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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 2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6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김희숙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평점 :
도스토옙스키는 1인칭 화자 '나'로 등장해 3부 시작부터 행정 시스템에 대해 비판한다. 전문적인 인적 자원이 있음에도 잘못된 관행ㅡ관직 세습ㅡ과 구습 때문에 실무 현장에서 실용성과 효율성이 떨어지고 있음을 지적하고, 예의 범절에 맞는 방정함과 소심함이 사회 통념상 착실하고 반듯한 사람의 필수 자질이 되어온 만큼 발명가와 천재 등 창의성이 상스럽다고 간주됐지만, 이제는 이러한 사고를 바꿔야 할 때가 됐음을 얘기한다.

작가는 예브게니 파블로비치를 통해 현재 자유주의자들이 이전의 지주 계급과 신학생 계층(특수 계급)에서 배출되어 러시아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국민적이지는 않다고 말한다(비록 두 사람은 지주 출신이기는 하지만). 또한 문학에서 로모노소프, 푸쉬킨, 고골만이 진정으로 자신만의 고유한 것을 갖고 있다고 얘기하면서 더불어 현재 지주나 신학생 출신만 있는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은 러시아적 사회주의자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한다.또한 므이쉬킨의 별장에 모여 난상 토론을 벌이는 사람들로부터, 사람들이 인류의 행복을 명분으로 산업화를 급진적으로 추진하고, 빵(물질)을 볼모로 노동자를 착복하며 그로인해 인민의 박탈감, 정서적으로 폐폐해져가는 당시의 현대인들의 상황을 비판함과 동시에 맬서스의 주장이 반인륜적이며 비도덕적임을 식인에 빗대어 지적한다. 더하여 입폴리트는 행복이 절정에 달하는 순간은 최종적인 발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을 발견하고자 하는, 끊임없는 영원한 탐구에 있다고 말하는데, 이 부분은 체호프의 희곡 <벚나무 동산>에서 폐차의 대사('스스로 도달하거나 아니면 도달하는 길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 줄 거야')와 비슷한 선상에 있다. 입폴리트가 쓴 '해명' 논문은 입폴리트를 관찰자로 함으로써 그의 주변에 있는 인물들 즉, 당시 러시아 인민들의 삶을 담아내고 있다. 입폴리트 본인이 폐병 환자로서 죽음을 기다리고 위층에는 얼어죽은 아기가 있으며, 문서 몇 장과 얼마간의 돈이 파멸을 결정할 만큼 절박한 이들은 대부분 중앙 정부의 힘이 미치지 않는 지방 관리의 만연한 부정부패로 인해 삶이 피폐해져 지방에서 일자리를 얻기 위해 도시로 온 자들이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자(입폴리트)는 현재의 순간을 사는 인간이기에 가장 충만하고 직접적인 삶을 산다. 그런데 병에 의해서만 시한부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니다. 당장 생계가 막막한 이들 또한 시한부 인생이고, 희망이 없는 자들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3부에서는 작가가 소설에 직접적으로 끼어들어 자신의 생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이 많다.
어느날 꿈에서 므이쉬킨은 나스타시야를 따라가려고 하는데 그때 그의 손을 잡는 이가 있어 잠을 깨니 아글라야였다. 나스타시야에 대한 감정이 인간적 연민과 동정이었다면 아글라야는 사랑에 가까운 감정이었을 것이고, 므이쉬킨은 이 두 감정 사이에서 갈등을 느낀다. 이 꿈이 이후 닥쳐올 파국의 복선임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귀족이지만 기득권층에 속하지 못한 므이쉬킨을 통해 스스로를 빗대어 러시아 증상류층 사람들의 권태와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무능력, 인습과 무기력, 민중에 대한 고정관념에 대해 역설적으로 일갈한다(당신들은 그런 부류가 아니니까요라고). 그러나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므이쉬킨의 연설에 불쾌감을 느끼지만, 위험하게 여기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그저 뇌전증을 앓고 있는 환자이며 몰락한 가문의 마지막 공작일 뿐인, 무력한 민중의 한 사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마주한 아글라야가 나스타시야에게 부정한 방식으로 '놀고 먹는 여자'라고 비난한자, 당신도 놀고 먹는 여자 아니냐며 받아치는 나스타시야. 두 사람은 서로의 삶의 태도를 비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아글라야는 남자들을 유혹해 편하게 살면서 자기 혐오에 빠져있느니 떳떳하게 세탁부라도 되라고 비난하고, 나스타시야는 곱게 자란 아가씨가 노동을 입에 올릴 자격은 피차 없다고 쏘아붙인다. 나스타시야를 향한 아글라야의 비난이 무조건 틀렸다라고 할 수 없지만 그 이전에 전제되어야 했던 것은 나스타시야에 대한 인간적 이해다. 타인의 삶을 함부로 재단할 수 없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비록 우정에 의한 충고라할지라도 상대의 입장에 이입하기 전까지는 조심해야할 부분인데 아글라야는 이 부분을 간과했다.
예브게니는 제3자의 입장에서 므이쉬킨과 나스타시야의 관계를 얘기한다. 그 두 사람의 시작은 애초부터 허위에서 시작됐고, 므이쉬킨이 현명한 사람이지만 경험 부족, 현실과는 동떨어진 순박함, 이로인한 판단력의 결여에 문제가 있다고 짚으면서, 그럼에도 므이쉬킨은 자신의 신념을 진실하고 자연적이고 본유적인 것이라고만 여긴다는 것. 예브게니는 나스타시야를 향한 므이쉬킨의 감정이 진실하고 진정성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신념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그저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감상인지 생각해 보라고 충고하면서 나스타시야의 과거는 별개로 현재의 행동 역시 두둔할 수 없음을 지적한다. 또한 혼인은 아무래도 좋고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심지어 나스타시야의 얼굴이 무섭다고까지 하면서 행복과는 상관없이 그냥 혼인하겠다는 그의 말에서, 비로소 나는 이 사람에 대해 알 것 같았다(예판친 집안 사람들이 자신을 대체 무엇 때문에 아글라야와 만나지 못하게 하는지 모르겠다는 므이쉬킨의 말에, 나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나는 므이쉬킨과 예브게니의 대화를 통해서 므이쉬킨이 순수하고 현명한 사람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진정으로 타인의 감정에 이입하고 공감하는 능력은 결여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입과 공감은 타고난다기보다 학습과 경험과 노력으로 발달한다. 므이쉬킨은 이성에 입각해 이론으로만 체득한 이타성을 실천하고자 했던 것으로, 어쩌면 사람들이 그를 향해 '백치'라고 했던 것은 순수성을 폄훼하는 것이 아닌 그야말로 성장을 멈춰버린 므이쉬킨에게는 적절한 단어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실현하고자 했던 이상은 반쪽짜리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을지. 그리고 두 여자를 모두 사랑했다는 므이쉬킨의 말에서 연민이나 동정 역시 사랑의 다른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의 혼란이 납득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나는 므이쉬킨에게 묻고 싶다. 아무도, 심지어 나스타시야조차도 행복하지 않은 그 결혼의 의미는 무엇이냐고. 더불어 나스타시야의 갱생을 바라는 당신의 마음이 '순수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혹시 당신은 당신의 '신념'에 대한 집착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것은 아니냐고. 그리고 그녀의 이면을 바라보았으나 아글라야에게 상처를 주는 것을 감수할만큼 나스타시야의 불안과 두려움을 온전히 이해했던 것이냐고.
나스타시야를 향한 두 남자의 집착. 로고진이 죽여서라도 그녀를 차지하겠다는 일념이었는지 아니면 고통과 광기만 남은 인생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는지 알 수 없다. 므이쉬킨이 두 사람을 쫓은 이유가 이러한 사달이 일어날 것을 예감해서인지 혹은 나스타시야를 구원하겠다는 사명감에서인지, 이또한 알 수 없다. 죄의 대가를 묵묵히 받아들인 로고진과 지능 조직이 완전히 손상되어 치유불능 상태에 이르러 그야말로 완전하게 '백치'가 되어버린 므이쉬킨의 비극적인 결말, 그리고 이 비극적인 사단이 일어나서야 므이쉬킨을 용서하고 동정하며 간혹 정신병원에 입원한 므이쉬킨을 들여다본다는 이유로 예브게니를 환영하는(처음 므이쉬킨에게 그랬던 것처럼) 예판친 집안의 사람들을 보면서 인간의 이중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므이쉬킨의 선의가 의식하지 못하는 부분에서 좋은 결과를 이끌어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이야말로 미래의 희망임을 모르지 않는다. 작가의 의도가 어떻든 간에 그럼에도 나는 므이쉬킨의 순수함에 마냥 박수를 쳐주기가 어렵다. 어린 아이의 순수함이 때로는 오히려 더 잔인하다는 말처럼, 그의 순수가 어느 누군가에게는 큰 상처가 될 수 있음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인간의 삶에 완벽한 순수도, 완전한 타락도 없음을 다시 깨닫게 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