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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 - 빈센트 람 소설
빈센트 람 지음, 이은선 옮김 / 비채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소리소문없이 찾아온 한편의 소설이 내 안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이것을 의학소설이라 해야 할지, 휴먼 소설이라 해야 할지. 캐나다가 낳은 세계적인 의사 문인(표지문구 인용)「빈센트 람」의 작품. 일반인들에게는 의사라는 직업만으로도 엄친아라는 인상이 있는데, 게다가 최고 권위 문학상 수상작가라고까지 하니 재능이라는 것은 사실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살짝 질투 나려한다.
의학소설이나 드라마에서 자주 그리고 있는 권의주의적이거나 야망에 노릇노릇 불타는 의사들의 파워게임 대신에 이 작품에서는 의사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극히 일부분만을 그리고 있다. 어째 너무 무자극적이고 수수한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지만, 정작 의학의 기본이 되는 생명의 소중함을 보여주는 것은 뒷전이고, 기업소설화 되고 사랑놀음이나 공포소설에 가까워진 최근의 막장 메디칼픽션들을 생각하면 이 소설의 구성은 오히려 파격적으로 보인다.
「밍」과 「피츠」라는 두명의 의과대학 지망생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마치 우리나라 고3수험생들과도 같은 학구열, 목표를 햘한 열정, 학업과 사랑 사이에서의 갈등 그리고 헤어짐에 이르기까지, 충격적인 사건이나 큰 감정의 동요 없이 그 나이 또래의 조금은 어설픈 사랑과 이별의 상처를 담담하게 그려낸다. 피츠보다 일년 먼저 의대에 합격한 밍은 피츠와 멀어지는 대신에「천」과「스리」라는 새로운 동료들과의 교감을 시작한다. 이 프롤로그격인 첫 장을 읽으면서 앞으로 의사가 되어 벌어지는 이들의 삼각관계, 혹은 사각관계가 주축이 되는 이야기가 되겠구나 하고 예상하지만, 이 후의 구성은 다소 의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장편이 아닌 연작 단편집이다. 이 서장 이후에 중간을 건너뛰고, 곧바로 의사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이들 4명 각자의 에피소드가 담긴 단편들을 보여준다. 이미 숨이 멎은 환자를 되살리고, 범죄 용의자를 치료하다 상처입기도 하며, 여행떠난 타국에서 임종을 맞은 환자의 수송을 지휘한다거나, 심지어는 사스와 투쟁하기도 하는 등 매순간 죽음과 직면해 있는 의사들의 모습을, 마치 다큐멘터리 속 한 장면처럼 세세하고 긴박감 넘치게 묘사한다. 이 중 마취없이 제왕절개 수술을 감행하는 밍의 에피소드는 개인적으로 가장 긴박감 넘치는 장면이었다. 이 단편들은 4명의 인물중 한명의 단독 에피소드이기도 하고, 혹은 여러명이 동시에 등장하는 에피소드가 되기도 한다. 연속되는 스토리로서가 아니라, 말그대로 한 인간으로서의 의사들의 삶의 단면들을 보여주는 이야기들이다. 다큐가 생생하고 리얼한 감동을 선사한다면, 소설에는 등장인물 저마다의 매력적인 캐릭터가 있다. 이 소설은 그것들을 절묘하게 결합한 형태가 아닌가 하고 지금에 와서 생각한다.
이 소설이 감동을 주는 것은, 의사라는 직업의 숭고함을 목격하게 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단편 사이사이에 놓여 있을 한사람 한사람의 삶의 궤적을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젊은 의사들이 응급실 안에서 정말로 순수하게 고군분투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보면 어느 순간, 학업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던 그때 그 풋풋한 아이들이 어느덧 이렇게 대견하게 한사람의 의사로 성장해 있구나 하는 것을 자각하게 되는 때가 찾아온다. 꿈을 이루기 위해 오직 앞만보고 달려왔을 그 젊은이들의 땀과 노력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찬데, 그저 평범한 젊은 의사라고만 생각했던 이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사명감을 발휘하는 장면에서는 때로는 숭고하게 사라져간 이 사회의 젊은 영웅들의 모습이 오버랩되기도 한다.
인간적인 면을 그리고 있으면서도 묘사는 철저하게 리얼함을 추구한다. 어쩌면 그 현실감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들의 이야기가 더 가슴에 와닿는지도 모르겠다. 역자는 후기에서 그 전문용어들 때문에 번역하기가 힘들었다고 토로하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거슬린다거나 책을 읽는데 큰 장애가 되지는 않는다. 그저 알아들어도 그만 몰라도 그만. 의사로서 거들먹거리는 저자의 모습같은 건 어디에도 없다. 한명의 인간으로서의 의사와, 의사로서의 사명감으로 충만한 책.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의료소설을 만났다고 단언할수 있다.