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열기를 식히기 위해 강물에 퐁당 뛰어들어 친구들과 멱을 감으며 물장구치는 열다섯 소녀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집안일과는 거리를 두고 애오라지 친구들과 어울려 놀이에 빠져 지냈던 때도 어리다는 이유로 용인되던 일들이 많았고 공부보다는 자연이 더 친숙한 시절이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강과 들판으로 몰려다니며 자연을 놀이 삼아 지냈던 시절 서산으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면 하루해가 짧다고 아쉬워하는 철부지 열다섯 소녀에 지나지 않았다. 별일 아닌 데도 크게 웃으며 깔깔거리던 소녀들과 비껴난 자리 눈 먼 아버지 곁을 지키는 열다섯 살 심청이 손을 재게 놀리는 장면이 연상된다. 결핍은 한 사람의 삶을 불편하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지만 곡절을 겪으며 성장하게 만드는 동인이기도 하다. 눈 먼 아버지의 눈을 띄우기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짐으로써 아버지의 욕망을 실현시키려 했던 딸은 효녀의 표상으로 남아 있다. 고대 소설 심청전과 채만식의 현대 소설 심봉사를 탐독하여 읽고 고전으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전통적 소재를 재해석하여 작가는 연인 심청을 창조하였다.

   만족할 수 없는 욕구를 충족하며 이루고 싶은 세계를 동경하고 욕망하는 삶을 지속하는 인생에서 어떠한 선택 결정권도 없이 문제를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인간이 감당하고 인내해야 하는 슬픔은 삶이 지속될수록 쉽게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기본적인 욕구조차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취하려는 욕망에 눈이 멀어 분별력 있게 행동하지 못하는 심학규를 보면서 어른답게 살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며 행간을 좇아 읽어갔다. 그는 스무 살에 눈이 먼 이후에도 양반의 후예라는 허세에 갇혀 출세를 위한 과거 공부에 매달리며 사서삼경을 매일 읽고 외워 보지만 뜻한 만큼의 효용적 가치를 실현하기는 어려웠다. 가난한 살림에 끼니조차 해결하기 힘든 일상에 불만을 드러내기보다는 통찰력 없이 행동하는 아버지를 불쌍히 여기며 심청은 삯바느질을 해서라도 양식을 얻어와 정성껏 아버지를 봉양하였다. 색정에 물들고 색욕에 눈멀어 주색잡기를 가까이 하는 아버지를 못마땅해 하면서도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로 받아들이며 측은해 하는 딸이기도 하였다.

   양반인 아버지와 노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운명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천대받고 살아가는 청년 윤상과 어머니의 목숨과 바꿔 세상 밖으로 나온 심청은 슬픔의 테두리 안에서 서로 의지하며 자랐다. 지체 놓은 이들은 가진 권력과 돈으로 서로를 이용하며 살아갔지만 청과 윤상은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도우며 부족함을 채워 성장하는 가운데 공동 운명체로 화합하며 살아가는 사랑을 그려 왔을 것이다. 하지만 연정을 품고 사는 이들의 바람과는 달리 운명은 헤살을 놓아 이별의 시간을 배태하여 결별을 예고했다. 심청이 아비의 삶을 멍에처럼 짊어지고 사느라 자신의 내밀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지낼 수가 없었다. 공양미 삼백 석에 하나뿐인 목숨을 제물로 바쳐야 했던 심청의 마음을 되돌리기에는 이승의 질긴 인연의 사슬이 동여맨 밧줄처럼 옴쭉 달싹 못하게 하였다. 연기의 법칙에 따라 육도 윤회하는 세계관에서는 인간으로 태어나 이승에서 생활하기도 어렵다고 하였다. 죽음으로써 육체는 현세에서 사라져 없어지는 현세적 부속물이고, 이승에서 지은 과보에 따라 윤회하는 순환의 틀에서 관계가 형성된다. 이승으로 오기 전 연인이었던 심청과 심학규는 천상의 규범을 어겨 인간 세상으로 내쳐져 부모와 자식의 인연을 맺고 효심이 지극한 심청이 아버지에게 정성을 다하는 생활로 현세적 삶을 이어갔다.

   양반의 피를 물려받았지만 떳떳하게 내세울 수 없는 출생의 결함으로 넓은 세상으로 나가 역량을 발휘한 기회를 박탈당한 채 살며 버텨야 했던 일상에서도 현재의 괴로움을 감내하며 살아갈 힘은 사랑에서 뻗어 나왔다. 어릴 적부터 심청이 곁에서 그녀의 일상을 지지하고 외로움을 함께 나누는 버팀목으로 자리했던 윤상은 일찍 철이 들어 앞가림을 잘하는 심청에게 울타리로 작용했다. 오늘 가진 것보다 내일 가질 것을 꿈꾸는 아버지를 대할 때마다 마음이 아팠지만 심청은 아버지의 바람을 들어주기 위해 스스로의 욕망은 내려놓고 푸른 물을 들인 무명천에 사랑하는 이의 옷을 지어 그에게 건네고는 이별을 고해야 했다. 옹색한 처지였지만 심청이 곁에 있어 마음이 푼푼하였던 시절을 떠올리며 뜻을 만들기도 전에 운명적인 이별이 사랑을 이루지 못하게 한 고통의 원천이었다.

   아무리 애를 써 봐도 철벽처럼 다가오는 운명은 헤쳐 나갈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는 이들은 현세에서는 타인의 목숨을 구하고 내세에는 자신의 삶을 구원하리라는 바람을 안고 살아간다. 아버지 심학규는 심청이 인당수 제물을 자청한 대가로 받은 공양미를 욕구에 이끌려 허랑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탕진하고 급기야는 몽운사에 올리기로 한 공양미까지 축내며 몹쓸 병까지 얻어 건강을 회복하기 힘든 상황에 놓였다. 윤상은 사리분별 못하는 늙은이 때문에 죽어가야 하는 심청의 희생을 막아 보려 애원하여 보기도 하였지만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목숨을 값어치 있게 쓰는 일의 숭고함을 알고 이타적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그녀의 생명을 앗아간 바다를 일터로 삼아 노동하며 물 위에 떠 있는 연꽃을 발견하여 왕에게 바쳤다. 화중군자라 불리는 연꽃은 진흙에 물들지 않은 정갈함을 지닌 꽃으로 고매한 정신을 표상하여 가까이 하는 이들이 많았다. 꽃을 사랑하던 왕은 일상의 탄력을 잃을 때 화사한 이미지로 기쁨을 주는 꽃으로 위로를 받을 때도 있었다. 연꽃 속에 요정처럼 자리한 심청을 보고 왕은 아리따운 처녀를 왕비로 삼았고 연꽃을 바친 일을 계기로 윤상은 경계가 삼엄한 궁에서 궁지기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심청은 왕비로 간택된 뒤 궁궐에서 윤상과 재회한 뒤 그와의 못다 한 사랑에 괴로워하며 속내를 털어놓아 보지만 이들의 재회는 윤상을 지옥으로 밀어 넣어 치명상을 입게 하였다. 희빈 정 씨의 흉악한 고문을 모질게 버티며 권력자들이 술수를 부릴 때에도 윤상은 굴복하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하였다. 죽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현재와 미래를 살피어 생각의 방향을 정한 뒤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심청을 지켜주었다. 불의 힘을 빌려 자백을 받아내려는 희빈 정 씨의 극악한 형벌을 안간힘으로 버티며 심청과 내통한 일을 자백하지 않은 윤상은 굳건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기꺼이 자기희생을 감수하였다. 윤상은 궁지기로 들어와 멀찍이 떨어져서라도 왕의 아내로 발탁된 심청의 모습을 가슴에 담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신분의 벽을 넘어설 수 없는 인연의 한계를 수용하였다. 그는 송나라로 향하던 뱃전에서 인당수로 뛰어들려 했던 심청을 지켜주지 못한 회한으로 그녀의 안위를 염려하고 남은 생의 행복을 빌어주는 넉넉한 사랑을 발현하였다. 모진 고문 아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버티며 주검으로 사랑을 지켜낸 윤상의 지순한 애정은 극악무도한 정 희빈을 자기 파멸로 이끌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맹인들을 위한 잔치를 연 연회에서 심청은 노쇠한 몸으로 병약해져 곧 생명이 다할 것 같은 현실의 아버지를 보면서 안타까움은 배가 되었다. 꿈속에서 본 훤칠하고 글을 잘하는 풍류가 아버지를 그리워하였던 심청은 개안하였지만 안쓰러운 유기체로 사위어가는 촛불 같은 모습에 그의 목숨을 부지하게 도와달라는 기도를 올렸다. 생명을 다해 아버지의 눈을 띄우기 위해 희생하였던 심청이 이제는 사위어가는, 아버지의 생명의 불을 지피기 위해 정성을 들였다. 아버지의 건강 회복을 바라며 생명을 지켜달라고 기도하는 동안 사랑해온 윤상은 죽음으로 치닫는 단말마의 고통에 시달리려야 했다. 이승에서의 모든 짐을 홀로 짊어지고 참혹한 고통에 형장의 이슬로 스러지면서까지 윤상은 사랑하는 여인 심청을 지켰다. 상여가 나가는 날 망자의 혼은 심청이 머무는 공간 앞에 머물다 그녀의 다정한 소리를 듣고 움직여 이승에서의 못다 한 사랑의 한을 갈무리하는 것처럼 비춰졌다.

   몸이 불편하더라도 살아 있기 때문에 통증을 느끼며 생활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한 채 가지지 못한 부분을 갈구하며 또 다른 무엇인가를 바라왔다. 부지기수의 이별을 겪으며 삶은 알고 있던 이들과 이별하며 고독을 배워가는 통과의례처럼 여겨진다. 청춘 시절에는 몰랐던 부분들이 새로운 얼굴로 떠올라 지금 있는 자리에서 정성을 다하며 사는 일의 소중한 가치를 일깨워준다. 죽을 고비를 넘긴 심학규는 무명의 어둠을 밝혀내는 마음의 눈을 뜨고 그동안 헛된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왔던 점을 뉘우치며 속죄양 의식을 실천이라도 하듯 세속을 등지고 유랑하는 삶을 선택하였다. 선택할 수 없는 탄생으로 슬픈 운명적 삶을 살면서도 궤도 내에서 수정하는 생활로 변혁을 꾀하였던 윤상은 죽음을 다짐하고 선택한 길에 충실함으로써 현생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의 고귀한 가치를 승화하여 갔다. 유랑의 길을 선택한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떠올리며 선업을 쌓아 복을 짓는 일로 자기 구원을 실현했던 왕비 심청은 약자들을 향한 사랑을 생생하게 표하며 슬픔으로 어두웠던 마음도 씻어내어 자기 정화를 넘어 이타적인 사랑을 구가하였다.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지 날라. 미워하는 사람과도 만나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않음은 괴로움이다. 미워하는 사람과 만남도 괴로움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을 잃음도 재앙이니까. 사랑과 미움이 없는 사람은 집착이 없으리.’

   법구경에 나오는 구절이 떠오른 것은 평범한 이들이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윤상을 떠나보내고 상실의 아픔에 젖기보다는 생자필멸의 법칙을 받아들이며 범속한 삶을 초탈하여 애욕을 넘어서는 사랑을 실천하는 일로 이승에 존재하지 않는 이를 그리며 남은 시간을 보내는 심청의 마음을 가늠키는 힘들다. 풍요로운 현실에 안주하여 사사로운 이익을 대변하며 살기보다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사랑을 베풂으로써 이타적 삶을 잇는 심청은 자비의 화신처럼 여겨진다. 마음 좋은 귀덕 어멈이 갓난아기 심청에게 젖을 나누어 주었고 좀 더 자라서는 일감을 챙겨주고 끼니를 해결할 수 있게 돕고 홀로 남은 심 봉사가 애욕에 눈이 멀어 애랑에게 넘어 갔을 때도 그의 건강을 살피며 보살피는 자비 행을 실천하였다. 탐심을 버리고 애착 관계를 벗어나 무상 보시를 행하며 살아갈 때 큰 과보를 얻어 궁극적으로는 너와 나를 포함한 우리들이 갈증 많은 세상을 지혜롭게 열어나갈 때 우주에 존재하는 삼라만상과 조응하는 삶을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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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일찍 철들어버린 청춘에게 - 시인 장석주가 고른 사랑과 이별, 청춘의 시 30 시인의 시 읽기
장석주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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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확실성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의 한숨은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연락 오는 제자들 중에는 노량진 고시원에 자유를 저당 잡힌 채 시험 합격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들이 많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시대 별 어려움을 모르고 살아온 젊은이들은 취업을 준비하며 철이 들어가고 있다. 철 따라 피고 지는 꽃들이 다른 것처럼 제 빛깔과 향기로 스스로의 삶을 꾸려갈 힘을 얻는 일은 사리를 헤아릴 줄 아는 지혜를 반영하기도 한다.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사랑하는 이와의 만남은 사치스러운 일로 비춰질 수 있을 것이다. 스무 살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시인의 시 읽기는 사랑과 이별을 담은 청춘의 시 서른 편을 해석하여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을 일깨워준다.

   

   신경림 시인의 작품이 수능 언어 영역 문제로 출제된 적이 있다. 가난하기 때문에 인간적인 감정마저도 접어야 하는 젊은이의 고통스런 삶을 통해 소외된 삶을 사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민과 이들에 대한 연대 의식과 유대감을 보여주었다. 물질적 결핍이 일상의 소소한 감정까지 외면하고 살아야 하는 고통을 가난한 이들끼리 연대하여 힘을 보탤 때 가난을 넘어설 수 있는 신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전망하였다. 불가피한 실연이더라도 쉽사리 잊히지 않는 어긋난 사랑으로 상심하며 지내는 이들이 많다. 시간이 약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해 보지만 여전히 가슴 속에는 피멍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상대를 등지고 걸어가는 이의 뒷모습은 처연하다. 끝난 사랑은 떠나고 홀로 남은 자에게 끝내지 못한 대상을 향한 그리움을 담고 있어 애틋함은 더하다. 상처는 나의 체질이라고 위로하는 시인의 시구는 다시 용기 내어 사랑할 수 있는 동기까지 앗아가 버릴 것 같아 안타깝다.

 

    혈기 왕성한 아이들과 생활하며 격세지감을 느낄 때마다 예전에 아이들은 그러지 않았다며 당시의 일화를 들려주며 공감을 끌어내 보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왕왕 있다. 급속도로 변화한 시대에 정주하는 대신 변화에 부응하는 언행으로 시대를 호흡하며 살아야 한다고 여기면서도 밋밋한 일상에 젖어 몸에 익은 대로 행동하고 만다. 성년으로 자리하여 스스로 살아갈 힘을 얻는 데는 통과의례처럼 거쳐야 할 과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정을 거르고 쉽게 넘어가려 했던 적이 떠올라 괴란쩍기만 하다. 영속하는 시간 속에 젊음과 결별하듯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한 친구들을 떠올리며 추억 속 이름을 부를 때마다,

   ‘전송하면서 / 살고 있네.’

   라고 노래한 마종기 시인의 연작시에서 인생의 덧없음을 발견하고 유한한 삶을 열정적으로 살아야 할 당위성을 찾는다.

  

   감각 없이 사는 이들에게 들려주는 일을 즐기는 시인은 시적 감수성으로 정서를 구체화하여 굳어진 가슴에 동력을 불어넣어준다. 부조리한 현실이지만 짓밟힌 풀들이 누웠다가 다시 일어서는 것을 보고 끈질긴 생명력으로 동적인 삶을 구가하는 자기 갱신을 담은 김수영 시인의 풀은 언제 봐도 희망적이다. 있는 그대로를 수용한 토대 위에서 선택한 방법대로 변화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삶의 자세는 열망을 형상화하는 일로 비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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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급성 패혈증으로 검사 도중 죽음을 맞은 이웃의 부고를 전해 듣고 문상을 다녀오는 길 일흔 둘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영정 사진 속 주인공은 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이 쉰을 바라보는 나이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더 많다고 여길 때면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새롭게 발견한다. 죽음이 자신을 비껴가 지인들은 모두 떠나고 홀로 남아 추억 속 그들을 불러내어 반추하며 살아가는 일은 절대 고독의 심연 속으로 끌어가고 말 것이다. 친구들은 우스갯소리로 먼저 묵게 되면 무덤에 와서 술 한 잔 따르며 말도 좀 걸어주라는 말을 들을 때면 처연해지고 만다.

  

   말수가 적은데다 원칙적인 삶을 고수하며 타협하기를 거부하던 오베의 황량한 삶에 소통의 빛으로 자리했던 소냐의 죽음은 그의 삶에 품위를 앗아 가버렸다. 논리 정연한 문제해결로 정답을 찾아가는 수학을 좋아했던 소년 오베에게 일상성이 깨지는 일은 달갑지 않은 일이었지만 불가항력적인 혈육의 죽음은 세상에 홀로 남은 이가 감내하며 살아야 할 몫으로 남았다. 세상사에는 질서가 있어야 하고 반복되는 일상이 있어 안정감을 찾을 수 있는 생활이 지속되길 바랐던 이에게 일상성의 균열은 스스로를 고립된 섬에 유폐하는 일로 이어졌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일에 적극적이었던 오베는 자동차 엔진을 이해하고 그것을 능숙하게 부릴 줄 알았다. 엄마를 여의고 떠나버린 엄마의 소소한 기억들을 가슴에 묻고 살면서 부자지간은 침묵 속에 추억 속 인물을 불러내며 지냈다.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아버지였지만 엔진을 정밀하게 이해하여 그는 고장 난 차를 완전하게 고쳐 전문성을 겸비한 이로 능력을 인정받으며 기능장으로서 품위를 갖춰 갔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실천하는 아버지의 성향을 닮은 아베는 아버지마저 여의고 열여섯에 아버지가 일하던 곳에서 현장 일을 도우며 기술자의 자질을 길러가던 중 불미스런 일로 누명을 썼을 때도 의연하게 대처하며 품위를 지킬 줄 알았다. 말문을 닫고 지내던 오베에게 누구도 쉽게 말을 붙이지 않았을 때 친절함 이면에 자리한 잇속을 드러내며 접근한 남자에게 보험사기를 당하였을 때도 그는 크게 맞서지 않았다. 물건들은 저마다 쓰일 곳이 정해져 있게 마련이지만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들은 과욕이 낳은 똥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푸념하며 오베는 물건의 올바른 기능을 존중하였을 뿐이다.

   목적지를 오가는 열차 안에서 책과 고양이 아버지를 좋아하였던 소냐를 만남으로써 웃음을 잃고 지낸 오베는 웃을 줄 알았고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유일한 존재로 각인되어갔다. 오베는 소냐를 만나기 전까지는 삶을 지속하였지만 진정으로 살았던 게 아니었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성실함으로 무장한 그는 주택 회사에 고용되어 장기근속하며 의무를 다하였고 소냐와 결혼하여 비로소 가족을 떠나보낸 절대 고독의 심연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었다. 정해진 시간에 눈을 뜨고 일과를 시작하던 안정적인 일상이 지속될 때는 평범한 일상의 반복이 소중한 줄을 모른다. 하지만 돌연한 사고로 치명적인 화를 입고 재앙에서 헤어나기 힘들 때면 일상의 리듬이 지속된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할 줄 알게 된다.

   소냐가 떠나고 그녀가 남긴 사진 속 추억들을 끄집어내어 지난날을 반추하지만 그녀가 남기고 간 빈자리는 채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오베 역시 그녀의 뒤를 따라 죽음을 결심하지만 이웃의 기습적인 방문과 누군가의 도움 요청은 인위적으로 목숨을 끊기로 한 날을 유예하게 만들었다. 평화를 사랑하고 상대에게 해를 끼치는 언행을 삼가는 원칙을 고수하며 살아온 오베는 정신을 잃고 선로에 떨어진 남자의 목숨을 구하고 영웅으로 떠올라 일간지 기자의 인터뷰 요청에도 그는 으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태도로 일관하였다. 행동하는 남자로 소통하며 지냈던 루네가 기억을 잃고 의존적으로 숨을 쉬며 사는 그를 마음대로 처분해도 되는 짐짝처럼 말했을 때도 오베는 그의 존엄성을 지켜주기 위해 노력했다. 무언가 해야 할 일이 잇달아 생겨나 유예해두었던 죽음에 임박하였을 때 그는 사후의 일을 문서화하여 변호사에게 일임하였고 인연을 맺고 지낸 이웃에게 짧은 편지를 전하였다.

   한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그 사람이 죽고 난 뒤 살아남은 자들의 평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조문객 금지. 시간 낭비 금지!’

   라는 오베의 유언이 무색할 정도로 그의 장례식에 조문객은 많았다. 사랑하는 이를 먼저 떠나보내고 그들을 추억하며 오랫동안 홀로 살아야 하는 이의 고통은 커 보인다. 소냐가 곁에 있던 세상과 그녀가 유택(幽宅)에 갇혀 불러도 대답 없는 메아리로 허공 속에 흩어져 버리는 씁쓸함은 죽음으로 결별한 이들의 고통 속에 자리한다. 행동으로 보이며 진정성 있는 실천력으로 그만의 사랑 방식으로 이웃을 배려하며 지냈던 오베는 죽어가면서도 지켜야 할 품위를 잃지 않았다. 융통성 없는 남자라는 말을 들을 때도 화를 내지 않고 넘길 수 있는 아량은 소냐를 향한 오베의 깊은 사랑에서 발현되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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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가 사는 게 재미있는 이유 - 30년간 정신과 의사로 일하고 15년간 파킨슨병을 앓으며 비로소 깨달은 인생의 지혜 42
김혜남 지음 / 갤리온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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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월요일 아들의 정기 진료를 위해 대학병원으로 가는 길은 쉽지 않은 길이었다. 결강을 피해 시험 기간을 이용해 당일치기로 다녀온 서울이다. 버스로 4시간 30분을 달려 도착한 터미널에서 지하철을 갈아타고 도착한 대학병원에서 의사와의 찰나 같은 면담을 위해 40분 남짓 기다려야 했고 약을 처방받고 점심 겸 저녁으로 된장찌개로 끼니를 해결하고 되짚어 남해로 오는 길 폭우는 쏟아지고 거친 바람은 숨을 크게 몰아 쉬어 길 위에 서 있는 자신의 안위가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오가는 버스에서 읽은 책 <<오늘 내가 재미있게 사는 이유>>에서는 현재 살아 숨 쉴 수 있음에 감사하며 열심히 살아야 할 당위성을 알려주고 있다.

 

    저자가 앓고 있는 파킨슨병은 뇌 조직이 손상돼 손발이 떨리고, 근육이 뻣뻣해지고, 몸이 굳고, 말소리도 잘 나오지 않는 신경퇴행성 질환으로 예후가 좋지 않은 불치병으로 여러 후유장애를 수반하는 악성 질환으로 보였다. 감수성 예민하던 시기 역사학자를 꿈꾸던 언니를 교통사고로 잃고 연이어 할머니마저 여의고 정신적 고통은 컸으나 역사학자를 꿈꾸던 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저자는 상처의 고통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의사가 되어 심신이 약해진 이들을 치료하며 희망의 빛을 투사할 수 있길 바라며 의대 진학의 뜻을 굳히고 학업에 전념하여 꿈을 이뤄갔다.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는 의학자로 대학병원에서 임상 경험을 늘려 연구하는 일을 지속하고 싶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여 좌절할 때도 있었지만 새로운 공간에서 쌓은 실질적인 경험으로 명망 있는 정신과 전문의로 자리할 수 있었다.

 

    요양을 위해 찾은 제주도에서는 천혜의 멋스러운 풍광만큼이나 다정한 지인들의 배려로 일상 속 즐거움을 발견하며 열심히 살아갈 이유를 절감하였다.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육신으로 타인의 도움 없이 지낼 수 없는 상황에 처했어도 힘을 낼 수 있는 것은 함께 사는 이들의 마음까지 헤아리며 살아가는 공동체적 삶을 구현하는 일로 비춰졌다. 개원한 지 1년 만에 발병한 병과는 결별하지 못한 채 쇠진하여 가는 육신을 바라보며 사는 일을 원망하며 질타하기보다는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하는 시간에 소소한 의미를 찾아갔다.

 

   요의가 느껴졌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아 화장실을 못 가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카트에 실려 볼일을 해결하여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어 감사하였다는 진솔한 고백은 건강한 육신을 당연시하며 살았던 시간을 반성케 하였다. 인지 능력 저하로 치매를 앓지 않아 그동안 살면서 품은 생각을 정리하며 책을 펴낼 수 있는 시간을 다행으로 여기며 오늘도 굳어지는 다리를 어루만지며 한 발짝, 한 발짝 움직이며 마음먹은 대로 행하는 순간을 영원처럼 여기고 살아가는 저자의 현재는 투정 부리던 마음을 상쇄해주었다. 힘들고 어렵다는 이유로 쉽게 포기하고 체념하는 젊은이들에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한 발짝만 내디뎌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도전으로 오롯한 삶을 가꾸어 가라고 당부하는 듯하다

 

    파킨슨병으로 하루에 4번 약을 먹어야 하고, 약효가 길지 않아 통증에 시달리는 시간이 늘어났다. 약효가 떨어지면 고통은 어김없이 찾아와 운신하기 힘들 정도로 저자를 괴롭혔지만 병까지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현재적 삶과 연애하는 것처럼 살아가는 일상은 진실함으로 가득했다. 약물에 의존하는 시간을 재촉하기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움직이며 약 먹을 시간을 기다리며 집필하였을 것이라 생각하니 애잔함이 더했다. 소득은 줄었고 약값은 늘었지만 남편이 의술을 전하며 돈을 벌 수 있으니 다행이라 여기고 가족 구성원들 자기 역할에 충실하여 공동체적 삶을 유지하고 있다. 희망을 노래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유하며 표현하는 생활에 열정을 쏟는 시간은 숭고한 삶의 가치를 발현하는 일로 그려졌다.

 

    생자(生者)는 필멸(必滅)한다는 인생의 법칙은 유한한 삶을 충일함으로 치환할 당위성을 부여한다. 정기적인 통원 진료로 약을 복용하며 지내는 아들이 있어서인지 저자의 고통이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 언젠가는 약을 끊고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조차 품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뇌 손상 없이 생각한 바를 기술할 수 있는 현실에 감사하여 생을 마감하기 전 희망 목록을 적어 실천하려는 의지를 다졌다. 햇볕 아래 스러져가는 이슬처럼 덧없는 인생에서 무상감을 뛰어넘는 자식들이 염두에 두고 살았으면 하는 목록 그에게 기다림은 희망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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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도에 관하여 - 나를 살아가게 하는 가치들
임경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지혜로운 자는 스스로도 살생하지 않고, 남을 시켜서도 살생하지 않으며, 남의 살생하는 것을 보면 마음으로 좋아하지 않는다.’

   불살생 관련 가르침은 생명체의 존엄성을 새기며 함께 살아가는 일상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삼라만상을 어떻게 보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언행은 판이한 양태로 드러난다. 태도는 가시적이지는 않지만 외적인 행동 배후에 있으며 현재의 상황적 요소와 결합함으로써 행동 결정의 요인으로 추론된다. 바람직한 인간 육성이라는 교육의 본질은 대학 입시에 밀려 제 기능을 살리지 못하여 파생되는 학교 문제를 임시로 변통할 뿐이다.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고 어떤 방식으로 풀어갈지는 선택의 몫으로 남는다.

 

   간섭받기보다는 자율적 선택 의지로 인생의 향로를 결정해 온 작가는 국경을 넘나들며 다원화된 생활에 적응해 온 덕분에 자신만의 빛깔을 띠고 살아가는 힘을 얻어왔는지도 모른다. 개인의 가치관과 살아가는 방식이 결부된 태도는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데 능동적인 에너지를 발현하며 살아갈 동기를 부여한다. 타인의 눈치를 살피며 상대에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 지배된 삶을 살아온 이들에게 흔한 수동성은 자발성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할 때가 있다. 내면을 살피며 중심을 바로 잡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은 자발적으로 경험한 것들을 통해 자연스레 발휘됨을 감지할 때가 많다. 행하는 일이 예전과 같지 않다고 여겨질 때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면서 원하는 대로 움직이며 살고 있는지 반추해 볼 일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애쓴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껍질을 깨려고 시도하기보다는 군집 본능에 따라 관성대로 움직이며 사는 일이 몸에 익어 편하다. 외아들로 집안일에 조력하지 않던 남자를 만나 함께 살며 가사 분담으로 이끈 변화의 시도는 사랑의 힘 못지않게 소중한 배려를 일깨워주었다. 진심으로 좋아한다면 상대보다 일을 많이 했다고 손해 봤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서로에게 관대해진 부부의 모습에서 질적인 성장을 가늠한다. 무리가 와서 고통을 느낄 정도의 가사 일에서 놓일 때 건강한 결혼 생활은 이뤄질 것이다.

 

   고인 물에서 오랫동안 생활하여서인지 구성원들과의 소소한 갈등이 초래한 인간관계 때문에 스트레스 받을 때가 왕왕 있었다. 경제적인 자율성으로 존재감 있게 생활하고 있어서인지 주변에는 그것을 시기하는 말들이 난무하였다. 모두에게 사랑받을 필요가 없다고 여기면서도 냉소적인 말 한마디에 상처를 입는 자신이 미워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속상해하며 평상심으로 생활하지 못하는 자신과 맞닥뜨릴 때면 회의가 들었다. 타인과의 관계에 짓눌려 질척거리기보다는 지금의 관계를 점검하여 재조정해 나가는 게 먼저일 것이다.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스스로에게 정직해질 때 오롯이 홀서 서서 얻어 자신의 일을 사랑하며 살아갈 자유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세월의 부침에 따라 변화해 온 자신을 들여다보며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생각한다. 서너 번 시도해보고 성사되지 않는다고 포기하여 자기혐오에 빠져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건전한 야심을 품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갈 때 점진적인 향상으로 성취감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불완전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어제의 나와 비교하며 불공정에 저항함으로써 자립심을 길러 가는 일은 통념의 잣대에 휘둘리지 않는 건전함으로 이뤄내는 자기 구원은 자존감 있는 삶을 지탱하는 힘으로 작용할 것이다. 어떤 일을 하든 그 일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일에 몰입할 수 있는 강도는 달라진다. 시간이 흘러도 쉽게 변하지 않을 바람직한 자세로 스스로 주인공으로 자리하여 갈 때 인생은 조금씩 즐거워질 것이다. 오지도 않은 미래의 꿈을 위해 소소한 감정을 유예하며 현재를 희생하는 삶에서 탈피하려는 시도는 나만의 가치관으로 삶의 방향에 물꼬를 틔우는 시원으로 자리할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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