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알래스카 샌더스 사건 1~2 - 전2권
조엘 디케르 지음, 임미경 옮김 / 밝은세상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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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은 미스터리소설을 놓고 종종 '밑밥'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 '밑밥'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회수하는지가 미스터리소설의 재미와 질을 결정한다(초자연적 현상이나 우연의 연속, 개연성 없는 느닷없는 새로운 인물의 등장은 사양해).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이 소설은 백 점 만점의 백 점이다. 상당한 분량만큼이나 수많은 밑밥과 의문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데 작가는 이것들을 설득력 있게 해결해 나간다(살짝 꼬아놓은 면이 없지 않지만).


​소설은 전반부에서는 알래스카 샌더스 살인 사건에 집중하다가 중반부를 넘어가 또 다른 실종 사건을 줄기로 삼아 두 방향에서 서술하며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소설 구성에서 눈에 들어오는 점은 앞서 언급한 두 사건과는 전혀 무관하고 이전 사건이자 마커스의 전작인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 이면에 치유하지 못한 마커스의 내면을 사이사이 드러내면서 다음 작품과의 연결고리를 만들어 놓는다. 참으로 치밀한 작가가 아닐 수 없다.  



이야기를 시작할 때만해도 어긋난 우정에 의한 복수와 치정 살인이라고 여겨졌던 사건은 시간이 흐르면서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고, 다정한 이웃이자 친구라고 여겼던 이들의 민낯이 하나둘씩 벗겨진다. 성실하고 모범적인 오빠, 내성적이고 정 많은 아들, 신뢰하는 동료, 다정한 어머니, 든든한 아버지, 친절한 이웃. 꿈 많고 아름다운 철부지로만 보였던 두 젊은 여자의 이기심과 평소에 문도 잠그지 않을 만큼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온 작은 마을 사람들이 숨긴 추악한 진실. 그들은 자신이 불이익을 당하거나 범인으로 몰릴 것을 우려해 사실을 은폐하고 진실을 외면했으며 때때로 거짓말을 했다. 범인조차 예상치 못했던 그들의 거짓과 무관심과 외면을 양분삼아 사건은 완전범죄에 가까워졌다. 무너진 정의와 구현하는 정의 중 진실은 어디에 더 가까울까. 


강력 범죄로 목숨을 잃거나 삶이 훼손되는 비극, 그리고 피해 당사자와 가족들의 삶은 어떻게 회복해야 할까. 해리 쿼버트의 말처럼 '우리 안의 못난이 악마'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악마들에 익숙해져 여차하면 우리 스스로 자신을, 삶을, 내주게 된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를 회복시켜 줄 것인가. 그야말로 불편한 진실에 다가갈수록 독자는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소설 속에서 해리는 작은 불꽃 하나로 삶을 다시 작동시킬 수 있다면서 마커스에게 스스로 왜 글을 쓰는지 자신에게 물어보라고 조언한다. 때때로 마주하는 절망에서 삶을 복구할 저마다의 작은 불꽃, 그리고 삶에 의문이 들때마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이를 통한 치유. 미스터리 소설인 이 작품이 정작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 아니었나싶다.  




사족
가독성은 최고다. 일단 펼치면 궁금해서 덮을 수 없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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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또 내일 또 내일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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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 초반에 만나 인생의 대부분을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실패와 성장을 반복해나가는 두 남녀의 이야기다. 이렇게 단순한 문장 하나로 정의하기에 이 소설은 복합적인 감정을 담고 있다.  


소설에서는 다양한 인종과 민족성, 그리고 언어를 가진 인물들이 만난다. 한국계 이민 1세대를 비롯해 일본계 이민자, 유대인, 한국계 이민 2세대, 유대인과 한국계 미국인 혼혈, 일본인과 한국계 미국인 혼혈 등 각자의 입장에서 겪은 정체성과 차별을 안고 살아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게임이라는 소재와 어우러져 흥미롭게 진행된다. 


소설의 진정한 시작은 1997년 게임 '이치고' 출시다. '이치고'는 셰익스피어의 <십이야>, 일본의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그림 <거대한 파도>에서 영감을 얻었다. 출시 10년 후 이에 대해 문화적 전유appropriation를 비난하는 비평가들에 대해 샘은 제 나라 문화만을 레퍼런스로 삼는 세상, 오로지 제 자신의 문화만을 옳다고 주장하며 다른 문화와 경험에는 눈멀고 귀먹은 세상을 비판하는데 이러한 맥락은 소설 전반에 걸쳐 있다.  


이치고 게임에서 눈에 띄는 점은 게임 속 '이치고'의 성별이 처음에는 불분명하다는 것. 샘과 세이디는 애초에 이치고의 성별을 확정하지 않았고, 게임 속에서는 아이로 남아있다. 즉 다인종 · 다민족 등 소설 속 청년들을 모두 상징하고 있는 것이라는 짐작을 해본다. 이처럼 아이디어를 창출하고 실질적으로 화면에 구현하는 게임을 만들면서 20대의 그들도 내적 성장을 이뤄간다. 돈과 명예, 사회적 성공, 우정, 사랑, 협력 등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에 늘 따라다니는 가치라고 봤을 때 인간은 죽을 때까지 성장하는 존재라는 생각도 잠시 스친다.  




 



백인과 한국인 혼혈인 샘은 상처받는 게 두려워 자신을 지켜내는 것만으로도 벅찬 사람이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고 호의를 베푸는 것에 익숙치 않지만, 그는 말없이 내색하지 않고 친구를 걱정한다. 유복한 집안이었지만 난치병 환자였던 언니로 인해 부모로부터 방치된 유년 시절에 샘을 만난 세이디는 외로움을 견디기 힘들어 하는, 이성과 감정을 오락가락하는 인물이다. 마크스는 샘을 동생처럼 좋아했다. 샘을 보호하고 샘이 세상을 살아가기 좀더 편하게 도와주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주변을 챙기는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샘은 자신이 마크스에게 도움을 받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을까싶은 사람, 마크스.  


우리는 스스로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사소한 일까지 우연과 선택의 연속 안에 살고 있다. 모두 다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다. 긍정의 순간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이끌기도 하고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 자의든 타의든 매순간 벌어지는 우연과 선택에 연연하지 말자. 애나와 샘이 비밀의 고속도로로 핸들을 돌리지 않았다면, 그들이 애초에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세이디가 '메이플월드'에 결혼 기능을 추가하지 않았다면, 마크스가 1층 로비로 나가지 않았다면, 앤트가 내려오지 않았다면... . 



소설 막마지에 세이디는 자신들이 그 시대에 태어난 게 행운이었다고 말한다. 조금 더 일찍 태어났더라면, 혹은 조금 더 늦게 태어났다면 지금보다는 더 힘들었을 거라고. 문득 나 역시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운좋게도(?) 정부 차원의 폭력이 난무하는 시대를 피했고, 살인적인 실업사태를 청년기에 직격탄으로 맞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SNS가 대중화 되기 전의 시대를 살아본 경험이 나쁘지 않다. 무엇보다 열심히 하면 노력의 대가가 지금보다는 좀 더 명확했던 시대를 살았다. 


갈수록 이른 나이에 성공을 이루겠다는 열망이 점점 더 커지는 세태다. 연예인의 데뷔 시기도 십대 초반으로 연령대가 점점 낮아지고, 프로게이머, 유튜버, 가상화폐 투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른 나이에 억대 수입을 올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새삼스레 이러한 폐해에 대해서 구구절절 늘어놓겠다는 건 아니다. 다만 어떤 측면에서든 성공과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길 바라는 마음이 크다. '열정페이'나 '아프니까 청춘이다' 따위의 말도 불편하고 거슬리지만, 비록 한때나마 순수한 열정 없이 자극적인 성공만을 바라보며 달리는 모습도 우려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마크스는 게임이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이라고 정의한다. 무한한 부활과 무한한 구원의 가능성. 그 어떤 죽음도 영원하지 않은. 인간이, 혹은 인생이 그런 것 아닐까. 상처가 계속 상처로만 남지 않는다. 선택, 후회, 상처, 일시적 성공이 보이지 않는 어떤 반응으로 내일의 우리에게 어떻게 작용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당면한 문제들을 겪어가며 우리는 세대를 이어가고 내일의 희망과 낙관을 바라며 동어반복하듯 생을 이어간다. 동현이 세이디에게 오락기 '동키콩'을 유증함으로써 샘과 세이디의 우정을 되새겼듯 우리는 죽음을 통해 삶을 확인하며 내일을 기대한다. 


소설은 허구다. 샘, 세이디, 마크스. 이들의 관계, 순전한 우정과 연민이 어쩌면 평행이론이나 우주를 날아다니는 SF보다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게 우리네 모습이다. 그래서 이런 소설을 사이사이 찾아 읽는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이들의 모습을 현실에서 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내 마음이 좀 부드러워지기를 바라면서.  



개브리얼 제빈의 작품을 세 번째 읽는다.
<섬에 있는 서점>은 여전히 따뜻하게 남아있고, <비바, 제인>은 살짝 아쉬웠으나, 이 소설이 그 아쉬움을 덮었다.  


나도 이렇게 마크스가 그리운데, 그들은 오죽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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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맛집 산책 - 식민지 시대 소설로 만나는 경성의 줄 서는 식당들
박현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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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맛집을 소개하는 책이다. 다만 21세기 서울이 아닌 한양(서울)이 경성으로 불리던 식민지 시대의 경성 맛집 이야기다. 혹시나 하는 노파심에 식민지 경험을 수긍하는 것이 아님을 저자는 미리 밝혀두면서 오히려 경성의 맛집에 드리웠던 식민지 그늘을 주목한다. 








경성시대에도 소위 맛집 핫플레이스가 있었다. 그것도 인기 메뉴를 맛보기 위해 온종일 줄을 서기도 했던, 그야말로 오픈런이 있었던 유명한 식당이 여럿이었다고 한다.  


이 책은 모두 열 곳의 맛집을 소개한다. 1부에서는 본정에 위치했던 네 곳의 음식점을 둘러보고, 2부에서는 종로에 있는 맛집 세 곳, 3부에서는 장곡천정과 황금정 특히 '조선호텔 식당'을 서술하는데 이와 함께 경성을 배경으로 하면서 이 장소들을 언급한 당시 소설들도 살펴본다.  


본정은 식민지 시대 경성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었다. 당시의 유명세에 비해 지금 본정의 위치를 정확이 하는 사람은 드문데, 대략 명동 부근이다. 명동에서 충무로까지 횡으로 이어진 상가가 발달한 상업 공간이었다. 식민지 시대 본정이 일본인들의 번화가였다면 종로는 조선인들의 거리였다. 지금의 종로 모습에서 한양 또는 경성의 화려한 중심가였던 종로의 옛 명성을 떠올리기는 어렵다는 사실이 조금 아쉬움으로 남지만. 지금을 기준으로 장곡천정의 위치는 프라자호텔이 있는 곳, 황금정은 을지로에 해당한다. 황금정은 금융기관이 밀집되어있어 경성의 '월스트리트'로 불기기도 했다고.  


​김말봉 <찔레꽃>, 이태준 <딸 삼 형제>, 박태원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염상섭 <삼대>, 이광수 <흙>, 채만식 <인형의 집을 나와서> <탁류> <금의 정열>, 현진건 <적도>, 박완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홍성유 <인생극장>, 유종석 <냉면 한 그릇>, 김낭운 <냉면>, 심훈 <불사조> 등 근현대 소설가들의 여러 소설들과 그 소설들이 연재됐던 신문이나 잡지의 삽화들을 적게나마 엿볼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ㅡ 


​개점한지 100년이 훌쩍 넘어서 지금도 영업 중인 '이문설렁탕'을 비롯해 당시 내로라하는 식당, 카페, 요릿집들이 모두 인상적이었는데, 아무래도 조선호텔이 눈에 띄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조선호텔이 문을 연 것은 1914년 10월이다. 그 규모(특히 부지)가 엄청난 것도 있지만 조선 최초로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건물로도 유명했다. 독일인 게오르크 데 랄란데가 설계를 했으며, 건축 자재  역시 독일을 비롯한 서양에서 수입했다고 한다. 랄란데는 총독부 청사, 경성역 설계를 담당하기도 했는데, 조선호텔은 당시 북유럽에서 유행하던 '유겐트 슈틸' 양식으로 지어져 이국적이고 우아한 모습으로도 유명했다. 읽다보니 사진 자료에서 보이는 조선호텔 공연실의 호화로움이 어느 정도 납득이 되고, 근대에 지어진 건축물들이 왜 전부 비슷한 분위기로 연출됐는지 알만하다.   


조선호텔은 처음에 철도호텔로 개장되었다. 이는 조선호텔이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 철도를 건설했던 목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대한제국 시절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인 '환구단'의 자리에 식민 지배를 위한 철도호텔이 중심에 있고, 신위판을 봉안하는 부속 건물인 '황궁우'가 호텔을 돋보이게 만드는 배경이 되게끔 했다는 것은 일본 제국과 식민지 조선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풍경이었다. 저자는 조선호텔이 위치했던 장곡천정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면서 조선호텔이 위치한 공간의 의미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짚는다. 


1936년 조선호텔 식당의 정식 메뉴판을 보면 종업원으로 보이는 여성 그림이 있는데 의복이 독특하다. 개량한복처럼 보이기도 하고. 정말 깜짝 놀랐던 부분은 당시 조선호텔의 방값이었다. 하루 방값이 12만원이었는데, 지금 시세로 따지면 60만에 해당한다.



몇 가지 재밌는 점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배달이다. 책의 삽화에 보면 국수나 설렁탕 배달은 쟁반을 이용했다면 중국음식점 배달은 지금과 비슷한 손잡이가 달린 통이었다(지금과 아주 흡사하다). 다른 또 하나는 '낙랑파라'의 사진이나 내용을 읽어보면 그곳이 예술가들의 살롱 역할을 한 장소가 아니었나싶다. 사진을 보니까 왠지 낭만적으로 느껴지고 괜히 흐뭇해진다.  


책을 읽으면서 신기한 점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건물의 규모, 메뉴의 특성, 변화한 입맛, 달라진 사회 정서 등을 고려해야겠지만, 한 예로 당시에 전문 디저트 카페가 있었다는 사실은 개인적으로 놀라웠다. 또한 특별한 목적 없이 거리를 걸으며 윈도우 쇼핑을 즐겼던 당시의 젊은이들 모습에서 지금의 우리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ㅡ  


이 책은 상당히 흥미롭고 재미있는 책이다. 제목처럼 단순히 경성 맛집 투어에 그치지 않는다. 그 당시 경성 중심가의 모습과 사회 계층의 구조나 생활상, 무엇보다 조금 생소한 근대의 문학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짧게나마 만나볼 수 있다는 매력이 가장 크다. 또한 책장을 넘길 때마다 경성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가 저절로 머릿속에서 튀어나오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런데 읽다보면 조금씩 씁쓸해진다. 서문에서 저자가 말했듯 일제 식민지 시대에 일본이 얼마나 소리없이 교묘하게 조선의 일상에 침투했는지 느껴지고, 열악한 근무 조건과 저임금에 시달리며 일해야 했던 당시 조선인의 위치가 어땠는지를 새삼 깨달아지기 때문이다.  


나는 사실 '먹는 것'에 크게 관심이 없다. 그래서 요즘 한창 유행인 소위 '먹방'이나 그와 관련한 콘텐츠나 프로그램을 거의 시청하지 않는다. 외식도 즐기는 편이 아니고 일상의 끼니는 웬만하면 직접 만들어 먹는 게 편하다. 여행이나 답사를 갈 때도 검색하지 않는 부분 역시 현지 맛집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고자 했던 이유는 저자가 서문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그 시대의 맛집을 살펴본다는 것은 곧 동시대의 문화를 알 수 있기 장치이기 때문이다. 어떤 음식이 유행했고, 유행한 계기는 무엇이며, 변화된 식생활 문화가 미친 영향까지 짐작하다보면 당시를 살던 사람들을 이해하고, 생각지 못했던 지금의 우리를 반추하게 된다.   


재미있는 경성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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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커다란 초록 천막 1~2 세트 - 전2권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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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e Gut, Alles Gut" 
 

프롤로그에서 스탈린의 사망 소식을 시작으로 하는 소설은 그로부터 2년 전인 1951년부터 1990년대까지를 배경으로 한다.  



 
 



소설은 구심점 역할을 하는 일리야 이사예비치 브랸스키를 중심으로 가지를 뻗듯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과 인연이 교차하고 격동의 소련을 관통하면서 당시를 살아낸 그들의 삶과 애환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그 많은 등장인물들(내가 헤아린 것만 칠십 여명이다)이 직.간접적으로, 크든 작든 일리야와 연관이 있다는 것. 또한 인물들의 관계, 사건과 갈등의 인과 과정 등이 시간의 순서가 아닌 관점에 따라 과거와 현재를 오가고, 소설이 진행될수록 밀도감은 더해진다. 같은 시기 혹은 같은 사건을 등장 인물 각각의 관점으로 조망하며 미처 드러내지 않았던 사건의 진실과 반전들이 여러 입장을 통해 입체적으로 그려진다.  


더하여 실제 사건, 허구의 인물과 실제 인물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어 마치 소설이자 르포르타주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데, 작가의 필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커다란 초록 천막>은 그야말로 작가의 최고작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2권에서는 당시 소련(특히 모스크바)의 서민층과 소수 민족의 삶을 대변하는 이들이 등장하는데, 매 장章마다 쓰여진 하나의 에피소드들이 연결되면서 한 권의 연작소설이라고해도 무방할만큼 내용이 다채롭다. 읽으면서 인상적이었던 점은 소설 전반에서 전해지는 류드밀라 울리츠카야의 예술적 지식과 소양, 그리고 감성이었다. 이러한 문학, 음악, 미술, 문화 등의 장치는 이 소설을 더욱 풍성하게 해준다.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며 저항과 투쟁의 정신을 보여주는 일리야, 일리야에게 인생을 던진 올가, 유대인이지만 러시아인이자 어른으로서 남고자 했던 미하, 섬세하고 유약해보이나 어쩌면 그들 중에서 가장 의리가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사냐. 이외에도 각자의 뜨거운 서사를 안고 있는 수많은 인물들이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주마등처럼 스친다.  


사랑과 우정, 이념과 신념, 민족성과 정체성, 냉전시대의 잔혹함, 모두가 고아였던 시대의 끔찍함, 선한 믿음, 스승에 대한 존경과 제자를 향한 애정, 정의와 불의, 강요된 선택,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아름다웠던 사람들과 그들이 독자에게 던지는 삶의 의미.  



읽는 내내 얼마나 마음이 들썩였는지 모른다. 일리야와 올가의 삶에 아팠다가 미하의 서사에 먹먹했고 사냐의 삶에 안도했다. 류드밀라와 주니어 '일리야'의 이야기에 안타까웠지만 코스탸의 따뜻한 마음에 울컥했다. 그와같은 이들이 어디 한둘이었으랴. 책을 덮으면서 마치 내가 그들과 함께 한 시대를 살아온 양 뭉클해졌다.   


올해 읽은 소설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다.   



 
516.
천재란 시나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에 그치지 않고 강이나 호수에 떠다니는 쇄빙선 같아서 시대를 앞서가서 벽을 부수고 얼음을 깨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서 그의 뒤에 오는 온갖 크고 작은 배와 보트가 다닐 수 있도록 하는 사람이야. 천재 뒤에는 가장 영리하고 재능 있는 사람들이 따르고, 그들 뒤에는 군중이 따라와서 결과적으로 새로운 발견은 상식이 돼. 평범한 사람들은 천재들의 노력과 시간의 흐름 덕분에 점점 더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되지. 그들은 시간을 앞서가는 사람들이고 말이야." 


518.
가치 있는 모든 것은 시대가 변해도 여전히 그 가치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 같아. 왜냐하면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것이 존재하고, 그런 세계가 무수히 많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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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 간토대학살, 침묵을 깨라
민병래 지음, 간토학살 100주기 추도사업추진위원회 기획 / 원더박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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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토대학살 100주기를 맞아 1923년에 벌어진 사건의 진실과 현재 우리가 마주해야 할 과제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1923년 9월 1일 일본 도쿄와 요코하마를 포함한 간토 지방에 7.9도의 대지진이 발생했다. 사망자만 10만 명에 이르렀다. 이때 조선인은 지진의 직접적인 피해와 별개로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일본 경찰과 자경단에게 무차별 학살을 당했다. 이재조선동포위문반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 수가 6700여 명에 달했다(중국인은 700여 명이 사망). 물론 일본은 지금까지 진상 규명조차 거부하고 있고, 그동안 우리 정부 역시 간토 학실의 진실을 밝히라고 요구하지 않았으며, 단독 조사도 외면했다. 심지어 추도문조차 발표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간토 조선인 대학살'은 잊힌 사건이 되었다.  


재일사학자 강덕상의 연구는 두 가지 쟁점을 언급한다. 진도 7.9의 대지진이라는 자연재해에 일본 정부는 왜 계엄령을 발동했는가? 조선인 학살을 조장한 유언비어는 어디서 시작되어 어떻게 전파되었는가? 진실을 밝히려는 그의 오랜 여정 끝에 도달한 결론은, 간토 조선인 대학살은 자경단의 예상치 못한 범죄가 아니며 수백만 이재민의 반정부투쟁을 우려한 야마모토 곤베에 내각이 직접 '조선인 습격설'을 퍼트리고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아 위기에서 벗어나려 했다는 것이다.  


(중략)






 
이 책에는 국적을 떠나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간토대학살'의 사실 여부를 밝혀 과거사를 청산하고자 애쓰는 이들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조선인 유골을 발굴하여 추도하는 모임'을 만든 기누타 유키에, 극우단체의 비난과 직업을 포기하는 것을 감수하면서 간토대학살을 조사했고 추모비를 세우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니시자키 마사오, 일본인 목격자와 생존한 조선인의 생생한 증언이 담긴 다큐멘터리 영상을 통해 조선인 대학살의 진실을 밝힌 오충공 감독, 1923역사관을 세운 김종수을 비롯해 자이니치 래퍼 FUNI, 사진작가 천승환 등 예술가와 젊은 세대들이 간토대학살 사건을 알리는 데에 연대하며 애쓰고 있다.


오충공 감독의 세 번째 작품인 <1923 제노사이드, 조선인 대 학살 100년의 역사 부정>(가제)이 올해 개봉될 예정이고, 9월에는 천승환 사진작가의 간토 조선인 대학살 관련 사적지 사진 전시회가 열린다고 한다.  



아베 정권 이후 득세한 극우 세력으로 인해 급기야 1923년 간토의 불령선인은 2013년 도쿄에서 다시 등장했었다. 역사를 부정하는 극우 세력에 맞서는 활동을 하고 있는 가토 나오키는 과거의 학살을 사죄해야 미래에 평화가 온다고 믿는다. 그리고 역사를 기억하는 데에 있어서 앞선 세대가 할 수 있는 일은 증언의 '기억을 이어 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니시자키 마사오는 자신의 역할이 바로 그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역사수정주의에 대한 경계심을 말하는 야마모토 스미코는 사죄가 없다면 불행은 반복되고, 자신의 활동이 조선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인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1923 간토대학살은 자서전, 일기장 등 기록으로 남은 수많은 증거와 생존자들의 생생한 증언이 그대로 살아있기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우리도 이제 직.간접적인 도움을 줄 수 없다면 적어도 역사를 바로 아는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 책이 막연하게 알고 있는 '1923년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에 대한 진실을 바로 알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람한다. 


책의 마지막에는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지를 방문하는 사람들을 위한 다크투어 안내서가 링크의 QR 코드와 함께 부록으로 실려있다. 여행자들에게 도움이 될 듯하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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