백성을 구했다면, 비록 시서(詩書)에서 칭송하는 자라 할지라도 무제보다 더 나은 인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그를 가깝게 알기에.. 이책을 역사 교양서로 추천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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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자 - 2009 제17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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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전 지도의 금자탑인 '대동여지도'를 남긴 김정호를 모를 이는 없을 것이다. 학창시절 배웠듯이.. 하지만 그는 고산자(古山子)라 불린다. 그것은 오로지 생애를 바쳐 그 모든 것을 품어안았고 평생 산을 그리워하며.. 그 산중에서도 옛산을 닮고 그 옛산에 기대어 바람처럼 살고 했던 고산자 김정호 선생.. 그는 조선 후기의 유명한 관리출신도 아니요 가난하고 몰락한 중인 신분의 한낱 지도쟁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런 지도쟁이는 조선의 강토를 사랑한 나머지 생애를 바쳐 그 모든것을 품고자 했다.

이런 그의 일대기가 박범신의 힘껏 벼린 문장과 장엄한 울림으로 한땀 한땀 그의 생애를 복원하며 첫 역사소설로 다시 살아났다. 하지만 책은 초반 쉽게 읽히지 않는다. 각종 고어(古語)와 문학적인 표현과 순수한 우리말 배치에 현학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것은 그냥 소설로 치부되기에 너무나 숭고한 맛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작가의 역량이자 역사 문학의 새로운 감흥이라 말하고 싶다. 과연, 고산자 김정호 선생의 생애는 어떠했을까 그 이야기의 실타래는 이렇다.
 
어린 시절 읽었던 위인전이 아니기에 통속적인 김정호의 어린 시절부터 얘기가 나오지는 않는다. 이미 대동여지도의 판각이 거의 완성된 상태에서 출발한다. 그러면서 수정하고 목판본 작업을 그린다. 그래서 소문대로 백두산을 열번이나 오르며 그 힘들고 뼈를 깍는 고통으로 만들어진 대동여지도의 탄생 과정은 빠져있어 아쉬움을 남긴다. 하지만 이야기는 조선후기 민중의 난 홍경래의 난(1811년)의 중심으로 김정호 삶의 전과 후를 조명한다.

그 난에 참가했던 형의 죽음과 그 난을 진압하러 떠난 지원대 행렬속에서 군현도의 잘못된 지도로 길을 헤매면서 아버지를 포함해 전원이 죽은 사건. 그때 김정호는 생각한다. 지도가 사람을 죽였다고.. 그래서 백성을 위한 지도, 누구나 쉽게 갖고 볼수 있는 지도.. 그것이 그를 평생 지도쟁이로 만들었다. 그 후 김정호는 길을 떠나 이 나라 강토를 하나하나 밟으며 땅의 형상과 물의 흐름 산의 굴곡을 몸소 체험한다. 그런 과정에서 혜련 스님과의 아련한 인연의 끈과 그 스님에게 건네받았던 딸 순실이.. 이들의 얘기는 한편의 가녀린 서사적인 표현으로 일관한다. 어찌보면 <고산자> 생애의 새로운 꿈같은 이야기로 읽은 이로 하여금 몽롱하게 만든다. 

이렇게 그가 찾아떠난 혜련 스님의 발자취속에서 조선 강토를 주유천하한다. 그런 과정에서 당대 실학자 혜강 최한기, 오주거사 이규경, 위당 신헌, 난고 김병연(김삿갓)과 대동여지도에서 간도, 대마도와 독도(우산도)가 빠진 당위성에 대해서 김정호는 설파하는데 바로 이용후생이자 실사구시의 입각한 지도 편찬의 효용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자세히 펼쳐진다. 즉, 지도는 정치적 판단에 의해서 그리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신념.. 그것이 그를 지탱해준 힘이자 원천이다. 

그러면서 마지막 『대동지지(大東地志)』편찬을 위해서 북쪽의 넓은땅 간도 답사를 떠난것이 화근이 되어 우리가 많이들 알고있는 오류중 하나.. 바로 첩자로 몰려 조선의 최고 권력가 안동 김씨 일파에게 호된 고문으로 목숨이 위태로워 지는데.. 하지만 그렇게 생을 마감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당시 조선후기 천주학쟁이들의 박해는 천하가 다 아는 사실, 결국, 그의 딸 순실이도 몰려 위험에 처해지자 아비의 애끊는 부정으로 만장(輓章)을 통한 눈물나는 탄원크리.. 결국, 그는 딸을 구했을까? 이후 김정호는 어떻게 됐을까.. 그에 대한 해답은 책의 마지막에 있다.

하지만 누구나 예감할 수 있듯이 그는 한평생 지도쟁이로 살다간 그다. 그에 대한 정확한 생몰년이 없는 신비스런 인물로 그가 남긴 방대한 지도와 지리지만이 그의 업적을 얘기할 뿐이다. 이런 고산자 김정호의 흔적은 지도의 업적으로만 표출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강토에 기대어 바람처럼 살고 싶어했던 그의 일대기를 박범신은 유유하면서도 숭고하게 그렸다. 그것이 바로 문학의 힘인 것이다.

불과 150여년전의 선조였던 그도 그리고 변하지 않은 강토에 지금도 우리가 살고 있으니.. 한 평생 지도로 그려낸 고산자 김정호 삶의 여정에 우리도 동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래처럼 그의 이상과 함께 말이다.

평생 꿈꾸어온 것이 무엇이었던가..
조정과 양반이 틀어쥔 강토를 골고루 백성에게 나눠주자는 것이고, 조선이라는 이름의 본뜻이 그러하듯.. 강토를 세세히 밝혀 그곳에서 명줄을 잇고 있는 사람살이를 새롭게 하자고 한것 뿐이다. 땅의 흐름과 물의 길을 잘 몰라 떠도는 사람은 더이상 없어야 한다.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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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 1 - 신라의 새로운 희망
장태우 지음 / 왕의서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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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의 정점에 있었던 김춘추 태종무열왕의 아들 법민 문무왕은 자신의 사후 동해바다에 화장하여 뿌리면 자신이 용이 되어 신라를 지키겠다고 유언했다는 전설이 있듯이 죽어서도 용이 되고자 했던 신라 제 30대 임금 문무왕이 역사소설 3권으로 나왔다. 운좋게 리뷰어에 당첨돼 읽게 되었는데 사실 문무왕의 대해서는 많이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삼한통일의 과정에서 그의 나라에 대한 충정과 고뇌를 느낄 수 있었지만.. 책이 후반부로 갈 수록 용이 되고자 했던 문무왕의 원대한 꿈이 이무기로 변신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역사 소설이 되버린 소회감부터 적는다. 더군다나 책 제목이 <문무>다 보니 지극히 신라 입장에서 써내려간 삼국통일의 과정을 그려내며 백제는 서적, 고구려는 북적이라 표현했는데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간략히나마 각권에 대해서 내용을 정리해 보면 이렇다. 우선 1권은 진평왕 집권 말기 20살 풋풋한 젋은 김춘추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순수 성골 신분은 아버지 김용춘의 피비린내나는 정쟁 속에서 살아남고자 스스로 진골 신분이 되면서 왕권과 멀어지게 된 그는 보종의 딸 보라궁주와 결혼해서 고타소를 낳고.. 이때 김유신이 동생 문희로 하여금 춘추와 연분을 맺게하니 그 둘 사이에서 법민(문무왕)이 태어난다. 그러면서 법민은 어린시절부터 소위 엄친아로 출중한 외모에 총기를 보이며 성장해간다. 그러면서 아버지 김춘추가 진덕여왕에 이어 왕위에 오르며 태자 법민의 행보는 두각을 나타낸다. 신라에게 많은 고통을 안겨준 백제와 고구려 멸망시키기 위해서 앞장서게 되고 이 과정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된다.

2권에서는 당나라와의 공고한 관계속에서 백제의 마지막 의자왕과 황산벌 전투에서 이기며 백제를 멸망시킨다. 하지만 곧바로 백제 부흥군의 반란군이 거세게 일어나고, 그 과정에서 연개소문이 보낸 첩자에 의해서 김춘추가 죽는 일이 발생하는데.. 암살설 의혹이지만 워낙 대식가에 말술과 스트레스등 지병설이 맞을 것이다. 암튼, 아버지 태종무열왕 이어 신라 제30대 왕이 된 법민은 다시 당나라와 함께 손잡고 고구려를 멸망시켜 삼한통일을 마침내 달성하는데.. 이때부터 법민의 고민은 시작된다. 삼한일통은 이루었지만 나당 연합군의 위세적 위치로 당고종 이치가 성세를 부리는등 내정 간섭이 심해지면서 골머리를 않는다. 하지만 이후 백제와 고구려의 잔당 세력등 규합을 통해서 당나라마저 몰아내고 진정한 삼한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기에 이른다. 물론, 그 활약에 김유신이 있음은 당연지사다.

하지만 3권부터가 내용이 삼천포로 빠지는 느낌이다. 우선은 삼한일통의 과정에서 당나라와 씻을 수 없는 불신과 원한을 쌓은 나머지 갖은 협박과 핍박은 이어지고.. 신라내의 친당파 천존과 흠돌의 반란에 휩싸이며 가까스로 제압하지만 쉽지 않은 정국 운영에 자신이 모토로 삼은 위민보국의 길에 대해서 계속 고뇌한다. 결국 스스로 용퇴를 결정하고 보위를 태자 정명(신문왕)에게 물려준다. 물론, 여기까지는 다소 신라적인 입장에서 통일을 이야기했지만 역사적 기술대로 이야기가 그림 그리듯 잘 전개됐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부터다. 즉, 문무왕 법민이 보위를 정명에게 물려주고 거짓 유언을 남기며 경주 앞바다에 수장됐다는 소문을 낸채 왜로 망명하고 만 것이다. 이런 이유는 자신의 존재로 인한 당의 내정간섭으로부터 벗어남과 동시에 왜국 침략의 방패막이 되려는 심지를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왜에는 예전 고구려 멸망전 법민처럼 거짓 유서를 남기고 왜국으로 망명간 연개소문이 대해인으로 불리며 왜왕의 보검인 초치검을 법민에게 구해달라는 인연이 있었는데.. 그 연개소문이 법민이 왜로 망명당시 왜국의 원영진인 천황이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물론, <일본서기>등의 사료를 중간중간에 언급했지만 확실히 명명된 것은 없었다. 결국, 연개소문 천황이 병으로 죽은후 왜국 내의 친백제파와 친고구려파 간의 정쟁 속에서 스스로 천황이 될 것을 결심하더니.. 미리 신라에 군사 원조로 손쓰고 친고구려파 진영에 가담해 반란을 진압하며 마침내 제42대 문무천황으로 등극하게 된다. 이렇게 기존 1,2권과는 틀리게 3권은 문무왕의 왜국 망명과 함께 그곳에서 암중모색 생활과 반란 진압후에 천황에 자리에 오르며 11년간 치세를 간략히 얘기하고 고굉지신 광길을 잃은후 생을 마감하며 끝맺는다.

그런데, 이것은 기존의 역사적 사실을 뒤엎는 충격적인?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책 뒷편에도 한일 고대사 최대의 미스터리라는 신라 30대 문무왕과 일본 42대 문무천황에 얽힌 1300년전의 역사의 비밀을 일본서기와 속일본서기에 나와있는 사실을 재해석하여 고대 한중일 삼국간의 비밀을 파헤쳤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즉, 소설대로라면 연개소문에 이어 문무까지 왜의 천황이 된 것이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어찌보면 기분좋은 설정이지만 역사 소설이라면 역사가 기본 바탕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배워온 역사적 인물에 대해서 이렇게 뒤엎는 반전?을 제공한다면 재미는 있을지 몰라도 감흥은 없다.

1, 2권이 법민의 출생부터 삼한일통의 과정을 그린 고뇌의 모습으로 감흥이 일지만.. 3권에서 문무왕 법민이 색다르게 천황으로 변모된 모습은 감흥이 아닌 흥미로 그친 이야기일 뿐으로 초중반과 후반의 각 이야기는 너무나 상충된 이미지로 고착되 버리며 책 전체 얼개에 찬물을 끼엊은 느낌이다. 하지만 그런 천황 등극의 역사적 미스터리로 올곧게 나갔다면 이견이 없을 책이.. 삼한일통 사후에도 용이 되고자 했던 그가 천황으로의 마지막 생애의 모습은 아이러니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처음보다 아쉬움이 많이 남는 책이 되버렸다. 아.. 법민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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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18
시오노 나나미 지음, 오정환 옮김 / 한길사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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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사레 보르자(Cesare Borgia, 1475 ~1507) 그는 과연 누구였을까.. 사실, 이 역사적 인물은 많이 알려진 인물은 아니기에 잘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이탈리아 로마사에 매료돼 <로마인 이야기>등으로 인기를 끈 시오노 나나미에 의해서 그는 다시 태어나게 된다. 그것도 책 제목처럼 우아하게 말이다. 우선, 본 책은 르네상스 저작집 시리즈 국내에는 96년에 첫 출간되면서 인기를 끈 작품으로 두번째 저작이라고 한다.

읽으면서 받은 소회는 평전의 기본틀을 유지하면서 소설의 형식을 중간중간 빌어써 읽기가 무난한 느낌이다. 하지만 당시 이탈리아 공국들의 관련된 지방과 참주들의 이름이 많이 나와서 집중을 안하면 혼선을 겪기도 한다. ㅎ 과연, 그는 누구길래 이렇게 '우아한 냉혹자'라 했을까.. 냉혹과는 상반되는 우아하다는 표현이 어찌보면 반어가 아닐까라고 읽기전 잠깐 생각도 했지만.. 먼저, 잘 알려지지 않은 체사레 보르자의 이력과 지내온 인생사를 본책의 소제별로 정리해 보면 이렇다. 책 서두에서 '신뢰는 무기를 이긴다(FIDES PRAEVALET ARMIS)'로 포문을 연 이 책은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 이야기를 한다.

첫째 '주홍색 법의'편에서는 이탈리아 15세기말 알렉산데르 6세의 교황의 아들이자 기독교 세계의 이단아로 태어나 적자는 아니었기에 교회의 군주라 하는 추기경이 되는 과정에서 난관에 부딪힌다. 하지만 교황인 아버지의 강력한 추진으로 추기경의 자리에 올라 주홍색 법의를 걸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추기경에 머물르지 않는다. 당시 최고 권위인 로마 교회를 철저하게 자신를 위해 이용함으로써 기독교를 모멸하며 과감히 주홍색 법의를 던져버리고 이탈리아 전체로 눈을 돌린다.

그러면서 둘째 '칼'이라는 소제목에서는 이책은 절정에 이른다. 즉, 근대 이탈리아의 시작이라 일컫는 1494년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공으로 나폴리 공화국의 왕위 계승권 다툼으로 시작된 이 전쟁은 밀라노 공화국의 일명 '일 모로'로 불리는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길잡이 역할로 이탈리아는 위기에 처하고 당시 19살의 체사레는 강화 조건으로 인질로 잡히는등 위기에 처하지만 샤를 8세의 자멸로 위기를 모면한다. 그리고, 체사레의 동생 후안 간디아 공작에 대한 교황의 총애와 그의 의문의 암살사건에 배후로 지목된 형인 체사레 보르자.. 이후 전면에 나선 체사레 보르자가 프랑스의 루이 12세와 정략적으로 손을 잡으며 무장으로써 위용을 떨치는 첫 관문의 포문을 연다.

바로 1498년부터 1503년까지 4년간의 시기로 이때 체사레 보르자는 거칠것이 없는 이탈리아 최고의 아름다운 무장으로 로마냐 공국을 공략하며 이몰라, 포플리, 페사로, 체세나, 파노, 파엔차등의 영지를 자신의 지배하에 놓으며 위용을 떨치고 로마냐 공작에 임명된다. 이런 그의 과정은 한편의 드라마처럼 전개되는데.. 그런 과정속에서 그의 잔인성과 냉혹함을 이렇게 대신한다. '피로 손을 더럽힐 바에야 차라리 온몸을 피에 담가버리는 그런 사나이다.' 여기서 피렌체 공화국도 위기에 빠지자 교섭의 목적인 특사로 파견된 인물이 니콜로 마키아벨리였고 그는 마치 종군기자처럼 그를 지근에서 지켜보는데 좀 처럼 말이 없는 알수 없는 매력과 경외감에 빠진다. 이런 그의 성정을  '칼'로 대변되는 과정은 체사레는 속내를 전혀 드러내지 않고 행동의 천재로 보는 작가의 의중이 많이 들어가 보이지만.. 그런 체사레의 모습이 웬지 낯설지 않은 것은 왜일까..

그런데, 이런 그도 위기를 맞는다. 자신의 휘하 용병대장 5인방이 자신에게 칼을 돌려 반란을 일으킨 것인데.. 이 과정에서 궁지에 몰리지만 날카로운 정세 파악으로 반란군의 자중지란을 이끌어 교섭과 강화조건으로 그들을 회유한다. 하지만 회유한 그들을 초대해 척결하는 모습은 바로 반전이 되는데.. 그 모습이 마치 '우아한 냉혹'으로 오버랩되는 순간이다. 이렇게 반란군을 진압하며 한숨을 돌리지만 이미 이탈리아 정세는 프랑스 루이 12세와 에스파냐의 페르난도와 이탈리아에서 제일 잘 나가는 베네치아 공화국 삼파전 틈바구니속에서.. 체사레 아버지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연로하고 열병에 빠져 죽게되니.. 이때부터 체사레도 중병을 앓고 그는 서서히 시들어간다.

그 마지막은 '흐르는 별'로 그의 종말을 애기하는데.. 최후의 모습은 측은하기까지 하다. 중병을 앓으면서 세력이 약화되고 그 넓던 영지는 계속 줄더니.. 새로 즉위한 교황 율리우스 2세와 다른 반대파 세력의 출현으로 궁지에 몰리며 성채에 갇히고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온갖 고초를 겪는다. 급기야 에스파냐 모타 성채에 투옥되며 생을 마감할 찰나에 지지세력에 의해 가까스로 도망친다. 그리고 그가 찾아간 곳은 나바라왕국.. 이 나바라 왕국이 프랑스 루이 12세와 손잡고 반 에스파냐의 기치에 체사레까지 보호하고 있으니.. 에스파냐 왕 페르나도는 당대 대담한 용맹을 자랑하는 보몬트 백작으로 그들을 치라 명한다. 이때 체사레는 자신의 마지막을 예감하듯 적진에 들어가니 과연 그는 어떻게 최후를 맞이했을까.. 그 결말은 바로 그의 짧은 31년 인생의 종착지가 되고 만다.

이렇게, 그의 짧은 인생을 역사적 사실과 작가의 체사레 보르자에 대한 애정의 열망으로 풀어낸 이 작품의 얼개는 마치 한편의 드라마같은 평전을 그려냈다. 결국,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의 룰모델이자 독살과 음모로 가득찬 보르자 가문의 이단아 체사레 보르자는 잔인하고 냉혹하다는 단면의 평가에서 벗어나.. 그가 꿈꾸고자 했던 야망속의 이상의 실현을 역사의 한 구석에 몰려 유폐된 지극히 현실주의 인간상을 끄집어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것이 때로는 우아하든 아니든 말이다. 그래서 체사레 보르자를 더 알고 싶어지는 이유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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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1세 - 운명을 뛰어넘어 세상을 지배한 여왕 아이세움 역사 인물 6
마이라 웨더리 지음, 강미라 옮김 / 미래엔아이세움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영국의 르네상스를 꽃피운 위대한 통치자 엘리자베스 1세를 알기에는 많은 책과 영화, 드라마들이 있다. 이 중에서 이 책도 그중 하나이지만 어린이와 청소년 눈높이에 맞추다보니 책 자체가 두껍지도 않고 간결하게 정리하며 소설처럼 써내려갔다. 그래서 다른 성인용 책들과는 틀리게 한 두시간만에 금방 읽었는데..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 보면 이렇다.

이야기의 첫 서문은 통상적인 그녀의 출생부터 나오지 않는다. 첫 시작은 21살의 엘리자베스가 런던탑에 갇히는 신세부터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 상황의 제공자는 바로 그녀의 이복 언니 메리 1세의 철권통치 기간에 엘리자베스가 반역을 했다는 모략으로 갇히게 됐으니.. 어찌보면 그녀의 순탄치 않은 인생 역정에 대한 암시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거슬러 그녀의 출생을 애기하는데.. 튜더 왕가를 만든 헨리 7세의 아들 헨리 8세와 두번째 왕비였던 앤 볼린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 하지만 그녀의 출생은 행복하지 않았고 아버지 헨리 8세의 여성편력은 그녀의 불행의 시작이었다.

급기야 둘째 부인이었던 앤 볼린은 간통과 모함으로 참수를 당했으니.. 그때 엘리자베스의 나이 세살.. 이후 엘리자베스는 아버지 헨리 8세가 4번의 왕비를 맞이하는 격동의 스캔들동안.. 엘리자베스는 1왕비가 낳은 메리와 3왕비가 낳은 에드워드와 함께 어린 시절 궁전을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아스트랄한 상황을 겪는다. 하지만 그때마다 새 엄마들은 예상과는 틀리게 엘리자베스를 잘 대해주었고, 그녀의 유모들도 그에게 교육도 시키는등 많은 도움을 주었으니.. 역시 운이 좋은 여왕이었다.

그러면서.. 헨리 8세가 죽고나자(1547).. 남동생 에드워드 6세가 즉위하고 얼마 안있어 죽자 엘리자베스의 이복 언니 메리 1세가 즉위하니(1553) 그녀는 종교개혁 부문에서 로마 카톨릭 신봉자로 수많은 개신교들을 처형하며 '피의 메리'라 불리는 무서운 여왕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엘리자베스가 런던탑에 갇히는 신세가 된 것이다. 하지만 메리는 나이가 많았고 아들을 낳지 못하는등 그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후 엘리자베스가 즉위(1558)하니 바로 영국의 황금시대가 열린 것이다. 당시 백성들은 피의 메리의 통치에서 벗어난 것부터 반기며 여왕의 즉위를 반겼다고 한다.

엘리자베스의 40여년의 통치동안 수 많은 업적이 있지만 그중 꼽으라면 두가지를 들 수 있다. 단연 헨리 8세때부터 시작된 종교 개혁과 관련된 문제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아버지나 메리 1세가 로마 카톨릭으로의 선회를 종교의 통합의 과정으로 다른 종교의 자유도 인정하고 성공회를 국교로 선포하여 사회의 안정을 꾀했으니.. 종교 문제는 당시 그렇게 중요한 문제였다. 이후 나라 밖으로 눈을 돌려 지리상의 발견후 강대국으로 떠오른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누루고 대양의 해상권을 장악한 점이다. 물론, 동시대에 세익스피어등 수많은 인문주의자들과 시와 연극을 통해 인본주의의 극치를 보여주며 르네상스 문화시대의 절정을 맞이한 점도 업적 중 하나다.

하지만, 이런 업적 과정 중에도 영국의 당시 상황은 그렇게 좋지 만은 않았다. 가난한자는 계속 늘고, 전염병은 창궐하고, 국가 재정은 줄고, 외세의 침략도 계속되는등.. 또한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여기서 메리는 메리1세와 다르다)의 반란으로 처형시키는등 그녀에게 끊임없이 마수를 펼치는 세력도 만만치 않았거니와 이런 처녀 여왕에게 구혼하는 이들도 꽤 많았으니.. 그녀는 측근에 두었던 로버트 더들리와 꽤 오랫동안 염문에 쌓이는등 만만치 않은 애정감각?도 보여준다.

이렇게 엘리자베스는 '짐와 국가와 결혼했다'는 말과 같은 자신감의 표출은 꽤 유쾌하고 활달한 성정을 엿볼수 있고 언제든 순행을 나서면 백성들과도 어울릴줄 알았던 여왕.. 그것은 아마도 어린시절부터 순탄치 않은 궁전 생활을 통해서 보고 듣고 겪은 경험이 바탕이 되지 않았나 싶다. 물론, 이 책으로 엘리자베스를 모두 알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나 드라마 또 책으로 만나보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은 항상 공통된 것이 있으니.. 그것은 그녀가 운명에 순응하면서도 뛰어넘을려는 의지가 충만했던 군주가 아니였나 싶다. 

죽기 2년전 1601년 11월 당시 68세의 늙고 기운 빠진 여왕이 영국 의회에서 '황금의 연설'이라 부르는 이 연설은 아직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으니.. 한번 음미해 보자.

"나는 그대들에게 나보다 국민들을 더 사랑한 왕은 없었다고 확실하게 말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재임한 기간 동안 일어났던 영광스러운 일은 모두 다 그대들의 사랑 덕분입니다. 왕이 되고 왕관을 쓴다는 것이 당사자에게는 겉에서 보기보다 훨씬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나는 왕이나 여왕의 권위와 영광스러운 이름을 이용해 유혹에 빠진 적은 없었습니다. 고맙게도 하느님이 믿음과 영광을 이루고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한 도구로 나를 만드셨기 때문이지요.. 지금보다 더 나라를 걱정하고 왕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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