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의 말을 할 수 있는 사나이 환상문학전집 38
안드루스 키비래흐크 지음, 서진석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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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유인원과 언어 및 삶의 터전을 공유하는 고대 설화에서 보여지는 세계관을 상징하는 숲과 기독교 문명 세계를 상징하는 마을로 나뉘는 소설은 석기시대 - 청동기 및 철기 시대 - 중세 시대를 한 차원에 배치한다.  
 



 



레메트는 숲이 아닌 마을에서 태어났다. 사람들에게 숲에서 나와 마을에서 살자고 한 사람은 아버지였고, 가족은 모두 마을로 옮겨갔으나 어머니는 마을 생활을 싫어했다. 그녀는 작물과 빵처럼 가공식품(혹은 식재료)을 쓰레기라고 말했지만, 아버지의 생각은 달랐다. 아버지는 새로운 시대의 사람이 되고 싶어 했고, 새로운 시대의 사람이라면 암울한 숲이 아닌 밝은 태양과 하늘 아래 마을에 사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아버지는 언어와 문명에 대한 호기심과 이를 터득해 나가는 스스로를 뿌듯해 한다. 그와 동시에 숲의 사람들이 사용했던 '뱀의 말', 즉 숲의 언어는 잊었고 그로인해 그는 마치 숲에게 대가를 치르듯 죽임을 당한다. 또한 어머니가 밀을 재배하고 수확하는 노동을 두고 '여름 내내 시커먼 개미'라고 비유적으로 표현한다면, 아버지는 숲에서 열매를 따고 사냥을 하는 행위에 대해 '거지같은 삶'이라고 말한다.  


소설의 시작에 해당하는 이 대목은 현대 사회에서 노동과 (과학)기술의 발달을 바라보는 시선에 닿아 있으며, 문명과 생태의 공존과 조화 측면에서 고찰해볼만하다. 이러한 점은 이후 요하네스와 레메트가 뱀 인츠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나타나는데, 뱀을 친구라고 주장하는 레메트에게 뱀과는 친구가 될 수 없다며 꼬챙이로 인츠를 죽이러 달려드는 요하네스를 보면서 엘크의 옆구리를 꼬챙이로 찔러 죽이는 숲 사람, 즉 자신들을 떠올리며 당황해한다.


그리고 유인원은 마을 사람들보다 오히려 동물을 죽이고 철을 갈취하며 마을 사람들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숨기지 않고 제 삶의 방식만 옳다고 여기는 외곬의 숲 사람들 생활방식을 더 비판하는데에서 유인원들이 보다 더 훨씬 유연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점들은 자연과 인간을 분리해 인간 외 생물을 지배할 대상으로 삼는 인간중심적 사고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와 유사한 관점은 소설 곳곳에 나타난다. 예를 들어 래메트가 마을에 내려갔다가 우연찮게 요하네스가 소를 치료하는 과정을 목도하게 되는데, 요하네스는 소를 치료한다고는 하지만 정작 소의 고통은 외면한다. 이를 지켜본 레메트는 차라리 소를 죽여 고통을 줄이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다만 요하네스는 소를 자산으로서 접근했다면 레메트는 고통을 느끼는 생명체로 바라봤다는 것이다.   


ㅡ 


소설이 진행할수록 눈여겨 볼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중에서 레메트의 어릴 적 친구인 패르텔을 꼽을 수 있다. 숲에서의 삶을 견디지 못하고 마을로 이사를 간 패르텔의 가족. 그가 마을에서 소위 기독교 문명 사회에 적응하고 동화되면서(과하게 말하면 세뇌 당한듯한) 한때 자신이 살았던 숲의 생활을 미개하고 야만적이라고 낮잡아 말하는 패르텔이 변화하는 과정은 눈에 띈다. 더불어 숲과 땅, 그 안에 사는 생명체들을 사랑하지만 세상과 고립된 채 숲에서 평생 살 수 있을지 고민하는 레메트의 모습을 통해 작가는 이에 대해 비판의 시선보다는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말하고자함이 더 크게 다가왔다.


숲에서의 삶을 고집하는 집단 안에서도 광신적이고 왜곡된 사람은 존재한다. 탐베트나 윌가스는 자연과 숲에서 찾아야할 본질보다는 오랫동안 이어져 온 구습만을 폭력적으로 고집한다. 어쪄면 숲 공동체의 쇠락은 시대의 흐름뿐 아니라 이와같은 사람들에 의해 더 가속됐는지도 모를 일이다.   



소설에는 유의미한 상황들이 많이 보인다. 
엘크 고기를 물 건너온 포도주와 함꼐 마시는 최초의 결혼식이 된 레메트와 히에의 결혼식. (하느님을 포함한)영적인 존재를 신봉하면서 그 안에 인간의 안위는 존재하지 않는, 그럼에도 끝없이 구원을 믿으며 집착하는 인간의 광기. 같은 시각에 마을과 숲에서 동시에 일어난 죽음. 자발적으로 철창에 갇혀 인간을 사랑하고 존경한다는 곰들. 


ㅡ 


자연과 문명의 공존과 조화 차원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살메와 믐미, 그리고 유인원 부부다. 인간 살매와 곰 믐미가 결혼했고, 이 소설에서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가족의 형태다. 그리고 유인원 부부 역시 모두가 도살당하다시피 죽어가는 숲에서 살아남는데, 그들은 숲의 사람들이 동물을 강압적으로 사육하고 도륙하는 것에 대해 반감을 품었던 이들이다. 또한 마을 사람들이 숲의 생물들을 죽음에 몰아넣은 것처럼 마을 역시 폐허가 되었다.  


이처럼 지배와 피지배 구도가 아닌 수평적 관계의 상생이야말로 인류가 추구해야하는 지향점임을 말하고 있는듯 하다. 소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인간다움'이란 무엇일까에 물음표를 놓는다. 인간이라면 과연 '살아있기만 한 것'에 만족할 수 있을까? 사회에 동화하지 못하고 고립된 삶이 진정한 인간다운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삼촌 보텔레는 사람들이 뱀의 말은 잊은데다 뱀의 말을 배우는 것이 어려워서 마을로 내려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요하네스는 숲의 삶이 원시적이고 힘들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쉽지만은 않은 것이 삶이다. 뱀의 말을 배우것만큼이나 문명 세계에 맞춰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리라.  


과거 속에 살고 있는 그들과 그들 세계에서 마지막 존재인 레메트. 집안의 마지막 남자, 숲의 마지막 남자, 히에의 마지막 남자, 마을의 마지막 이교도, 뱀의 말을 할 수 있는 마지막 존재.  


끝으로 숲의 사람들이 그토록 염원했던 북녘 개구리가 있는 곳, 그리고 그곳의 상징성. 이는 보고 느끼고 깨닫고자 노력하는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라고 이해했다. 쓰다보니 어떻게 '살고 있다'가 아닌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질문하고 답을 찾는 과정이 '인간다운 삶'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 헛헛하고 쓸쓸하다.



※ 출판사 지원도서
 

새롭게 열리는 세상에서 조용하고 무미건조하게 썩어 가는 나의 지식은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부질없었다. 갑자기 비참해진 미래가 눈 앞에 펼쳐졌다.(중략) 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 마을에 가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밭을 갈고 빵을 먹으로 살아야 할까? 난 그곳에 살기 싫었다. - P268

그들의 성실한 삶은 이제 끝이 났다. 그들의 세상, 그들의 이야기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 P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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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의 그림자 속에서
알비다스 슐레피카스 지음, 서진석 옮김 / 양철북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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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차 대전 이후 대부분의 사람들은 패전국 독일, 사상 유래 없는 대학살 사건의 피해자이자 이스라엘을 세운 유대인, 승전한 연합국, 무엇보다 강대국으로 부상한 두 나라의 양강 구도의 재편 등을 떠올린다. 그러나 졸지에 전쟁의 가해자가 되어 처참한 삶과 죽음을 겪어야했던 동프로이센 사람들. 소설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녀와 가족, 그리고 주변 인물들의 삶을 통해 모든 것을 잃고 최소한의 인권조차 보장받지 못했던,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그들의 이야기를 한다.  






얼어붙은 네무나스강을 건너려는 독일 아이들. 러시아 군인은 독일 아이들을 향해 수류탄을 던지고, 부상당한 아이들은 얼음 구멍 속에서 허우적댄다. 동프로이센 거리에서 독일인의 시체를 보는 건 어렵지 않고, 살아있다한들 러시아가 점령한 땅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린다. 러시아 군인들이 가족을 데려와 살고 있던 독일인 가족을 내쫓고 집을 차지하면 원래 주인인 사람들은 땔감 창고에 거처를 마련한다. 여자와 아이와 노파만 남은 마을은 러시아 군인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다. 붉은 군대가 마을에 쳐들와 폭력과 약탈을 일삼고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가족들과 함께 네무나스강으로 몸을 던졌다.


동프로이센 사람들은 굶주림의 끝에 쥐를 잡아먹고, 나무껍질을 뜯어 먹는다. 여자들은 군인에게 두들겨 맞고, 고작 열 살 전후의 아이들은 가족의 생계 혹은 배고픔에 지쳐 국경을 넘거나 이것조차 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스스로를 시장에서 파는 물품으로 내놓아 제발 자기를 사달라고 애걸한다. 그들에게 '인간다움'이란 사치가 되어버렸다.  


레나테가 고양이한테 우유를 주는 여자에게 당신이 살고 있는 그 집이 빼앗기기 전 자신들의 집이었다고 말하자 그녀는 "우리 잘못이 아니야"라고 변명하듯 말한다. 러시아 여자는 자신들, 즉 전쟁과 무관한 러시아 시민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내면에서는 부끄러움을 느꼈을테다. 전쟁은 모든 사람에게 각각 다른 형태의 수치심을 안긴다. 


남편과 아이와 친구를 잃고, 죽을 기운조차 없는 지긋지긋한 삶. 여전히 살아 있는 그들의 바람은 그저 죽음뿐이다. 



이 소설에서 의미심장한 부분은 에바가 아이들에게 가족의 이름을 외우도록 일러두면서 자기가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 그리고 독일인임을 잊지말라고 당부한다. 하지만 리투아니아로 도망치듯 가버린 언니를 뒤쫓다 놓쳐버린 레나테가 살기 위해 기계처럼 외운 말은 에바가 훈련하듯 당부시킨 내용과는 달랐다. 


"내 이름은 마리톄예요." 



열린 결말로 끝나는 소설은 그뒤 레나테의 삶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얘기해주지 않는다. 다시 길 위로 나서서 정처없이 세상을 떠돌게 되는지, 스타셰를 만났던 것처럼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게 되는지, 독자는 확인하지 못한다. 다만 레나테가 살아남아 전쟁 직후 동프로이센의 엄혹함과 처참함, 그리고 그보다 훨씬 이전에 행복했던 때를 기억하면서 동시에 그 시절을 증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숨 작가의 <한 명>을 읽으면서 너무 참혹하고 끔찍해 울면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의 감정과 많이 겹쳐졌다. <늑대의 그림자 속에서>를 읽는 동안 "어떡하냐..."라는 말을 연신 내뱉었고, 너무 속상하고 마음이 아파서 내내 명치 끝이 뻐근했다.  


전쟁이라는 격류에서 승자는 과연 누구일까. 
전쟁은 이긴 자도, 진 자도 인간을 '인간'으로서 남겨두지 않는다. 아주 오래된 역사의 수많은 사건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음에도, 세계는 여전히 전쟁이라는 도구를 사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지금도 어딘가에서는 또 다른 '레나테'가 '마리톄'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작가는 소설 속 레나테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레나테'들을 기억하기를 바라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 출판사 지원도서

그 여인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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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르칸트
아민 말루프 지음, 이원희 옮김 / 교양인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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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출간한 소설인데, 우리나라 번역본은 25년만에 복간됐다.  
11세기 셀주크 제국과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페르시아의 근현대를 걸쳐 오마르 하이얌의 필사본을 매개로 두 시대를 잇는 대서사를 그려낸다. 오마르 하이얌, 하산 사바흐, 니잠 알물크, 빅토르 앙리 로슈포르, 자말 알딘 알아프가니, 모건 슈스터 등 실존 인물과 실제 역사적 사건들에 작가의 상상을 엮은 소설은 벤저민이라는 19세기 인물을 서술자로 내세워 오마르 하이얌이라는 천재 지식인이자 시인을 중심으로 11세기 이슬람 세계와 근현대 격동의 시대에 오마르 하이얌의 필사본을 좇아 동방으로 떠나는 벤저민의 여정을 따라간다.   


앞에서 언급했듯 소설의 절반은 11세기, 나머지 절반은 19세기 말~20세기 초를 배경으로 서술하는데 전반부를 읽으면서 하산 사바흐와 아사신 교단에 대한 자료를 찾아 읽느라 시간이 조금 지체됐다. 아사신의 공동체 교리를 읽으면서 이슬람 지하드에 대한 생각이 자연스레 따라왔는데 현재에는 많은 부분이 와전되거나 혹은 왜곡된 해석으로 쓰이는 경우가 적지 않은 듯 하다.   


그리고 19세기에는 페르시아의 입헌제(민주제)를 놓고 내분과 더불어 식민제국들의 첨예한 이권 다툼 등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세계 열강의 전쟁터였던 페르시아의 근현대사를 단편적으로나마 들여다 볼 수 있다.  


ㅡ 


소설에는 여러 매력적이고 인상적인 부분들이 많지만 일일이 언급하자면 스포일러가 되기에 쓰기를 아낀다. 실존인물이든 허구적 인물이든 각각의 인물들이 갖는 입체감이 커서 영화로 만들어도 무척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렴결백하고 자아와 신념이 확실하며 돈과 권력의 무상함을 이른 나이에 이미 꿰뚫고 있는 천채 학자이자 고결한 시인인 오마르 하이얌, 무소불위의 권력을 쥔 실력자로서 제국의 태평성대를 제손으로 이뤄냈다는 자부심으로 가득 찬 재상 니잠 알물크, 다른 세상을 꿈꾸며 이스마일파의 부흥을 염원한 하산 사바흐, 당시 여성이 갖는 한계를 뛰어 넘어 제국을 손에 넣고 싶었던 야심가 술타나 테르켄 하툰과 자한, 페르시아의 입헌제와 민주주의를 열망한 파젤, 그리고 조국과 시詩와 벤저민을 사랑한 시린 등 그들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그려졌다.  


소설에서는 정치적인 부분을 서술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 서사에서 가장 어리석고 무능한 자는 술탄 말리크 샤와 무함마드 알리 샤. 의지나 신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래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휘둘리며 분노와 자존심만 가진 허수아비 왕. 무능한 사람이 권력을 쥐고 수장이 되면 어떻게 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두 인물이다. 그리고 강력한 집단을 만들기 위해 사건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지도 않은 채 두 아들을 참형시키고, 아내와 딸을 내쫓는 하산 사바흐의 공포에 가까운 엄격한 공정함은 과연 그를 따르는 이들의 귀감이 되었을까? 


ㅡ 


책을 읽다보면 오마르 하이얌이 벤저민 O. 르사즈로 환생한 게 아닐까싶을 정도로 두 사람의 성향이나 삶의 궤적이 닮아 있다. 권력과 부富에 관심이 없고 야심과는 거리가 멀지만 본의 아니게 정치적 상황에 말려들고, 그들의 권유가 뜻하지 않게 누군가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며, 이것이 한 시대에 직간접적으로 파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완성하지 못한 아름다운 여인과의 운명적 사랑, 그리고 시를 향한 열망까지.   


벤저민은 필사본을 좇아 동방의 땅으로 왔지만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는 투쟁에 깊이 관여하게 됐고, 그로인해 친구를 잃었다. 하워드 바스커빌의 페르시아를 향한 동경을 부추기기까지했던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자신의 우발적이고 부차적인 역할에 대해 회의를 느낀다. 이러한 회의 또한 오마르 하이얌과 흡사하다. 



오마르 하이얌이 유명한 이유는 의학자이자 천문학자요 수학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시詩다. 그가 학문에 매료되는 이유도 학문 속에서 최상의 시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나는 오마르 하이얌의 삶이 시 그 자체로 느껴졌다.  


하산 사바흐의 비밀 철장 벽감 안에 있던 오마르 하이얌의 필사본이 800년의 세월을 지나 어떻게 미르자 레자의 손에 들어갔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필사본이 손에 손을 거쳐 이어져왔고, 우리 역시 후대를 이어 삶을 지속한다. 소설은 우리에게 삶과 시의 영속성을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저런 것들을 떠나서 일단, 재밌다. 
올해의 소설 목록에 올린다.  




※ 출판사 지원도서

나는 이 도시를 혐오하지 않으리라. 설사 미역 감는 여인이 환영일지라도. 설사 칼자국 난 얼굴의 사내가 현실일지라도. 설사 이 신선한 밤이 나를 위한 마지막 밤이 된다 할지라도.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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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만든 가난 - 가장 부유한 국가에 존재하는 빈곤의 진실 Philos 시리즈 25
매슈 데즈먼드 지음, 성원 옮김, 조문영 해제 / arte(아르테)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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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모든 가난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한 이 책은 가난의 원인을 이해하려면 가난한 사람들 너머를 들여다봐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한다. 저자는 축적된 현장 연구 자료와 각종 보고서, 사회과학 연구들을 결합해 개괄적으로 설명한다.


저자는 노동, 주택, 금융, 복지 부문으로 나누어 분석하면서 미국 사회복지의 문제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퍼 주는' 게 아니라 적절하게 사용되지 못하고 있음을 짚는다.  








저자는 가난은 불안정과 육체적 통증과 트라우마를 남기며 자유를 상실시키고, 사회는 이를 치료하는 데 투자하지 않아서 가난한 사람들은 각자 알아서 고통에 대처해야 한다. 인류는 과학 기술을 바탕으로 거의 대부분 분야에서 엄청난 발전과 진보를 이루었다. 그렇다면 가난에서는 어떤 진보가 이루어졌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집권당에 상관없이 가난은 계속 정체되어 있다(물론 미국의 얘기다. 하지만 한국이라고 다를리가!). 저자는 묻는다. 왜 가난은 개선되지 않을까? 이에 대해 우리는 배정된 예산이 적절한 방식으로 적정하게 쓰이고 있는지를 볼 필요가 있다.  


최저 임금, 임시 계약직, 노조에 대한 언쟁은 끊이지 않는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계약직'의 임금은 현저히 낮고, 노조의 규모와 역할은 갈수록 축소되어 간다. 자연스럽게 노동자들의 권리는 위축되고, 일자리의 질도 더 나빠졌으며, 이에 따라 소득 양극화와 불균형은 점점 늘어간다. 저자는 경제문제가 교육 문제로 환원될 수없고, 불균등한 일자리 시장이 세계화에만 있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몇몇 나라의 실제 사례를 근거로 들어 노조의 부재에 의한 경제적 불평등이 권력과 직결됨을 얘기한다.  


기업은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정부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시장 장악력이 커진 기업들은 임금을 낮추고, 노동자들은 임금보다 더 많은 가치를 기업에 제공하며, 기업은 이러한 패턴을 유지하기 위한 알고리즘을 꾸준히 찾아내어 업데이트 한다. 노동자 개개인이 철옹성같은 기업에 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노동비용이 하락하면 기업의 이윤이 증가하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대기업 이윤으로 득을 보는 건 주주다. 그런데 현재 사회 구성원 중 많은 사람들이 주식시장에 이해관계가 있다. 우리가 앞서 언급한 패턴을 알면서도 외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자는 노동자들에게 생활임금을 허락하지 않을 때, 그들은 건강, 행복, 생명 그 자체를 거부당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우리는 빈곤 문제에 있어서 초점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맞춰 왔다. 그러나 우리가 정작 던져야하는 질문은 빈곤의 다른 한편에서 이익을 얻는 이가 누구냐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정부 예산이 부족하고, 실업 수당이나 여타 지원금 때문에 실업자들이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국민이 게을러진다는) 서사를 받아들인다.저자는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의 빈곤을 그들의 노력이 부족하며 복지가 의존성으로 이어져 자립 의지를 꺽는다는 말을 수용하는 것은, 이러한 선동이 설득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경제적 안정이 가난한 사람들의 삶과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라고 얘기한다.  


노동착취를 해결하는 최선의 방법은 노동자의 권리를 증진하는 것이다. 저자는 가장 많은 권력과 자본을 쥐고 있는 사람들은 미국의 막대한 빈곤에 가장 많은 책임이 있다고 일갈한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자신이 속한 사회를 면밀하게 들여다볼 것을 당부한다. 조세회피, 노조 깨기, 저임금 이력 등 착취 기업인지, 궁핍과 절망을 확산하거나 공공 서비스를 반대하는 기업은 아닌지, 저소득층 동네의 젠트리피케이션에 책임이 있는지 등을 살피며 투자와 소비를 결정하고 빈곤 폐지론자가 될 것을 권한다.  


저자가 명명한 '결핍 눈속임'은 아주 익숙한 정치 프레임이다. 본질을 피해 요리조리 말장난을 통한 대다수 국민의 눈가리기가 아직까지 먹히는 이유는 앞서 얘기한 것처럼 결핍에 대한 비난의 대상에 그 모든 사람들을 포함시켰기 때문이다(정작 가장 크게 비난받아야할 사람을 제외한 채).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항상 정부가 입버릇처럼 얘기하는 '자원이 부족'하지 않음을, 국가의 풍요를 인정해야 함을 강하게 얘기한다.


저자는 빈곤의 종식이 수백만 노동자와 그들의 가족들에게 더 나은 안전과 건강, 안정된 삶을 의미하는 것이며 사회악의 근원을 도려내는 것이라고 말한다(실제로 수많은 범죄와 사건들의 원인이 생계와 직결되어 있지 않은가). 빈곤이 사라진다해도 시장과 사유재산권은 건재할 것이며 소득의 양극화의 일정 크기의 간극은 메울 수 없을 것이다(그러니 너무 겁 먹지 말라는 것(?!)으로 읽혔다). 


ㅡ 


개인적으로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을 신기하리만치 짚어서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지 모르겠으나 책은 의외로 술술 읽힌다. 무엇보다 미국의 빈곤과 사회 문제를 서술하지만 특정 법률을 제외한 거의 모든 점이 우리나라와 아주 흡사하다(어느 정치 경제 전문가는 한국이 미국보다 더 신자유주의적 국가라고 했다).  


조문영 교수가 해제에 썼듯 한국은 상대적 빈곤율과 자살률 및 노인 빈곤율이 높고, 출산율은 OECD 국가 중 최 하위이며, 노인인구의 소득 및 자산 양극화는 점점 더 극심해지고 있다. 가난이라는 궤도에 들어서면 벗어날 수 없는 악순환의 원인이 저임금, 외주화, 노동착취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여기에 이러한 문제들에 있어서 자신은 예외라거나 무관하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가난이 지속되는 책임이 정부, 기업, 언론에만 있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전세 사기를 비롯한 당장의 범죄들이 '한 사회가 돈을 버는 방식이 바로 빈곤을 만드는 방식'이라고 말하는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활동가의 말을 증명한다. 


저자와 해제자의 제안은 저임금 불법화와 포용적 노동운동 전개, 정직한 기업, 무조건적인 재분배보다 사회안전망의 균형, 빈곤을 온존하는 정책 재고, 복지 신청 시스템의 개선, 실효성 있는 정책을 향한 지지, 빈곤의 공간적 분리의 지양, 빈자의 선택과 권리 존중이다.


책은 어렵지 않게 쉬운 용어로 쓰여있어서 읽는 데에 전혀 무리가 없지만, 혹시라도 이 책을 다 읽기가 부담스럽다면 조문영 교수의 해제 글만이라도 읽기를 바람한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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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덱스 - 지성사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 색인의 역사 Philos 시리즈 24
데니스 덩컨 지음, 배동근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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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얘기를 하면 별나다는 말을 종종 듣는데, 나는 두꺼운 백과사전의 '색인' 읽는 것을 좋아하고, 모르는 한자를 찾을 때면 지금도 앱보다는 옥편을 뒤적거리기를 더 선호한다. 그렇다보니 색인에 역사가 있다고 해서 나름 흥미와 기대를 갖고 책을 펼쳤다.  







이 책은 13세기 유럽의 수도원과 대학으로부터 21세기 실리콘밸리 기업에 이르기까지 색인이 밟아 온 경로를 기록하고, 색인이 독서 생태계의 변화들에 어떤 식으로 대응해 왔는지의 과정과 그런 변화의 지점에서 독자와 독서 자체가 어떤 식으로 변해왔는지를 보여준다.   


색인의 종류에는 용어 색인(콘코던스), 주제 색인, 보편 색인, 풍자적 색인이 있다. 용어 색인은 원문에 충성스러운 색인, 주제 색인은 원문과 독자 사이에서 그 충성도를 적절히 배분하는 색인이다. 두 색인 모두 중세의 동일한 시점에 대두되었는데, 주제 색인이 영향력을 키웠다면, 대조적으로 용어 색인은 19세기라 끝날 무렵까지도 전문가들의 도구로만 쓰이다가 오늘날 컴퓨터의 출현으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저자는 이상적인 색인은 책이 어떤 방식으로 읽힐지, 그것이 어떤 식으로 이용될지 미리 예측한다고 썼다.  


색인의 역사를 다뤘지만 중세까지 다룬 내용에는 색인뿐 아니라 일부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어서 아주 흥미롭다. 색인은 2000년 전에 등장했다. 기원전 3세기 무렵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알파벳 24개 자모를 동원해 배열한 것을 시작으로 시리아 북쪽의 고대도시 우가리트에서 발견된 점토판들을 통해 기원전 8세기 중엽에 그곳에서 알파벳 철자에 순서를 매기는 방식이 정착된 사실, 로마인에게 '인덱스'라는 각각의 두루마리에 다는 이름표 등 시대를 거치며 변화를 가졌고, 알파벳 순서를 이용하는 것으로서 한차원 높은 지적 도약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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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이 독서 도구로 이용된 것은 13세기에 들어서이다. 독서 과정을 능률화하기 위함이었고 책을 사용하는 방식에서 효율성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색인이 필요해질만큼 책을 빨리 읽어야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주로 책은 수도사들이 읽었고, 그들은 느릿하게 책을 읽고 명상했다. 그러다 12세기에 들어서면서 백성들 사이에서 공부하고 복음을 전하며 설교를 하는 탁발 수사의 규모가 커졌다. 탁발 수사들에게 대중과의 의사 소통과 설득의 중요성이 새롭게 대두되면서 빠른 시간 안에 텍스트의 분석과 정리가 요구되었다. 정보에 따라 세분화하거나 종합해 효율적으로 관리를 해야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도구로서 색인의 성공 여부는 독자들이 적절한 시간 안에 필요한 구절을 찾을 수 있는가에 달려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색인으로 인해 책을 읽는 것이 아닌 사용하는 것으로 용도를 퇴색해버렸다는 평가도 있있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검색 엔진을 사용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법하다(책의 마지막 장에서 다룬다). 지금도 검색만 하면 어지간한 정보는 모두 알 수 있다는 이유로 독서의 유의미성에 대해 논하는 것은 독서를 얼마나 편협하고 협소한 시각으로 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지점이다. 18세기에 들어서면 풍자적 색인을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색인은 경멸의 대상이자 경멸을 표현하는 도구가 되었다. 



21세기의 소설이나 희곡에 색인이 없다. 왜 소설 색인은 얼마 가지 못하고 사라졌을까? 소설에 관한 색인 부분을 읽다보면 소설 색인이 왜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는지를 알 것 같다(기능을 못했다는 건 독자 입장인 나의 판단). 소설의 사건과 감정, 그리고 인물은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하고 미묘한 점이 많고, 소설 내에서도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든다('인간'을 다루다 보니 그럴밖에). 예를 들어 질투, 분노, 사랑, 우정 등 감정을 색인했을 때 그 한계를 어디에 둘 것이며, 악인 색인을 둔다고 해도 입장과 기준에 따라 선과 악이 달라질 수 있으니 이것 역시 단정하기 어렵다. 더구나 책에서 다룬 예들을 살펴보면 색인 그 이상의 역할울 하고자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18세기에 소설 <클러리사>의 색인이 85쪽에 달했다는데, 이 정도면 중단편 소설의 분량이다. 


색인은 근대의 특성을 갖고 있다. 시간을 아껴주고, 멀게 만 느껴졌던 것들을 가까이 잡아당긴다. 19세기 존 펜턴이 만든 색인 협회의 로고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 색인은 공부 혹은 독서의 이정표이자 길잡이(책에서는 열쇠라고 표현)가 되어준다. 
 
오늘날 해시태그 역시 색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디지털 시대에 SNS 유저들은 검색자인 동시에 분류자라고 할 수 있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달라져도 색인은 나침반으로서의 역할을 지속할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는 점점 더 '검색'은 모든 면에서 필수가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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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 만들기] 


한 작가의 모든 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첫문장 또는 마지막 문장 색인. 예를 들면 찰스 디킨즈의 모든 작품의 첫문장(또는 마지막 문장) 색인.  


다른 하나는 편집자인 헨리 몰리에서 힌트를 얻었는데 '분노에 대한 색인'을 만들어 등장인물이 화를 내는 대목마다 목록을 작성하고 위치 표시를 하는 것. 그러면 독자는 소설에서 인간이 주로 어느 상황에 놓였을 때 화를 제일 많이 내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재밌는 색인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하다보니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인터넷에서 자료를 많이 찾아본 사람이라면 익히 알겠지만, 웬만한 색인은 이미 거의 다 존재한다. 우리는 더 이상 필요한 자료와 정보를 찾기 위해 도서관을 찾을 필요가 없다. 또한 도서관에서조차 무인 검색대가 마련되어 원하는 자료를 사서의 도움 없이는 곧바로 찾을 수 있다. 시기(시대), 대상, 키워드 등 범위만 정해 검색 엔진을 돌리면 순식간에 많은 자료들이 넘쳐난다. 오히려 지나친 정보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게 더 큰 일이 되어버렸다. 원하는 주제와 범위만 정해 프로그래밍한다면 어떤 색인도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다. 인터넷 시대가 도래하면서 색인은 더 중요한 위치에 올랐다고 볼 수 있다. 사장될 뻔한 색인의 화려한 부활을 반겨야 할지, 지나친 정보화 시대를 우려해야 할지 난감한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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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린 색인 중 재밌는 색인] 


* '꼬치 꼬치 캐묻는 사람 그리고 떠벌' 224
* '시간 낭비[수고하셨습니다ㅡ색인 작성자] / 시간가 지식 14~15, 394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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