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100년 전쟁 - 정착민 식민주의와 저항의 역사, 1917-2017
라시드 할리디 지음, 유강은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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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알고 싶었던 역사였기에 하나라도 놓쳐 잘못 이해할까 우려되 꼼꼼하게 읽느라고 완독까지 예정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일단 표지의 지도는 워낙 유명해서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지도의 색깔만으로도 팔레스타인이 어떻게 변화됐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현대에 이토록 공격적으로 영토 확장이 가능한지 눈을 의심할 지경이다).  






 
 


영국과 근대적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인을 민족적.정치적 권리를 지닌 한 민족으로서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에 중동의 다른 모든 위임통치령은 독립을 획득했는데, 왜 팔레스타인만 이런 혜택을 받지 못했을까? 그리고 밸푸어와 영국은 왜 영국의 유대인 유입을 막는 데에 팔레스타인을 희생양으로 삼았을까? 팔레스타인은 다른 독립국가들처럼 뚜렷한 실체와 중앙집권적 체제, 그리고 진정한 동맹자가 없었으며, 외견상 확고한 민족전선도 유지하지 못했다. 영국은 이러한 점을 이용해 엘리트 파벌을 형성해 이간질하고, 일부를 통치 체제 안에 흡수했다. 밸푸어는 4대 열강이 시온주의에 동조함을 밝히며, 시온주의가 옳든 그르든, 좋든 나쁘든 간에 그 오래된 땅에 거주하는 70만 아랍인의 욕망과 편견보다 시온주의의 아주 오래된 전통과 현재의 요구와 미래의 희망에 더 높은 가치를 두었다. 또한 팔레스타인인의 견해를 존중할 필요가 없으며, 그 오래된 땅에 오랫동안 거주해온 70만 아랍인을 '일시적인 거주자'에 불과하다고 단정했다. 이 모순적인 논리를 이해할 수 있나?


위임통치국과 국제연맹은 애초에 팔레스타인에서 무력 사용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첫 번째 선전포고 시기에 팔레스타인인들의 공정성 호소와 대표단 파견, 민중 시위는 아무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들은 언제든, 언제라도 총을 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저자는 안보리 결의안 242호를 보면 유엔은 팔레스타인인의 존재를 없애 버렸다고 썼는데, 나는 유엔조차도 애초에 이들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크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원래' 나라가 없는 난민일 뿐이고, 분쟁의 당사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팔레스타인인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그저 형식에 불과한 인도주의적인 쟁점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더 기가 막힐 노릇인 건 1969년 이스라엘 총리 골다 메이어는 '팔레스타인인 같은 건 없었고 (...) 그들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선언을 한다. 팔레스타인인들의 운명을 손아귀에 쥔 강대국 사이에서 그들은 언급조차 되지 않은 채 무시당했다. 이러한 모욕을 참아낼 민족이 있겠는가? 그들은 국제사회에 자신들의 주장과 대의를 제기하기 위한 민족운동을 부활시킬 수 밖에 없었을 터다.  



1979년 1월,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미국과 접촉했다는 이유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핵심 인물인 아부 하산 살라메를 암살하는데, 이스라엘의 배신감은 미국을 향해야 하는 것 아닌가? 레바논 주재 대사인 존 건서 딘을 암살 시도 표적으로 삼긴 했지만 결국 죽은 사람은 팔레스타인인이다. 민간인을 담보로 한,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어쩔 수 없이 베이루트에서 철수하기로 합의할 때까지 미국과 이스라엘, 미국의 압력에 굴복해 방관한 아랍 정권들에 의해 계속될, 그리고 전쟁 후 참혹한 학살에 대한 책임도 심판도 없는, 비열한 전쟁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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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결정적이자 가장 심각한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오류는, 1993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원칙 선언> 합의에 따라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팔레스타인인들의 대표로 인정했고 팔레스타인해방기구도 이스라엘 국가를 인정했다. 그런데 이 '인정'이 팔레스타인인 입장에서 유의미한가?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국가를 인정하거나 국가의 창설을 허용하지도 않았다. 터무니없게도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자신들의 고국을 식민화하고 점령하는 국가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온갖 특권을 유지한 채 사실상 땅과 사람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정당화해준 셈이었다. 껍데기 뿐인 이 협상의 오류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심각한 결과를 안겨다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후 1995년 협정은 2년 전 오슬로 협정을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형상이었다. 이 협정으로 팔레스타인 땅은 누더기처럼 쪼기졌고, 이스라엘은 60퍼센트가 넘는 지역을 차지했다. 이는 이스라엘이 차지한 지역의 아랍인들은 졸지에 쫓겨나는 신세로 전락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어처구니 없이 그어진 국경선으로 인해 팔레스타인인들은 이동 자체에 문제가 생겼다. 팔레스타인 자치 지역 사이에 이스라엘 땅이 있어 검문소를 통과해야 하는 지경이 된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단절과 압박은 점점 더 심해졌다.    



저자는 자살 폭탄 공격이 팔레스타인 민간인을 공격하고 암살한 것에 대한 보복이라고 보는 하마스의 서사를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과연 맹목적 복수 이외에 어떤 성과를 달성하려고 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남긴다. 더구나 이스라엘 민간인을 겨냥한 공격은 이스라엘 사회를 와해시키는 데 치명타가 되지 않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스라엘 사회가 가진 응집력을 무시한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나타낸다. 민간인을 향한 공격은, 팔레스타인인들이 민족 의식을 각성한 계기가 되었듯, 이스라엘에게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간과한 결과가 아닐까싶다.    


이 즈음에서 개인적으로 드는 의문점은 이스라엘은 왜 그토록 불평등에 집착하느냐는 것이다. 저자는 불평등은 보통 안전의 욕구로 암호화되고 정당화된다고, 그래서 과거의 트라우마에 대응해서 지금까지 여러 세대가 공격적 민족주의라는 반사적 교의를 바탕으로 자라났으며 정밀하게 구축된 식민지 현실이 흔들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기인하다고 해석한다. 그런데 책을 읽고 나면 시온주의자들은 이미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차곡차곡 계획을 쌓아가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마치 사냥감(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팔레스타인)을 정해놓고 오랫동안 준비를 해온 사냥꾼의 모습으로 말이다. 결과적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은 이 덫에 걸려든 영락없는 먹잇감 신세가 되었고. 결론은 이스라엘이 그토록 명분으로 삼는 '홀로코스트' 이전부터 팔레스타인 식민화 프로젝트가 시작되었고, 전쟁 당시 유대인 학살은 그들에게 대의적 명분을 안겨준 셈이라는 것이다(로 이해됐다).  


이스라엘이 이토록 극악스러운 이유는 성스러운 땅이라는 신앙적 의미를 넘어서 다른 식민국과는 달리 돌아갈 곳이 없어서이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처음 아메리카에 발을 딛고 원주민들을 잔혹하게 몰아냈던 유럽인들도 따지고 보면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사람들 아니었던가. 그렇게 따지고 보면 어제의 피해자가 오늘의 가해자가 된다는 원리는 어쩜 이렇게도 찰떡같이 들어맞는지.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테러'다. 테러를 옹호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정당하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정식으로 인정받은 국가가 없으니 군대가 없어 테러리스트가 된 이들을 비판없이 무조건 비난만한다면, 국가의 이름을 걸고 대규모 정규 군대를 이끌고 무방비 상태, 그것도 국가의 보호를 전혀 받을 수 없는 난민 위치에 있는 수백, 수천의 민간인을 학살하는 것은 어떤 명분으로 정당한가. 그들이 테러리스트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원인을 짚어야한다는 것이다. 현재 미국에도, 이스라엘에도, 일본에도, 한국에도, 유럽의 어느 나라에도 테러리스트를 자처하는 '국민'은 없다. 대의적 명분없이 가족과 함께 먹고 살 만한 사람이 테러리스트가 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팔레스타인 전쟁 100년사는 그 어떤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상황이다. 저자는 비교적 냉철하게 정황을 들여다보고 비판하는데, 그들의 입장에서 제3자이자 독자에 불과한 내가 더 감정이 올라와 읽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제3국의 국민일 뿐인 내가 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큰 도움이 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적어도 테러리즘에 가려 그 이면을 놓치고 일방적으로 비난을 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협상과 타협, 공존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막무가내로 독선적인 이스라엘을 상대로 여전히 쉽지 않은 길이겠지만, 저자의 바람대로 팔레스타인인들이 마땅히 누려야 하는 해방을 간절히 기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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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수업 - 불교철학자가 들려주는 인도 20년 내면 여행
신상환 지음 / 휴(休)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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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나 답사를 다닐 때 근처에 성당이나 사찰이 있으면 가능한 들러보려고 한다(물론 답사 일정에 성당이나 사찰이 있는 경우도 많다). 불교는 나에게 익숙한 종교가 아니다. 등산과 답사가 계기가 된 사찰 방문은 종교와 무관한 안온함을 주기는 하지만 불교에 대해서 아는 바는 상식 수준을 넘지 못한다.   


제목이 <인도 수업> 이지만, 절반 정도의 분량이 티벳과 불교 이야기다. '불교 수업'에 더 가까운 책이 아닐까 싶은데, 그럼에도 제목이 <인도 수업>인 까닭은 인도에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저자가 어디에서 무슨 얘기를 해도 결론은 인도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를 짓기 때문인 듯하다. 인도에서 20년 수학한 저자가 인도, 티벳, 투르크 여행기를 불교와 접목시켜 서술한다.  








 
인더스강은 기원전 3세기 인도 정복 전쟁을 펼쳤던 알렉산더 대왕이 그리스어로 '인도스'라고 불렀고, 페르시아인들은 '힌두스'라고 불렀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오늘날 인더스강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인도인들을 부르는 '힌두'가 생겨났다고 하네. 인도에는 국어 즉 national language가 없다. 이는 인도의 역사.인종.지형 등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애초부터 '나라말'을 생각하기에는 그 규모가 컸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너무 다양했던 것. 이처럼 인도의 언어와 어원, 역사, 문화의 유래와 현재 인도인들의 삶 등을 여행자가 아닌 현지인의 입장에서 이야기한다. 




티벳은 궁금하지만 검색으로 아는 게 전부인 곳이다. 먼저 새롭게 안 사실, 티벳학이라고 하는 것은 티벳의 문화.역사 등을 공부하는 것이고, 티벳 불교는 이 기운데 불교를 전문으로 다루는 것이고, 티벳 밀교는 티벳의 현밀쌍수의 전통 가운데 밀교를 강조하며 수행하는 것 등을 가리킨다(티벳 불교와 밀교는 다르다). 그럼 여기서 현밀쌍수는 무엇인가? 이런 식으로 아는 건 없고 궁금증은 못 참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료를 찾느라 읽는 시간만큼이나 검색하고 다른 책을 들추는 데 시간이 들었지만, 그 과정도 꽤 재미있었다. 


대승 불교가 대중들에게 널리 퍼지게 된 배경이 '시장의 요구' 때문이었다고. 티벳의 불교 전래는 불교적 세계관을 그 문화적 원형으로 삼고 출발했다. 당시 주나라에서는 사후 문제를 언급하면 은나라의 귀신 숭배 사상과 겹쳐 소위 이단으로 낙인이 찍히게 되었는데, 중국에 전래한 불교가 커다란 마찰 없이 도교의 개념을 빌어 중국 문화와 융합될 수 있었던 것은 '사후 문제의 결여'라는 빈자리를 채워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에는 그만한 이유가 다 있다더니!) 


인도-티벳 불교의 전통을 이해하는 핵심은 '세간의 진리'와 '수승한 의미의 진리' 이다. 일체 부자성에 근거를 둔 언설로 표현 불가능한 연기 실상의 세계와 언설로 된 희론의 세계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일체 부자성=연기=공성' 이라는 항상 움직이는 세계를 언어.개념.정의 등으로 고정하는 언설의 세계로 전환하는 순간, 오류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거 이해하는 데 시간 좀 걸렸다) 


중국 불교가 소의경전(Root text Buddhism)이라면, 티벳 불교는 주석불교(Foot note  Buddhism)이다. 그러나 기도와 신행, 대승의 근간인 자비심과 공성을 강조하는 것은 공통분모다.  


티벳 불교에서의 밀교는 생활 그 자체를 뜻한다. 신행의 근간이 되는 진언과 염송은 밀교의 전통인데 대승 불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니 티벳 불교=밀교로 취급할 필요는 없다. 밀교는 스승과 제자 간의 법의 전승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제례 의식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중국이나 티벳의 밀교는 공통점을 지녔으나 티벳 불교는 '티벳 불교'의 특징을 지닌다. 이외에도 티벳 불교와 비티벳 불교의 차이, 티벳 불교가 세계로 퍼져나갈 수 있었던 이유, 그리고 티벳의 간략한 역사 등 티벳(불교)에 대한 궁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자유 티벳'을 향한 불교의 불살생 언칙에 따른 비폭력 투쟁을 계속하는 티벳 불교와 만가지 단점에도 불구하고 유일무이에 가까운 한국의 호국 불교의 위대함은, 방식은 다르지만 맥락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2장 티벳 이야기]를 읽고는 나름 진심 뿌듯했다는.  



[4부 투르크 이야기]는 그야말로 여행 에세이 느낌이 물씬 나는 부분인데, 읽다보니 몇 년 전에 읽은 유홍준 교수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중국편 중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도시' 가 생각났다. 중복되는 내용이 많지는 않지만 그때 기억을 되짚어 가며 읽는 것도 꽤 괜찮은 읽기였다. 파미르 고원 , 톈산 산맥, 키르기스스탄의 오시, 카자흐스탄의 북아랄해, 투르케스탄의 아흐멧 야사위의 대영묘, 사마르칸트 등 두 달에 걸친 중앙아시아 여행기. 이렇게 긴 여행 일정이 가능하다니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비록 일부나마 내가 이 책이 아니면 어디서 불교 경전을 쉽게 만날 수 있을까 싶다. 나에게는 불법을 따라가는 생소한 여행기였지만, 내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불교를 철학적으로 접근해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종교학으로는 엄두가 안나고).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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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석영중 지음 / 열린책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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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도스토옙스키에 관해 예리한 글, 심오한 글, 웃기는 글, 무서운 글은 쓸 수 있지만 따뜻한 글을 절대 못쓴다고 얘기한다. 그 치열함에서 따뜻함보다는 위로를 받았다는 저자가 고른 2백 개의 구절 혹은 장면이 실려있다. 불안, 고립, 권태, 권력, 고통, 모순, 읽고 쓰기, 아름다움, 삶, 사랑, 용서, 기쁨 등 열두 개의 주제별로 나누어진 도스토옙스키를 단편적으로나마 만나본다.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전에 일단 가볍게 훑어보니 다행(?)스럽게도 대부분 읽은 작품이라 더 반가웠다. 서문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족적을 찾아 러시아, 카자흐스탄,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체코, 오스트리아, 스위스를 둘려본 저자의 순례가 간단한 에피소드처럼 쓰여 있는데, 로마사를 따라 답사 순례를 하고 싶은 나로서는 무척 부러운 부분이었다. 그리고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나면 다른 작가는 조금 심심하게 느껴진다는 저자의 말에 충분히 공감하는 바다.   
 



'고통'이 도스토옙스키 문학 전체를 아우르는 핵심 화두라는 첫문장에서 그동안 읽은 그의 작품들을 되짚어보니 납득이 된다. 저자는, 인간은 타인의 고통과 자신의 고통이 스쳐 지나가듯 만나는 지점에서 성장한다고 썼는데, 이에 촛점을 맞춰 인용된 글들을 읽어갔다. 자신의 가난보다 더 극한의 가난에 시달리는 이웃의 고통을 목격하는 마카르, 족쇄에서 두 발이 그냥 빠질 정도로 앙상한 죄수의 고통, 벼랑 끝에 내몰렸으나 돌아갈 곳을 상실한 자의 고통, 어린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과 고통, 굶주림의 고통 등. 이러한 고통들을 의식하려고 하지 않는 순간, 우리는 공감력을 잃어버린 소시오패스가 되고 만다. 무엇보다 악으로 변질되는 슬픔이야말로 가장 고통스러운 부분이라는 마지막 문장에서 우리가 놓아서는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깨닫는다.  


'고통은 조건과 상관없이 우리가 수용하는 방식에 따라 우리의 격을 달라지게 한다'는 저자의 글에서 '일단 멈춤' 모드가 된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여기에 인용된 글은 <지하로부터의 수기>인데, 아마 '고상한 고통'을 염두에 두고 쓴 문장인 것 같다. 이론적인 것이 아닌 실제적인 면에서 저자가 말한 고통의 수용 방식과 내가 수용하는 고통의 방식의 차이에 대한 생각들이 길어진다.  


<악령>을 통해 고통의 종착역인 죽음을 극복할 때 인간은 신의 경지에 이를 것이며 그 세상이 얼마나 끔찍할지를 얘기하는 대목에서 일련의 미래 소설들에서 영생이 또 다른 고통의 시작임을 일관되게 주장하는 바와 상통한다. 위로받을 수 없다는 사실만이 위로가 되는 그런 고통이 인생에는 있다는 저자의 글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깊게 와닿는다.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하여 완전히 몰입해서 읽는 것과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것은 것의 같은 것이 아닐까라고 짐작하는 저자. 그런가...? 책은 읽는 대상일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 여러 매개체로 전환된다. 때로는 사랑으로, 때로는 추억으로, 때로는 아픔으로, 떄로는 위로로 다가온다. 책 자체보다 책을 소유했던 사람 혹은 그와의 관계 맺음에서 오는 여러 감정들에 따라 달라진다. 독서라는 행위 역시 모든 이에게 긍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하물며 글쓰기야 말해 무엇하랴. 저자는 <가난한 사람들>의 마카르가 존재하기 위해 썼고, 씀으로써 존재했다고 얘기하는데, 도스토옙스키야말로 그러하지 않았을까.  


격하게 와 닿은 문장, "독서는 삶의 균형을 잡아 주는 경험이지 삶을 대신하는 경험은 아니다.(p182)"



​도스토옙스키에게 있어서 아름다움이란 영혼이 아름다운, 영원을 향한 깊은 응시다. 이는 그의 몇 작품만 읽어도 아주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미시킨이 말한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하리라"는 나스타시야의 외모적 아름다움이 아닌 것처럼, 특히 <백치>의 미시킨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알로샤로 대변하는 궁극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성찰이 없는 내면의 인간은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 이러한 아름다움에 무감각한 사람, 해학이 없는 사람을, 저자는 위험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사랑은 도스토옙스키가 가장 많이, 가장 집요하게 파고들었던 개념이다. 정말 그의 소설에서는 어떤 형태든 '사랑'이 절대적 위치에 있다. 사랑이야말로 얼마나 섬세한 감정인지. 사랑할수록 우리는 타인을 인정하고, 더 잘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사랑은 누군가를 변화시키는 가장 큰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게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보상에 대한 생각이 아주 미미하게 개재해도 그 사랑은 의미를 상실한다는데, 현실에서 그러한 사랑이 가능할까? 저자의 말대로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사랑이다. 사랑에 대한 평가는 사랑이 깨어졌을 때만 가능하다는 저자의 말에 슬그머니 웃음이 난다. 사랑을 평가하겠가고 그 사랑을 일부러 깰 수 없는 노릇이니까. 집착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에 목숨 걸지 마시길. 로고진(아니면 드미트리)처럼 된다. 더하여 로고진의 사랑을 사랑이라 할 수 있겠나. 그리고 그런 무서운 사랑, 반길 사람 아무도 없을 것이다.


도스토옙스키가 지향하는 사랑은 '실천적 사랑'이다. 주변의 소외자, 약한 자들에 대한, 완벽한 자기희생을 통한 사랑의 완수.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도 이러한 변함없는 사랑은 불가능하다고 수차례 강조했다고 한다. 그래서 저자는 우리가 짚어할 부분은 실천적 사랑의 성공이 아니라 그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라고.  




우리는 타인을 어디까지 용서할 수 있는가. 도스토옙스키는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그는 종교적인 차원에서의 용서, 그리고 법과 원칙적인 차원에서의 용서를 명백히 구분했다. 눈에 들어오는 용서에 대한 해석은, 연민과 동정심을 구분해야 하는 것과 범죄자를 구제하는 것은 동정심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스스로를 인간으로 깨닫게 해주는, 동료 인간의 인간적인 대접이라는 것이다. 범죄자가 스스로 죄를 뉘우칠 때에 용서와 갱생의 선순환이 시작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저자가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보편적인 시선에 대해 얘기하면서 인간의 도리를 지키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인 것 같다는 글에서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가장 많이 인용된 작품은 <죄와 벌> <악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지하로부터의 수기> <죽음의 집의 기록>이다. 발췌한 문장들을 읽자니 새록새록 기억이 나면서, 저자의 첨언을 읽는 즐거움까지 보태졌다.  


책을 다 읽고나니 정말 200개의 장면을 뽑아내는데 엄청 고생하셨겠다는 생각이 든다. 뽑아놓은 글을 읽어도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그 많은 작품들 중에서 테마에 맞춰 일일이 찾아냈을 수고와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애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중간 중간에 저자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나 깊게 각인되어 있는 장면, 혹은 대목들이 있는데, 앞으로 좋아하는 작가들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구절 혹은 장면들을 수집해 놓는 것도 의미있는 작업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들이 선뜻 손을 내밀기에는 거리감이 있을 수 있으나 기승전결이 있는 책이 아니라서 읽는 데에 무리가 없다. 가볍게 도스토옙스키를 만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무엇보다 저자의 글이 참 좋아서 그것만으로도 읽어보라고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개인적으로 사이사이 읽게 될 책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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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위의 집
TJ 클룬 지음, 송섬별 옮김 / 든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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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2.
우리가 우리인 건, 어떻게 태어났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이 삶을 어떻게 살기로 결정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 소설에는 '보통 사람'이라고 지칭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괴물이라고 핍박하는 인물들이 주요 등장인물이다.  
 


섬의 정령 채플화이트, 고아원 원장이자 출신을 알 수 없는 아서 파르나서스 , 악마의 자식으로서 적그리스도 종족인 여섯 살 루시, 어린 나이에도 얼굴에 수염이 나는 노움족 탈리아, 변신이 가능한 열여섯 살 샐, 형태가 불분명하고 촉수가 있는 메두소조아 천시, 희귀종 와이번 시어도어, 어린 숲 정령 피, 그리고 소심하기 짝이 없이 라이너스가 그들이다.  
 


그런데 책을 읽다보면 '괴물'은 과연 누구인지 독자는 알게 된다. 
인격을 존중하지 않고 오로지 일방적 명령에 복종하며 시키는대로 일만 하면 만사형통이고, 동료가 처한 곤란한 상황을 방관하고 나아가 한낱 조롱거리로 삼으며, 다수의 생김새와 다르다는 이유로 편견을 앞세워 학대하는 사람들. 그리고 다이어트 때문에 샐러드만 먹어야 한다는 라이너스의 말에 너도나도 몸을 동그랗게 부풀리고, 친구의 허물이나 행동이 의도된 것임이 아님을 적극적으로 변호하며, 서로의 다른점을 개성으로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존중하는 아이들.   



 
이 소설은 곳곳에 천진한 아이들을 통해 어른들에게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아이들이 바다를 처음 본다는 라이너스에게 왜 바다를 처음 보냐고 묻자 해야 할 중요한 일들이 많아서 바다를 보러 갈 시간이 없었다고 대답한다. 원하지 않는데도 샐러드만 먹어야 하는 자신이 행복하다는 라이너스의 말에 의아해 하는 아이들. 열심이 살고 있는 우리, 삶이 즐거운가요? 
 


마을 사람들이 고아원을 향해 쓴 비방문이 뗏목을 타고 숲으로 흘러들어 온 것을 본 라이너스는 마법 능력을 가진 아이들을 향한 편견과 차별을 목격한다. 그들의 주장에 반대하는 문구를 써 넣은 깃발을 뗏목에 실어보내면서 처음으로 살아있는 기분을 느끼는 라이너스. 사람들은 자기가 선택한 삶을, 혹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여기지만 실상은 자신이 원하는 삶이 진정 무엇인지 충분히 고민의 시간을 갖는 이는 많지 않다. 상황에 떠밀려, 시간에 떠밀려 결정한  숱한 것들이 나 역시 얼마나 많았던가. 아서는 호기심이 결여된 삶은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없으며, 유머의 반대는 아무 감정도 못 느끼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많은 시간을 이렇게 살고 있지 않나 싶어서 조금 씁쓸하다.  
 


이 소설에서 짚고 넘어가는 또 한 가지는 집이라는 공간과 가족이다. 아서는 (소외 당한) 아이들에게 주어야 하는 것은 희망, 보살핌, 자기만의 장소, 어떤 두려움도 없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수 있는 집이라고 말한다. 소설의 후반에 라이너스가 최고위 경영진들 앞에서 여섯 명의 아이들에 대해 일일이 설명하는 장면에서야 독자들도 아이들의 사연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면서, 서로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공감하고 이해하며 보듬어 줄 수 있는 존재라면 가족이 될 수 있음을 새삼 각성한다.  
 


또한 작품에서 '괴물'로 취급되는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현재 우리 사회에서 소외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겹쳐진다. 심지어 멀쩡히(?) 마법아동관리부에서 일하는 라이너스나 마르시아스섬의 시장인 헬렌조차 소설 밖 현실에 존재한다면 억압당하는 소외계층이었을 터다. 그러나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마법 아동을 꾀어내 퇴마술을 하고, 무턱대고 괴물로 몰아붙이며 어린아이에게 총구를 들이미는 마을 주민 역시 '괴물'이기는 마찬가지다. 
 


소설 초반, 마법적 존재들이 보통의 인간에게 동화되어야 한다는 라이너스의 주장에 아서는 왜 동화되어야 하며, 동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누구이고, 동화를 강요당한 자들은 선택의 여지가 있는지에 대해 묻는다. 라이너스는 이에 대해 동화는 공공의 이익을 위한 조치라고 반박하는데, 과연 그 '공공의 이익'에 동화를 강요당하는 자들의 이익도 포함되어 있는지를, 독자는 되묻고 싶어진다.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려면 먼저 소수의 마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아서의 말이 와닿는다. 소설은 버티는 것 말고 살아가는 삶의 중요함을 얘기한다. 소설의 마지막, 돌아온 라이너스가 우는 탈리아를 번쩍 안아 올리는 장면에서 덩달아 눈물이 그렁그렁해진다.
 



한때 이영도 작가의 전작부터 나니아 연대기, 호빗, 레모니 스니켓, 해리포터 시리즈까지 일정 기간 동안 열혈 판타지 독자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기가 지나고 켄 리우, 신서로 등 사이사이 읽고 있으나 2,3년 전쯤부터는 의도치 않게 손절이라고 할 정도로 판타지와 거리가 먼 독서를 해왔다. 정말 오랜만에 읽은 판타지다.  
 


읽으면서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업>이 생각났다. 물론 내용은 전혀 다르지만 그때 느꼈던 따뜻함과 뭉클함이 다시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인생에서 때로는 판타지가 필요하다.  
 
 


420.
우린 모두 각자의 미눗방울 속에 안전하게 갇혀서, 이렇게 넓고 신기하기만 한 세상을 만나지 못하는 거야. 얼마나 손해인 줄도 모르고. 하지만 비눗방울 속에 갇혀 살기란 참 쉬워. 반복되는 일과는 평온을 주고든. 그러다가 비눗방울이 터지고 비로소 정신을 차리면 우리가 놓치고 살았던 게 이렇게 많다는 사실이 차마 믿어지지 않는 거야. 심지어 겁이 나기도 해.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다시 그 비눗방울 안에 들어가기도 하지.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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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몰랐던 K - ‘진짜 선진국’ 대한민국을 위한 박노자의 불편한 제안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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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국적을 가진 한국인이지만 경계에서 늘 냉철하게 한국의 현실을 짚어온 박노자 교수가 한국이 진짜 선진국으로 가는 길을 제시한다. 과거, 위계, 혐오, 노동, 세계, 미래 등 여섯 개의 장을 통해 불편하지만 알아야 할 진실들 조목조목 짚어가며 허울 뿐인 선진국이 아닌 자국민이 행복을 위한 길을 선택해야함을 조언한다.  









한국은 양극화 속의 빈곤, 노인 빈곤, 노동시장의 이원화와 '불안 노동' 증가, 노동시장 진입 실패자 증가 등의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저자는 사회구조적인 원인을 개인으로 한정하여 이유를 살펴보면 그 원인을 타자와의 관계라고 짚는다. 인간이 고통과 위기를 극복하고 살아갈 힘을 주는 심리적 요소가 타자와의 관심, 존중, 소속감이라고 한다면,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이 최우선인 신자유주의적 사회에서 공감능력은 오히려 '약점'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공감과 연대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각종 '혐오'다.  



타인을 존중하려면 '동등'이 기본 이념이 되어야 하는데, 위계가 기본 이념인 사회에서 존중은 실현하기 어렵다. 존중이 부재한 관심은 관음증에 불과하고, 어떻게든 이겨야만 하는 살인적인 경쟁에서 소속감 역시 따라올 턱이 없다. 우리는 현재 가난, 즉 결핍에 시달린다. 가난은 물질의 부족을 함의하지만 1차적 욕구의 결핌 외에도 '시간 빈곤', '관계 빈곤' 등 2차적 욕구의 가난에 시달린다.  



사회 어디에서도 '나'를 책임져줄 조직체가 없다면 취약한 한 개인이 사회에서 어떻게 버텨낼 수 있을까. 물론 이러한 일이 한국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해서 '남들도 다 그래'라는 핑계로 방치한다면 국가도,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우리도 덩치만 비대해진 빈 수레가 될 터다. '부유한 나라의 가난한 개인들'이라는 문구가 목에 턱 걸리는 느낌이 든다. 이를 위해서는 적절한 사회 제도 개혁은 물론이며, 더불어 사회 구성원의 의식 전환과 통념이 바뀌어야 한다. 



저자는 주요 열강국이 자행하는 '제재'를 들어 타자를 강제로 쫓아내거나 '우리'와 동화시키려는 국가의 폭력에 대해 언급한다. 그런데 이러한 양상의 폭력은 국가와 민족 간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규모의 범위를 넓히든 좁히든 칼자루를 손에 쥔 제재 폭력은 끊임없이 발생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선진국'은 일상이 비폭력화되어 안정적이며 복지가 가능한 바람직한 사회를 의미하는가, 아니면 돈이 많고 소수자들을 언제든지 박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회를 의미하는가. 복지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은 '톨레랑스'다. 민족, 종교, 문화적 소수자에 대한 관용과 존중을 뜻한다. 소수 의견을 표현할 자유, 다양성이 박해당하지 않을 권리가 보장된 사회가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국이 그토록 모델로 삼는 그 거대한 나라는 과연 선진국일까. 



저자의 말에 따르면 한국 사회의 비폭력화가 이루어지자면 사회, 특히 직장의 탈군사화와 사회 전반의 평등화, 사회적 관게들의 대등화 등이 필요하다. 대학 평준화를 통한 학벌 카스트 제도의 타파가 필요하고, 노동자들의 경영 참여를 통한 기업의 민주화부터 필요하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래서 심각하다. 알면서도 하지 않고 있기에.  




차별과 따돌림, 노동자와 지식인의 사회 계급 분화, 양심수, 여전히 존재하는 국가보안법, 경직된 위계성, 사회적 신분 세습, 학벌주의, 소외계층의 죽음, 살인적인 노동 시간, 혐오정치와 배제, 착취, 내부의 오리엔탈리즘, 기후 변화에 따른 식량 자급률과 이민 증가, 신자유주의의 후퇴, 한국의 미래 예측과 제시 등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으면서도 근본적으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수많은 폭력들과 개선점에 대해 얘기한다. 저자는 코로나 사태를 거쳐 한 시대가 종말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한국이 미국식 신자유주의 모델을 완전히 벗어나 한국식 생태형 복지국가 모델 전환의 장기적 비전을 심각하게 고민해야만 자국민의 안정과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조언한다.  



가끔 이 분의 저서를 놓고 한국에서 살지 않는 (민족 정서가 결여된) 귀화한 한국인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고, 일단 한국에서 세금내고 살면서 책을 내라고 비난하는 독자들도 종종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타자화해서 객관적으로 들여다 보기 어렵다. 특히 '우리'라는 소속된 집단은 '나'와 동일시 되기에 '한국'을 비판하는 것은 '나'를 비판하는 것 같아 그 내용이 맞든 틀리든 불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귀담아 들어야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원래 입에 쓴 약이 몸에는 좋은 법이라고, '우리' 어르신들이 말씀하지 않았는가.




♤ 하니포터 2기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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