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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식
척 팔라닉 지음, 최필원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파이트클럽>, <서바이버>, <인비저블 몬스터>등 써내는 작품마다 기존 소설의 개념을 깨부수는 파격적인 방식을 채용해 왔다는 척 팔라닉이라는 작가. 천재라는 것 같다.(상징적인 의미겠지만) 이중 실제로 읽어본것은 데뷔작인 파이트 클럽뿐이지만, 이 작가의 책은 없어서 못읽는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관심을 가지고 보니 국내에도 이미 오래전부터 많은 작품이 소개되어 있는게 아닌가. 어쨌든 파이트 클럽의 쇼킹함 하나만으로도 나는 이 작가가 천재라는 사실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그런 팔라닉의 작품이라기에, 이번에는 과연 또 어떤 놀라운 장소에 어떤 기상천외한 탑을 쌓아 올렸을 것인가 하는 기대감으로 책을 펼쳐들게 되었다.
책을 열면 아마도 독특하고 기발한 것이 튀어나오지 않을까 했던 예상과는 달리 처음에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그 실체가 손에 잡히지 않는다. 독자는 언제나 지그소 퍼즐의 조각들처럼 뿔뿔이 흩어져 있는 단편들만을 쫓아다니게 된다. 그 조각들이 하나씩 끼워 맞추어져 나중에 완성되는 최종적인 그림은, 그 조각 하나하나에서는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것이었다.
주인공의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이상인가, 아니면 과거에 대한 회상인가 싶은 독백부분의 세계는 일인칭인듯 일인칭의 시점에서 미묘하게 비켜나 있다. 그렇지만 지극히 자신감 넘치는 진행 스타일. 이것이 아마도 팔라닉 스타일인 듯 하며, 독특한 긴장감과 불안을 유지한 채로, 항상 예상못한 플롯이 독자의 머리를 앞질러간다. 일상생활에 싫증내고 있던 독자에게라면 상당히 강렬한 자극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소설이지만, 반대로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던 독자에게는 감당하기 버거운 강력한 바람이기도 하다.
파이트클럽을 내내 염두에 두고 있었다면 <질식>은 그보다는 홈 드라마에 가깝다. 미쳐 버린(미쳤다기 보다는 치매에 가까운) 모친의 치료비를 감당하기 위해서 큰 돈이 필요한 주인공 빅터는, 의대를 중퇴하고 스스로를 낙오자라 단정지은 인생. 18세기의 식민지를 재현한 테마파크에서 연기하는 엑스트라이며, 동시에 섹스 중독을 치료하기 위한 모임에도 나가고 있다. 친구 데니는 섹스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언제부턴가 온갖 "돌"을 긁어모으는데 전념하기 시작하고. 빅터는 "돈"을 긁어 모으기 위해서, 레스토랑마다 돌아다니면서 음식을 먹다 목에 걸려 질식하는 연기를 계속 해나간다. 질식하는 연기가 어째서 돈을 벌어다 주는지는 책속에서 직접 확인하시길.
모든 의미에서 이색적이며, 광기에 사로잡혀 있는 듯한 스토리를 왠지 즐겁게 읽을 수 있는 것은 척 팔라닉이란 작가의 굉장함이다. 책을 읽고 있는 동안에는 도무지 그 의도를 파악할수 없도록 여기저기 흐트려 놓은 에피소드, 단락들, 몇몇 상징물들, 현란하고 칼라풀한 인상의 풍경들, 반복되는 문구들이, 환각과도 같은 효과를 내지만, 다 읽고나서 보면 어느새 모든것이 제자리에 잘 끼워 맞추워져 있다.
어머니의 고백과 미녀 의사와의 만남이 무기력하고 지루한 빅터의 생활을 순식간에 헤집어 엎고, 어지럽혀, 그는 지금까지 맛본 적 없는 아픔을 체험한다. 그리고 그 아픔이 안타깝고 상쾌한 엔딩을 가져온다. 질식은 절묘한 유머로 물들인 블랙코미디의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한편으로는 복잡하고 진지한 부분도 있어서, 그 어처구니없음과 드라마틱함 사이를 왕래하는 것이 매력이다.
시도때도 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이미지의 파편들은 저마다 크고작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장을 덮기까지는 알 수 없는 이야기. 정해진 모든 여정을 순차적으로 걸어서 마지막 종착점에 도달했을때, 비로소 스윽하고 답답하던 호흡이 돌아온다. 책을 읽는 동안 내내 질식할것 같던 독자를 틀림없이 이전보다 훨씬 행복한 기분으로 해방시켜 준다. 기묘한 잠재의식. 척 팔라닉만의 릴랙세이션 효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