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바이올린 색채 3부작
막상스 페르민 지음, 임선기 옮김 / 난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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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요하네스 카렐스키의 영혼은 광기에 가까워지곤 하는 이상한 성향이 있었다. 그 성향으로 인해 그는 단 하나의 존재 이유만을 갖게 됐는데, 그것은 자신의 생生인 영혼을 음악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달리 말해, 미완성 악보인 자신의 영혼을 매일 조금씩 더 천재적으로 연주하는 것이었다. 
  






 
천재 바이올린 연주자 요하네스, 바이올린 장인 에라스무스.
악기를 만드는 사람과 연주하는 사람의 운명적인 만남. 이들의 만남에 '운명'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이유는 바이올린이라는 공통점을 넘어서 음악이 인생의 전부이며 그들의 영혼을 담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한 사람은 사랑하는 여인의 목소리를 악기에 담으려했고, 다른 한 사람은 오페라 작곡에 일평생을 걸었다.  


ㅡ 


요하네스가 오페라 작곡에 집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소설에서는 예술가로서의 영혼과 광기를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그리고 있는데, 나는 그의 집착이 외로움에 기인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곱 살부터 10년 동안 천재 소년이라는 유명세를 타고 마음 한조각 나눌 친구도 없이 어머니와 단둘이 유럽 곳곳으로 순회 연주 공연을 다니고, 화려한 연주회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온 밤이면 늘 외로웠던 요하네스가 어머니가 죽은 후 대중으로부터 빠르게 잊혀진 허허로움이 어땠을까를 짐작해 본다. 


ㅡ 


카를라의 초대로 참석한 작은 모임에서 에라스무스는 몇몇 귀족 청년들과 논쟁을 벌인다. 카를라는 에라스무스에게 그녀의 음색을 재현할 수 있는 악기를 만들 수 있는지 묻는다. 카를라의 재촉에 그녀를 위해 그녀의 목소리와 같은 가장 아름다운 바이올린을 만들겠다고 장담하는데, 그순간 그의 마음은 카를라를 향한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자존심을 세우기 위한 객기였을까.  


ㅡ 


그들이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것들, 잃어버려야했던 것들. 그것은, 아름다운 음악을 악보 안에, 혹은 악기 안에 그들의 것으로 가두어놓을 수 있을 것라는 오만함에 대한 비극적인 대가가 아니었을까.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프랑스군이 베네치아를 점령했을 당시 산마르코 광장에서 열린 성령강림대축일 축제에서 이탈리아 장교들과 프랑스 장교들이 한데 어울린 부분이었다. 축제 동안 춤과 노래가 적군과 아군을 가르지 않았던 것처럼 예술은 어느 개인에게 종속될 수 없음을, 세 남녀를 통해 전해진다.  


ㅡ 


소설은 요하네스와 에라스무스의 서사를 구구절절 장황하게 늘어놓지 않는다. 절제되고 시적이며 함축적으로 그려내고 있는데, 그 감정이 오롯이 빠져들었더랬다. 읽는 내내 니콜로 파가니니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영혼이 담긴 바이올린이 부숴졌든, 불후의 명작이 됐을지도 모를 오페라가 소멸됐든, 그들에게 안식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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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임볼로 음붸 지음, 구원 옮김 / 코호북스(cohobooks)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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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정부는 코사와 마을 사람들은 참석하지 않은 베잠의 회의에서 코사와를 미국의 석유회사 펙스턴에 팔았고, 유전에서 마을 우물로 흘러드는 오염물의 독에 의해 아이들이 하나둘씩 죽어갔다. 마을 사람들은 정부와 펙스턴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코사와를 원래의 상태로 돌려놓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기 위해 마을의 대표단이 베잠으로 향했지만, 그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펙스턴 본사가 코사와 사람들을 위한다는, 정부가 코사와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인다는, 수도의 사람들이 코사와 사람들의 죽음에 애도를 전한다는, 펙스턴과 정부는 코사와의 친구라는, 그 모든 거짓말 따위는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다. 코사와 사람들이 알고 싶은 것은 그들의 공기와 물과 땅이 언제 다시 깨끗해질 건지 구체적이고 정확한 계획이고, 그들이 바라는 것은 깨끗한 물, 깨끗한 공기, 깨끗한 음식이 전부다.







 
주인공 툴라가 열 살에 시작되는 소설은 가상의 마을 코사와를 배경으로 30년의 세월을 서술한다. 화자의 시점을 달리하는 이야기 구성은 말라보와 사헬을 비롯한 기성세대의 관점, 다른 하나는 그들의 자식인 '어린이들' 관점에서 진행되는데, 그 '어린이들'이 청년 시기를 거쳐 부모의 세대가 되어가는 과정이 흥미롭게 이어진다. 


독재자가 군림하는 가난한 나라에서 백성들이 죽어가는 것은 코사와뿐이 아니다. 어느 마을에서는 군인들이 소녀를 유린하고, 다른 마을에서는 벌목으로 산림과 땅이 죽어가고 있고, 또 다른 마을에서는 광산으로 주민들이 쫓겨났다. 이 마을들에 사는 사람들이 베잠에 와서 울며 도와달라고 빌었지만, 베잠에는 그들을, 그들의 요구를 기억하는 자가 아무도 없다. 열 살의 아이들이 아버지가 되고, 그들의 아버지가 할아버지가 되도록 코사와는 달라지지 않았다. 


코사와를 비롯한 아프리카의 고통은 훨씬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기름을 채굴하기 전에는 고무 채취로 고통받았고, 강간 및 인신 매매도 당했다. 독재자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손에 넣었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법치를 들어 파괴했으며, 부정부패를 넘어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국토를, 국민을 외국 기업에 팔았다.  


거대 자본, 다국적기업, 내전과 전쟁, 기후변화 등 여러 이유로 우리는 살던 마을을, 나라를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 툴라가, 사헬이, 야야가 그랬듯이. 지구라는 행성 역시 필멸의 존재니 인류는 그 끝이 언제든 우주로 나가지 않는 이상 멸망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유한함에도 불구하고 '문명'과 '경제성장'을 명분으로 약자들을 약탈하는 것에 수치와 부끄러움을 모르는 대다수의 사람들. 이것이 코사와만의 일이겠는가. 경제 선진국 안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지 않나. 코사와가 이해한 문명과 경제성장은 모두가 풍요로운 세상이다. 


ㅡ 


소설은 토양과 수질 오염으로 인한 코사와 마을 사람들과 투쟁에 앞장 선 툴라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가부장제에서 제 삶을 본인 뜻대로 살지 못하는 여성과 공동체의 관습을 따르고 분열을 조장하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무조건적으로 순종하며 치유하지 못한 채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아이들, 옳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족을 부양해야하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가장들, 나라와 가족 중 우선 순위를 결정해야만 하는 딜레마, 혈연과 인종에서 오는 정체성의 혼란과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상실감 등 복합적인 문제들이 얽힌 인물들의 면면이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어제까지만해도 동네를 뛰어다니며 함께 놀던 친구들이 이유도 모른 채 줄줄이 죽어나가고, 대화를 하겠다고 집을 나선 아버지가 실종되고, 재판도 없이 마을 남자들이 교수형을 당한 경험을 고스란히 안고 살아야하는 어린이들, 우리가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많은 아이들 죽음의 참담함은 말할나위 없고, 소설 초반에 나를 더욱 분노하게 했던 점은 소녀에게서 더할 수 없이 자상했던 아빠를 앗아갔다는 것보다 고작 열 살 아이에게 평생을 바쳐 복수를 결심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툴라가 유학 간 미국에서 코사와의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의 서명은 '언제나 우리 중 하나, 툴라'다. 그녀가 일평생 생득권으로 삼았던 '우리'. 툴라는 서른 살도 되지 않은 나이에 자신의 남은 생이 험난한 투쟁으로 끝나리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것만이 유일한 삶의 길임 또한.  


내가 가장 애잔하게 바라본 인물은 사헬이다. 스물여덟 살 무렵에 과부가 된 그녀에게 주어진 권리와 의무는 생이 다할 때까지 먼저 떠난 남편에 대한 애도뿐이다. 시어머니인 야야의 넋두리처럼 사헬의 곁에 누가 있어줄까? (남편과 자식을 앞세운 그녀에게 물리적 편안함이 대수일까.) 



펙스턴은 장학재단을 설립해 코사와 아이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코사와 마을 자리에 새로운 유전을 개발하고 있으니 헛웃음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아이들은 펙스턴이 후원하는 돈으로 학업을 이어갔고, 새로운 삶을 위해 유럽과 미국으로 떠났다. 서른 해가 지나 코사와의 아이들은 유럽과 미국의 기업이나 베잠의 정부에서 일자리를 얻어 윤택한 삶을 살고 있다. 이 기막힌 모순을 어떻게 하나로 설명할 수 있을까.   


만약 말라보가 베잠으로 가지 않았다면, 마을 사람들이 펙스턴 대표단을 가둬놓지 않았다면, 봉고가 또다시 베잠으로 향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어떻게 살아갔을까? 그들이 살았다면 코사와 사람들의 고통의 무게가 줄어들었을까? 아무도 알 수 없다. 오스틴의 말처럼 때가 되면 변화가 올지도 모르지만, 끝까지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저항해야하는 까닭은 할 수 있는 방법이 그것 뿐이기 때문이니까.


소설의 인물 설정상 굳이 따지자면 툴라가 저자와 가장 가까워 보일 수 있겠으나 나는 오스틴과 툴라 두 사람 모두에게서 저자가 느껴진다. 대화와 행동. 변화를 꿰하는 노력에는 오스틴의 방식, 툴라의 방식으로 나뉘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자했음이 아닐런지. 마치 독백처럼 읽혔던 툴라의 편지에서 전해지는 고뇌와 숙고의 과정을 통한 확신과 결의가 참... 진하게 와닿는다.   



소설의 마지막장을 덮고 긴 숨을 내뱉었다.
너무나 애처롭고 아름다웠던 툴라를 어떻게 잊을까.
이 먹먹함이 가시려면 또 며칠의 시간이 걸릴 듯 하다. 


나의 '올해의 소설'에 올린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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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눈을 심어라 - 눈멂의 역사에 관한 개인적이고 문화적인 탐구
M. 리오나 고댕 지음, 오숙은 옮김 / 반비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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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눈멂은 내게 완전한 불행은 아니었다. 삶의 한 방식, 삶의 스타일일 뿐이다. 
(보르헤스) 
 

열 살 무렵 망막색소변성증(정확한 진단명은 원뿔세포-막대세포이상증)을 진단받은 저자는 열여섯 살 즈음에는 보통 크기의 글자도 읽을 수 없게 됐고, 첫 진단 후 40년이 지난 현재는 완전한 실명은 아니지만 앞을 보지 못한다. 이 책은 시각장애인의 위대한 인간 승리 성공담이나 장애인 관점에서 비시각장애인 중심의 사회 시스템에 대한 일방적 비판의 글이 아닌 호메로스, 소포클레스, 셰익스피어, 밀턴, 보르헤스, 샬럿 브론테, 주제 사라마구, 프랭크 허버트, 프랜시스 베이컨, 데카르트 등 분야를 불문한 고대 및 현대의 인물과 그들의 문헌을 데려와 문학과 철학을 비롯해 스티비 원더 등 대중문화에 이르기까지 눈멂이 갖는 피상성, 죄악, 진실과 거짓, 시각 중심주의 등을 서술한 문화 및 예술 비평서에 가깝다.  









 
온전한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무언가를 보게 되리라는 눈멂의 은유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이어져왔다. 저자는 젠더가 눈멂을 굴절시킨다고 쓰면서 여성과 눈먼 남성을 같은 선상에 놓으며 그들이 비주류 바라봄의 대상임을 짚는다. 동시에 인간 존재의 가변성이 젠더 유동성으로 나타남을 지적하며 눈멂이 곧 여성성과 동일시됨을 얘기한다(그러니 시각장애인이 여성일 경우는 어떻겠는가).


시력이 아주 완벽하다고 믿을 때조차도 우리의 시력은 근본적으로 어둡고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눈멂이 우리 인간성의 한 양상임을 깨닫지 못한다. 많은 문헌들에서 혹은 고정관념적으로 보통 인간의 내면적 깊이와 관련해 눈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상 눈은 물질로 구성된 몸의 한 부분일 뿐이다. 


저자는 뿌리깊은 시각 중심적 편견 때문에 시각장애 작가가 자신의 진실을 말하기 어렵다고 얘기한다. 이러한 맥락에 대한 이야기가 초반부터 꾸준히 언급되고 있는데, 이 부분에 무척 공감했다. 많은 비시각장애인 작가들이 마치 시각장애인의 세계를 완전히 알고 있는 것처럼 쓴 글들과 이를 위화감없이 받아들이는 독자들에 대해, 그리고 나 역시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깨닫기도 했다. 평소 궁금했던, 영아기에 시각을 잃은 시각장애인의 경우, 비시각장애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의 시각 세계가 암흑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경험적 비교 대상이 없기에 적절하지 않음 또한 새삼 인지했고.   



올리버 색스는 사물을 보고, 그것을 시각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즉각적이고 선천적인 능력 같지만, 실은 전반적인 기능의 위계가 필요한 인지적 성과에 해당한다고 했다. 즉 읽는 법을 배우듯 보는 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해당 장에서 시각을 복구하는 것이 우울한 어둠에서 기쁨 넘치는 빛으로 나아간다는 안일한 은유를 피해야한다고 얘기하는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올리버 색스의 저작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가 생각났다. 비장애인이 장애에 대해 갖고 있는 섣부른 고정관념과 왜곡된 인식을 깨달았었는데, 이 책에서도 그 당시 느끼고 배웠던 점을 다시 각성할 수 있었다.  


저자는 점자가 하나의 문자 체계임을 분명히 하면서 점자의 읽고 쓰기를 시각장애인뿐 아니라 비시각장애인도 배울 수 있는데, 문제는 동기에 있다고 말한다. 각 나라의 언어와 문자를 배우는 것에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듯 점자 역시 마찬가지임을 주지한다. 저자의 지적처럼 비시각장애인에게 점자를 배울 동기는 많지 않다. 거기다 시중에 점자책도 쉽게 구할 수 없어서 더욱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11장에는 헬렌 켈러를 들어 장애 행동주의에 대해 서술한다. 예술 창작 및 공연에 있어서 시각장애인이 만든 역할을 그들이 연기하는 것은 장애 행동주의를 위한 중요한 수단임을 밝히며 비시각장애 작가와 배우가 연극과 영화 속의 시각장애인을 창조하는 것은 포용과 다양성에 있어서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하는데, 작년에 시청했던 한 드라마에서 다운증후군 장애인이 직접 배역을 맡아 연기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공익광고를 비롯해 이러한 추세로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는 듯한데 점점 더 확대되기를 바람한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영감 포르노'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저자는 장애가 영감을 준다는 말에 대해 거부감을 표하며 장애를 영감과 연관 짓는 것은 장애가 단지 인간성의 한 양상이 아니라 무언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고 인권에 반하는 것임을 지적한다. 이 부분은 1장의 호메로스와도 연결되는데 이러한 점은 현대의 대중문화에서도 수시로 활용 및 은유된다는 점에서 나 역시 불편하다. 


ㅡ 


시각장애인은 평생의 파트너에게 보살핌을 받아야한다는 인식, (시각)장애인의 지적 수준이 비(시각)장애인보다 낮다는 편견, 성적 지향의 결정조차 시각의 있고 없고에 달려있는 듯한 태도 등 우리는 여전히 많은 편견을 갖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15장에서는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무시되는 눈먼 자들에 대해 몇 페이지에 걸쳐 서술하는데, 이 부분에서 저자의 의견을 더 듣고 싶은 점이 있었다. 소설은 우의적인 설정이고 정황상 눈먼 자들이 갑자기 실명해 충격을 받았을 거라고 여길 수 있음을 저자도 짚는다. 그럼에도 사라마구가 소설 속에서 묘사는 '눈먼'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고 있음을 지적한다. 소설에서 인물들은 목숨을 잃을수도 있고 그안에서도 절대 악인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과연 '눈먼' 사람들은 어떻게 그려져야 했으며, 유일하게 시각을 잃지 않은 여성과 눈이 멀게 된 사람들은 어떤 구조를 가져야했을까. (이 부분은 계속 생각 중이다.) 



"장애는 유동적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비(시각)장애인으로서 주류라고 인식하고 있지만 위의 짧은 문장은 장애와 비장애의 장벽이 얼마나 낮은지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비장애 중심주의 담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저자는 통찰하며 일갈한다. 


이 책을 펼치고 서너쪽을 넘길 즈음 내가 갖고 있는 비시각장애인으로서의 한계를 또다시 깨달았다. 책의 표지에 점자가 있는 것까지는 납득을 했는데, 책을 펼치자마자 든 생각은 '폰트가 왜 이렇게 커?'였다. 그순간 나는 여전히 비시각장애인 관점에서 사물을 우선해 판단하고 있구나라고 새삼... . 산산히 쪼개져있는 의식의 조각들을 모으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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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 에디터스 컬렉션 13
다자이 오사무 지음, 오유리 옮김 / 문예출판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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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나는 확신하고 싶다.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살아왔다고. 

 


1947년, 스물아홉 살 가즈코는 6년 전에 아이를 사산한 후 이혼하고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고, 그녀의 동생 나오지는 대학교에 다니다가 징집된 후 종전 후에는 행방이 묘연한 상태였다. 전쟁이 끝난 해부터 집안 경제 사정이 나빠지자 외삼촌의 권유로 시골 이즈로 이사온 모녀. 몇 달 후, 아편 중독자가 되어버린 나오지가 돌아온다.  









소설에는 가즈코, 나오지, 우에하라를 중심으로 가즈코를 1인칭 화자로 삼아 서술한다. 종전 후 몰락해가는 귀족과 패전 이후 황폐해진 사회에서 방황하는 젊은이들의 내적 갈등, 혁명이라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오는 혼란, 그리고 구차한 삶이라도 살아내겠다는 생명력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허울뿐인 귀족에서 벗어나 평민으로 살아보고자 발버둥첬던 나오지. 그의 일기에는 전쟁터에서 권력자의 하수인 역할에 불과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이런 삶이 계속된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밖에 없음을 통탄하며, 어머니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쓰여 있다. 자신이 살아야할 이유를 찾지 못했고, 강인한 민중의 한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으며, 귀족 사회에서도, 민중 사이에서도 이방인이었던 나오지는 끝까지 귀족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어 쾌락과 타락을 선택했으나 매순간 불행했다.  


나오지가 방황과 고뇌를 보여준다면 우에하라는 무기력함을 나타낸다. 집에서는 사흘이 지나도록 전구를 갈지 못해 아내와 딸이 해가 지면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이른 시간에 잠자리에 든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각혈을 하도록 술을 마신다. 가즈코의 열렬한 구애가 담긴 편지를 읽었으면서도 답장 한 통 없다가 6년 만에 찾아온 그녀를 하룻밤 받아들인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일상에 도저히 이대로는 살 수 없다고 판단한 가즈코는 6년 전에 한 번 만나 입맞춤을 한 게 전부인 우에하라에게 자신을 받아달라는 세 통의 편지를 보낸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아이를 낳고 싶다는 것. 가즈코가 우에하라에게 바라는 것은 아내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그의 첩이 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사랑을, 아이를 원할 뿐이다.   


가즈코는 자신의 편지를 비웃는 사람이라면 여자가 살아가려는 노력과 여자의 생명을 조롱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심정이 갇혀 있는 듯한 현실에 숨쉬기조차 어려워 폭풍우가 몰아치더라도 항구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호소한다. 또한 자신은 정박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물 위에 떠있기만 하는 배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며, 당장의 상황을 가장 괴로워하고 고민하는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임을, 누군가의 쑥덕거림 따위는 개의치 않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내비친다.  



가즈코와 우에하라의 재회. 애초에 우에하라에게 의탁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혁명할 계기가 필요했고, 도전적으로 나서서 뭇사람들의 시선과 낡은 도덕을 무시하고 목표를 달성해 승리를 쟁취했다. 그리고 우에하라에게 멋지게 말한다, 당신은 당신의 전투를 치르라고. 어머니와 살던 시절의 귀족적 명예와 평온이라는 꾸며식 허식에서 벗어나 사생아와 그 어미라는 도덕적 허물을 걷어내고 혁명을 완성해 나가기 위해 꿋꿋하게 살아갈 것을 선언하는 그녀. 어쩌면 가즈코의 강인한 삶에 대한 욕구와 생명력 자체가 혁명이 아닐까. 그리고 혁명은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대신할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 우에하라에게 보내는 편지는 가즈코의 결연한 의지를 대변한다. 



이 소설에서 두드러지는 부분은 가즈코의 변화다. 소설 초반에 유약하게 느껴졌던 그녀의 모습은 어머니의 병세를 기점으로 달라지더니 우에하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상당히 도전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녀의 내면에 숨어있던 기질이 위기를 맞아 발현된 것인지, 아니면 현실에 부딪치면서 단단해진 것인지는 정확히 판단할 수 없으나 진흙탕 속에서도 살아남겠다는 가즈코의 강인함은 나오지와 우에하라, 두 남자와는 대조를 이룬다. 내 아이를 낳아달라는 것도 아니고, 당신의 아이를 낳아주겠다니. 그야말로 시대의 전복이 아닐 수 없다.




138.
나는 살아나가야 한다. 어린애일지 모르지만 언제까지나 응석받이로 있을 수는 없다. 나는 이제부터 세상과 맞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아아, 어머니처럼, 사람과 다투지 않고, 증오도 원망도 없이 아름답고 가련하게 생을 마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우리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닐까. 죽어가는 사람은 아름답다. 산다는 것. 살아남는다는 것. 그건 너무나 추찹하고 생피 냄새 나는, 더럽기 그지없는 일이란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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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 신과 인간이 만들어온 이야기
필리프 르셰르메이에르 지음, 레베카 도트르메르 그림, 전경훈 옮김 / 니케북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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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 읽다가 중간에 살포시 덮고, 신약성서는 말그대로 읽기만 했다. 그래서 성경이라면 뒷걸음질 치는 부류인데, 미리보기로 살펴보니 내용도, 그림도 신박하다. 신과 인간의 서사라는 소개글에 걸음질은 점점 앞으로 다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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