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 - 시드니 걸어본다 7
박연준.장석주 지음 / 난다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약혼자가 있는 줄 모른 채 우연히 만난 여인에게 빠져드는 운명은 상냥하고 순수한 로테에게 끌려 마음의 짐을 내려놓지 못한 베르테르는 권총으로 자살하고 만 비련의 주인공 역을 맡은 뮤지컬 관람을 앞두고 집을 떠나는 길에 책 한 권을 꺼내들었다. 남해에서 부산까지 가는 버스에서 읽을 요량으로 도착한 책들 중 한 권을 선택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며칠 전에 장석주 시인의 독서 경험과 애장하는 도서 중심의 여운 있는 글을 읽어서인지 한 권이 책으로 부부의 연을 맺었음을 독자들에게 선포하는 통과의례에 해당하는 글이 궁금해서였다.

 

   때 늦은 겨울비가 차창을 때리고 스물다섯이라는 나이 차를 뛰어넘는 사랑의 열매에 더 관심이 가는 것은 가보지 않은 길을 걷는 부부의 용기가 부러워서일 것이다. 스승과 제자의 인연으로 만나 서로를 향하여 뛰는 가슴을 억누르며 이것은 아니라고 손사래를 칠 때마다 숙명의 끈은 자꾸만 보이지 않는 선으로 이어져 둘을 견고하게 묶어주었는지도 모른다. 맑은 영혼으로 서정적인 감수성을 키우며 살아온 시인의 생활 속에 깊이 밴 사랑의 정서는 이성적인 판단으로 이해되지 않는 마음의 부름이었다.

 

   청정 지역의 광활한 공간에서 자연적 질서를 거역하지 않고 살아가려던 두 사람에게 번잡한 공간을 벗어나 투명한 하늘 아래 비취색 물결을 보면서 걷고 걸으며 여유롭게 지낼 수 있는 안식의 시간이 주어졌다. 시드니 북서쪽 동네인 글레노리의 대저택에서 한 달 동안 머물며 둘 만의 세계를 이어나간다. 나와 너가 만나 우리가 된 두 시인은 한 집에서 함께 사는 일에 익숙지 않았지만 서로 조심하라며 말을 건네는 배려가 돋보였다. 10년을 연애하고 한 보금자리에 둥지를 털었지마는 혼자 살던 시간에 익숙했던 이들에게는 자신의 영역에 들어온 이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네며 간섭받는 일이 달갑지 않은 일이다.

 

   짐을 꾸리고 여행길에 오르기 전 낯선 공간에서의 생활이 두렵기도 하지만 둘이 함께 하는 여행이기에 설렘이 더했을 것이다. 한자리에서 잠들었다가 눈을 뜨고 상대의 눈을 바라보며 민낯으로 인사를 건네며 조금씩 둘은 서로에게 젖어간다. 살아내야 할 삶에서 비껴나 느긋하게 움직이며 물상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시간은 속력을 내며 왜 이러고 사는지도 묻지 않은 채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삶과는 대별된다. 도시에 자연을 인공적으로 조성한 왕실 정원을 찾아 갖가지 나무들의 향연을 보면서 걷는 일은 지금껏 살았던 삶을 뒤집는 일이라는 점에서 소요하는 삶이라 일컫는 저자는 걷기 예찬론자로 비춰진다. 걸음으로써 마음의 고요를 찾고 가슴속 응어리를 풀어내며 지냈던 지난날 노모와의 10년 생활이 쉽지 않을진대 원망이나 푸념은 보이지 않는다.

 

   글레노리 주택에서 글쓰기와 명상으로만 보내던 날들은 부부가 수도원에서 수행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자기만의 세계 속으로 침잠하였다. 아내는 남편의 고집은 따를 자가 없을 것이라며 남편의 속살을 드러내고 간섭받기를 싫어하는 점을 알아 그의 영역을 침해하지 않으려 애썼다. 침묵을 지키며 글쓰기에 빠져 있는 남편에게 항변이라도 하듯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피아노로 수차례 연주했다는 상상만으로도 웃음이 피어오른다. 무료함을 달랠 길이 없어 P를 좀 봐 달라는 신호를 JJ에게 보냈지만 허사였다. 포도주 한 병을 마시고 토한 붉은 포도주가 흥건한 바닥에 널브러진 아내를 보면서 죄책감과 연민, 안도감이 교차했다는 진솔한 표현에는 낯선 공간에서 느끼는 부부의 동질성 회복은 연대로 나아갈 것이다

  

   시드니에 도착한 뒤 마중 나온 이의 환대를 받으며 글레노리 올드 노던 로드에 위치한 저택으로 이동하여 여장을 풀고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실험 기간은 한 달이라는 시간이지만 심리적인 시간은 상대적이라 가늠하기 힘들어 보인다. 낯선 공간의 이방인으로 현지인들의 속살들을 들여다보며 소소한 행복을 발견하고 심심함을 애써 지우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낯선 곳을 둘러보다 시큰둥해지면 책을 펼쳐 읽는 시간은 자유로운 시간을 만끽하는 여유로 채워진다. 가속도가 붙지 않는 공간에서는 조바심을 낼 일도 없고 무한 경쟁의 각축전을 벌일 필요가 없으니 시간도 더디 흘러간다

   

   달콤한 이름만큼이나 연인들의 애정 행각이 자연스레 벌어지는 곳 달링 하버 주변을 걸으며 사유 속으로 빠져드는 시간은 다른 생활의 흔적을 각인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카지노에서 기분 좋을 만큼의 소비로 모험을 거는 시간은 인생의 희로애락을 맛보며 기분을 전환할 수 있는 시간의 영역이었다. 아무리 좋은 곳이라 하더라도 몸에 배인 섭생까지 버리면서 현지 생활에 적응하기는 힘들다. 된장찌개의 구수한 맛을 그리워하고 김치찌개의 얼큰함에 빠져 보는 상상만으로도 이민자들은 행복을 떠올리게 될 것만 같다. 시드니 생활에 익숙할 즈음 살던 공간으로 돌아온 부부는 각기 다른 색깔로 그동안의 일상을 기술한 것처럼 서로의 세계를 존중하며 감성적인 영역을 키워 늦게 만난 인연을 소중히 보듬고 살아갈 시간들로 채워가길 바라는 마음이 커져만 간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