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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천사를 믿었다
R. J. 엘로리 지음, 나선숙 옮김 / 노블마인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30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 죽음과 맞닿아 있던 한 사내의 영혼의 궤적을 그린, 연대기라 불릴만한 품격과 중후함을 갖춘 소설이다. 미국 남부 조지아 주의 시골 마을 '오거스타폴스'를 무대로, 소녀만을 노리는 연쇄살인마와 이 악마같은 사건의 악몽에 사로잡힌 한 소년의 기구한 운명을 그리고 있는 이 이야기는 미스터리 소설이 하나의 서브장르가 아니라 문학적으로도 얼마든지 주류일 수 있음을 확실히 보여준다. 언뜻, 연쇄 살인사건이라는 잔혹한 범죄가 중심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이 장대한 이야기의 일면에 지나지 않는다. 소설의 대부분은 '조지프 캘빈 본'이라는 화자의 비극적인 인생을 그리는데에 소비된다. 거듭해서 덥쳐오는 불행의 파도, 철저한 리얼리즘과 강렬한 문체는 소설 속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를 떠올리게 한다.
아버지를 여의고 엄마와 단둘이 살고 있는 소년 조지프가 본 것은, 사신의 모습과 천사의 하얀 깃털이었다....
1939년, 12살의 조지프는 같은 반 여자아이의 죽음과 마주친다. 강간과 구타를 당해 끔찍한 소녀의 사체는 벌거벗겨진 채로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다. 이후 주변지역에서 몇번이나 반복해서 일어나는 소녀 참살사건은 조지프의 인생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평소에 신이나, 천사와 인간의 연결에 대해 생각하는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한 소년. 순진한 성격에 더해 일찍 아버지를 여읜 경험으로 '죽음'에 대한 감정이 다른 사람보다 민감했던 조지프였다. 이지적이던 그의 어머니까지 어느 사건이 원인이 되어 정신병에 걸리고, 일찌감치 조지프의 문학적 재능을 발견하고 조언을 아끼지 않던 여교사와도 슬픈 이별, 그리고 운명처럼 만난 연인과도....
전혀 기억에도 없는 증거를 날조당하면서 조지프의 길고 긴 어둠의 생활이 시작된다. 군데군데, 후에 작가가 된 조지프의 문장이 삽입되서 이 긴 여정의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다.
조지프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차례로 잃어가는 비극의 주인공이다. 다만 비극이 이어지는 것 뿐이라면 그저 신파극에 지나지 않았을 터, 비극이 도래하기 전까지 저자의 펜 끝은 조지프의 인생에 찾아오는 행복을 서서히, 그리고 선명하게 그려낸다. 난생 처음으로 타인에게서 인정받는 기쁨, 선생님과의 감정의 교류, 소꿉친구와의 우정, 수호자들이라 이름붙인 소년 탐정 단의 사명감, 첫사랑, 결혼....
하지만 그 정점에 오르는 순간마다 매번 그는 나락의 바닥으로 내쳐지고 만다. 소년 시대부터 작가를 목표로 해온 조지프는 작가가 됨으로써 비로소 비극과 타협하고,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 연쇄 살인마를 쫓기 시작한다.
조지프를 포함해서 엄마, 선생님, 그리고 아버지 대신이었던 라일리 아저씨까지 등장인물들의 대사 하나하나가 너무나 깊다. 되풀이 해 읽고, 생각하게 만드는 장면이 많아서 페이지를 넘기는 손이 수시로 멈추지만 그렇다고 늘어지는 것은 아니다. 깊이있는 문장이 이야기를 더욱 농밀하게 만든다. 범인 찾기를 넘어서 인간의 존엄, 생명, 정신, 선과 악, 용서 등으로 깊숙히 연결되어 간다.
과연 광기에 찬 진범이 밝혀지는 것만으로 이 지독한 여정이 결말 지어질 수 있을까? 마침내 긴 고난의 세월도 마지막을 고하게 되는 것일까?
범인의 정체에 대한 불안감이 차츰 확신으로 굳어져 가는 마지막 조지프의 긴 독백은, 이러한 이야기에서는 좀처럼 느끼기 힘든 문학적 감동마저 전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