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더 하우스 1
존 어빙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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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인트 클라우즈라는 시골마을의 어느 고아원에서 태어난 호머 웰즈. 그리고 그를 받아낸 닥터 라치. 이 이야기는 어쨌든 행복과 감동, 슬픔과 자상함, 그 모든것을 감싸고 있는 듯한 따뜻한 빛으로 넘치고 있다. 낙태라는 무거운 주제를 이렇게까지 가까이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작가의 독특하고 유머러스한 문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 태아에게 생명은, 영혼은, 혹은 인격이란 과연 있는 것일까.

원제인 The Cider House Rules 라는 것은 사과농장의 룰이라는 의미. 사람은 살아가는데 있어서 어디에나 반드시 규칙이라는 것이 있다. 자신의 임의대로 침범해서는 안되는 구역, 가족 사이의 룰, 사회의 룰, 지역의 룰, 세계의 룰. 어느 곳에나 규칙은 있다. 그것을 성실히 지켜 냄으로 인해서, 우리는 각자의 삶, 생활을 정상적으로 영위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고아원에서 태어나 자란 호머 웰즈는 유년기 시절에 입양되었다가 다시 쫓겨 오기를 몇번이나 반복한다. 결국 닥터 라치는 호머를 고아원에서 기르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자신이 행하고 있는 출산이나 낙태를 그에게, "주님의 일"로서 전수한다. 그러나 호머가 관철하는 것은, 태아에게도 영혼이란 것이 있으며, 닥터 라치가 낙태 시술을 하는 것은 반대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손으로 그 일을 할 수는 없다는 것. 

어느 날, 낙태시술을 받으러 온 젊은 커플 월리와 캔디. 호머는 둘을 따라 넓은 세상으로 여행을 떠나 간다. 살아가는 수많은 방법들,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과 생활방식. 그런 것들을 마치 평범한 일상의 일처럼 담담하게 그려나간다. 소설이지만, 때로는 어딘가의 현실의 이야기를 보고 있는 것 처럼 너무나 생생하고 사람냄새 나는 그런 이야기. 

마지막, 멜로니의 연인이였던 로나가 호머의 앞으로 보낸 편지의 한 문장. "당신은 결국 그녀의 영웅이였어요." 이 부분을 읽을 때는 정말 가슴이 뭉클해졌다. 독자에 따라서 그 감상은 다 제각각이겠지만 나는, 호머와 고아원에서 같이 자라고, 자립한 뒤에도 평생 호머를 생각하고 찾았던 멜로니가 호머에게 남긴, 나는 네가 영웅이 될 줄 알았다는 문구가 너무나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사람은 히어로가 되기 위해서 사는 것도, 히로인이 되기 위해서 사는 것도 아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아간다. 그렇지만 닥터 라치가 이야기하는 "쓸모있는 사람" 의 의미를 멜로니도, 호머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룰이 있는 생활. 고아는 항상 집단 안에서의 룰, 타인의 속박과 감시, 애정의 결핍, 몽상, 자기표현의 결여, 협소한 세계, 울음소리, 꼭 껴안을 수 없는 사랑, 키스가 없이 잠드는 밤... 여러 가지 것들에 익숙해져 있다. 이 이야기에는 그것들 하나하나가 가지는 모든 의미가 담겨있다. 모든 삶의 방식이 있다. <사이더 하우스>는 확실히 그런 소설.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은 하나가 아니고, 그들은 항상 더 나은 곳을 보고 있다. 아무것도 비관하지 않고 그 과정까지도 사랑하고 있다. 영화도 훌륭했지만, 소설은 최고였다. 이런 멋진 작품을 알게되서 정말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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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순간
빌 밸린저 지음, 이다혜 옮김 / 북스피어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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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눈을 떴을때 나는 병실에 누워있었다. 목소리와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채.... 목은 잘리고 알몸에 구두만 신겨진 상태로 밤거리에 버려져 있었다는 나의 신분을 밝혀줄 단서가 될 만한것은, 구두밑창에 감추어져 있던 한장의 천달러짜리 지폐뿐. 그리고 기억을 되찾기 위해 나선 나의 주위에서는 연쇄적으로 살인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심각한 중상으로 빈사상태에까지 이르렀다 간신히 되살아 난데다가, 기억상실에, 의지할 사람도 없고, 게다가 돈도 일자리도 없는 사방이 꽉 막힌 암담한 상황에 처해있으면서도, 이렇게까지 넉살좋고 태연할수 있는 주인공은 그다지 많지 않을것 같습니다. 자신을 의심해서 찾아온 경찰과 마주하고서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고, 도움을 준 인간이 죽든지 울든지 게의치 않음. 상대가 자신에게 위협을 가해오면, 반대로 더 큰 위협을 하던가 아예 절단을 내버림. 그렇다고 절대 미운 악당의 이미지는 아니고, 냉철하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오히려 쿨한 인물상입니다. 보고 있으면 시원시원하고 때로는 산뜻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지극히 프로페셔널한 주인공이기 때문에 마지막 선택은 좀 의외였습니다. 대신에 반전의 효과는 더 커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새벽의 뉴욕의 맨하탄. 목이잘린채 길바닥에 버려져 있다가 다행히 근처에 살고 있는 여자의 도움을 받아 목숨은 구했지만, 기억상실이 되어버린 남자. 이것이 첫째장에서의 장면입니다. 그런데 다음장이 되면, 남자는 완전히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 같은 상태로 죽어 있습니다. 기억을 잃은 주인공과 사건의 수사를 맡은 경찰이<나>의 정체에 가까이 다가가는 모습이 번갈아가며 보여지는, 영화로 치자면 이른바 컷-백. 2개의 이야기가 교차되면서 진행되는 기법은, 이 소설의 작가 벨린저의 특기입니다. 

밸린저는 이런 서술 트릭의 대가이자 그 원조격인 인물입니다. 다수의 이야기 줄기를 영화의 장면 전환처럼 교차시키면서 진행하는 이 수법은 매장 마다 장면이 바뀌므로,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본래는 조금 혼란스러울 수도 있겠습니다만, 여기저기 발품을 팔아 단서를 캐나가는 주인공과 네트워크로 연결된 데이타베이스를 활용하는 경찰, 각각 적합한 수사 방법으로 주인공의 정체에 근접해가는 과정을, 마치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보이게 만든 교묘한 연출에서는 장인의 숙련된 기교가 느껴집니다. 객관적인 1 인칭+감정적인 3 인칭이라는 조합도 독자의 의표를 찌르고 있고, 미스테리와 서스펜스, 하드보일드가 좋은 느낌으로 융합한 작품이었습니다. 정말로 영상화 되면 상당히 재미있지 않을까. 어두운 뉴욕의 분위기입니다.

진상이 하나씩 드러날때마다 그 스케일이 예상외로 커지는데 놀랐습니다. 전체적인 구성이나 분위기를 고조하는 수법이 교묘하고, 몰입도도 높습니다. 먼저 소개된 <이와 손톱>과 같이 이 책도 뒤의 결말부분이 봉인되어 있습니다. 이른바 봉인본. 초판 원서의 경우에 이 봉인을 뜯지 않고 책을 가져오면 책값을 환불해주는 상당히 공격적인 마케팅을 했다고 합니다. 일단 반전의 퀄리티는 둘째치고, 이 마지막 순간까지는 그야말로 단숨에 도달하게 되기때문에, 거기까지 진행하고 봉인된 채로 환불한 사람은 없었을 듯 합니다. 그런 자신감을 내세울만한 소설입니다. 

결말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이러쿵 저러쿵 말할수 없는게 아쉬움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독자의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만한 반전입니다. 특이하고 개성있는 결말을 원하는 사람은 <이와 손톱>보다도 이쪽을 더 선호하게 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조금 짓궂은 느낌의 결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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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감옥
쓰네카와 고타로 지음, 이규원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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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네카와 코타로의 3번째 작품이자 2번째 단편집. 단숨에 읽어버렸습니다. 이 책에 수록된 3편의 단편들의 공통된 테마는, 상징적인 의미의 "감옥" 입니다. 어느 이야기나 "현실과 동떨어진 무언가에 사로 잡혀 버린" 사람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을 쳐보지만, 문득 깨닫고 보면 어느새 거기에 동화되어 있는 사람들.

<가을의감옥>은 "시간" 에 갇힌 사람들의 이야기, <신가 몰락>은 "공간" 에 갇힌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환상은 밤에 자란다>는 특별한 "능력"에 잡혀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당연히 모두 "감옥" 으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라고는 있지만, 글쎄요...

<가을의 감옥>에는 "11월 7일 수요일" 에 갇힌 '아이'라는 이름의 여대생이 등장합니다. 같은 하루가 몇번이고 반복된다는 설정은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어디선가 종종 본듯한 기억도 나고, 최근에 읽은 "츠츠이 야스타카"의<시간을 달리는 소녀>와는 기억이 지워지지 않는 채로 같은 날을 반복하면서 이것저것 하고 싶은 일을 해본다는 상당히 세세한 곳까지 닮아 있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 작품이 그것들과 다른점은 11월 7일을 반복하는 사람이 주인공만이 아니고, 그 똑같은 처지에 놓여있는 사람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가 된다는 점. 그리고, 정체불명의 존재에 의해 하나씩 하나씩 소멸하는 사람도 있다는 오리지널 요소. 무엇보다도 그 분위기가 판이하게 다릅니다. 그건 이 작품집 전체의 분위기이기도 해서 기묘한 세계와 알수없는 불안감. 쓰네카와 코타로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티비시리즈인 환상특급이나 기묘한 이야기를 떠올려보면 얼추 비슷하게 짐작할수 있을듯 합니다.

<신가 몰락>은 길을 잃고 헤매다가 우연히 한 초가집을 발견하게 되는 남자가 주인공입니다. 이 집에는 가면을 쓴 이상한 노인이 혼자 살고 있었는데, 이 노인은 주인공을 이 초가집의 후계자로 지명하고 어디론가 가버립니다. 그러자 혼자남은 주인공은 왠걸, 아무리해도 이곳에서 빠져나갈수가 없게 됩니다. 한동안 머무르면서 주인공은 이 불가사의한 초가집의 정체를 조금씩 깨닫습니다. 그리하여... 우여곡절끝에 빠져나오게 되었는가 싶더니 ... 그 후에 이야기는 의외의 상황으로 발전합니다. 기담, 괴담같던 이야기가 순식간에 사이코 호러 비슷한 이야기로 급변. 결말로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이 상당히 기발하면서도 전혀 억지스럽지 않습니다.

<환상은 밤에 자란다>는 이상한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초능력을 가진 여자아이의 이야기입니다. 이상한 사람들이 주위에 꼬이고 기묘한 일들이 자꾸 일어납니다. 소녀가 어떻게해서 특별한 능력을 가지게 되었는지, 왜 그곳에서 할머니와 함께 자라게 되었는지 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그려집니다. <천둥의 계절>에 등장했던 모캐릭터의 파트를 생각나게 하는 이교도적인 분위기였습니다. 결국 정말로 무서운 것은 힘 그 자체가 아니고, 사람의 마음속의 사악한 부분이 그 힘을 기르고 있는 것이라는... 뭐 그런 이야기쯤 되려나요. 아 무섭다.

변함 없이 환상적이고 독특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쓰네카와 코타로의 이야기. 그러나, 이번에는 그 분위기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미묘한 심리묘사와 복잡한 인간 관계가 좋았습니다. 이런 맛은 다른 작가의 소설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힘들죠. 일상속에 몰래 섞여 들어와있는 이계의 묘사가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게다가 무섭게 쓰려는게 아닌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으스스한 분위기는 이 작가의 특기입니다. 데뷔후 불과 3작품만으로 이제는 완전히 독자적인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마지막 단편인 <환상은 밤에 자란다>가 가장 마음에 듭니다. 섬찟한 이미지와 결말의 안타까움이 단연 매력. 쓰네카와 월드는 갈수록 탄탄해지네요. 이번에도, 완벽하게 빠져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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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키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오근영 옮김 / 창해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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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X의 헌신>으로 나오키상을 수상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시공을 초월한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 감정의 교류를 그리고 있습니다. 본격 미스터리는 물론이고, 모험 소설에서부터 SF판타지, 청춘 미스터리나 패러디에 블랙 코미디까지 폭넓은 작풍으로 독자를 사로잡는 그의 작품군 안에서도, 이 소설 <도키오>는 조금 그 궤를 달리합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인만큼 미스터리적인 요소가 빠지지는 않지만 그 색체는 그다지 짙지 않은 편입니다. 감동판타지라고 해야할까. 굳이 비교하자면 전작인 <비밀>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도키오"라는 이름의 청년이 난치병인<그레고리우스 증후군>으로 인해, 혼수상태에 빠져 병실에 누워있습니다. <그레고리우스 증후군>은 뇌신경이 서서히 죽어가는 유전병입니다. 도키오의 모친인 "레이코"쪽 집안 사람들은 원래부터 이 "저주받은" 병의 인자를 가지고 있어서, 처음부터 아이를 갖지 않기로 결심하고 결혼을 강행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뜻하지 않게 하게된 임신. 중절수술을 받으려는 레이코를 설득해 도키오를 낳게 한 것은, 남편인 "미야모토 다쿠미"였습니다. 죽음의 문턱에 있는 아들을 앞에 두고, 레이코는 다쿠미에게 말합니다. "저 아이에게 물어보고 싶어. 태어나길 잘했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지, 행복했는지 아니면 우리를 원망하는지."  그 말을 들은 다쿠미는, 레이코에게 이상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20년도 더 지난 과거에 만났던, 도키오라고 자칭한 소년과의 추억을....

이후 장면은 1970년대 후반으로 넘어옵니다. 그 당시의 다쿠미는 열정도 없고, 인내심도 없고, 변변한 직장도 없는 백수건달. 그러던 어느 날, 아사쿠사 놀이공원에서 그는 한 소년과 만납니다. 마치 다쿠미를 예전부터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묘하게 허물없이 행동하는 이 소년은,자신의 이름은 도키오이고 다쿠미와는 먼 친척 사이라며, 그의 집까지 따라와 그대로 머무르게 됩니다. 그리고 몇일 후, 다쿠미의 연인인 "치즈루"가 갑자기 자취을 감추고, 도키오와 다쿠미는 그녀의 행방을 쫓기 시작하지만, 한편 그 여정은 또한 다쿠미의 출생을 더듬어 올라가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읽기 쉬운 문장과 스피드감 있는 이야기로, 독자를 끌어 들이는 특유의 흡입력은 변함 없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로서는 드물게, 상당히 많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그의 소설 중에 이만큼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작품이 또 있었는가 하면 국내에 소개된 것들 중에는 별로 떠오르는 작품이 없습니다. 각 캐릭터가 가진 개성이 확실하고, 호감가는 캐릭터들 뿐이므로, 상쾌한 기분으로 읽을수 있었습니다. 다양한 색깔의 인물들에 의해,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때로는 가슴 뭉클한 감동이 있는 드라마로서 이야기는 전개됩니다. 치즈루의 여자 친구와, 복서출신인 그녀의 흑인 애인, 야쿠자 무리들과 뒤얽히는 오사카에서의 스토리는 매우 속도감이 있습니다. 작가가 오사카 출신이라서 그럴까요. 그 전까지의 진행과 비교하면 오사카의 정경은 유독 세밀한 곳까지 묘사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과거에 받은 상처로 인해 삐딱한 삶을 살고 있는 다쿠미지만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청년입니다. 도키오와의 만남으로 인해, 만남에 의해, 다쿠미는 점점 좋은 방향으로 변해갑니다. 그리고 정말로 소중한 것을 깨달아 갑니다. 점차 자신이 태어난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현재, 과거, 그리고 미래가 교차하는 이야기는, 그것 자체만 생각하면 굉장히 비현실적이기도 해서, 흔히 있는 타임슬립 계통의 SF소설로만 생각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런 SF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다쿠미나 도키오나 그 밖의 다른 등장 인물들의, 인생이나 가족에 대한 깊은 애정이 여러가지 형태로 현실감있게 그려지고 있어서, 오히려 주위에서 정말로 일어날수 있을법한 이야기라는 기분으로 읽을수 있었습니다. 

내일만이 미래가 아닙니다.
태어나게 해주어서 감사해요.
미래를 살아 주세요.

젊은 시절의 아버지에게 전하는 도키오의 말들을 하나하나 생각해 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찬 느낌입니다. 자신이 태어났다는 것에 대해 감사할 수 있는 것, 자신의 생명이 사그러 들어가고 있을 때에도 누군가의 미래를 걱정하고 배려하는 기분을 가질 수 있는 것, 그런 인생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일인지 재차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책을 읽고, 감상을 가질수 있는 것도, 모두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 것. 부모님께 전하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라고.... 쉴새없이 가슴을 후벼파는 신파조의 작품은 아니지만, 서서히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소설입니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눈물을 뚝뚝 흘린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감동적인 이야기였습니다. 

덧붙여서, 이 책에 나오는 그레고리우스 증후군이라는 병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작가가 이 작품을 위해서 만든 가공의 증상이라고 합니다. 발병원인, 증상의 경과등이 상당히 실감나게 묘사되고 있어서, 처음에는 아, 이런 희귀병도 있구나하고 놀랐습니다. 지적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인터넷 검색이라던가 의학사전을 뒤적거려보기도 했습니다만 도저히 그 정보를 얻을수가 없더군요. 역시 희귀병은 희귀병인가보다 혼자 납득하고 있다가 왠걸, 역자후기에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창작이라고 밝히고 있어서 조금 당황스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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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일 1 - 불멸의 사랑
앤드루 데이비드슨 지음, 이옥진 옮김 / 민음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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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나가는 포르노 배우이자 제작자인 주인공은 술과 마약에 취한 상태로 자동차 사고를 일으킨다.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전신화상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은 이미 정상적인 기능을 잃고 흉칙한 몰골로 변해버린 상태. 오직, 퇴원해는 대로 자살을 해버리겠다는 일념으로 힘든 치료를 버텨내고 있는 그의 앞에, 느닷없이 중세 독일에서 그와 연인 사이였다고 주장하는 여자가 나타난다. 그녀, 마리안네 엥겔은 주인공이 쾌유할 수 있도록 힘을 불어 넣어 주면서, 매일같이 그의 병실을 찾아와 이야기한다. 다른 시대, 다른 나라에서 다시 태어나 반복되는 장렬한 사랑 이야기를. 불멸의 사랑을. 그 사랑은 불보다도 뜨거운 시련을 거쳐 불사조와도 같이 다시 소생한다. 700년의 시간도 이 사랑의 이야기의 앞에서는 퇴색한 장식물과도 같은 것. 서로 사랑하면서도 가혹한 운명에 찢기워지고 마는 두 남녀는, 수백년 뒤의 행복을 믿으며 이별의 숙명을 받아들인다.

마리안네 엥겔이 주인공의 병실을 찾아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그야말로 전설같은 이야기이다. 700년전 엥겔탈 수도원에 머무르고 있던 한 수녀와 화상을 입고 죽어가고 있던 용병의 가슴아픈 사랑이야기. 그리고 그것이 자신들의 이야기라는 터무니 없는 주장. 그러나 그 터무니 없는 이야기를 듣는 동안 삶을 놓으려던 주인공의 마음은 서서히 변화되어 간다. 마리안네 엥겔에 대한 마음과 함께 주위사람들에 대한 마음까지도, 그리고 단테의 신곡과 증표들.

이 가슴아픈 메인스토리뿐만 아니라 마리안네 엥겔이 들려주는 또다른 네편의 사랑이야기는 하나같이 안타깝고 비극적인 것들 뿐이다. 전염병에 걸려 죽어가는 아내를 위해 병이 옮는것도 마다하지 않고 돌보다가 아내의 뒤를 따라 죽음을 선택하는남편. 바다에 나갔다가 폭풍우에 실종된 남편을 언제까지고 기다리는 아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비구니의 삶을 택했지만 결국 폭군에 의해 생매장당하고 마는 여인, 사랑해선 안될 사람을 사랑한 죄로인해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마지막까지 자신을 희생한 한 남자. 이 안타까운 사랑의 모습들은 그저 눈물을 자아내기 위한 신파조의 이야기가 아니라 희생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는 고귀한 사랑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영원한 사랑이란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 종종 이야기의 화두가 되곤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이미 영원한 불멸의 사랑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마리안네 엥겔과 같은 700년이라는 오랜 세월에 걸친 사랑은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이 생에서 다 못한 사랑은, 다음생에서 그리고 또 다음생에서, 진정한 사랑을 배우고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 우리는 계속해서 윤회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을 버릴수 있는 경지. 자신의 생명을 온전히 바쳐야 완성되는 사랑이란 이런 의미일 것이다. 시공을 뛰어넘는 이들의 사랑이야기는 안타깝고 아름답다. 그야말로 기괴하고 매혹적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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