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벳 - 어느 천재의 기묘한 여행
레이프 라슨 지음, 조동섭 옮김 / 비채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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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이나 레오나르도 다빈치같은 천재들의 어린시절을 한번 상상해보자. 실제 모습이야 어찌되었든 좋다. 왠지 혼자 골똘히 생각에 잠겨서, 들판에 앉아 끊임없이 노트에 무언가를 빼곡하게 적어놓는 아이의 모습이 상상되지 않는가. 그 얼굴은 세상 모든 것을 알고 싶다는 순수한 호기심으로 가득하다. 작은 생명체의 움직임 하나하나, 사람들의 대수롭지 않은 대화와 안면 근육의 움직임, 소리, 관성의 법칙, 해부도, 기후변화의 패턴 등, 세상을 이루고 있는 모든 만물과 법칙들이 이 아이의 관찰의 대상이고 탐구의 영역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테쿰세 스패로 스피벳"이라는 국적 불명의 이름을 가진 핀란드 이민자 집안의 12살짜리 소년이 바로 그런 아이이다. 스피벳은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다. 놀라운 관찰력과 해박한 과학지식을 바탕으로 한 도해와 도식에 일가견이 있는것. 그래서 스피벳의 노트는 언제나 수많은 그림과 이론으로 채워져 있다.

그동안 자신이 그린 과학도해와 지도를 학술지에 몰래 기고해 온 스피벳에게 스미소니언 협회로부터 과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연락이 온다. 스피벳은 스미소니언 박물관이 있는 워싱턴까지 혼자서 미대륙을 가로지르는 횡단을 시작한다. 도보와 기차 무임승차만으로.

그런데 스피벳은 어째서 혼자 워싱턴까지 가기로 마음먹은걸까. 스피벳은 비록 저명한 학자들도 감탄할만한 수준의 도해 실력을 가진 천재소년이지만 마음만은 아직 여리디 여린 아이이다. 자신의 눈앞에서 총기사고로 목숨을 잃은 동생에 대한 죄책감과 그로인해 점점 멀게만 느껴지는 가족들. 의기소침해 있던 스피벳이 비밀을 털어놓지 못하고 몰래 집을 빠져나와 험난한 여행길에 오르는 이유다. 그 긴 여정끝에 모든 오해가 풀리고 결국은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한 소년의 모험담이자 성장소설.

그렇지만 이런 단순하다면 단순하고 진부하다면 진부한 성장 스토리가, "지금까지 이런 소설은 없었다"는 극찬을 받는 이유라 하기에는 어딘가 미흡하다. 사실 이 모험담 자체는 이 책에 대한 설명의 1/ 140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어느 천재의 기묘한 여행"이라는 부재가 말해주듯, 천재 소년의 시선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얻을수 있다는게 바로 이 책이 특별한 진짜 이유다. 천재가 등장하는 이야기는 많지만, 진정으로 천재의 머릿속을 들여다볼수 있는 책은 그다지 흔한 것이 아니다. 이 책의 판형이 과학서나 지리서처럼 크고, 가로로 넓은 것은 단지 디자인 때문만이 아니라, 본문 좌우로 천재소년의 도해와 부연설명들을 채워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도해로 표현되는 스피벳의 생각의 범위로 말할것 같으면,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과학에 범주에 속하는 모든 분야를 아우른다. 그 어마어마한 박식함과 대조적으로 그것을 도출해내는 순진한 어린 아이의 시점, 이 두가지가 맞물려서 내는 독특함이 아마도 이 소설을 유일무이한 것으로 만드는게 아닌가 싶다.

마리아 페슬의 "블루의 불행학 특강"이라는 재기넘치는 소설을 읽은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주인공인 여고생 블루의 박식함에 혀를 내두른 기억이 아직 남아있을 거라 생각한다. 관심사가 주로 문학작품인 블루가 문과천재였다면, 스피벳은 주로 과학쪽에 호기심을 기울이는 이과천재라고 할 수 있다. 천재의 머릿속을 묘사한다는 것은 박식하다고 해서 해낼수 있는 작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설픈 만물박사 흉내는 작가를 괴변론자나 과학 오타쿠처럼 보이게 할 뿐이다. 그런면에서 나는 이 "레이프 라슨"이라는 작가는 실로 천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단순히 작가의 지적수준이나 박학다식함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천재가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바라보는지를, 그 천재의 매커니즘을 잘 알고 있기 때문(혹은 잘 아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결국 스피벳의 입을 빌린 저자의 끊임없는 독백과 머릿속에 떠오르는 발상의 파편들의 무더기 아니겠는가. 고로 이 저자는 천재다. 그도 아니면 정말로 예리한 관찰력과 눈썰미로 천재를 흉내내고 있거나. 어느 쪽이든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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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리플레이 판타 빌리지
켄 그림우드 지음, 공보경 옮김 / 노블마인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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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0월 18일, 갑작스런 심장 발작으로 제프는 죽었다. 의식이 돌아오자, 1963년에 와 있다. 21살의 봄이다. 의식만 과거로 타임 슬립해 버린 제프. 경마와 월드 시리즈 결과에 배팅해 큰돈을 손에 넣은 그는 남아있는 미래의 기억을 자산으로 투자 사업을 시작한다.

누구나 한번쯤은 해봤음직한,「만약 인생을 다시 살아 볼 수 있다면」이라는 상상. 그런「만약」이 이 책의 주인공 제프에게 현실이 되어 일어난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오래 된 설정이지만, 그럼에도 그 명성답게 두말할 나위 없이 재미있었다. 타임 슬립을 소재로 한 이야기로는 이 이상의 것이 또 있을까. 다소의 결점은 있다손 치더라도 그런 것은 언급할 마음도 들지않을 만큼의 명작이다. 타임슬립이라면, 순간적으로 몇몇 일본 소설들이 머리에 떠오른다. 기타무라 가오루의「시간과 사람」3부작이라던가, 히가시노 게이고의「도키오」, 오기와라 히로시의「타임슬립」등이 그것인데, 전부 인상적으로 읽은 작품이였음에도 이 책의 재미와는 애초에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는다.

「상처」난 레코드판을 전축에 올려놓으면 바늘이 튀어 앞으로 다시 돌아가 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것처럼 사람의 인생도 예전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그럴수만 있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갈수가 있다. 또다른 멜로디를 연주할 수가 있다. 그렇지만, 상처난 곳에 이르는 순간 바늘은 반드시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버린다고 한다면? 아무리 마음에 드는 멜로디를 만들어낸다 해도, 바늘이 제자리로 돌아와 버리면 그것은 어디에도 남지 않는다. 게다가 그 바늘이 되돌아오는 주기가 조금씩 짧아지기라도 한다면? 이것은 그러한 이야기다. 43살의 죽음이라는「상처」에 접어들 때마다 바늘이 돌아오는 제프의 인생은 얼마든지 원하는만큼 새로운 멜로디를 연주할 수 있지만, 여기에는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다. 제프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다 읽은 후에는「나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다.

젊은 날의 자신으로 되돌아올 때마다, 이전의 삶을 교훈으로 삼아 배움을 거듭해 가는 궁극의 자기 계발. 리플레이를 반복할 때마다 더 높은 곳을 향해 올라 가는 주인공이 그 결말 뒤에는 과연 어떻게 되는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마치 보너스와 같은 형태의 에필로그로 마무리하고 있지만, 실은 저자「켄 그림우드」가 말하고 싶었던 주제의 힌트는 바로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작품속 주인공처럼 저자 자신이, 실제로 심장 발작으로 운명을 달리했다는 것이 또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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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젤과 크레테 - 힐데군스트 폰 미텐메츠가 쓴 차모니아의 동화
발터 뫼르스 지음, 전은경 옮김 / 들녘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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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뫼르스가 차모니아어를 번역하고 삽화를 그렸으며, 저자의 약력을 첨부했다. 압둘 나흐티 갈러 교수의 "차모니아와 그 인근 지역의 기적과 존재, 현상에 관한 해설사전"을 인용하여 각주를 붙였다.」

유명한 그림 형제의 동화인 헨젤과 그레텔을 떠올리게 하는 이 책은 차모니아 남서부(페른 하힝엔)에 사는 작은 난쟁이 쌍둥이 남매의 모험담입니다. 길을 잃고 헤매던 남매가 우여곡절끝에 맛있는 음식 냄새에 이끌려 마녀의 집에 발을 들여놓는다는 플롯은 얼핏「아니 이것은 헨젤과 그레텔의 패러디가 아닌가!」하는 생각을 불러 일으킬수도 있지만, 맞습니다. 어떻게 보아도 패러디가 맞습니다.

그렇지만 차모니아라는 미지의 대륙을 창조하고 그곳에 온갖 생명력을 불어넣어 마치 지구상에 실재하는 지역처럼 묘사해 놓은 이 책은, 그저 단순한 패러디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심오합니다. 은연중에 서점에서 차모니아에 관한 서적을 찾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게 될지도 모를만큼 정교한 세계관을 보여줍니다.

유머와 익살이 그 중심에 있는 작품치고는 의외로 그 세밀함이 감탄을 자아낼 정도에요. 예를 들자면, 차모니아 대륙의 역사와 문화, 이곳에 서식하고 있는 여지껏 듣도보도 못한 수많은 생명체들, 이들의 습성과 행동반경, 등은 이 책 하나만으로도 훌륭한 도감하나를 뚝딱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전혀 낮설게 느껴지지 않으니 그게 또 대단합니다.

이 책은 앞서 말한 것처럼 쌍둥이 남매의 모험담입니다. 그런데 그 구성을 보면 조금 특이한 것을 발견할수 있는데요, 바로 액자소설이라는 것입니다. 이야기 중간중간에 엔젤과 크레테 이야기의 저자, 그러니까 이 책의 저자 발터 뫼르스가 아닌 차모니아의 작가 힐데군스트 폰 미텐메츠가 자신의 목소리로 일종의 작품해설이랄까 신변잡기 같은것을 장황하게 늘어놓기도 하고, 이야기가 모두 끝 난 후에는 결말부분의 전개방식을 두고 독자와 타협하기도 하는등 적극적으로 이야기에 개입합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완전히 막을 내리는 부분. 여기서부터가 정말로 이 책의 진가라고 생각합니다. 결말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페이지수가 많이 남아 의아할지도 모릅니다. 그 부분은 엔젤과 크레테의 진짜 저자인 힐데군스트 폰 미텐메츠의 반생전기로 채워져 있습니다. 가상의 인물에 대한 가상 전기라,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반생전기라 이름붙은 이유는 이 작가가 꽤 오랜기간동안 행방불명되어 있었던 탓입니다. 종종 행적이 모호한 시기가 있었던 때문에 완전한 전기라 하기에는 어딘가 조금 부족하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아무튼 이 전기부분이 압권입니다. 메인인 엔젤과 크레테의 이야기는 오히려 이 반생전기 부분을 위한 들러리였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한 인물의 생애를 어떻게 이렇게 세세한 곳까지 완전히 창조해 낼수가 있는지, 누군가의 평전을 완전히 새로 꾸며내서 쓴다는 것도 대단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꾸며내는 것은 한 인물의 생애 뿐 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이곳은 현실세계가 아니라 차모니아입니다. 힐데군스트 폰 미텐메츠의 인생의 어느 한부분의 기록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그와 관련된 차모니아의 기록까지도 연쇄적으로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가 어느 해에 발표한 작품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하나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차모니아의 정세, 출판계의 분위기나 비평가들의 의견, 판매부수, 독자들의 성향, 이전까지의 그의 행보등 모든 데이터가 충족되어 있을때 비로소 그 위에 힐데군스트 폰 미텐메츠라는 작가의 기록도 세워질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놀랍지 않나요. 이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 힐데군스트 폰 미텐메츠의 업적도 대단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쓴 말터 뫼르스라는 작가에게 다시 한번 감탄하지 않을수가 없습니다.     

동화를 모티브로 했다고 해서 어린 독자들을 위한 작품이 아닙니다. 결코 난해한 것은 아니지만 심오한 차모니아의 문학과 출판계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어린이라는 딱지는 떼고 와야 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고급판타지라는 표현이 아주 마음에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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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 - 빈센트 람 소설
빈센트 람 지음, 이은선 옮김 / 비채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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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소문없이 찾아온 한편의 소설이 내 안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이것을 의학소설이라 해야 할지, 휴먼 소설이라 해야 할지. 캐나다가 낳은 세계적인 의사 문인(표지문구 인용)「빈센트 람」의 작품. 일반인들에게는 의사라는 직업만으로도 엄친아라는 인상이 있는데, 게다가 최고 권위 문학상 수상작가라고까지 하니 재능이라는 것은 사실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살짝 질투 나려한다.

의학소설이나 드라마에서 자주 그리고 있는 권의주의적이거나 야망에 노릇노릇 불타는 의사들의 파워게임 대신에 이 작품에서는 의사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극히 일부분만을 그리고 있다. 어째 너무 무자극적이고 수수한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지만, 정작 의학의 기본이 되는 생명의 소중함을 보여주는 것은 뒷전이고, 기업소설화 되고 사랑놀음이나 공포소설에 가까워진 최근의 막장 메디칼픽션들을 생각하면 이 소설의 구성은 오히려 파격적으로 보인다.

「밍」과 「피츠」라는 두명의 의과대학 지망생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마치 우리나라 고3수험생들과도 같은 학구열, 목표를 햘한 열정, 학업과 사랑 사이에서의 갈등 그리고 헤어짐에 이르기까지, 충격적인 사건이나 큰 감정의 동요 없이 그 나이 또래의 조금은 어설픈 사랑과 이별의 상처를 담담하게 그려낸다. 피츠보다 일년 먼저 의대에 합격한 밍은 피츠와 멀어지는 대신에「천」과「스리」라는 새로운 동료들과의 교감을 시작한다. 이 프롤로그격인 첫 장을 읽으면서 앞으로 의사가 되어 벌어지는 이들의 삼각관계, 혹은 사각관계가 주축이 되는 이야기가 되겠구나 하고 예상하지만, 이 후의 구성은 다소 의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장편이 아닌 연작 단편집이다. 이 서장 이후에 중간을 건너뛰고, 곧바로 의사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이들 4명 각자의 에피소드가 담긴 단편들을 보여준다. 이미 숨이 멎은 환자를 되살리고, 범죄 용의자를 치료하다 상처입기도 하며, 여행떠난 타국에서 임종을 맞은 환자의 수송을 지휘한다거나, 심지어는 사스와 투쟁하기도 하는 등 매순간 죽음과 직면해 있는 의사들의 모습을, 마치 다큐멘터리 속 한 장면처럼 세세하고 긴박감 넘치게 묘사한다. 이 중 마취없이 제왕절개 수술을 감행하는 밍의 에피소드는 개인적으로 가장 긴박감 넘치는 장면이었다. 이 단편들은 4명의 인물중 한명의 단독 에피소드이기도 하고, 혹은 여러명이 동시에 등장하는 에피소드가 되기도 한다. 연속되는 스토리로서가 아니라, 말그대로 한 인간으로서의 의사들의 삶의 단면들을 보여주는 이야기들이다. 다큐가 생생하고 리얼한 감동을 선사한다면, 소설에는 등장인물 저마다의 매력적인 캐릭터가 있다. 이 소설은 그것들을 절묘하게 결합한 형태가 아닌가 하고 지금에 와서 생각한다.

이 소설이 감동을 주는 것은, 의사라는 직업의 숭고함을 목격하게 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단편 사이사이에 놓여 있을 한사람 한사람의 삶의 궤적을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젊은 의사들이 응급실 안에서 정말로 순수하게 고군분투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보면 어느 순간, 학업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던 그때 그 풋풋한 아이들이 어느덧 이렇게 대견하게 한사람의 의사로 성장해 있구나 하는 것을 자각하게 되는 때가 찾아온다. 꿈을 이루기 위해 오직 앞만보고 달려왔을 그 젊은이들의 땀과 노력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찬데, 그저 평범한 젊은 의사라고만 생각했던 이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사명감을 발휘하는 장면에서는 때로는 숭고하게 사라져간 이 사회의 젊은 영웅들의 모습이 오버랩되기도 한다.

인간적인 면을 그리고 있으면서도 묘사는 철저하게 리얼함을 추구한다. 어쩌면 그 현실감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들의 이야기가 더 가슴에 와닿는지도 모르겠다. 역자는 후기에서 그 전문용어들 때문에 번역하기가 힘들었다고 토로하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거슬린다거나 책을 읽는데 큰 장애가 되지는 않는다. 그저 알아들어도 그만 몰라도 그만. 의사로서 거들먹거리는 저자의 모습같은 건 어디에도 없다. 한명의 인간으로서의 의사와, 의사로서의 사명감으로 충만한 책.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의료소설을 만났다고 단언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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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2 - 두 명의 목격자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13
최혁곤 외 지음 / 황금가지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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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대망의 2번째 작품집. 이미 첫번째 작품집을 읽은 독자라면 반가운 이름들을 다시 만날수 있다. 기존의 작가들중 상당수의 멤버가 그대로 남아있어서 진화랄지, 전작과 비교해서 얼마나 발전된 이야기를 보여줄 것인지 기대하면서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번 작품집같은 경우는 전체적으로 쇼킹함보다는 이야기를 풀어가는 저자들의 입담이 노련해졌다는 인상이다. 흡입력 있고 술술 읽히는 이야기들이 많다. 때로는 완성도라는 면에서 아직 미덥지 않은 작품이 있는 것도 사실인데, 그런 이야기 조차도 맛깔나게 읽히는 건 역시 해외소설에서는 찾기 힘든 한국적인 정서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 장르문학계의 발전을 응원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다.
인상적인 몇작품을 소개하면,

「두 명의 목격자」
표제작. 어두컴컴한 새벽 한적한 도로, 아무렇게나 세워진 택시 뒷좌석에는 목졸린 여자의 시체가 누워있고, 운전사는 등에 칼이 꽂힌채 길바닥에 나뒹굴고 있다. 과연 이 시츄에이션은?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 사건의 내막을 아는 두명의 목격자가 사건에 이르기까지의 진상을 번갈아 가며 이야기한다. 사실 두명의 목격자는 사람이 아닌 핸드폰과 택시 미터기다. 강렬하다면 강렬한 시작이지만 의외로 범인은 누구인가를 밝혀내는게 아니라 그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어떤 일이 있었던가를 보여주는 구성. 노인 역할인 미터기와 젊은 여자 역할의 핸드폰의 대화가 맛깔나다. 내용도 그렇지만 결말은 한술더 떠서「세상살기 참 빡빡하구만.」하는 말이 절로 튀어나올것 같은 이야기.

「살인자의 쇼핑목록」
고객들을 관찰하는게 일상이 되어버린 대형 할인마트 캐셔의 이야기. 취미를 넘어 어쩐지 병적이기까지 하다. 그녀는 지금 마트에 자주 출몰하는 한 남성을 관찰하고 있는 중이다. 의외의 결말은 아니지만 다른 작품과 비교하면 유독 그 쇼킹함이 인상적이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해야할까? 너무 많이 이야기했다. 흡입력 있는 전개가 압권.

「빛의 살인」
이 단편집에서 가장 반가웠던 작품. 전작을 읽은 사람이라면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많이 있을 듯 하다. 특이하게 전작에 실렸던 작품과 유기성이 있는 연작 단편이다. 고구려 시대를 무대로 활약하는 문달과 설천 콤비의 이야기.「만약 제가 죽는다면 제 가족들 중 한명이 범인일 겁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뜬 후에 곧바로 시체가 되어 발견된 예씨 어르신. 누가 죽였을까? 사실 지금은 전작의 기억이 가물가물하기는 한데 그때는 이렇게까지 재미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어서 조금 놀랐다. 안락의자 탐정 스타일의 가장 추리소설다우면서도 완성도 높은 이야기. 뭐니뭐니해도 시대적 배경이 최고의 강점이자 차별화 요소.

「순결한 순례자」
한국 추리소설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중에 하나인「B컷」의 저자의 작품이라 정말이지 엄청 기대하고 있었다. 그것도 맨 마지막에 배치해 놓은 탓에 기대치는 거의 최대치까지 올라간 상태. 아마 그게 독이 되었을까 기대한 만큼은 미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도 이 단편집에서 빼놓을수 없는 작품중에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절에서 벌어진 의문의 살인사건. 거기에 의도하지 않게 저지르게 되는 또 하나의 살인.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진범은 누구이며 진실은 무엇인가.「사연없는 인생 없다더니 다들 그렇고 그렇게 살아왔군요.」하는 주인공의 공허한 독백이 기억에 남는 작품.

좋고 나쁘다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취향에 맞는 작품들을 소개한 것이다. 전부 개성있는 작품들이라 아마 독자순위를 매기면 천차만별일듯. 전체적으로 수준이 높아진것 같아 세번째 작품집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그런데 문달과 설천 콤비의 이야기는 세번째 작품집이 나오기 전에 외전격으로 먼저 소개되어도 좋을듯 한데... 아니면 속시원하게 연작단편집이나 장편으로 나오거나. 시너지 효과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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