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공화국
안드레스 바르바 지음, 엄지영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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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전, '인디오 공동체 통합 정책'을 시행하기 위해  사회복지과 과장직을 맡아 가족과 함께 산크리스토발에 도착한 화자. 그가 도착한 산크리스토발은 아름다운 풍경 뒤에 녜에 인디오들의 더럽고 불결한 낙후된, 가난한 삶의 현장이 숨어 있었다. 도착 후 집 열쇠를 받으러 시청으로 향하던 중 차로 들개를 치고 말았고 동물병원으로 옮긴 그 개는 극적으로 목숨을 건져 '모이라' 라는 이름으로 가족이 되었다. 화자는 이것이 길조인지 흉조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매 페이지마다 복선이 아닌지 의심될만한 사건의 연속이다. 미스터리한 사건을 처음부터 드러내 놓은 상태임에도 독자는 작가의 사소한 언급이 사건의 열쇠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긴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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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 2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6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김희숙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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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는 1인칭 화자 '나'로 등장해 3부 시작부터 행정 시스템에 대해 비판한다. 전문적인 인적 자원이 있음에도 잘못된 관행ㅡ관직 세습ㅡ과 구습  때문에 실무 현장에서 실용성과 효율성이 떨어지고 있음을 지적하고, 예의 범절에 맞는 방정함과 소심함이 사회 통념상 착실하고 반듯한 사람의 필수 자질이 되어온 만큼 발명가와 천재 등 창의성이 상스럽다고 간주됐지만, 이제는 이러한 사고를 바꿔야 할 때가 됐음을 얘기한다.








작가는 예브게니 파블로비치를 통해 현재 자유주의자들이 이전의 지주 계급과 신학생 계층(특수 계급)에서 배출되어 러시아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국민적이지는 않다고 말한다(비록 두 사람은 지주 출신이기는 하지만). 또한 문학에서 로모노소프, 푸쉬킨, 고골만이 진정으로 자신만의 고유한 것을 갖고 있다고 얘기하면서 더불어 현재 지주나 신학생 출신만 있는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은 러시아적 사회주의자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또한 므이쉬킨의 별장에 모여 난상 토론을 벌이는 사람들로부터, 사람들이 인류의 행복을 명분으로 산업화를 급진적으로 추진하고, 빵(물질)을 볼모로 노동자를 착복하며 그로인해 인민의 박탈감, 정서적으로 폐폐해져가는 당시의 현대인들의 상황을 비판함과 동시에 맬서스의 주장이 반인륜적이며 비도덕적임을 식인에 빗대어 지적한다. 더하여 입폴리트는 행복이 절정에 달하는 순간은 최종적인 발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을 발견하고자 하는, 끊임없는 영원한 탐구에 있다고 말하는데, 이 부분은 체호프의 희곡 <벚나무 동산>에서 폐차의 대사('스스로 도달하거나 아니면 도달하는 길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 줄 거야')와 비슷한 선상에 있다.  


입폴리트가 쓴 '해명' 논문은 입폴리트를 관찰자로 함으로써 그의 주변에 있는 인물들 즉, 당시 러시아 인민들의 삶을 담아내고 있다. 입폴리트 본인이 폐병 환자로서 죽음을 기다리고 위층에는 얼어죽은 아기가 있으며, 문서 몇 장과 얼마간의 돈이 파멸을 결정할 만큼 절박한 이들은 대부분 중앙 정부의 힘이 미치지 않는 지방 관리의 만연한 부정부패로 인해 삶이 피폐해져 지방에서 일자리를 얻기 위해 도시로 온 자들이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자(입폴리트)는 현재의 순간을 사는 인간이기에 가장 충만하고 직접적인 삶을 산다. 그런데 병에 의해서만 시한부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니다. 당장 생계가 막막한 이들 또한 시한부 인생이고, 희망이 없는 자들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3부에서는 작가가 소설에 직접적으로 끼어들어 자신의 생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이 많다.




어느날 꿈에서 므이쉬킨은 나스타시야를 따라가려고 하는데 그때 그의 손을 잡는 이가 있어 잠을 깨니 아글라야였다. 나스타시야에 대한 감정이 인간적 연민과 동정이었다면 아글라야는 사랑에 가까운 감정이었을 것이고, 므이쉬킨은 이 두 감정 사이에서 갈등을 느낀다. 이 꿈이 이후 닥쳐올 파국의 복선임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귀족이지만 기득권층에 속하지 못한 므이쉬킨을 통해 스스로를  빗대어 러시아 증상류층 사람들의 권태와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무능력, 인습과 무기력, 민중에 대한 고정관념에 대해 역설적으로 일갈한다(당신들은 그런 부류가 아니니까요라고). 그러나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므이쉬킨의 연설에 불쾌감을 느끼지만, 위험하게 여기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그저 뇌전증을 앓고 있는 환자이며 몰락한 가문의 마지막 공작일 뿐인, 무력한 민중의 한 사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마주한 아글라야가 나스타시야에게 부정한 방식으로 '놀고 먹는 여자'라고 비난한자, 당신도 놀고 먹는 여자 아니냐며 받아치는 나스타시야. 두 사람은 서로의 삶의 태도를 비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아글라야는 남자들을 유혹해 편하게 살면서 자기 혐오에 빠져있느니 떳떳하게 세탁부라도 되라고 비난하고, 나스타시야는 곱게 자란 아가씨가 노동을 입에 올릴 자격은 피차 없다고 쏘아붙인다. 나스타시야를 향한 아글라야의 비난이 무조건 틀렸다라고 할 수 없지만 그 이전에 전제되어야 했던 것은 나스타시야에 대한 인간적 이해다. 타인의 삶을 함부로 재단할 수 없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비록 우정에 의한 충고라할지라도 상대의 입장에 이입하기 전까지는 조심해야할 부분인데 아글라야는 이 부분을 간과했다.  



 
예브게니는 제3자의 입장에서 므이쉬킨과 나스타시야의 관계를 얘기한다. 그 두 사람의 시작은 애초부터 허위에서 시작됐고, 므이쉬킨이 현명한 사람이지만 경험 부족, 현실과는 동떨어진 순박함, 이로인한 판단력의 결여에 문제가 있다고 짚으면서, 그럼에도 므이쉬킨은 자신의 신념을 진실하고 자연적이고 본유적인 것이라고만 여긴다는 것. 예브게니는 나스타시야를 향한 므이쉬킨의 감정이 진실하고 진정성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신념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그저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감상인지 생각해 보라고 충고하면서 나스타시야의 과거는 별개로 현재의 행동 역시 두둔할 수 없음을 지적한다. 또한 혼인은 아무래도 좋고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심지어 나스타시야의 얼굴이 무섭다고까지 하면서 행복과는 상관없이 그냥 혼인하겠다는 그의 말에서, 비로소 나는 이 사람에 대해 알 것 같았다(예판친 집안 사람들이 자신을 대체 무엇 때문에 아글라야와 만나지 못하게 하는지 모르겠다는 므이쉬킨의 말에, 나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나는 므이쉬킨과 예브게니의 대화를 통해서 므이쉬킨이 순수하고 현명한 사람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진정으로 타인의 감정에 이입하고 공감하는 능력은 결여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입과 공감은 타고난다기보다 학습과 경험과 노력으로 발달한다. 므이쉬킨은 이성에 입각해 이론으로만 체득한 이타성을 실천하고자 했던 것으로, 어쩌면 사람들이 그를 향해 '백치'라고 했던 것은 순수성을 폄훼하는 것이 아닌 그야말로 성장을 멈춰버린 므이쉬킨에게는 적절한 단어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실현하고자 했던 이상은 반쪽짜리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을지. 그리고 두 여자를 모두 사랑했다는 므이쉬킨의 말에서 연민이나 동정 역시 사랑의 다른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의 혼란이 납득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나는 므이쉬킨에게 묻고 싶다. 아무도, 심지어 나스타시야조차도 행복하지 않은 그 결혼의 의미는 무엇이냐고. 더불어 나스타시야의 갱생을 바라는 당신의 마음이 '순수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혹시 당신은 당신의 '신념'에 대한 집착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것은 아니냐고. 그리고 그녀의 이면을 바라보았으나 아글라야에게 상처를 주는 것을 감수할만큼 나스타시야의 불안과 두려움을 온전히 이해했던 것이냐고.  


​나스타시야를 향한 두 남자의 집착. 로고진이 죽여서라도 그녀를 차지하겠다는 일념이었는지 아니면 고통과 광기만 남은 인생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는지 알 수 없다. 므이쉬킨이 두 사람을 쫓은 이유가 이러한 사달이 일어날 것을 예감해서인지 혹은 나스타시야를 구원하겠다는 사명감에서인지, 이또한 알 수 없다. 죄의 대가를 묵묵히 받아들인 로고진과 지능 조직이 완전히 손상되어 치유불능 상태에 이르러 그야말로 완전하게 '백치'가 되어버린 므이쉬킨의 비극적인 결말, 그리고 이 비극적인 사단이 일어나서야 므이쉬킨을 용서하고 동정하며 간혹 정신병원에 입원한 므이쉬킨을 들여다본다는 이유로 예브게니를 환영하는(처음 므이쉬킨에게 그랬던 것처럼) 예판친 집안의 사람들을 보면서 인간의 이중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므이쉬킨의 선의가 의식하지 못하는 부분에서 좋은 결과를 이끌어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이야말로 미래의 희망임을 모르지 않는다.  작가의 의도가 어떻든 간에 그럼에도 나는 므이쉬킨의 순수함에 마냥 박수를 쳐주기가 어렵다. 어린 아이의 순수함이 때로는 오히려 더 잔인하다는 말처럼, 그의 순수가 어느 누군가에게는 큰 상처가 될 수 있음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인간의 삶에 완벽한 순수도, 완전한 타락도 없음을 다시 깨닫게 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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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
제니 오델 지음, 김하현 옮김 / 필로우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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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이자 교수인 저자는 이 책에서 현재 우리 사회의 생산성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하지 않는 것, 즉 거부에 대해 얘기한다. 관심 경제를 중심으로 각 장마다 유지 노동과 보존 작업보다 파괴가 더 생산적이라는 관심경제의 부수적 논리를 파악하고, 대안으로써의 도피를 택한 몇몇 인물과 집단을 살펴보며, 거부의 역사를 살피고 동시에 창의적 거부 공간이 어떻게 위협받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관심경제에서 벗어나 주도적인 방식으로 삶을 영위하고 이상적인 소셜 네트워크를 상상하고 제안하면서 '인간이 인간이 되는 데 전념' 하고자 했음을 밝힌다.








먼저 '딥 리스닝Deep Listening'. 저자는 새소리를 듣는 것으로서 딥 리스닝 방식을 체험하는데, 이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조용히 걸으면서 새소리가 들릴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데 경청도 마찬가지. 우리는 타인과 대화할 때 온전히 상대의 말을 듣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하다못해 다른 생각을 한다거나 상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신이 할 말을 떠올리곤 한다. 저자는 이어서 완전한 몰입 상태에서의 걷기를 예로 들며 일정 기간의 단절이 주는 유의미한 경험과 변화에 대해 말하는데, 이 또한 현대인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이다. 요즘 걷기 운동이 간편하게 실천할 수 있는 운동으로서 인기가 한창이지만, 이 걷기에 집중과 몰입이 동반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운동에 편리하도록 경량화한 이동통신이 개발되고, 블루투스 무선 이어폰 정도는 모두 귀에 꽂고 다니고 있는 실정이니 인간은 그야말로 시간과 공간의 효율성을 온몸으로 체현해내고 있는 중이다.



저자는 거부하는 것과 모든 것에 안녕을 고하는 것은 다르다고 얘기한다. 후자는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책임을 방치하는 것일 뿐이라고. 저자의 말처럼 1960년대 코뮌은 무척 매력적이고 낭만적이기까지 하지만, 현실적으로 실현하기에는 불가능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잠시나마 인터넷을 멀리하고 뉴스를 읽지 않는 것은 미봉책에 불과하다. 특히나 업무도, 중고대학교의 수업까지 온라인으로 전환하는 팬데믹 시대에 인터넷과 거리두기는 1960년대 코뮌 이상으로 비현실적일 뿐이다. 저자도 이를 모르지 않기에 모든 것을 거부하는 것은 실수라고 재차 말하고 있는 것일테고, 사색과 참여와 대응의 필요성을 제안한다. 한 발짝 떨어져 객관적 관점을 유지하며 현재를 살아가는 동시대인으로서의 책임과 소명이 무엇보다 필요한 때다.


우리가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존재는 주위 사람이다. 외형적인 부분 뿐만 아니라 이웃과의 소통의 부재와 단절은 인간을 외롭고 피폐하게 만든다. 재난 상황이 발생하거나, 응급 상황이 닥쳤을 때 어딘가에 도움을 요청하고 서로를 보듬어 줄 수 있는 이들은 SNS 팔로워가 아니라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다. 21세기에 SNS 친구들이 의미없는 존재라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온라인 상에서 이루어지는 공감과 소통에 진정성만 동반된다면 점점 더 고립되어지는 현대인에게 좋은 동반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상대를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노력을 불필요한 감정 소모라고 여긴다면 현실에서든 온라인에서든 늘 외로울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다양한 성향을 가진 사람을 만나는 과정에서 타인을 이해하고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생각해 보면 온라인에서의 교류는 분명 한계가 있다.


저자는 상업적인 소셜 네트워크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진정한 거부는 바틀비의 대답처럼 질문의 성립 조건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관심경제에 있어 진정한 철회에는 지속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관심을 거두는 능력 뿐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 관심을 기울이고 관심을 확대.증식하며 관심을 더욱 예리하게 갈고 닦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더 나아가 미디어와 광고가 우리 감정을 이용하는 방식을 면밀히 연구하고, 미디어가 조정하는 알고리즘 버전의 자기 모습을 이해하며, 우리가 무의식 중에 당하는 가스라이팅과 두려움과 불안의 근원이 무엇인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관심경제에서 '제3의 공간', 즉 관심을 돌리는 행위가 중요한 이유는 개인의 관심이 집단적 관심의 토대가 되고, 모든 종류의 유의미한 거부 행위의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이에 저자는 생각의 토대를 복원하는 데에 있어 '현상의 공간'에 집중한다. 저자는 아렌트의 말을 빌려 '현상의 공간'을 유의미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정의하는데, 그가 조사한 사례를 찾아본 결과 현상의 공간은 대개 물리적인 공간이었다. 저자는 지금의 상황에서, 소셜 네트워크가 이러한 시간과 장소의 역할을 해주길 기대한다. 잠시 들렀다 사라지는 공간이 아닌, 공감과 책임, 정치 혁신을 배양하는 공간으로 거듭나기를.  





생산성과 효율이라는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이 당연해지는 세상에서 경제적 안정이 무너진 노동자에게 남은 것은 시간이 곧 돈이라는 압박감과 무한 노동시간이다. 구독과 좋아요가 곧 돈벌이가 된 현 세태에 공감은 허울일 뿐 돈을 벌기 위해서 온갖 자극적인 행위가 밤낮으로 여과없이 무분별하게 이루어진다.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이 누군가에게는 모두 돈으로 환산되는 세상은 숨이 차도록 급박하게 돌아간다. 인간은 점점 더 스스로에 대한 통제권을 잃어가고, 변화와 적응에 대한 두려움으로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알고리즘에 자신을 안주시킨다. 사용자가 미디어의 상품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우리가 미디어에 착취당하고 있음에 대한 인지 여부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책을 제목만 보고 '잠시 휴대폰을 꺼두셔도 좋습니다' 처럼 힐링 에세이나 정신 승리를 위한 심리 자기계발서로 판단하면 곤란하다. 저자는 신자본주의 세계에서 인간의 가치가 실용성과 효율성으로 재단되고, 마치 워커홀릭이 유능한 인재처럼 여겨지며, 거래로 이어지는 인간 관계에 얽매이는, 관심경제에 개인의 권리를 빼앗긴 세태에 반기를 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비평서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다.  


저자가 말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주고 주위에 시선을 돌리며 현재의 관심경제 체제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이러한 사고를 동반한다면 굳이 온라인 세상에서 '로그 오프'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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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날씨 - 위기가 범람하는 세계 속 예술이 하는 일
올리비아 랭 지음, 이동교 옮김 / 어크로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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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시간은 한낱 그림자처럼 덧없이 지나가지만
삶은 그루터기에 남은 불씨처럼 영원히 계속되리라

(영화 '블루'에서 / 감독 데릭 저먼) 
 


비평가이자 에세이스트 올리비아 랭이 2011년부터 쓴 에세이, 칼럼, 서평, 대담 및 간단한 평전 형태의 글을 모아 출간한 책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자신의 큰 관심사는 예술이 저항과 회복에 관련을 맺는 방식이라고 말하며 소외와 차별에 대한 저항, 그리고 참여와 관용과 환대에 관해 얘기하고자 함을 분명히 한다.  
 








저자는 10대 후반부터 상태계 파괴와 기후 변화를 막는데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섰고, 스무 살에는 자발적 고립을 선택하며 야생과의 조우를 경험하기도 하지만 이는 지구 환경에 최선이 아닌 오히려 퇴보에 가깝고, 결국은 고립이 자신을 갉아먹으며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삶이 갈등의 원인기도 하지만 동시에 지속적인 행복의 원천임을 젊은 나이에 깨닫는다. 그래서 저자가 이 책에 등장하는 예술가들의 불행과 희망과 저항에 더 이입할 수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린시절 가정 폭력과 학대로 고통받고, 유년부터 지녀온 내재적 수치심과 성정체성에 혼란스러워 하며, 불안정한 양육 환경에 노출된 채 불안감을 안고 성장했으며, 자신을 옭아매는 과거로부터 벗어나지 못해서 선택한 글쓰기가 역으로 다른 올가미가 되고, 고독과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불안을 떨치지 못하는 예술가.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비단 그들 뿐만이 아니다.  
 


사회적 위협에 대한 과잉 경계를 촉발하고, 거절당하는 것에 극도로 예민해지면서 사회적 상호 작용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며, 이는 고립을 강화시키게 된다. 작은 화면 뒤에서 숨고 드러내기를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는, 필터링 된 자신의 모습에 눌러주는 '좋아요' 에 만족하는 요즘 사람들. 저자는 여기에서 짚어냐 할 것은 이런 식의 접촉이 진정한 친밀감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만들어진 이미지 뒤에서 온라인 친구를 얻을 수 있으나 고독은 치유되지 않는다는 것. 고독은 관람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발견되고 표용되어야 치유가 가능하다고 얘기한다. 무엇보다 사이버 공간은 현재 더 이상 사적 공간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저자는 접촉을 두려워하면서도 접촉을 원하는 한 우리에게 아직 기회가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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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일곱 살에 요절한 바스키아는 인터뷰에서  세상을 위해 그렸다는 자신의 그림에서 '세상'이란 곧 사람이라고 말했다. 흑인 빈민층 출신 예술가가 말하고 싶었던 사람 사는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겠는가. 조지프 코넬을 읽으면서 작품을 찾아봤는데 정말 모든 작품이 상자 안에서 이루어진다. 혼자만의 세계에서 고독에 빠져 로맨티스트였음에도 독신으로, 여행과 자유에 대한 로망이 있었음에도 자신의 생활권 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았던 코넬은 스스로 덜 내성적이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말로 알 수 있는 것처럼  은둔자였고, 그의 모티브가 된 상자를 통해 자유와 구속을 창작했다. 사사건건 감시를 늦추지 않는 어머니와 돌봐야하는 동생. 그가 얼마나 사랑과 자유를 동경했을지.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한 마디, 안으로 뚫고 들어 온 정오로 향하는 햇살이 '신나는 신세계'였다니. 관계에 대한 노력을 감정 소모로 여기는 추세를 생각해 보면 우리는 점점 더 은둔자의 모습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예술에 있어서 강간과 살해를 소재로 다루는 것 자체가 불경죄가 되는 경우가 있는데, 시각화된 공포가 기록된 실제 사건보다 더 몹쓸 외설이라도 되는 것처럼 우리는 상당한 불쾌감을 표시한다. 실제 사건 피해자들의 피해와 공포를 보듬어주기보다는 외면해버리는 것이 더 편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세라 루커스는 "내게 예술의 의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생각하고 말한 것들을 표현하는 데 있다"고 말하는데, 이는 예술 뿐만 아니라 사회 공동체 안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싶다. 작가 앨리 스미스는 담장을 두르고 요새화에 집착하다 보면, 우리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는 형국이라고 말한다. 이 부분을 읽다보니 문득, 앨리 스미스는 신자유주의 세계에서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가해지는 폭력적인 정책들을 말하는데, 나는 현 시국의 우리 모습이 연상됐다. 
 


예술이 저항의 행위일까? 비옥한 토양에 던져진 씨앗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렸고 얘기면서, "악에 맞서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풍자"라는 작가 힐러리 맨틀의 말을 인용한다. 그리고 이어진, 존 버거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한 "환대해야죠" 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웃음과 환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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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에세이나 칼럼을 읽다보면 예술가들이 대상을 관찰하는 시각이나 감수성이 남다르게 예민하다는 점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순탄하지 않은 삶이 예술에 몰입하게 하는 건지, 도드라지는 예술적 감성 때문에 삶이 순탄하지 않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조지아 오키프를 비롯한 여러 예술가들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이런 생각이 반복적으로 든다.  
 


사실 이 책에 언급된 예술가들을 모두 알지 못한다. 몰랐던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하나하나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무엇보다 가장 반가운 만남은 앨리 스미스였다. 그의 소설들을 좋아하면서도 작가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에 나 나름대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 무척 궁금했더랬다. 개인의 상상에 어떤 대상의 이미지를 정형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그럼에도 나는 앨리 스미스라는 작가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차에 작품 밖에서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환대로써 친절을 택해 인간다운 인간이 되라고 말하는 존 버거는 말해 무엇하리. 
 


저자는 문학, 미술, 영화, 사진, 음악 등 수많은 예술 작품들과 작가들을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결핍과 고독과 외로움, 그리고 난민과 이민자, 성소수자, 인종차별, 페미니즘, 젠트리피케이션, 기후 변화 등 당면한 사회 문제들을 고찰하면서, 이 안에서 예술이 자리하고 있는 위치와 역할을 예술가들의 저항적 삶을 짚어보며 예술의 공간에서 우리가 확장해나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얘기한다.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의 삶과 자신의 경험을 풀어놓는 그가 진정으로 애정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것 같다.   
 
 


293.
예술은 마음의 문을 열고 '나'라는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다. 예술은 바로 그런 것이다. 세상을 사는 사람이 만든 것이고 그들의 상상력도 함께 따라온다. 시대와 역사와 개인의 인생사를 막론하고 다가올 인생은 제압할 수 없다. 마치 세상에 빛과 어둠이 깔리는 것처럼. 그러나 때가 되면 우리는 활기찬 상상력과 함께 그 빛과 어둠을 넘나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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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희의 인간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주현 옮김 / 1984Books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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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우리가 달라지며 우리가 보는 그것이 우리 자신을 드러내고, 이름을, 진정한 자신의 이름을 부여한다고 말하는 시인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시선이 느껴지는 에세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들, 그리고 어떤 대상을 보았을 때 각자의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시각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평소 지향하는 삶의 방식이 드러나는 모습을 목격할 때가 있다. 좋다, 나쁘다 혹은 옳다, 그르다를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때때로 우리에게는 거창하지 않은, 일상의 작은 틈을 이용한 성찰의 시간이 필요함을 말하고 싶다. 
 


시인은 오래된 책보다 더 젊은 것은 없다고 썼다. 무슨 의미일까? 곰곰 생각해보기도 전에 한두 쪽을 넘기니 푸쉬킨과 시인의 글이 답을 준다. 황폐한 우리의 머릿속에 불을 켜주는 역할을 하는 것은 오래된 책들이다. 글은 죽음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데, 아마 죽음으로 침묵하는 이들의 모든 생각과 말들이 책 안에 녹여져 있으며, 책이 부싯돌 역할을 해준다면 내면화를 통해 재창조하는 것은 결국 독자 개인의 노력에 달렸음이다.  
 


연주회장에서는 연주자도 청자도 오롯이 음악에만 집중할 수 없다는 글렌  굴드의 말에 현혹된다. 하물며 영화관에서 팝콘 먹는 것도 거슬려하는 나같은 사람은 격하게 공감한다. 오페라 공연 관람시에도 노래 들으랴, 연기 감상하랴, 자막 보랴 정신이 없다. 어느 연주회에서는 아주 가끔 조는 사람도 있어 집중이 안 되는 경우도 있었던 기억을 떠올려보면 엉뚱하기는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 책에서도 여지없이 등장하는 지슬렌. '단 한 번의 봄이 일생의 모든 봄이었고, 단 한 순간의 삶이 모든 순간을 살아낸 삶과 같았다' 라는 문장이 얼핏 읽기에는 그저 사랑타령에 불과한 듯 하지만 좀 오래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도 사랑 뿐만 아니라 어느 한 때의 좋은 기억으로 남은 추억은 삶을 견디고 이겨내게 하는 경험이 있지 않은가.  
 


시인은 알츠하이머가 고단하고 기진맥진하게 만드는 일들과 물건을 사고 타인을 질투하고 경쟁에서 승리하는 현대 생활의 질서에서 해방시켜준다고 말하면서, 그야말로 한 번도 삶이었던 적이 없는 삶을 끝내준다고 말한다. 이는 이 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다. 아버지가 아들과 아내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자, '우리가 잊지 않은 녀석', '최고로 훌륭한 사람'이라고 대답했다는 분. 시인의 남다른 감수성에 대한 의문이 풀리는 지점이었다.  
 


산책을 하고, 책을 펼치고, 꽃이 피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무 의미 없는 일이라면, 무엇이 의미 있는 일이겠냐는 시인의 물음에서, 나는 잠시 내 삶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크고 아름다운 열쇠 꾸러미, 그러나 문이 없다면 그 열쇠 꾸러미는 쓸모가 없다. 우리 안에는 수많은 문이 존재한다. 그 문이 어떤 문인지는 본인만이 알 것이고, 그 문을 만드는 자가 누구인지 또한 본인만이 알 터다.   
 


 
야생과 순수가 결합된 집시 소녀, 시각과 관점, 괴짜 글렌 굴드를 바라보는 이해 충만한 시선, 음악과 사랑과 삶의 숭고한 동일성, 지금은 세상에 없으나 지금도 사랑하고 있는 여인을 향한 애틋한 그리움, 아버지에 대한 추억, 소소한 일상에서 발견하는 철학적 사유, 질병과 노화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과 정서적 측면이 결여된 부적절한 노인 부양 시스템의 지적, 어린 고양이의 죽음을 통해 바라 본 삶이 우리를 데려가는 종착지에 대한 단상, 스스로 만든 단절과 허상에 대한 성찰. 
 


서투름으로 붉어진 상처 입은 삶이야말로 진실하고, 자신의 책들은 모두 스스로 쓰여졌다고 말하며, 읽고 쓰고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구원하는 삼위일체라고 얘기하는 크리스티앙 보뱅은 위에서 언급한 모든 부분들에서 삶의 깊은 통찰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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