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대전 Z 밀리언셀러 클럽 84
맥스 브룩스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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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라는 사람들에 대해서 무한한 경외감을 느끼게 해 준 책. 정말이지 같은 소재를 가지고도 이렇게까지 다른 소설을 쓸 수 있다니, 같은 상상이라도 표현하는 방법을 달리하면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가 된다. 이 책의 특징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좀비라는 상상의 산물을 소재로 쓴 논픽션이라는 느낌. 물론 실존하지도 않는 소재가 논픽션이 될리 만무하지만, 다큐멘터리 형식을 빌려서 그려낸 이 이야기는 적어도 그 분위기에서 만큼은 영락없는 논픽션의 그것과 같다.

때는 인류가 좀비와의 치열한 전쟁을 막 끝마치고 난 근미래. 그 끔찍한 재앙으로부터 살아남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인터뷰한 내용을 모아놓은 형식으로 이 책은 구성되어 있다. 좀비가(이 책에서는 좀비를 전염병으로 규정 하고 있다.) 처음 발병한 중국 한 마을의 참상을, 생존자의 입을 통해 당시를 회상하듯 듣는것으로 시작해서, 전쟁의 처음부터 끝까지 시간별, 장소별로 전세계 곳곳의 목격자들이나 체험자들의 증언을 듣는 것으로 이 전쟁의 전체적인 구도를 그려볼수가 있다. 특정한 스토리를 따라가는 다른 작품들과는, 그 정보의 광범위함에 있어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말이 가상의 인터뷰이지, 전세계의 정치, 군사, 경제, 사람들의 생활상등등 다방면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그 디테일이 정말로 세밀하다. 시대적 배경이 지금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는 근미래라는 점도 있어서 이 설정은 완전히 창조된 것 만은 아니고, 지금의 국제 정세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다. 현 정세와 상당부분 맞물려서 돌아가고 있는 근미래의 상황을 보고 있으면 작가가 세계 정세에 대해 얼마나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전체적인 구도뿐만 아니라, 각각의 인터뷰 하나하나가 가지고 있는 생동감은 이게 모두 지어낸 이야기라는게 더 신기할 정도로 현실감이 넘친다. 

이 책에는 한국과 북한의 상황을 묘사한 인터뷰도 실려있는데, 한국독자의 입장에서는 이부분이 또 상당히 마음에 든다. 외국 특히 서양쪽 작가들의 작품에서 우리나라의 정치적 군사적 상황을 묘사하는 부분을 읽고 있으면 너무 왜곡된 이미지로 그려져서 이질감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에서는 그다지 그런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 편이다. 세부적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그 미묘한 분위기와 긴장감의 정도를 잘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 나는 군생활의 대부분의 시간을 비무장 지대 안에서 보냈는데 그 때의 공기나 에피소드들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짧은 분량 안에서이긴 하지만 작가가 상당히 정통해 있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이것은 다른 나라의 부분을 묘사하는데 있어서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듯 하다. 

좀비가 몰려다니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두말할 나위없고, 내가 진짜 이 책을 추천하고 싶은 사람들은 전쟁 다큐멘터리나 논픽션에서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 전쟁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 SF의 범주에 들어갈만한 작품인데도 자꾸만 지나간 전쟁을 떠올리게 되는건 아무래도 이 생존자들의 인터뷰라는 것이 과거를 회상하는 행위이기 때문일 것이다. 미래를 회상할 수는 없는 거니까. 그만큼 실제로 있었던 과거의 어느 사건을 돌이켜 보고 있는 듯한 실제감이 살아있다. 아무튼 내가 지금까지 읽어본 좀비물 중 최고. 아니 그 전에, 이런 류의 픽션이 있다는것 자체가 신선한 충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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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플랜 노블우드 클럽 3
야나기하라 케이 지음, 이은주 옮김 / 로크미디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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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대상 수상작. 몸값을 요구하지 않고도 현금을 가로채는 유괴극. 과거의 작품 중에도 이와 같은 전례가 있었는지의 여부는 잘 모르겠지만, 처음 접하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기발한 발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이 작품의 매력적인 점은, 그 발상이 발상으로 그치지 않게 하는 소설 안에서의 기발한 범죄수법. 그리고, 대리모, 아동학대, 노인문제, 온라인 트레이드, 태아세포, 미용 성형등등, 현대 사회의 어두운 단면들을 대표하는 민감한 소재들을 잔뜩 다루고 있으면서도, 그로 인해 작품 전체의 위화감이 느껴진다거나 이야기의 큰 흐름이 끊기는 일 없이, 짜임새 있는 이야기로 잘 버무려져 있다는데 있다. 게다가 이런 극히 현대적인 이야기의 이면에<가족의 정>이라는 다소 고전적인 주제가 자리잡고 있는 점이 또 재미있다. 이색적인 논스톱 유괴(이면서도 유괴가 아닌)미스터리.

대리모로서 하루하루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오다기리 요시에는, 현재 출산을 앞두고 있는 만삭의 몸을 이끌고 자신이 대리모로서 처음으로 낳은 아이인 미와 토시나리를 보기위해 찾아간다. 먼발치에서 토시나리를 바라보던 요시에는 아이가 엄마인 사키코에게 학대당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고 우발적으로 아이를 집에서 데리고 나와 버린다. 신주쿠의 유흥가에서 우연히 요시에를 만나 그 사실을 알게 된, 요시에의 전 애인 다시로 고지는, 이 바닥의 선배격인 아카보시 사토루에게 이 사실을 상담한다. 다시 사토루가 조 류세를 끌어들이고 한때 주식매매로 크게 손실을 본 과거가 있던 류세는 이 때의 경험과 지식을 발휘하여 터무니없는 유괴 계획을 생각해 낸다. 여기에 치메를 앓고 있는 류세의 아버지 야스오까지 합세해 <아무도 죽지 않고, 손해 보는 사람도 없으면서 5억 엔을 뜯어낸다>는 전대미문의 유괴극이 막을 올린다. 완전범죄를 노리는 이들의 계획은 아주 순조롭게 진행된다. 그런데, 모든 것이 잘 마무리 되려는 시점에 느닷없이 등장한 크래커 요슈아. 완벽했음에 분명한 계획이 한사람의 해커로 인해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틀어져 버린다.

Enigma라는 이름의 이 한가족같은 유괴집단(?)의 구성원들 - 뒷골목 보디가드 출신으로 뛰어난 무술 실력을 자랑하는 류세, 과거에는 신주쿠의 여왕님으로 이름을 날리던 호스티스였지만 현재는 대리모로 살아가고 있는 요시에, 언더그라운드 카지노의 점장인 사토루와 유흥가 종업원인 고지, 그리고 치메를 앓고 있는 류세의 아버지 야스오 - 뿐만 아니라 엄마의 잦은 학대로 인해 자폐증을 앓고 있는 소년 미와 토시나리, 미와가의 가장이자 투자 회사의 사장인 토시나리의 아버지, 토시나리의 엄마이자 광기에 사로잡힌 미저리같은 여자 사키코등등, 현대 일본의(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사회상을 반영한다고 해도 좋을 개성넘치는 인물들이 가득하다. 그런데 모두가 주인공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이야기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이 인물들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존재는 수수께끼의 인물 요수아와 이들을 쫓는 여형사 가오루이다. 특히, 사건의 진상과 함께 베일에 가려진 요수아의 존재를 간파해내는 이 여형사는, 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실질적인 주인공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상당한 컴퓨터 실력을 가지고 있는 신세대 형사이며, 게다가 굉장한 미인이라는 설정.

배짱이 있고 마음 따뜻한 이니그마의 실질적인 리더 조 류세의 캐릭터도 매력적이지만 뒤늦게 등장해 대활약하는 이 여형사의 매력은 이를 뛰어넘는다.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배려하는 마음은 상당히 여성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조직의 규율을 어기고 단독행동을 하면서까지 자신의 의견을 밀고 나가는 강인함도 가지고 있는 이 개성있는 인물을 그리는 방법이 "남성 작가의 시선" 이기 때문이다. 여류작가이면서도 남성 작가의 글과 같은 분위기가 공존하는 이 작가가 창조해내는 캐릭터 조형은 상당히 독창적이다. 인물묘사 뿐만 아니라 작풍 자체가 여류작가 특유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의, 뭐랄까 퓨전요리같은 느낌을 준다. 색다른 느낌의 엔터테인먼트 작가가 나타났다는 신선한 즐거움과 함께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 부분이다. 

유괴가 유괴가 아니게 되는 특이한 시츄에이션과 스피디한 전개는, 철저하게 독자의 즐거움을 추구하고 있어서 술술 넘어 간다. 유괴사건을 다룬 소설이라는 것이 전면에 부각되고 있지만, 실제로 읽어 보면 <유괴물>이라는 인상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의외로 <유괴>그 자체보다도, 삼자의 관계가 서로 얽히는 서스펜스라던가, 여러 가지의 소재가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등장하는데서 오는 속도감이 더 큰 매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튼 다음에서 다음으로, 계속해서 사태가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어 가기 때문에, 유괴라는 것은 결국 사건의 발단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이것은 이 작품의 큰 매력이다. 스타트 지점으로부터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도착점. 거기까지 도달하는 동안 끊임없이 작가에게 농락당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한 작품 안에서 워낙 다양한 소재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각 분야의 전문적인 지식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 다소 피상적인 부분도 없지는 않지만, 어쨌든 재미라는 면에서 만큼은 일급의 엔터테인먼트 작품. 사소한 모순점따위는 날려 버리는, 초고속 서스펜스를 즐길 수가 있었다. 또 스토리가 조금씩 진행되면서, <퍼펙트 플랜>이 단순한 유괴 미스테리가 아니고, <가족의 본연의 자세>를 명제로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런 확실한 주제가 바닥에 깔려있는 이 소설은, 단순한 엔터테인먼트로서의 재미 뿐만이 아니라, 동시에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감동 드라마로서의 즐거움도 만끽하게 해주는 쾌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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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애무
에릭 포토리노 지음, 이상해 옮김 / 아르테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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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야시시한 제목을 하고 있지만,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다. 현대인의 정체성, 정신적 갈등 뭐 이런것들에 대한 이야기. 미스터리적인 요소가 가미된 심리소설 정도 되는 것 같다. "붉은애무" 라는 것은 아마도 프랑스에서 팔리고 있는 특정 립스틱의 제품명인 듯 하다. 소설 안에서 주인공이 이 붉은애무를 입술에 바르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그저 입술에 바를 뿐인 립스틱의 이름이 책의 제목이 된 것은 이 립스틱이 단순히 스쳐지나가는 소도구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중요한 매개체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아이의 아빠인 주인공은, 가발을 쓰고, 제모를 하고, 원피스를 입고, 그리고 붉은 애무를 바르는 것으로 비로소 엄마로 변모하게 된다.

보험 대리점의 점장인 주인공 펠릭스는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건물의 화재현장에서 세입자였던 한 엄마와 어린 아들의 행방불명 소식을 듣게 된다. 화재가 진압된 뒤에도 건물안에 이 모자가 남아 변을 당했다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이들은 과연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리고 수많은 형태의 가족의 모습 중, 이 소설에서 이들은 왜 하필이면 아버지 없이 단둘이 살고 있는 모자지간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일까. 

펠릭스에게는 사랑스러운 어린 아들을 뺑소니 사고로 잃은 아픈 기억이 있다. 그의 아내는 어느날 그의 앞에 나타나 아들 콜랭을 낳고, 그리고는 부자를 남겨둔 채 어디론가 훌쩍 떠나 버렸다. 남자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펠릭스는 어느날 부턴가 엄마를 찾는 아들 콜랭을 위해 엄마로 분장하기 시작한다. 무엇보다도 콜랭이 엄마로서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좋았고 거기에 부응하려 노력하는 사이 어느덧 펠릭스는 여장을 한 채로 잠을 자고, 외출을 하게 될 정도로 엄마의 역할에 충실해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훌쩍 떠났던 아내가 갑자기 이들 부자에게로 다시 돌아온다. 두 사람이 번갈아 콜랭을 돌보게 되면서 펠릭스는 더 이상 엄마 분장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엄마인 마리가 돌아 온 후, 아들 콜랭은 엄마 분장을 한 펠릭스를 비웃기까지 했고, 펠릭스와 함께 했던 모든 놀이와 장난을 거부했다. 엄마의 역할에 익숙해져 있던 펠릭스, 아버지가 없는 가정에서 자란 그에게 아버지로서의 역할은 생소하기 그지없다. 콜랭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그는 그런 아들에게 배신감마저 느낀다. 그러나 그런 감정도 잠시, 엄마인 마리와 같이 있던 콜랭은 마리가 잠시 전화를 받느라 한 눈을 파는 사이에, 달려오던 차에 치여 목숨을 잃는다. 그리고...

프랑스 소설답게 독특하고 몽환적인 분위기가 매력적인 작품이다. 이 책의 이미지는 굳이 표현하자면, 불에 타 검게 그을린 집안과 잿빛 하늘로 대변되는 모노톤의 배경위에 립스틱의 붉은색만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이미지. 고혹적이면서도 기괴한 이 이미지는, 비틀려 있는 현대인의 정신세계와 맞닿아 있다. 

전통적인 가족제도에서 벗어나 핵가족화되고 개인화 되어 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분명 정신적으로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다. 그로 인한 정신적 욕구불만, 공허함에서 비롯된 왜곡된 집착의 형태라던가,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는 인간에 대한 심리묘사가 대단하다. 충격적인 마지막 결말은 그야말로 그 정점을 보여준다.

사회는 점점 더 빠르고 편리한 쪽으로 진화되어 가고 있지만, 반면에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는 더 큰 것을 잃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잃어가고 있는 것들이야말로, 인간의 내면 형성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필수 영양소인 것은 아닐까. 아버지의 부재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딱 꼬집어 이야기 하기는 어렵겠지만, 펠릭스에게 결핍되어 있는 것은 적어도 어린시절 아버지라는 존재로부터 가장 효과적으로 배울수 있는 것이였음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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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에서 온 소년들 Medusa Collection 3
아이라 레빈 지음, 김효설 옮김 / 시작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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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74년 9월, 브라질 상파울로에 모인 전 나치 친위대원 6명에게, 앞으로 2년 반이라는 기간에 걸쳐서 세계 각지에 사는 65세 전후의 남자 94명을 살해하라는 기괴한 지령이 내려진다. 지령을 내린 자는 "죽음의 천사"로 악명 높았던 전 나치의 주임의사 멩겔레 박사. 이 이해할 수 없는 계획의 목적은 도대체 무엇인가? 한편, 얼떨결에 그 정보를 입수하게 된 "나치 사냥꾼" 리베르만은 이 정보의 신빙성에 대해 완전히 확신하지 못한 채 조심스럽게 조사에 착수하지만, 곧 이 계획의 피해자들과 그 피해자들 사이의 공통점을 찾아내게 되는데...

<죽음의 키스>, <로즈메리의 아기>와 더불어 아이라 레빈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이 작품이 발표된 때가 1976년, 지금부터 4반세기도 더 지난 작품인 만큼,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소재 자체는 지금의 독자들의 눈으로 보면 결코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물론 발표 당시는 획기적이였을 것이 분명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스토리의 교묘함에 정말로 감탄 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한차례 영화로 만들어졌던 작품이 다시 제작된다고 하는 것만 보아도, 이 소설이 얼마나 잘 쓰여진 작품인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는 이해하기 힘든 살인 지령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언뜻 보기에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을 것만 같은 피해자들 (모두 공무원이거나 그와 비슷한 직업에 종사하는 남자들로서, 나치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듯 하고, 덤으로 연령이 65세 전후인)은 이야기 속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냥 내버려 두어도 머지않아 자연사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구태여 일부러 찾아가서 살해해야 할 이유가 과연 무엇인가? 초반부터 그런 강렬한 "수수께끼" 가 제시됩니다. 파견된 "암살자"들은, 냉혹하고 치밀한 계획을 세워 피해자들을 한사람, 또 한사람 확실하게 말살해 갑니다. 지령 자체의 기괴함에 더해 그 실행 방법의 리얼한 묘사가, 스토리에 상당한 긴박감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한편, 그 정보를 입수한 리베르만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정보의 확인을 위한 독자적인 조사에 착수합니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유를 알 수 없는 수상하고 위험한 계획이 존재하며 그것이 실행에 옮겨지고 있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리베르만의 소극적인 대응이 초조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계속해서 살인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숨막히는 상황 속에서, 리베르만은 우연한 계기로 피해자들 사이의 "공통점"을 발견합니다. 여기서부터 이야기의 템포는 급격히 빨라집니다. 그 "공통점"의 이유가, 전반부의 복선과 서로 연계되면서 멩겔레 박사의 "이해할 수 없는" 지령의 충격적인 전모가 서서히 드러납니다. 

멩겔레 박사의 "광기" 를 부각시키면서 리베르만과 멩겔레 박사의 최후의 결전으로 이끌어 가는 후반부의 스토리텔링은 절묘합니다. 정상을 향해 서서히 서서히 오르고 있던 롤러코스터가 갑자기 뚝 떨어지는 듯한 속도감과 통쾌함이 있습니다. 비교적 슬로우 페이스였던 전반부의 전개와 대비되서, 그 속도감이 더욱 크게 느껴집니다.

앞서 말했 듯, 이 책의 소재는 픽션의 소재로서 이미 드물지 않은 것이 되어 버렸는지도 모릅니다만, 그 소재의 대상이 주는 섬뜩함에 있어서는 단연 독보적입니다. 게다가 이 작품이 발표된 때가 1976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통찰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소설에서 그려지고 있는 공포의 핵심은, 기분 나쁠 정도의 예언성에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면에서 소설속에서의 리베르만의 최후의 "결단" 은 머지않아 실제로 우리가 내려야 할 결단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최근의 상황으로 보면 그것이 그리 먼 훗날의 이야기인 것만은 아닌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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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페리움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4-4 로마사 트릴로지 1
로버트 해리스 지음, 조영학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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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내가 부르게 될 노래는 권력과 그 사내에 대한 애기다. 권력이란 정부에 의해 개인에게 부여된 공적이고 정치적인 힘을 뜻하며, 우리는 이를 라틴어로 임페리움이라고 칭한다. 공화국의 역사상, 권력을 획득할 자원이라고는 오직 자신의 재능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키케로는 독특한 인물일 수밖에 없다. 메텔루스나 호르텐시우스와는 달리, 그는 명문 출신도 아니며 선거 중에 끌어들일 정치적 우군도 없었다. 폼페이우스나 카이사르처럼 입후보를 뒷받침해 줄 강력한 군사력도, 크라수스처럼 앞길에 뿌릴 엄청난 부도 그에게는 없었다.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오직 목소리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뼈를 깎는 노력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웅변으로 바꾸었다.- 

팩션의 귀재 로버트 해리스의 작품. 아무런 정치적 기반 없이 로마 시대의 최고 권력인 집정관의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이 소설은 그 키케로의 심복이자 최고 실력의 서기이기도 한 티로라는 노예의 입을 통해, 일개 변호사에서 집정관의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키케로의 행보를 들려준다. 로마를 배경으로 한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인 폼페이가 베수비오 화산 폭발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순간을 다루고 있었다면, 임페리움은 키케로라는 한 역사적 인물의 삶을 재조명 한다고 할 수 있겠다.

다양한 매체에서 다루는 수많은 로마시대의 이야기들 속에서, 그 중심에는 당연하게도 그 유명한 카이사르가 있다. 그러나 이 키케로라는 인물은 로마가 낳은 문인중에 가장 유명했던 사람이라고 할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읽어온 작품속에서는 언제나 극속에서 조연 신세를 면치 못해왔다. 카이사르를 위시하여 폼페이우스나 크라수스같은 워낙에 쟁쟁한 인물들과 동시대를 산 인물의 비애라고 할까. 아무튼 나에게 있어서 키케로의 이미지는 지금까지 조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였다. 그런 키케로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바뀌는 게기가 되어 준 책이였다. 처음 접해보는, 키케로가 주역으로 활약하는 이야기.

이 소설의 화자인 티로는 원래 키케로의 부친의 책들을 관리하던 노예였던 모양인데, 키케로가 철학을 공부하기위해 그리스로 떠나면서 아버지로부터 빌리게 된다. 그렇게 키케로의 옆에 있게 된 한 노예가 키케로의 일생의 심복이자 친구같은 존재가 되어 로마 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순간을 살다 간 키케로의 산 증인이 되기에 이른다. 이 책에 실려있는 티로라는 노예의 이야기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고 작가의 상상력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많은 부분에서 그의 활약이 사실이라면 아마도 티로의 활약이 없이는 키케로는 결코 집정관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키케로의 일대기뿐만 아니라 역사를 바꾼 숨은 공로자로서의 한 노예의 모습을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야기는 2부로 나뉘어서 진행된다. 1부인 <원로원>에서는 아직 젊은 변호사였던 키케로가 시칠리아의 총독인 베레스의 악행을 고발하고 귀족 계급의 온갖 방해와 회유와 맞서 결국 베레스의 유죄 판결을 이끌어 내는데 성공하고, 이로인해 유명인사로 발돋음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당시 최고의 변호사였던 호르텐시우스와의 대결이 백미이다. 2부인 <집정관>에서는 조영관과 법무관을 차례로 역임한 키케로가 로마를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크라수스와 카이사르의 음모에 맞서 험난한 과정끝에 승리를 쟁취하고 마침내 로마 정계의 최고점인 집정관에 당선되기까지의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그려내고 있다.

한 인물의 전기, 혹은 역사소설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방식을 보면 한편의 법정 스릴러나 정치 스릴러를 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고 시종일관 긴박감이 넘친다. 역사소설하면 흔히 생각하기 쉬운 사건 나열 형식의 딱딱함과는 거리가 멀다. 로버트 해리스라는 작가의 진가가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배경과 돈이 중시되는 정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행해지는 정략결혼, 중상모략, 권모술수를 통해 보여지는 모습들은 서기 2천년대를 살고 있는 우리 시대의 어두운  모습과 별반 다를바가 없다. 로마의 정치, 사법체계 안에서 벌어지는 권력자들의 행태는 현대사회를 배경으로 한 픽션들과도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시대는 바뀌고 과학은 눈부실 정도로 발전하였지만, 인간의 탐욕과 권력을 향한 본성만은 예나 지금이나 전혀 변하지 않은 듯 하다.

키케로라는 인물의 개인사뿐 아니라 로마 공화정의 마지막 시기를 방대하게 그려낸, 그야말로 대작이다. 역사적인 인물들의 활약상과 로마의 사회상을 마치 영상으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그려낸 정교한 묘사가 일품이다. 픽션이 주는 재미와 논픽션의 사실성, 두마리 토끼를 모두 쫓는데 성공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작가의 재능과 철저하고 세심한 고증이 만나 빚어낸 결과일 것이다. 책을 읽고 난 지금은 마치 고대 로마를 여행하고 막 돌아온 듯한 느낌이다. 로버트 해리스의 작품 중 단연 최고이자 이것이 바로 히스터리 팩션이다 라고 감히 말할수 있을 것 같다. 임페리움은 로버트 해리스의 로마 삼부작 중 첫번째 작품이라고 한다. 이번 작에서는 비록 그 비중이 적었지만 로마 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되는 절대 주역 카이사르. 삼부작 안에 포함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로버트 해리스의 손을 거친 카이사르의 이야기도 꼭 읽어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더도덜도 말고 이 책 임페리움 정도의 완성도만 보여준다면 더이상 바랄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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