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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순간
빌 밸린저 지음, 이다혜 옮김 / 북스피어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눈을 떴을때 나는 병실에 누워있었다. 목소리와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채.... 목은 잘리고 알몸에 구두만 신겨진 상태로 밤거리에 버려져 있었다는 나의 신분을 밝혀줄 단서가 될 만한것은, 구두밑창에 감추어져 있던 한장의 천달러짜리 지폐뿐. 그리고 기억을 되찾기 위해 나선 나의 주위에서는 연쇄적으로 살인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심각한 중상으로 빈사상태에까지 이르렀다 간신히 되살아 난데다가, 기억상실에, 의지할 사람도 없고, 게다가 돈도 일자리도 없는 사방이 꽉 막힌 암담한 상황에 처해있으면서도, 이렇게까지 넉살좋고 태연할수 있는 주인공은 그다지 많지 않을것 같습니다. 자신을 의심해서 찾아온 경찰과 마주하고서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고, 도움을 준 인간이 죽든지 울든지 게의치 않음. 상대가 자신에게 위협을 가해오면, 반대로 더 큰 위협을 하던가 아예 절단을 내버림. 그렇다고 절대 미운 악당의 이미지는 아니고, 냉철하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오히려 쿨한 인물상입니다. 보고 있으면 시원시원하고 때로는 산뜻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지극히 프로페셔널한 주인공이기 때문에 마지막 선택은 좀 의외였습니다. 대신에 반전의 효과는 더 커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새벽의 뉴욕의 맨하탄. 목이잘린채 길바닥에 버려져 있다가 다행히 근처에 살고 있는 여자의 도움을 받아 목숨은 구했지만, 기억상실이 되어버린 남자. 이것이 첫째장에서의 장면입니다. 그런데 다음장이 되면, 남자는 완전히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 같은 상태로 죽어 있습니다. 기억을 잃은 주인공과 사건의 수사를 맡은 경찰이<나>의 정체에 가까이 다가가는 모습이 번갈아가며 보여지는, 영화로 치자면 이른바 컷-백. 2개의 이야기가 교차되면서 진행되는 기법은, 이 소설의 작가 벨린저의 특기입니다.
밸린저는 이런 서술 트릭의 대가이자 그 원조격인 인물입니다. 다수의 이야기 줄기를 영화의 장면 전환처럼 교차시키면서 진행하는 이 수법은 매장 마다 장면이 바뀌므로,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본래는 조금 혼란스러울 수도 있겠습니다만, 여기저기 발품을 팔아 단서를 캐나가는 주인공과 네트워크로 연결된 데이타베이스를 활용하는 경찰, 각각 적합한 수사 방법으로 주인공의 정체에 근접해가는 과정을, 마치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보이게 만든 교묘한 연출에서는 장인의 숙련된 기교가 느껴집니다. 객관적인 1 인칭+감정적인 3 인칭이라는 조합도 독자의 의표를 찌르고 있고, 미스테리와 서스펜스, 하드보일드가 좋은 느낌으로 융합한 작품이었습니다. 정말로 영상화 되면 상당히 재미있지 않을까. 어두운 뉴욕의 분위기입니다.
진상이 하나씩 드러날때마다 그 스케일이 예상외로 커지는데 놀랐습니다. 전체적인 구성이나 분위기를 고조하는 수법이 교묘하고, 몰입도도 높습니다. 먼저 소개된 <이와 손톱>과 같이 이 책도 뒤의 결말부분이 봉인되어 있습니다. 이른바 봉인본. 초판 원서의 경우에 이 봉인을 뜯지 않고 책을 가져오면 책값을 환불해주는 상당히 공격적인 마케팅을 했다고 합니다. 일단 반전의 퀄리티는 둘째치고, 이 마지막 순간까지는 그야말로 단숨에 도달하게 되기때문에, 거기까지 진행하고 봉인된 채로 환불한 사람은 없었을 듯 합니다. 그런 자신감을 내세울만한 소설입니다.
결말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이러쿵 저러쿵 말할수 없는게 아쉬움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독자의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만한 반전입니다. 특이하고 개성있는 결말을 원하는 사람은 <이와 손톱>보다도 이쪽을 더 선호하게 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조금 짓궂은 느낌의 결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