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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제 - 너무도 위풍당당한, 지극히 시끌벅적했던―
요시카와 고지로 지음, 이목 옮김 / 천지인 / 2008년 1월
평점 :
품절
한무제 유철(漢武帝 劉徹, B.C.156년-87년)의 일대기를 현재 방영되고 있는 칭TV의 정통사극 '한무제'를 보면서 극의 오프닝과 클로징의 장엄한 울림과 동시에 더욱더 한무제 유철의 생애를 알고 싶어서 구입한 책.. 국내 유일무이한 한무제 평전이 되겠다. 요약하면 16세 젊은 나이에 제위(帝位)에 오른 한무제 유철.. 제국 한나라의 오랜 숙원인 흉노 정벌을 시작으로 '실크로드'가 상징하는 동서 문물문화 교류등의 장대하고 화련한 외치(外治), 유교의 국교화, 군현제와 향거리 선제, 균수법, 평준법, 소금과 철의 국가 전매를 통해 국가 재정을 공고히 하고 중앙 집권을 강화하는 등 전방위적으로 한 제국을 확장하고 전성기를 완성하고 구가했던 중국 시스템의 완성자..
이렇게 이 책은 한무제 유철에 대한 어린시절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생애와 치세를 다루면서 중국 역사상 가장 빛나는 시대였다고 일본 저자 요시카와 고지로는 감히 말한다. 그러면서 소제목으로 '너무도 위풍당당한, 지극히 시끌벅적했던.."으로 표출하며 이 시대야말로 중국 역사상 최초의 대전환기였다고 평가하는 그는 무제의 개인사부터 무제의 치적과 그 시대의 분위기를 엄정한 사료와 문학적 상상력을 교직하여 엮어낸 한 편의 장대한 서사시처럼 풀어썼으니 읽는이로 하여금 한편의 전기 소설을 읽는듯 빠져들게 만든다. 그렇게 많지 않은 200여페이지의 분량속에 한무제 유철을 그대로 담아낸 내용들은 이렇다.
1-0 아교阿嬌―금옥을 지어 그녀에게 주리라 - 여기서는 유철의 어린시절에 있었던 일화중에 제목처럼 '금옥장교(金玉藏嬌)'의 고사의 유래와 즉위 초반의 과정을 다루면서 두영과 전분의 두 대신을 통한 할머니 두태후와 유학의 충돌 과정속에서 논쟁과 고민.. 그리고 진황후와 위자부를 맞이하는 과정이 소상히 드러난다. 2-1 흉노匈奴―국토의 기본 윤곽을 확정하다 - 말 그대로 대흉노전의 모든것을 담고 있다. 흉노족 정벌을 통한 대외적 영역의 팽창은 한무제의 유명한 업적중에 하나로 꼽고 있다. 그런 대흉노전에 앞장선 두 장수는 바로 위자부의 동생 위청과 위청의 조카 청년장수 곽거병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에 이야기가 사료를 바탕으로 드라마처럼 펼쳐지니 한무제 치세 50여년중 가장 정력적인 중반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2-2 현량賢良―정신문화의 시스템을 구축하다 - 여기서는 할머니 두태후 붕어후 유교의 국교화를 위해서 열정적으로 문학지사들인 현량과 문사들을 대거 등용한다. 그들의 면면들만 봐도 동중서, 사마상여, 엄조, 주매신, 매고, 동방삭, 그리고 승상으로 가장 이름을 떨쳤던 공손홍과 직언을 서슴치 않았던 급암, 그리고 혹리(酷吏)의 대표적 인물 장탕까지 굵직한 인물들을 통해 한무제의 웅혼대략을 말한다. 3-1 서역西域―실크로드를 열다 - 이 부분은 흉노전에서 눈을 돌려 바로 서방세력 서역과 남방에 눈을 돌려 천하중심으로 서고자 그가 웅대한 지계를 펼친 실크로드 개척.. 이 중심에는 다 알다싶이 '장건'이라는 인물이 있었으니 장건의 서역 개척의 그림이 그려지는데.. 그런 가운데 장건의 개고생은 이루 말할 정도가 아니었지만 개척후 홀대받은 장건이었다니 의외다.
3-2 신선神仙―하늘의 아들, 스스로 신이 되려 하다 - 치세가 중반이 넘어서면서 한무제는 독재권력의 마수를 들어냈으니 그것은 바로 봉선(封禪)의식을 통한 '천지(天地)의 사(祀)'에 무단히도 열심이었다는 기록과 함께 특히 신에 대한 과도한 존숭과 주술에 대한 맹목적 신앙으로 점철된 황제의 욕망을 이야기하며 그것으로 인한 대규모 건축 사업을 벌인 이야기가 사료를 통해 전해진다. 4-1 반혼返魂―스러져가는 꽃의 설화 - 치세 말년의 한무제의 비극을 애기하는 장이다. 말년에 얻은 후궁 이부인과의 애뜻한 러브스토리와 이부인의 오빠인 이사장군 이광리를 통한 서역 원정과 흉노 정벌 과정에서 이광리와 이릉의 투항사건.. 그리고 이를 두둔한 사마천의 궁형처벌.. 하지만 말년의 흉노정벌은 잘 나가던 시절의 위청과 곽거병 시절처럼 시원치 않았으니 무제는 스러져가는 꽃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4-2 망사望思―아들을 그리워하다 - 결국 위자부의 소생인 여태자인 황태자가 음험하기 짝이 없는 강충이라는 인물의 모함으로 반란세력으로 탈바꿈 되면서 무제인 아비와 칼을 겨누고 황태자는 스스로 목을 매 자결했으니.. 그때 무제 나이 66세로 늙은 황제의 마음은 삭막해지더니 억울하게 누명을 뒤집어쓴채 죽어간 아들의 원죄(寃罪)를 위해서 '사자궁(思子宮)'을 짓고 '귀래망사(歸來望思)'의 대(臺)라는 이름을 붙여 달랬다 한다.
이렇게 황태자 '여태자'가 죽은후 5년뒤 기원전 87년 후원 2월 정묘일에 무제는 자신의 70년 생애를 마치며.. 그의 유조(遺詔)를 받는 사람은 바로 한무제가 그렇게 총예하며 24살에 요절한 청년 장수 곽거병의 동생 곽광과 흉노의 왕자로 한나라에 항복해온 김일제였다. 물론, 이 두사람은 각자의 성실한 재간으로 이후 황제 소제와 선제를 특히 곽광이 잘 보필했고 선제는 바로 황태자 여태자 유복의 손자였으니 운명의 장난이 아니냐며 저자는 반문한다.
이렇게 본 책은 다른 평전들처럼 전기 형식을 빌려 생애를 고스란히 조명하고 있다. 비록 페이지는 200여페이로 걸출한 인물을 다룬 책치고는 짧은 편이지만.. 그 짧은 내용속에 한무제 유철의 그림은 충분히 그려질 수 있다고 읽은 이는 말하고 싶다. 더군다나 저자는 맺음말 부분을 통해서 '시스템 구축의 제왕학'으로 총정리를 했는데.. 이것이야로 한무제 시대가 중국 역사에서 최초의 대환기를 맞이하며 할아버지 문제와 아버지 경제 시절에 쌓아놓은 기반위에 그림을 완성했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하지만 50여년이나 되는 재위기간 오로지 좋은 것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니.. 하지만 그런것을 무색시킬 정도의 치적은 지금도 중국인들의 가슴속에는 웅대한 울림으로 다가서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반고의 한서(漢書)는 한무제를 이렇게 평가했으니 풀어쓰면 이렇다.
한나라가 흥하기까지 인류는 이미 여러 시대를 경과했으며, 한나라는 여러 시대의 바람직하지 못한 잔재를 부득불 물려받아야 할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맨 먼저 무질서를 질서로 되돌려놓은 것은 초대 고조였으며, 그 뒤 3대 문제와 4대 경제는 모두 백성을 편히 휴양시키는 일을 주요 사안으로 삼았다. 다만 고전을 규범으로 삼아 시행하는 문화적인 사업만은 지극히 불완전했다. 그 일을 수행한 이가 효무황제였다. 먼저, 즉위 초에 유가의 고전인 '육경(六經)'의 가치를 드높이고 그 외의 학파는 배제하겠다고 당당히 선언한 후, 온 나라를 물색하여 널리 인재를 발탁하고 그들과 더불어 대사업을 수행했다. 대학의 개설, 제사의 정돈, 역법의 개정, 악률(樂律)의 정비, 악기의 창작, 봉선의 거행이 모두 지난날의 문화 시대 주나라의 뒤를 잇는 일들이었다.
또한 조정의 언어문화도 찬연히 빛을 발하여 어디에 내놓더라도 부끄럽지 않게 되었다. 이후의 천자들이 그것을 조술(祖述)할 수 있었고, 인류의 문화를 옛날 이상의 시대에 접근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아닌 무제 덕분이었다. 무제는 무엇보다도 적극적인 영웅이었다. '웅지대략(雄志大略)'이었다. 만일 무제의 적극적인 성격이, 한편으로는 문제와 경제의 온화한 정책까지 유지하면서 백성들의 행복을 증진시켰다면, 고전에서 칭송하는 옛 성천자(聖天子)라 할지라도, 무제보다 더 뛰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중략) 만약 무제의 웅지대략으로 문제와 경제의 공손함과 검소함을 바꾸지 않고 백성을 구했다면, 비록 시서(詩書)에서 칭송하는 자라 할지라도 무제보다 더 나은 인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그를 가깝게 알기에.. 이책을 역사 교양서로 추천하는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