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 있는 리플리 리플리 5부작 1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미정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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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살 톰 리플리에게는 재능만 있는 게 아니라 운도 있었다. 너무나 술술 풀리는 톰의 운발이 억지스럽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이 소설 초판이 1950년대 중반에 출간됐음을 기억하시라.  


십수 년 전에 읽을 때에는 스토리에 무게를 두고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번에 읽으면서 유독 눈에 들어온 부분은 '톰 리플리'라는 캐릭터와 소설 속에서 보여지는 그의 심리였다.  








사기와 공문서 위조 등 시시콜콜한 죄를 저지르고 다니는 톰은 소설 시작부터 경찰에 쫓기는 인물로 그려진다. 유년 시절 이모의 가정학대로 시작해 두 번의 가출, 그리고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국세청 물품 보관소에서의 일을 끝으로 무직 상태다. 하는 짓을 보면 양아치가 따로 없는데 생긴 건 멀끔하고 훤칠하며, 머리까지 좋아서 학습 능력이 뛰어나다. 남을 흉내내거나 성대모사 같은 잔재주는 말할 것도 없고 회계, 언어, 예술 등 배우는대로 흡수한다.  


잔인하게 사람을 쳐죽이는 데 망설임이 없다가도 한없이 여린 모습을 보이는 톰은 반사회적인격장애라고 하기에도 묘한 경계선에 있다. 분노를 터뜨리다가도 죄책감을 느끼고, 좋아하는 사람을 속이는 것에 괴로워하고, 타인을 향한 동정심을 가지며, 자기연민과 이상이 뒤섞여 동경하는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이렇듯 작가는 독자가 '톰 리플리'를 한껏 미워할 수도, 응원할 수도 없는 인물로 만들어버렸는데, 독자의 이러한 감정이 소설에서 내내 흐르는 톰의 감정선과 흡사하다. 그렇다보니 독자는 시종일관 톰의 관점에서 소설을 읽게 된다(나만 그런가...?).


톰은 능수능란하게 디키와 톰을 오가면서 자신이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완벽하게 인지하고 있다. 심지어 디키의 아버지 앞에서 디키의 절친 행세도 마다하지 않는다. 소설 초반에 톰은 '뉴욕이라는 도시가 마치 거대한 쇼를 하는 것 같다'고 느끼면서 동시에 '어느 순간 폭삭 주저앉을 것만 같은 세트장'같다고 표현한다. 모두를 속이고 있다는 쾌감과 언젠가는 모두 들통날 거라는 불안감이 수시로 교차한다. 상대의 무정함에 쉽게 상처받고 외로운 게 싫었다는 톰이, 죽을 때까지 사람들과 가까워질 수도 없고 방심하는 순간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도 위험한 줄타기를 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시간이 흐르고, 거짓이 더 크고 넓어질수록 그 이유와 원인은 무의미해졌겠지만.  


어쩌면 톰이 뉴욕을 떠나는 배 안에서 그린리프 부부의 과일바구니를 보고 흐느낀 그때가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첫 번째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그 장면이 기억에 내내 남았다. 나의 바람과는 달리 톰이 생각하는 인생의 새 출발점은 '헌팅캡'이었는데, 헌팅캡은 톰을 상류층 명문대 출신의 고소득자로 변모시킨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을 먹게 한 헌팅캡. '새로운 인생'을 생각하는 독자와 톰의 괴리는 이렇게 크다.   



톰 리플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장면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톰은 항해 중에 그린리프 부부 앞으로 편지를 쓰는데, 과일바구니에 대한 감사의 인사와 순항 중이라는 내용을 넘어서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상상해서 써내려간다. 아직 만나지도 않은 디키와의 일상, 마지라는 여성에 대한 의견 등 그 분량이 무려 여덟 장에 달한다. 또한 도티 이모에게 보내는 편지는 자신이 마치 해외에 출장이라도 떠나는 사람마냥 예의를 다해서 쓴다(이모와 톰은 예의를 갖추는 관계가 아니다). 자신이 배에서 연기하고 있는 상류층 명문대 출신의 진지한 청년 역할에 충실하게. 이후 톰은 드문드문 이모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이것 역시 상당히 의외의 모습이다.  


소설 곳곳에는 리플리가 정작 기대하고 바랐던 것이 무엇인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들이 있다. 화목한 가정, 격려를 아끼지 않는 부모, 다정하고 친근한 형제, 스스럼없이 우정을 교환할 친구. 톰으로서는 도저히 가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모르는 디키가 더 괘씸했는지도 모르겠다. 톰이 저지른 모든 범죄는 우발적이지 않았다. 어쩌면 '나를 이렇게 만든 건 모두 너희들'이라는 톰의 삐뚤어진 복수심이 터져버린 것은 아니었을지.


어느 때부터 디키의 걸음새, 세세한 몸짓과 말투, 음성의 높낮이까지 따라하고, '집'을 갖고 싶어하며, 하찮은 존재가 되는 게 싫어 다시 토머스 리플리로 돌아가기 싫은 톰. '리처드 그린리프'를 연기하는 것도 모자라 종단에는 '톰 리플리'까지 연기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래서 앞으로의 삶에 '나'가 아닌 '연기자'로 살아야만 하는 남자. 배우가 되고 싶었던 그가, 배우가 되지 못해 제 인생 전체를 허구로 만들어 버린 것 같아서 안타까웠다. (물론 톰이라면, '너나 잘하세요'라고 했을듯 하다만.)



최고의 범죄 소설가이자 심리소설의 대가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유를 가장 분명하게 증명해주는 작품이다. 범죄소설이지만 범인을 추적하는, 쫓고 쫓기는 줄다리기를 떠나서 오직 톰 리플리에만 집중해도 충분히 풍성한 소설이다. 범인凡人인 나로서는 이 똑똑하고 명민한 남자의 심리를 유추하는 것만으로도 읽는 동안 내내 흥미로웠다.  


작가는 소설 속에서 리플리의 감정과 생각을 가늠할 수 있는 몇몇의 상징적인 단어와 장면들을 던져놓는데, 그것들을 따라가다보면 리플리가 얼마나 다중적 인물인지 알 수 있다.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고, 화려한 쾌락을 탐닉하며, 지독하게 세속적인, 그러면서도 저속하지 않은, 이 남자의 뒤를 계속 따라가봐야만 할 것 같다.  





※ 출판사 지원도서
   

이런 생각이 든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예전에도 두어 번 든 적이 있었다. 화가 나고 실망할 때면 죽이고 싶은 충동이 일다가도 순식간에 사라지고 나서 수치심만 남았다. (...) 디키에게 우정이며 동료애며 존경심까지 줄 수 있는 건 모조 주었다. 그런데도 디키가 배은망덕으로 갚는 것도 모자라 이젠 적의까지 품다니. 디키가 매정하게 날 내치다니. (...)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디키 그린리프가 되자. - P87

방에 혼자 있을 때도, 로마 거리를 거닐 때도 톰에게는 매 순간이 기쁨이었다. 관광을 겸해서 아파트를 보러 다니면서도 톰 리플리가 디키 그린리프로 변신한 이상, 절대로 외롭거나 지루하지 않았다. - P105

그는 톰이면서도 톰이 아니었다. 떳떳하고 자유로웠지만 자신의 일구수일투족을 의식적으로 조종하고 있었다. (...) 이제는 침대에서 일어나 이를 닦으러 가는 순간부터 톰은 디키가 되었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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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 자연의 재발명 Philos Feminism 4
도나 J. 해러웨이 지음, 황희선.임옥희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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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어디로 가고 싶은지를 탐구하는 공간을 획득하고 싶다면, 우리의 대안을 찾는 것이 핵심이다.  


이 책은 1978년에서 1989년까지 쓴 논문을 모았다. 이 시기는 지난 수십 년 동안 형성된 다양한 페미니즘 갈래들 사이에서 복잡한 정치, 문화, 인식론적 선동이 이루어졌던 시기다. 그리고 국제 사회는 냉전 체제 말임을 감안해서 읽으면 좋을 듯 하다.

생물학과 진화와 자연사, 그리고 자본주의가 어떻게 페미니즘과 관련있는지를 여러 실험 관찰과 논문을 통해 탐구한다. 또한 언어, 문학, 이념과 사상, 과학적 담론이 그동안 어떤 방식으로 젠더를 다뤄왔는지 서술한다. 그리고 성sex이 어떻게 정치적 범주에서 이용되어 왔는지, 여성=젠더로 곧장 등치시키는 논리적 오류, 그리고 젠더의 계급화와 그 계급화를 소멸해야 하는 이유를 짚어내며, 앞으로 젠더적 차원 그 이상으로 차별을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가야함을 역설한다.







정치화된 신체 겸 정치제도, 정체政體/body ploitic의 개념은 고대부터 있어왔다.  산업혁명 초기에 정체 이론에 중요한 발전이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자연경제와 정치경제는 다양한 수준에서 상호 연관되었다.   

1부에서는 동물사회학 혹은 동물집단에 대한 과학이 억압적인 정체 이론을 구성한다는 데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이 생명사회과학을 새로운 실천과 이론을 고안해 재전유하면서, 동물사회학의 중심을 차지한 지배 개념에 기댄 생리학적 정치에 맞서 비판적 이론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이 분야가 사회 세계를 비추는 성차별적 거울이 되었고, 정당화 이데올로기를 제공함과 동시에 물질적 힘을 증강시킴으로써 문제의 세계를 재생산하는 도구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부분은 '생산에 초점을 맞추는 생명사회 이론의 바탕에는 근본적인 가정이 있다'는 명제다. 인간은 도구 사용 적응의 산물이다. 우리는 인간과 자연의 교류를 중재하는 도구들을 써서 우리 자신을 능동적으로 설계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인간의 부속물(도구)을 필연적인 인간 본성이자 기술적 요건으로 간주한다. 이 논리는 자연과 소외된 관계를 구축하면서 기계 및 기계의 산물을 우위에 둔다. 신체는 뒤쳐진 것이며, 인간 개조의 정당성을 확고하게 만드는데, 이와 다른 길은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인 몸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후반부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페미니즘까지 연결해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생물학 분야가 어떻게 신체와 공동체에 대한 이론을 자본주의적이고 가부장제적인 기계와 시장으로 구축했을까? 기계는 생산을 위한 것이고, 시장은 교환을 위한 것이며, 기계와 시장 모두 재생산을 담당한다. 저자는 사회생물학이 어떻게 자본주의적 재생산의 과학인지 보여주고자 한다. 제1차 세계대전과 현재 사이에, 생물학은 기능주의의 용어들로 파악된 유기체에 초점을 맞추는 과학으로부터, 사이버네틱스 체계의 용어를 통해 자동화된 기술적 장치들을 이해하고 연구하는 과학으로 변환되었다. 생명과학의 변화는 자본주의적 재생산이 지속되는 가운데, 권력의 본성과 기술의 변화를 수반했다. 사회생물학은 사회 및 개체군에 대한 생물학적 이해다. 모든 자본주의적 과학에 관한 한 설명이 필요한 근본적인 문제는 개체가 공동선에 어떻게 이용되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사회생물학의 기초는 자연에 대한 자본주의적이고 가부장제적인 분석으로 지배 관계를 요구한다. 성차별주의의 근간은 성역할을 유전적으로 설정되었다고 합리화하는 데 있기보다는, '인간'이 '자연'을 지배한다는 기본 공학의 논리에 따라 설정됨을 짚는다. 인간 사회에 적용된 사회생물학적 추론은 직업 분리, 우세 위계, 인종주의적 쇼비지즘, 그리고 성에 기초한 사회가 유전적 경쟁의 더 추악한 측면을 통제하기 위해 지배구조를 만들어 낼 '필요성'을 안이하게 자연화하는 경로로 흡수된다.  


현재의 강력한 정치적 계기 속에서, 페미니즘 이론의 심화된 상호교차성, 공동 구성, 식민주의 담론 비판, 반인종차별주의 이론 등은 근본적으로 무엇을 '여성의 경험'으로 간주할 것인가를 두고 언제나 논란이 분분한 해석들을 개별적으로, 또 집합적으로 재구성해왔다. 무엇을 '여성 경험'으로 간주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는 페미니즘 역사 전반에 걸쳐 페미니즘의 담론 실천을 변화시켰다.저자는 이에 대한 생각을 바탕으로 문학을 비롯한 문학에 대한 고고학 외에도 여타 텍스트들을을 통한 페미니즘과 우머니즘을 넓게 톺아서 해석한다.  

저자는 젠더에 관한 모든 근대 페미니즘적 의미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여성을 집단적.역사적 과정 중의 주체로서 구성할 수 있도록 해 주었던 사회적 조건 속에서, 여자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라는 시몬 드 보부아르의 주장에 토대했다고 주장한다. 젠더는 수많은 투쟁의 장에서 성차를 자연화하는 것에 반발함으로써 발전된 개념이다. 젠더를 둘러싼 페미니스트 이론과 실천은 성차의 역사적 체계를 설명하고 변화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생물학이 개입에 열려 있는 사회적 담론이라기보다 몸 전체를 지칭하는 것이 되어버리자 페미니스트들은 '생물학적 결정론'에 반발하면서 사회구성주의에 동조하게 되었다.

(중략)

젠더, 인종, 계급에 대한 의식은 가부장제, 식민주의, 자본주의라는 모순적인 사회 현실을 겪어 온 우리의 비참한 역사가 강제로 떠안긴 성과다. 여기에서 '우리'로 간주되는 이는 누구냐고, 저자는 묻는다.  

​ㅡ

제목을 봐서는 도대체 영장류와 사이보그가 어떻게 여자, 그것도 페미니즘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 싶지만 읽다보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차별의 뿌리는 너무나 깊고, 그중에서 성sex과 인종(또 인종 안에서의 성차별, 젠더 안에서의 인종차별)에 관련한 차별은 어디까지 파고 들어가야 그 근원에 닿을 수 있을지 아득할 지경이다. '여신'이 되느니 사이보그가 되겠다는 책 속 저자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종단에는 납득이 된다. 

책에 쓰인 내용을 내가 온전히 제대로 이해했는지 장담하기는 어렵다. 다만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읽을 때와 비슷한 경험을 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뭔가 어렴풋하던 것이 선명하고 명확해지는 지점들이 있었다.   

페미니즘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막연하다거나 여성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독자라면 읽어보기를 권한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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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 정보라 환상문학 단편선 2
정보라 지음 / 퍼플레인(갈매나무)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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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출간본에 실릴 단편들 중 표제작을 포함한 네 작품이 실린 가제본이다. 


소설들은 주로 폭력에 대한 서슬퍼런 이야기들이다.
학폭 및 청소년 범죄, 그리고 죽음조차 사치스러운 비열한 이들. 폭력의 전염성과 중독, 하면 할수록 이유없이 증폭되는 분노와 이를 따라오는 무자비한 폭력이 가져다주는 쾌락, 타인을 지배하려는 욕망. 제 이기를 위해 무람없이 저지르는 가학 행위와 살인. 타인과 비교하며 내가 나로서 살아가지 못하고 흔들리는 위태로운 현실. 
 






 
실린 작품들 중 특히 <감염>은 우리가 폭력에 어떻게 익숙해지고 그에 따라 얼마나 무감해지는지를 극단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출판사 소개글에서 언급한 '하이퍼 리얼리즘'의 세계를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 <감염>에서 만나볼 수 있다.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조금은 남보다 더 세상사나 처세에 능통해야만 안심이 되는 세태. 삶의 결이나 살아가는 방식은 저마다 제 나름의 길이 있을텐데 말이다. 부모의 강요, 관습, 고정관념 등에 떠밀려 제 삶의 방식을 놓아버리는 순간, 어쩌면 내면은 이미 좀비가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지금은 네가 잘 모르겠지만~'으로 시작하는 명이의 충고는 어쩌면 그 말을 하는 본인을 향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관점에서든 인생이 곧 소설이라는 어느 작가의 말이 떠올려지는 작품들이었다. 
정식 출간본에 실릴 다른 작품들도 기대하며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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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타뉴의 노래·아이와 전쟁 책세상 세계문학 7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송기정 옮김 / 책세상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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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자전적 이야기 두 편이 실려있다. 그의 유년 시절을 있는 그대로 담았기에 에세이 혹은 회고록이라고 할 수 있겠고, 서술 형식은 소설처럼 쓰여져 있어서 자전적 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을 듯 하다.  







[아이와 전쟁] 


1940년에 태어난 직후부터 5년간 전쟁을 겪은 아이였던 이가 전하는 이야기다.  


그가 기억하는 전쟁에 대한 첫 번째 기억은 '폭력(폭격)'이다. 그는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이 민간인을 향해 폭탄을 투여하는 영샹을 보면서 비오듯 쏟아지는 폭탄 아래에 있을 아이들을 생각한다. 


작가는 사람들이 보통 전쟁에 대해 언급할 때 대체로 희생, 승리, 용기, 지휘관의 능력, 전쟁을 통해 얻은 가치 등을 찬양하지만, 여자나 아이들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하지 않음을 짚는다. 그들에 대해 말할 때는 인명 피해 혹은 민간인 학살 등의 참화를 이야기할 때뿐이다. 최근들어 군사작전에서 발생하는 무고한 민간 피해를 의미하는 '부수적 피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쓰면서 여성과 아이들은 피해자라기보다는 부수적인 요소로 취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문득 든 생각,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해결되지 않은 여타 많은 사건 사고와 과거사들이 해결되지 않는 이유가, '피해자'라기 보다 '부수적 요소'로 인지되어서일까(생각해보면 피해자가 거의 다 여성과 미성년자다)?  


작가가 어린 시절 전쟁 중에 경험한 허기. 이는 해결이 가능한 배고픔이 아닌 채울 수도, 충족시킬 수도 없는 공허함에서 오는 허기다. 그런데 오늘날 과잉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그 공허라는 허기가 해결됐을까. 전쟁과 결핍의 시대에 몰아닥쳤던 공허감이 지금까지 이어진다면, 우리는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는 건지... . 


유년 시절에 겪은 전쟁의 폭력적인 경험을 통해 전쟁으로 인해 생긴 상처는 쉽게 아물지 못한다는 것을 사실적이고 절박하게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현재 벌어지고 있는 세계 곳곳의 전쟁 피해 아동 역시 이 공허와 단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임을 말하고 있다. 


작가는 전쟁 중에 태어난 아이는 결코 아이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지금도 지구 곳곳에서 어른의 시간으로 살아가고 있을 수많은 아이들을 생각한다. 그 아이들은 얼마나 긴 시간 동안을 공허와 허기와 상실과 두려움을 안고 살아갈 것이며, 그것들을 지우는 데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야할까. 



ㅡ 
 


[브르타뉴의 노래] 


작가는 유년기를 보냈던 브르타뉴 지방의 작은 마을 생트마린을 추억하고, 독자는 화자의 안내에 따라 그의 경험을 공유한다. 하지만 이 글은 단순한 회고나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추억담에 그치지 않는다. 그 이면에 있는 생트마린의 변화를 반추하며 현대인들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오래 전 마술과도 같았던 힘과 용기, 연민과 유대감, 그로인해 때때로 찾아오는 환희의 순간이 지금을 사는 우리들의 삶에 스며들어 살아나기를 바람한다.  


브르타뉴는 두 개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전통적이고 시대에 뒤떨어져 사람들에게 잊힌 브르타뉴, 향락과 쾌락이 들끓는 현대적 브르타뉴. 그리고 몇 년 후 건설된, 그 둘을 잇는 코르누아유 다리. 이후 생트마린의 모습은 차츰 변화한다. 아마존처럼 거대하고 야생적이었던 강은 사람들의 뱃놀이와 주차장 시설 때문에 리아스식 해안으로 변했고 상업시설이 들어서면서 완전히 도시적인 분위기가 되었다.  


작가는 프랑스 내에서 브르타뉴의 지리적 위치와 민족성, 그리고 역사에 대해 문학적으로 이야기한다. ​
언어의 소멸과 문화적 동화. 이제는 사라진 브르타뉴의 말言. 르 클레지오는 그들에게(아니면 스스로에게) 왜 저항하지 않았을까, 묻는다. 국가 통일을 기조로 국가적 교육 강령으로 브르타뉴어 사용을 금지하자, 브르타뉴 사람들은 자신들의 말이 사라지는 것을 (대부분) 수용했다. 그 언어를 사용하면 지긋지긋한 가난과 무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복장과 헤어, 생활 양식, 축제 및 문화 등 정체성을 드러내는 모든 표시들이 사라져갔다. 브르타뉴 지방에서 다수자였던 그들은 스스로를 문화적 소수 집단으로 전락시켰다. 



그는 과거 브르타뉴 사람들의 삶의 양식을 기억해 서술하며 독립적인 시대, 그리고 용기와 기개가 있던 시절이 사라져가고 모든 것이 획일화 되어 삶의 생기를 잃어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고향을 떠나 공장 노동자가 되기 위해 도시로 떠나는 젊은이들. 더 이상 가업을 잇는 이도, 고향을 지키고자하는 이도 없는 생트마린. 살충제에 의한 생태계 파괴, 전쟁의 상흔, 상실된 연민과 인간성, 오래된 것과 낡은 것에 깃든 시대정신과 유산의 가치를 폄하하며 물리적 효용성과 손익비용에만 기준을 두는 세태, 나약함과 무력함으로 치부되는 잃어버린 과거에 대한 향수. 



작가는 브르타뉴의 역사와 현재를 통해 극단주의 정당들의 포퓰리즘과 이민자 혐오 등을 꼬집으며 브르타뉴 지역의 자치권을 언급하면서, 이는 민족주의가 아닌 자유를 의미함을 분명히 한다. 그러면서 점차 복구되는 땅, 자연, 문화, 정체성에서 희망을 본다. 그의 희망이 브르타뉴에 한정된 것은 아닐테다.  


한때 어린 시절을 보냈던 마음의 장소가 사라져가고 변해가는 것을 보며 마치 보물을 도둑맞은 느낌처럼 마음이 흔들렸다는 작가의 말이 깊게 공감된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가슴 속에 간직할 유년 시절의 아름다운 사진 한 장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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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꼭두각시
윌리엄 트레버 지음, 김연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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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1918년 아일랜드 독립전쟁과 내전을 배경으로 시작하면서 가슴 아픈 역사를 통해 두 가문의 운명적인 인연과 한 집안의 비극사를 그리고 있다.  


1919년, 아름다운 페르모이의 킬네이에서 평화로운 일상을 보냈던 어린 소년 윌리 퀸턴은  블랙 앤드 탠즈 군인들의 광기어린 무장폭력과 학살로 인해 아버지와 두 여동생을 잃고, 어머니와 단 둘이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때마침 휴가 중이었던 두 고모들은 무사했으나 어머니는 그때부터 정신이 온전치 못한 채 살아간다. 우울한 유년 시절 끝에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이모와 사촌 메리앤. 메리앤은 그에게 킬네이 시절의 행복감을 상기시켜주는데, 이 만남은 또다른 비극의 시발점이 되고 만다.  








윌리, 메리앤, 이멜다 각각의 관점에서 시간의 순서대로 서술한다. 
18세기 후반, 아일랜드의 퀸턴가家 남자와 결혼한 영국 여성 애니 우드컴으로부터 서사가 시작된다. 1916년 아일랜드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나 여전히 진행 중인 혁명에 대한 논쟁들은 남지만, 격동의 시기에 피를 흘리며 살아간 사람들은 서서히 잊혀진다.


영국과 아일랜드의 대립, 가톨릭교도와 신교도의 대립, 약자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여성의 위치 등 작가는 역사적 사실과 세 등장인물의 개인적 삶을 엮어 시대의 역사와 개인이 별개일 수 없음을 전하면서 동시에 고통스럽고 가혹한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내는 이들이 건네는 용기가 독자의 가슴을 묵직하게 울린다.  


선의가 잔인하고 무자비한 칼이 되어 돌아와 한 가정을 파괴하고, 예측이 가능한 평안한 미래를 냉기 서린 잔혹한 운명으로 바꾸어 놓았다. 과거의 킬네이로 돌아가고자 무던히도 애썼던 노력은 허망한 물거품처럼 무의미해졌다. 온 몸, 온 마음을 다한 사랑조차 운명을 바꾸지 못했다. 그러나 그 사랑으로 견디고 버텨진 하루하루 역시 삶이 되고 역사가 된다. 


혹독하게 추운 2월의 겨울날에 임신한 몸으로 아무도 없이, 불편한 존재가 되어 페르모이에 내던져진 메리앤의 감정은 상상만으로도 막막하고 아득하다. 사라지고 싶어도 사라질 곳이 없고, 에비와 같은 용기조차 낼 수 없으니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겠나.   


불쾌할 정도로 한편이 되어 메리앤에게 영국으로 돌아가기를 압박하는 페르모이의 사람들의 권유가 무엇이었는지 책을 덮고 난 후, 내 나름으로 짐작해본다. 보호. 혼란의 시기에 윌리를, 나아가 윌리가 사랑한 여인을, 그리고 두 사람의 사랑을 지켜주고 싶었던 그들의 한결같은 마음. 조국을 지켜내려했던 아일랜드인들의 마음도 이와 같은 건 아니었을까. 



진실을 아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과연 상처가 될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우리에게, 혹은 나에게 있는지 자문한다. 한평생 짐이 될지도 모르는 그 진실이 가져다줄 파장과 모순을 납득하고 이해할 용기. 윌리와 메리앤의 선택은 불가항력이었나 무모한 치기였나. 


메리앤에게서 <펠리시아의 여정>의 펠리시아가, 윌리에게서 <루시 골트 이야기>의 루시가 떠올려 진 이 소설은 내가 읽은 윌리엄 트레버의 모든 작품 중에 가장 비극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수십 년의 긴 세월을 통과하고 얼굴을 마주한 그들은 아마, 나와는 다른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사족 
기브바첼러가 눈앞에 있었다면 주먹이 먼저 나갔을 것이다.  




※ 출판사 지원도서

내 존재의 모든 세부, 내 몸의 모든 혈관, 모든 흔적, 내 모든 친밀한 부분이 눈을 감고 쓰러지고 싶게 만든 그 부드러움으로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 킬네이에서 난 당신을 기다릴 거예요. 당신이 이 세계를 떠도는 동안 난 어떤 가혹한 운명에도 살아남을 겁니다. 외로움이 당신을 사로잡았다는 걸 난 이해합니다. - P264

난도질당한 삶들, 그림자의 피조물들, 그의 아버지의 말처럼 운명의 꼭두각시들. 우리는 유령이 되었다. - P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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