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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른 아침 꿈에서 깨어나 냉수를 마신 뒤 여느 때처럼 산에 올랐다 내려 올 생각으로 창밖을 보니 안개가 자욱하여 한 치 앞을 가늠하기 힘들 정도였다. 간밤에 내린 비의 영향인지 안개 낀 날은 습기가 스멀스멀 기어드는 벌레처럼 나는 감싸고 흔들어 마음까지 축축하게 젖게 만든다. 습한 기운이 더 많아서인지 안개는 사람을 점점 무기력하게 만들어 운신하기 힘들게 하는 경향이 있다. 안개 낀 날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하지만 가슴 속 답답함을 더해 중압감을 줄 때가 많아 안개가 걷히기를 소망하게 된다. 안개가 걷혀 사물들이 제 모습을 드러내며 그 자리에서 안정적으로 있을 때 평안함을 얻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광란의 도가니를 연상케 하는 일들이 많이 벌어져 지극히 평안하게 생활할 수 없을 때가 많다.
아내의 권유로 자애학원에 첫 발을 디딘 강인호 교사는 서툰 수화로 농아들에게 시를 읊으며 소통의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부임한 첫날 자신의 반 아이 동생이 기차 사고로 죽었고, 잠긴 여자 화장실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은 지금껏 은폐되어왔던 자애학원의 실상을 드러내는 단서가 되었다. 세상에 살아갈 능력 중 가장 중요한 것이 결핍된 채로 세상에 던져진 아이들에게 강 교사는 지금껏 함께 생활했던 교직원들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어서인지 아이들은 서서히 마음의 빗장을 열기 시작했다. 말할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는 아이들에게 겹친 장애와 불우한 가정환경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아이들의 천형처럼 여겨졌다.
표면적으로는 장애아동을 돌보는 지역 유지로 사회사업을 지속적으로 여는 선량한 모습을 하고 있으나 이면에는 짐승 같은 본능이 들끓는 자애학원 실세들의 전횡은 또 다른 폭력을 낳고 있다. 외따로 떨어져 괴기스러운 모습을 한 자애학원은 짙은 안개 속에 모든 것을 숨긴 채 아이들에게 폭력을 가하며 그들을 옥죄어갔다. 청각 장애인들의 기숙학교인 자애학원은 학교 명칭과는 달리 자애롭지 못한 기득권자들이 동물적인 본능을 앞세워 무방비로 노출된 학생들을 농락하며 성적 욕구를 충족시켜 나가고 있었다. 교장과 교장의 쌍둥이 동생인 행정실장, 기숙사 사감 교사가 번갈아가며 장애 학생들을 성폭행하지만 어느 누구 하나 그 내용을 들춰 내 공론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말할 수 없는 아이들은 그 사실을 이야기할 수 없었고, 들을 수 있는 교사들은 애써 그들의 아픔을 외면한 채 녹을 받아먹으며 자애학원에 기생해 왔던 것이다. 더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 불행한 사건이 부패 세력의 비호 아래 묵인되고 용인되어 왔다는 점이다.
침묵의 카르텔 속에 자행되어 왔던 폭력 양상을 짐작하였던 강인호 교사는 담임을 맡고 있는 반 학생의 증언을 토대로 인권센터 서유진 간사와 힘을 합쳐 가해자를 법의 심판대에 서게 했다. 하지만 기득권층은 성폭력의 온상인 자애학원의 비리를 밝히고 가해자들을 처벌하여 일침을 가하기보다는 그들에게 집행유예 선고를 함으로써 가해자 편을 들어주고 말았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에 어둠과 공포를 느끼고, 인간을 향한 가증스러움으로 더욱 오열하며 절규하는 장애아들의 가족을 연상하며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마음은 화기로 끓어올랐다. 지금껏 자욱한 안개에 휩싸여 불투명한 채로 단절되어 어떤 추악한 일이 벌어지는지도 몰랐던 자애 학원의 진상이 규명되었을 때 안개는 걷히는 듯했다. 하지만 범법자들은 그들이 저질렀던 부정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 판결을 받음으로써 면죄부가 씌어진 셈이 되고 말았다.
재판정의 판결에 불복한 학생들과 인권센터 사람들은 천막교실을 열고 거대한 성에 맞서 힘겨운 싸움을 벌여 보지만 돌아온 것은 또 다른 폭력이었다. 철거 용역반의 폭력으로 아이들은 쓰러지고, 지도부는 구속으로 이어졌다. 천막으로 급히 와 달라는 서 간사의 문자를 뒤로 하고 아내를 따라 서울로 올라간 강 교사의 행동은 소시민적인 삶을 사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듯해 측은함마저 들었다. 높이 쌓아올린 성벽처럼 견고하고 거대한 악의 축들의 담합 앞에서 인간의 도덕적 양심은 점점 제 빛을 잃어갔다. 무진에서 벌어지는 무뢰배들의 협잡이 낳은 추악한 풍경이 가공된 소설 속의 풍경을 넘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일면을 담아 있는 듯해 더욱 이 세상이 흉물스럽게 다가온다. 강자 중심으로 흘러가는 사회 기류, 정의의 실종, 민주주의의 후퇴와 같은 사회적 현상이 자애 학원의 부정과 너무도 닮아 있다. 하지만 과거 우리는 악(惡)의 무리를 축출하여 선(善)을 바로 세우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행해왔다. 약자들이 홀로 더불어 힘을 모을 때 참혹한 고통이 주는 외로움과 쓸쓸함을 극복하고 당당하게 나설 수 있는 세상을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