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모든 것에 안부를 묻다 - 시인이 관찰한 대자연의 경이로운 일상
니나 버튼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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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여름 별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장만한 시골집에서 지내면서 일상의 경험을 통해 주변의 자연과 생물들을 관찰하고 탐구하며, 토양과 균류에 이르기까지 넓은 범위의 생태를 이야기한다. 






 
동물은 여러 매체를 통해 인간에게 친숙한 존재이고 동시에 예술적 영감을 준다. 인간의 생활과 별개로 동물은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지적 능력과 의사 소통 능력이 훨씬 뛰어남을 쓰면서 새와 벌의 비행의 정교함과 정확함, 벌이 구축한 공동체 사회, 작디 작은 곤충들이 생태계에 미치는 큰 기여도, 수적 우세와 응집력으로 번성한 개미 등 아주 오래 전부터 기후와 생태계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적응해 온 동물들에 대해 서술한다. 더불어 인류사와 동물의 상관 관계를 짚으며 현재 자행되고 있는 동물 학대와 혐오, 동물의 생래적 습성과 이를 이용하는 것을 넘어 인위적으로 품종 개량을 서슴치 않는 인간의 이기, 인간의 관점(특히 감정적인 면)에서 동물의 생태적 패턴을 규정하는 우리의 오해와 그릇됨을  짚는다.  


저자가 말한 생물의 크기는 상대적인 개념이라는 문장이 기억에 남는다. 대부분 인간은 제 몸뚱이를 기준으로 크기를 재단하지만, 사실 지구에서 사는 생물들 중에 가장 흔한 크기는 적어도 인간이 아니다. 저자의 말대로라면 개미 정도의 크기가 가장 흔한 크기다. 야생 동물은 이 땅의 진장한 주인이자 땅을 지키는 파수꾼이라는 그의 말에 동감한다.  


ㅡ 
 
식물은 지구 생물체량의 99퍼센트를 차지한다. 굳이 수치적으로 따지자면 지구는 식물이 장악한 셈이다. 무엇보다 식물이 없으면 지구의 그 어떤 동물도 생존할 수 없다. 


저자는 식물이 가진 예민한 감각을 일종의 감정으로 간주해도 될지 묻는다. 집에서 식물을 키워본 사람이라면 '그렇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물이 부족하면 바로 윤기를 잃는 이파리, 너무 더우면 늘어지는 가지, 별다른 이상이 없으면 제때 피는 꽃, 어느 때부터인가 새롭게 올라오지 않는 선인장. 이틀 전, 고무나무의 줄기가 단단해지려면 맨 아랫단 잎을 떼어주어야 한다는 조언에, 수경으로 키우기 시작한 고무나무의 잎 한 장을 두눈 질끈 감고 떼어냈는데 그 자리에서 하얗게 올라오는 수액을 보고 속상했다. 얘가 눈물을 흘리네, 싶더라는. 이러니 식물에게 감정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겠나. 식물은 지구에서 생태와 환경을 가장 잘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존재다. 피터 싱어는 식물이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는데, 난 그 의견에 반댈세.


동물만큼이나 식물도 인간에게 혹사당하는 중이다. 인위적 품종 개량, 의도적 멸종(대표적인 사례가 바나나), 대규모 플렌테이션에 의한 엄청난 양의 물 소비, 농약 및 살충제 사용에 대한 심각성은 말하기도 입이 아픈 지경이다. 


저자는 시골집에서 생활할 때 애써 잔디를 관리하지 않아도 마당이 저절로 자라며 그들이 자체적으로 스스로를 돌볼 수 있다는 사실에 해방감을 느꼈다고 썼다. 이에 관련한 글을 읽으며서 옛날에는 집 옆에 <보호하는 나무>를 심었다는 스웨덴 전통 이야기가 눈에 들어왔다. 집 마당에 심은 나무 한 그루에 온전한 먹이 사슬 형태를 이룬다는 것만으로도 참 경이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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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생명의 역사를 생물학적, 사회 및 사회과학적, 환경 및 인문학적 관점에서 탐구하면서 지구의 역사를 다양한 측면에서 서술한다. 또한 공장식 축산을 비롯한 현재 대두되고 있는 사회 문제들을 지적하면서 생태계 오염에 따른 지구 온난화와 기후 변화에 대해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생물 종의 다양성과 개체수 감소의 우려를 나타낸다. 인간 외 생물들이 야생성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공간 확보와 환경 조성의 중요성 또한 짚는다. 


읽으면서 동물권에 관련한 책들이 생각났는데, 동물이 내재적 가치를 가진 존재인지에 대한 여부와 그에 대한 동물의 권리 논쟁은 고대부터 이어져왔음이 떠올려진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아퀴나스, 칸트, 벤담, 싱어, 레건에 이르기까지 동물의 도덕적 지위 여부에 대한 주장은 달랐는데 근래 들어 반려 동물이 확대되면서 동물의 내재적 가치를 인정하는 분위기가 커지고 있다. 그러나 모든 동물이 이와같은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다. 실험 동물에 대한 찬반 대립은 여전하고, 경제적 측면과 생태적 측면이 격돌하는 순간에는 거의 다 경제적 측면이 우위에 놓이며, 공장식 축산의 가혹한 환경은 동물의 내재적 가치와는 아주 거리가 멀다. 이러한 논쟁 역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다.  


 
서문에는 자연에 들어선 인간은 손님으로서 방문을 하는 것이라고 썼는데, 이 문장이 무척 공감이 된다. 한여름에 산장에 며칠 머물다보면 특히 이 말에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다. "아, 내가 이들의 공간에 침투한 거대한(?) 이방인이겠구나"라는 생각.  


책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데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인간 외의 생물들과 유대하며 살아야하는 이유를 철학, 문학, 역사, 과학을 통해 설득한다. 그들이 보여주는 자유와 단합, 고독과 유대 사이의 역학.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존중해야 할 것임을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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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
모드 방튀라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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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화자인 아내가 남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절절한 고백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두 아이를 낳고 15년차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아내의 사랑은 어째 섬뜩하다. 당장, 남편의 다정함, 부부 간의 안정된 유대감, 충분히 예상되는 평안할 그들 미래에 만족하지 못한다. 이보다는 더 열렬하고, 남편이 외도를 하고 거짓말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통제되지 않는, 말초적 자극의, 그런 맹렬한 사랑을 갈구한다. 그런데 소설이 진행될수록 처음과는 다른 화자의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그녀의 격한 말투와 실제 남들에게 보여지는 모습은 상당히 거리가 있다. 심지어 남편은 아내를 '내 순둥이'라는 애칭으로 부른다(소설에 그냥 쓰인 단어는 없다). 







 
서술자이자 주인공인 아내의 관심사와 초점은 오로지 남편과 사랑에 맞춰져 있다. 거기에는 두 아이를 포함한 누구도, 그 무엇도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 그녀는 어떤 사람일까? 


아내는 부르주아층 남편과 결혼해 단란한 가정을 꾸렸고, 고등학교 교사이자 프리랜서 번역가이며, 자타가 인정하는 미인이다. 남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여지는가에 대해 집착해서 스스로를 적당히 과장하고,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타인과 관계에 있어서 상대를 과도하게 칭찬해 스스로를 한없이 낮추는 방식을 선택하고, 부부 애정 정도를 다른 부부와 비교하며 우위에 있음을 확인하고 싶어한다.  


그렇다면 오매불망하는 남편에 대한 그녀의 태도는 어떨까?
아내는 자식도, 부모도, 친구도 필요없다. 오직 남편만 있으면 충분하다(심지어 남편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는 제 자식들을 질투하고, 아이가 세상을 떠나는 건 견딜 수 있어도 남편이 세상을 떠난 것은 견딜 수 없다고 말한다). 남편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확대 해석하며 시비를 따지고 집착하면서 남편이 떠날까봐 불안을 안고 산다. 남편에 대해 자신이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고 불쾌하게 여기며, 남편이 그녀가 예측한 범위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면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쳐 막연한 의심을 품는다. 그리고 남편이 그녀와 결혼한 것을 후회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한다. 남편의 우편물과 자동차 네비게이션 행선지와 이메일을 확인하고, 소지품을 뒤지는 그녀는 결국 의부증 증세까지 보인다.  


ㅡ 

이쯤되면 독자는 아내가 점점 불편해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여성을 좀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남편의 직업은 멋지고, 학력이 화려하고, 외모가 출중하고, 스포츠에 능통하고, 부르주아 가정에서 성장한 반면 서민 가정에서 태어난 아내는 미모 외에는 내세울 게 없다고 생각해 부부의 관계가 불균형하다고 여긴다. 남편을 곧 자신과 동일시하면서 그의 가치가 곧 자신을 내세우는 도구가 된다. 또한 남편의 행위 하나하나가 자신에 대한 애정 척도가 된다(예를 들어 남편이 장을 봐온 물품이 많으면 많을수록 자신을 더 사랑한다고 느끼며 영수증에 찍힌 액수를 보고 남편의 사랑을 계량화한다). 남편에게 보여지는 모습과 남편이 좋아하는 모습에 집착하고, 무슨 책을 번역하든 결국 남편과 연관지어 생각하는, 한마디로 모든 사고 체계가 남편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누군가는 그녀의 자격지심이나 낮은 자존감을 이유로 들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아내를 통해 우리는 반문할 수 있다.
여성에게 강요되는 모성애, 성적 욕망의 억압, 순종적이고 헌신하며 무엇이든 능숙하게 해내는 슈퍼우먼의 현신. 무엇 하나 오롯이 본인 위주의 삶을 설정하기 어려운 기혼 여성의 삶을 고스란히 보여준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내가 교사일을 좋아하는 이유는 수업 시간에 자신이 관심의 대상이고 수업 시간만큼은 그녀가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순둥이'가 아닌 팜파탈을 꿈꾸는 그녀가 막심을 만날 때면 남편 앞에서 포장했던 모습을 모두 거둬내고 자신의 성적 욕구에 충실하며 민낯을 드러내는데, 그녀가 집착하는 사랑을 덜어낸 육체적 관계에서 훨씬 편안한 모습을 보인다. 소설을 완독하고 나면 그녀가 집착하는 건 정작 사랑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 <에필로그>를 읽다보면 아내가 정말로 착각하고 있는 점은 따로 있다. 


나는 왜 서글퍼지는 거지....... . 




※ 도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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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거기 있었다
함정임 지음 / 현암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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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취향저격이다.
읽고 있는 중에도 계속 눈에 밟히는, 올해 읽은 에세이 중에 가장 마음에 들어온 책이다. 


이 책은 작가를 사로잡았던 소설가, 시인, 화가, 예술가 들의 생애 공간과 영면처를 찾아간 묘지 기행이다. 지면에 언급된 인물들과 그들의 작품, 그리고 사이사이 발췌한 문장들의 주인(?)까지 꼽으면 수십 명 인사가 책 안에 있다. 단순한 기행을 넘어 영면한 이들의 작품들과 죽음 이전의 삶을 무겁지 않게 톺아보는데, 작가의 인문학적 시야가 돋보인다.  


프랑스의 파리에 있는 몽파르나스, 팡테옹, 몽마르트르, 페르 라셰즈, 오베르쉬르우아즈로 순례를 시작한다. 반 고흐를 따라 암스테르담에서 아를, 파리, 고흐의 마지막 거처였던 오베르쉬르우아즈까지의 여정을 짚고,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생애 마지막 3년을 보냈고 그곳 성의 예배당에 묻힌 앙부아즈와 다빈치의 이탈리아 고향 마을을 여행한다. 더하여 생폴드방스, 루르마랭, 마르세유, 세트, 드럼클리프, 크레타,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 루앙, 모스크바, 야스나야폴랴나, 베네치아, 베를린, 빈, 샤를빌메지에르 등 수많은 도시와 외곽 마을, 그리고 그곳에 잠든 수많은 이들의 이야기가 다정하고 아름다운 사진들과 함께 서술한다.  







 
기억에 남는 몇 가지들을 짚자면, 
책의 처음에 등장하는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묘지. 그들은 합장되어 있는데, 서로의 자유를 존중했고 사실혼 관계에 가까웠음에도 한 집에서 살지 않았던 그들이 과연 합장을 원했을지에 대한 가벼운 의구심. 그리고 어머니를 의부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했던 보들레르가 의부의 가족묘지에 묻히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짐작. 이들의 묘지를 따라가면서 든 생각은 비록 본인에 관한 사안이라도 죽음 이후에는 고인의 손을 떠났으니 자신의 죽음 뒤를 걱정하는 건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유언을 남기면 뭐하냐고, 말을 안 듣는데). 반면 착한 아들도 있다. 베케트 가까이 묻어달라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죽어서 파리로 이사온 수전 손택. 정말 지척에 묻혔더라.   


프랑스 파리의 묘지 중 페르 라셰즈 묘지는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몽파르나스, 몽마르트르, 팡테옹도 유명하지만 페르 라셰즈는 파리에 있는 공원과 20개의 묘지 중에 가장 규모가 크고, 파리에서 가장 넓은 녹지를 자랑한다고. 당대의 건축가와 조각가들이 다양한 재료와 스타일로 기념문과 기념비를 만들어 놓아서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는데, 개선문과 함께 파리에서 가장 많은 방문객이 찾는 명소이기도 하고,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어 박물관과 마찬가지로 중요하게 안내되어 있다고 한다. 발자크, 프루스트, 조르주 페렉, 짐 모리슨, 폴 엘뤼아르, 에디트 피아프가 잠들어 있다. 그런데 페렉의 유골은 봉안당 벽에 잠들어 있다. 공간에 대한 애착을 보인 페렉이 잠든 곳이 네모칸 작은 벽이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쓸쓸한 느낌이 들더라는. 


대체로 국립묘지 격인 팡테옹에 안장되거나 특별한 사연이 있거나 혹은 가족이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많은 인사들이 가족묘지에 안장되어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꽤 흥미로웠다. 그리고 파리의 묘지에는 프랑스인 외에도 많은 외국인들이 상당수 영면해 있는데 문득 그들에게 파리는 어떤 의미였을지도 궁금해졌고.  


기억에 남는 묘지는 아무것도 세우지 말고 소박하게 묻어달라는 톨스토이의 당부대로 그믜 묘는 그야말로 푸른 잔디뿐이다. 말년의 그의 모습을 떠올리면 그와 잘 어울리는 묘지다. 다른 하나는 빈에 있는 쇤베르크의 묘. 빈 중앙 묘지에는 음악가군이 배치되어 있는데, 유독 쇤베르크만이 혼자 뚝 떨어져 있다. 흰 대리석을 육면체 비석 모서리를 바닥에 꽂아 기우뚱하게 세워놓은 형상이다. 마치 현대 미술 작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 인상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은 따로 있는데, 파리 시민에게 죽음의 공간이 일상 속에서 조화롭게 자리를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묘지의 벤치에서 독서를 하고, 한가로이 산책을 하는 그들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묘지의 바람을 느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고요한 한적함이 얼마나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는지 알 것이다. 그래서인지  파리뿐 아니라 프랑스 곳곳의 공동묘지는 상당히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더라는. 그래서 사진에서 보여진 장소들의 공기를 맡아보고 싶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잘 사는 것만큼이나 죽음을 잘 맞이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꽤 오랫동안 역사 답사를 다니면서 가끔 일정에 문학에 등장한 지역 또는 작가들의 생가를 넣기도 하는데, 차후 본격적으로 문학 중심 답사를 다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스무 살부터 그를 사로잡았던 이들을 좇았다면, 나는 나의 청춘 시절을 붙잡아 주었던 문학 작품의 관련한 장소들을 좇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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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생트의 정원 문지 스펙트럼
앙리 보스코 지음, 정영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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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책을 펼치면 소설 시작부터 문장에 마음을 뺏긴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_스완네 집쪽으로>를 떠올리게 하는 문장은 그 이상으로 섬세하고 아름답다. 보리솔과 그 주변 경관의 소박하지만 수채화 같이 투명하고 평온한 시골 풍경을 아주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또한 조용하고 평화로운 작은 마을 아멜리에르에 대한 설명과 묘사 역시 당장에라도 가보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로 아름답게 묘사한다. 
 







소설은 신화 혹은 동화같은 이야기이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미스터리적인 측면도 있다. 사이사이 뜬금없이 등장하는 메제미랑드라는 인물에 대한 궁금증과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련의 초자연적인 상황을 추적하는 그를 통해 껍데기만 남은 것같은 소녀 펠리시엔의 숨겨진 비밀, 그리고 그녀와 무관해보이지 않는 화자 메장의 꿈이 암시하는 바에 대해 환상적으로 서술한다.  


이 소설에서 시종일관 느껴지는 것은 땅과 자연의 생명력이다. 그리고 이 자연 속에서 고독으로 침잠하는 양치기 아르나비엘은 성인에 가까운 모습으로 그려진다. 앎의 지혜와 오랜 경험과 깊은 숙고에 따른 심오한 감정으로 동물을 대하는 양치기들이 터득한 삶의 깨달음, 그리고 내면과의 대화를 음미하는 고독을 영유하며 겸손한 그들을 향한 순수한 존경, 동시에 현재는 이런 지혜의 전승자 명맥의 수가 적어지는 것에 표하는 작가의 안타까움이 메장을 통해 고스란이 드러난다.  


보리솔의 게르통 부부 역시 양치기와 같은 선상에 있다.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자신들에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그들의 정원은 마치 낙원처럼 그려진다. 그런데 그들의 땅에 없는 것이 바로 '물'이다. 산간 지역인 보리솔은 이상하게 샘이 말라서 늘 물이 부족하다. 이러한 곳에 맡겨진 소녀가 펠리시엔이다. 집시 여인이 버리다시피 떠맡겨놓은 소녀는 마치 영혼이 없는 것처럼 무력하다. 보리솔의 '샘'과 소녀의 '영혼'은 무엇을 상징할까.  


소설의 결말만 놓고 보면 우리 삶에 진정으로 필요한 건 사랑과 이타심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하지만 의문이 든다. 게르통 부부, 메장, 시도니, 그들 모두 펠리시엔을 아끼고 사랑했다. 그런데 왜 소녀의 영혼은 그들 사랑에 부응하지 않은 걸까? 그렇다면 아무 반응도 없는 소녀를 그들은 왜 사랑한 걸까? 메장이 생각하기에 그들의 관심과 걱정이 소녀에게 가닿지 않은 것이리라 짐작한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소녀의 진짜 이름을 몰랐기 때문이리라.  



소설은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환상적 측면이 더욱 두드러진다. 
작가는 탐욕스러운 마법사의 저주에 걸린 채 보리솔에 맡겨진 순간부터 펠리시엔이 원래 이름을 되찾는 과정에 동참했던 그들을 통해 우리가 사랑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로서 살아가야만함을 말하고자 했던 것 같다. 


책을 덮으면서 다시 살아날 보리솔이 눈앞에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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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들 환상하는 여자들 2
브랜다 로사노 지음, 구유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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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직접적 서술자인 기자 조엔과 그녀의 인터뷰이인 펠리시아나를 화자로 삼아 그 두 사람이 번갈아가며 서술한다. 두 사람의 서술을 따라가다보면 오랜 시간 반복되어 온 여성(gender) 서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가정폭력, 성 소수자 학대와 혐오, 여성 차별 및 강간과 살해, 데이트 폭력 등 등장인물들이 살아오면서 크고 작게 겪어온 일들이다. 그럼에도 그들 곁에는 그들을 존중하고 격려해주는 이들이 있었다. 펠리시아나는 치유자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은 코스메 할아머지의 칭찬이었다. 할아버지는 말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그녀를 사랑하고 존중했고, 팔로마는 항상 조언자를 자처했다. 조에 역시 엄마의 격려로 포기 하지 않고 성과를 이뤘고, 레안드라 또한 아버지의 신뢰와 기다림에 부응했다. 존경하는 혹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의 인정과 존중은 얼마나 든든하고 의지가 되는가.  


펠리시아나 아버지는 딸에게 버섯과 약초가 자라는 곳을 보여주면서 바로 이곳에 책이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읽고 쓰는 법을 모른다. 펠리시아나는 자신은 미래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고, 점쟁이가 아니라고, 언어를 통해 현재를 본다고 말한다.  펠리시아나는 자신의 언어의 치유자라고 하지만 정작 그녀는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른다.


그렇다면 소설에서 끊임없이 반복하는 '언어'와 '책'은 무엇을 의미할까. 상대의 입장과 마음을 보고 듣고 공감하고 이해하려는 진정성 있는 노력,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한 최소한 배려가 담긴 솔직한 말. 사심없는 축복과 조언과 위무가 '언어'라면, '책'은 그들이 개척한 역사의 흔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술자는 한 여자를 제대로 알려면 먼저 스스로를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태어나고 성장한 나라가 다르고, 관습이나 정서도 다른 펠리시아나와 조에, 그리고 그들 자매의 삶의 궤적은 유사하다. 그들의 서사는 곧 현재까지 이어져오는 여성(gender)의 역사를 대변한다.



소설에서 '마녀'는 생물학적 여성만을 지칭하는 것으로 읽히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의 성(sex)으로 규정받지 못해 '마녀'라는 이름으로조차 불리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집안 최초의 여자 치유자로서 고정관념과 혐오의 틀을 하나둘 깨며 앞으로 나아간 펠리시아나처럼, 지금도 그릇된 관습과 세상이 그어놓은 한계와 차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수자 및 사회적 약자 계층의 편에서 공정사회의 길로 가기 위해, 폭력과 살해의 위험에서 살아남고 존중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서로에게 '언어'와 '펜pen' 되는 이 세상 모든 '마녀들'의 발걸음을 지지하고 응원한다.




사족
조에의 아버지, 참 좋은 사람이고 좋은 아버지다. 소설 말미에 레안드라가 학교에 불을 지른 이유와 굳이 그 시각에 방화를 저지른 이유가 밝혀지는데, 이에 대한 합의점을 도출하고 앞장서 나서준 아버지를 보면서 부녀가 참 멋있더라는(방화가 멋있다는 건 아니고). 아버지가 사십대 나이에 세상을 떠났을 때 그들 가족의 상실감이 얼마나 컸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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